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왕이 즉위하다 ( 197년 05월(음) )

산상왕(山上王)047047 고구려의 제10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197∼227년이다. 고국천왕의 둘째동생으로서 中兄인 發岐와 왕권쟁탈전을 벌여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닫기은 이름이 연우(延優)【또 다른 이름은 위궁(位宮)048048 고구려의 제10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197∼227년이다. 고국천왕의 둘째동생으로서 中兄인 發岐와 왕권쟁탈전을 벌여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닫기이다.】이고,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 “주몽의 후손 (宮)이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이 태조가 되었다. 지금의 왕이 태조의 증손049049 태조왕부터 동천왕까지의 왕실 계보에 관해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 등 중국측 문헌과 《삼국사기》가 원문으로 채택하고 있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또는 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라는 기록을 산상왕에게 배당시킨 《삼국사기》는 ‘位宮’을 산상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삼국지》에서 현재의 왕 位宮이라고 한 것은 동천왕을 가리킨다.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에 나타난 宮에서 位宮까지의 계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신동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분주의 연구」, 《동대사학》 1, 1995, 50쪽 참조).닫기으로 역시 태어나면서 사람을 보는 것이 증조 과 비슷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비슷한 것’을 불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하였다050050 본문의 《위서(魏書)》 인용의 내용은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魏收 撰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에 모두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魏書’를 《삼국지》의 魏書 또는 《위서(魏書)》로도 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13 동명왕 원년조에 인용한 ‘魏書’는 《위서(魏書)》인 것이 확실하므로 여기서의 ‘魏書’도 또한 《위서(魏書)》 일 것이다.닫기.”고 하였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는 까닭에 연우가 임금 자리를 이어 받았다.
처음에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에 왕후 우씨가 비밀리에 초상난 것을 알리지 않고 밤에 왕의 동생 발기(發歧)051051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에는 ‘拔奇’라 하였다.닫기의 집으로 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손이 없으니 그대가 마땅히 이어야 합니다.” 하였다. 발기가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하늘이 정하는 운수는 돌아가는 곳이 있으므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예(禮)라고 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왕후는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가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연우가 더욱 예의를 차리며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바래다주시오.” 하였다. 연우가 그 말에 따랐다.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가서, 다음날 새벽에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발기가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병력을 동원해서 왕궁을 포위하고 소리치기를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052052 형이 죽어 아우가 그 뒤를 잇는다는 것은 형제 상속의 전통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 고국천왕∼서천왕시기는 고구려가 사회의 변혁을 겪는 시기였다. 이때는 부 명칭의 변화, 형제 상속으로부터 부자 상속으로, 兄死娶嫂의 습속에 대한 비판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닫기. 네가 차례를 뛰어 넘어 임금 자리를 빼앗는 것은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처자식까지 목베어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연우가 3일간 문을 닫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053053 후한 말 요동에서 웅거하던 실력자였다. 처음 玄菟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요동태수가 되어 고구려와 烏丸을 공격하였다. 다시 산동의 東萊를 접수하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을 칭하였다. 204년에 죽어 아들 康이 뒤를 이었다(《삼국지》 권8 위서 公孫度傳).닫기을 보고 알리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자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모의하고 즉위하여 천륜의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하러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다. 공손탁이 그에 따랐다.
연우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는데, 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배자를 추격하니, 발기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차마 지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계수가 형제간의 정이 없었을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이 한 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라 하였다.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가 소리내어 슬피 울며 그 시체를 거두어 풀로 덮어 매장하고 돌아왔다. 왕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술자리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기를 “발기가 다른 나라 병력을 청하여 자기 나라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막대하다. 지금 그대가 그를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가 자살하자 매우 슬피 우는 것은 도리어 과인이 도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하였다. 계수가 안색이 바뀌며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 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하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어진 마음으로 악을 잊으시고, 형의 상례(喪禮)로써 장사지내면 누가 대왕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관부에 나아가 죽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자리에 앉아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과오를 알겠다. 그대는 자신을 책망하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 왕자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기쁨이 극치에 달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註 047
고구려의 제10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197∼227년이다. 고국천왕의 둘째동생으로서 中兄인 發岐와 왕권쟁탈전을 벌여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
註 048
고구려의 제10대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197∼227년이다. 고국천왕의 둘째동생으로서 中兄인 發岐와 왕권쟁탈전을 벌여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
註 049
태조왕부터 동천왕까지의 왕실 계보에 관해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 등 중국측 문헌과 《삼국사기》가 원문으로 채택하고 있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또는 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라는 기록을 산상왕에게 배당시킨 《삼국사기》는 ‘位宮’을 산상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삼국지》에서 현재의 왕 位宮이라고 한 것은 동천왕을 가리킨다.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에 나타난 宮에서 位宮까지의 계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신동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분주의 연구」, 《동대사학》 1, 1995, 50쪽 참조).
註 050
본문의 《위서(魏書)》 인용의 내용은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魏收 撰 《위서(魏書)》 권100 고구려전에 모두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魏書’를 《삼국지》의 魏書 또는 《위서(魏書)》로도 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13 동명왕 원년조에 인용한 ‘魏書’는 《위서(魏書)》인 것이 확실하므로 여기서의 ‘魏書’도 또한 《위서(魏書)》 일 것이다.
註 051
《삼국지》 권30 위서 고구려전에는 ‘拔奇’라 하였다.
註 052
형이 죽어 아우가 그 뒤를 잇는다는 것은 형제 상속의 전통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 고국천왕∼서천왕시기는 고구려가 사회의 변혁을 겪는 시기였다. 이때는 부 명칭의 변화, 형제 상속으로부터 부자 상속으로, 兄死娶嫂의 습속에 대한 비판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註 053
후한 말 요동에서 웅거하던 실력자였다. 처음 玄菟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요동태수가 되어 고구려와 烏丸을 공격하였다. 다시 산동의 東萊를 접수하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을 칭하였다. 204년에 죽어 아들 康이 뒤를 이었다(《삼국지》 권8 위서 公孫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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