협보가 왕이 정치에 힘쓸 것을 건의하다 ( 3년 12월(음) )

12월에 왕이 질산(質山)079079 현재의 지명을 알 수 없다. 이 이후에도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들이 질산의 남쪽 또는 북쪽에서 사냥하였음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왕실·귀족의 사냥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新大王 때 明臨夫에게 食邑으로 주어졌다(《삼국사기》 권16 高句麗本紀 新大王 8년권45 列傳 明臨夫傳).닫기 북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5일이나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080080 이 관직은 고구려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세 가지의 예가 나타나고 있다. 즉 脫解(《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7년조), 瓠公(《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脫解尼師今 2년조), 味鄒(《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즉위년조)가 각각 大輔職에 있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탈해의 경우 大輔로서 軍國政事를 맡았다고 함이 같은 기록에서 보이고, 《삼국사기》 권38 職官志에도 “以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라 한 것을 볼 때 大輔는 신라에서 軍國의 일을 총괄하는 宰相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신라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구려에서 大輔는 후에 左輔, 右輔로 나뉘어지고 이는 다시 國相으로, 또 다시 大對盧로 변천되어 간다. 이러한 변천과 함께 그 권한과 성격도 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노중국, 「고구려국상고」상·하, 《한국학보》 16. 17, 1979). 이는 왕권의 강화 정도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이 시기의 大輔는 族的 기반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어 聯盟長에 버금가는 존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大輔’라는 명칭은 이러한 성격과는 달리 중국식으로 수식되어 정리된 것일 것이다. 《尙書大傳》에 의하면 天子를 둘러싸고 前後左右에 각각 疑, 丞, 輔, 弼이 있어 천자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하는 데 “可正而不正 責之輔”라 하여 ‘輔’는 천자를 바르게 하는 임무를 지녔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天子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를 통틀어 四輔라 하게 된 것 같다. 漢 平帝 때에는 太師·太保·太傅·少傅의 四輔之職을 임명한 기록이 보이고 있고(《자치통감(資治通鑑)》 권35 孝平皇帝 元始원년(元年) 2월), 王莽이 집권한 후에는 太師·太傅·國師·國傅를 四輔로 하였음이 보인다(《通典》 권20 職官 三公總敍).닫기협보(陜父)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고 백성들이 마음을 놓지 못하므로, 마땅히 힘을 쓰고 힘을 써서 형정(刑政)을 올바르게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말을 달려 사냥하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만일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정치는 거칠게 되고 백성은 흩어져서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신은 두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협보의 관직을 그만두게 하고 관원(官園)081081 官에 속한 農園으로 御料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동경, 1933, 208쪽).닫기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하여 남한(南韓)082082 남쪽의 韓나라 또는 韓 지방의 뜻이다. 韓은 세 부류가 있어 지역에 따라 馬韓, 卞韓(弁韓), 辰韓으로 불리웠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韓國’, ‘韓地’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三國志》 권30 魏書 韓傳). 《삼국사기》 권1 新羅本紀 赫居世居西干 53년조에 東沃沮에서 新羅를 지칭하여 ‘南韓’이라 한 것도 본문과 같은 용례이다.닫기으로 달아났다.

註 079
현재의 지명을 알 수 없다. 이 이후에도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들이 질산의 남쪽 또는 북쪽에서 사냥하였음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왕실·귀족의 사냥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新大王 때 明臨夫에게 食邑으로 주어졌다(《삼국사기》 권16 高句麗本紀 新大王 8년권45 列傳 明臨夫傳).
註 080
이 관직은 고구려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세 가지의 예가 나타나고 있다. 즉 脫解(《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7년조), 瓠公(《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脫解尼師今 2년조), 味鄒(《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味鄒尼師今 즉위년조)가 각각 大輔職에 있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탈해의 경우 大輔로서 軍國政事를 맡았다고 함이 같은 기록에서 보이고, 《삼국사기》 권38 職官志에도 “以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라 한 것을 볼 때 大輔는 신라에서 軍國의 일을 총괄하는 宰相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신라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구려에서 大輔는 후에 左輔, 右輔로 나뉘어지고 이는 다시 國相으로, 또 다시 大對盧로 변천되어 간다. 이러한 변천과 함께 그 권한과 성격도 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노중국, 「고구려국상고」상·하, 《한국학보》 16. 17, 1979). 이는 왕권의 강화 정도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이 시기의 大輔는 族的 기반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어 聯盟長에 버금가는 존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大輔’라는 명칭은 이러한 성격과는 달리 중국식으로 수식되어 정리된 것일 것이다. 《尙書大傳》에 의하면 天子를 둘러싸고 前後左右에 각각 疑, 丞, 輔, 弼이 있어 천자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하는 데 “可正而不正 責之輔”라 하여 ‘輔’는 천자를 바르게 하는 임무를 지녔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점차 天子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를 통틀어 四輔라 하게 된 것 같다. 漢 平帝 때에는 太師·太保·太傅·少傅의 四輔之職을 임명한 기록이 보이고 있고(《자치통감(資治通鑑)》 권35 孝平皇帝 元始원년(元年) 2월), 王莽이 집권한 후에는 太師·太傅·國師·國傅를 四輔로 하였음이 보인다(《通典》 권20 職官 三公總敍).
註 081
官에 속한 農園으로 御料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동경, 1933, 208쪽).
註 082
남쪽의 韓나라 또는 韓 지방의 뜻이다. 韓은 세 부류가 있어 지역에 따라 馬韓, 卞韓(弁韓), 辰韓으로 불리웠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韓國’, ‘韓地’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三國志》 권30 魏書 韓傳). 《삼국사기》 권1 新羅本紀 赫居世居西干 53년조에 東沃沮에서 新羅를 지칭하여 ‘南韓’이라 한 것도 본문과 같은 용례이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행정>관인>포상·징벌
색인어
이름 : 협보,협보,협보
지명 : 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