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워 패하다 ( 645년 (음) )

황제가 안시성072072 현재의 중국 요녕성 해성시 동남 15km의 英城子屯에 있는 고구려 山城이 그 터로 여겨진다.닫기에 이르러 병력을 보내 공격하니, 북부 욕살(褥薩)073073 고구려의 城의 장관이다. ‘褥’은 《翰苑》·《通典》 등에서 ‘傉’으로 썼다. 《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 인용의 高麗記에 “又其諸大城置傉薩 比都督 諸城置處閭(近支) 比刺史 亦謂之道使”라 한 데서 大城의 장관을 지칭한다. 都督과 기능이 비슷하다는 데서 여러 성을 총괄하여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에는 “官有…凡十二等 復有內評 外評 五部褥薩”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욕살은 5部 즉 內·東·西·南·北部의 중요한 軍鎭에 각각 두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5~158쪽). 그러나 이 五部는 욕살의 출신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고연수(高延壽)074074 고구려의 大城의 장관인 褥薩 직위에 있던 인물이다. 《冊府元龜》 帝王 來遠部에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라 한 데서 그의 당시의 관등이 位頭大兄이었음과, 後部 즉 絶奴部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後部 방면의 욕살’(軍主는 곧 욕살)로 이해하고 고연수의 성은 곧 ‘高’씨이고 그가 桂婁部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8쪽). 그러나 계루부 출신 이외에도 국가에 큰 공을 세워 高氏를 賜姓받는 예가 있었다. 高慈墓誌銘(《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509~517쪽)에 高慈의 20대조 高密에게 고씨가 사성된 예가 그것이다(《삼국사기》 권17 주석 78 참조). 당 태종이 安市城을 공격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성 외곽에서 당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결국 당에 항복하였다.닫기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075075 고구려의 大城의 장관인 욕살 직위에 있던 인물이다. 《冊府元龜》 帝王 來遠部에 《大兄前部軍主高惠眞》라 하였으므로 그의 당시 관등은 大兄이었음과, 前部 즉 灌奴部 출신임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그러나 이를 ‘前部 방면의 욕살’로 이해하고 고연수의 성은 곧 ‘高’씨이고 그가 계루부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8쪽). 그러나 賜姓 등의 방법으로 계루부 출신 이외의 인물이 高氏 姓을 지닐 수도 있었다. 고연수와 함께 안시성을 원조하여 당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당에 항복하였다.닫기이 아군과 말갈병력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고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다.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과 연결하여 보루를 삼고, 높은 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을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약탈하면 이를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 하면 진흙과 바닥에 고인 물에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터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무리를 뽑아 그들과 함께 밤에 달아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경(卿)들은 보라. 저들은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저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 때에 대로(對盧)076076 《삼국지》 권30 魏書 고구려전에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沛者와 직능이 같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족장적 신분층에 속하던 것이 고구려의 관계조직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229쪽).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沛者는 이미 여러 차례 나오나 對盧는 이곳에서 처음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沛者를 ‘那部’의 최고 유력자에게 주는 것으로, 對盧를 ‘那部’가 변화된 ‘方位部’의 유력한 大加에게 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임기환, 「고구려 초기 관계조직의 성립과 운영」, 《경희사학》 19, 1995, 63쪽).닫기고정의(高正義)가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다. 연수(延壽)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왕(秦王)077077 당나라 태종을 말한다.닫기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연수는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을 40리 앞두었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대장군078078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8 唐紀 太宗 貞觀 19년 6월조에는 ‘左衛大將軍’이라고 하였다. 左衛大將軍의 관품은 정3품이었다.닫기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079079 突厥의 都布可汗을 자칭하다가 薛延陀에게 패한 후 唐나라로 귀화하였다. 龜茲, 西突厥 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죽은 후 昭陵(당 태종 능)에 배장되었으며 시호는 元이다.닫기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유인하게 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어 거짓으로 달아나니, 연수가 “상대하기 쉽구나.”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적과 대하여 전쟁을 하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면서 사졸들이 고구려가 이르렀음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는데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필승의 병사들입니다. 폐하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전쟁에 나아가 뛰어난 계책을 내어 승리하였습니다. 모두 위에서 성스러운 계책을 내리고 여러 장수들이 이를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의 지휘를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여러분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보겠다.”고 하고, 무기(無忌) 등과 더불어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산천형세가 병력을 숨기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피었다. 아군과 말갈이 병력을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였다. 황제가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 황제의 군대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병졸 5천을 빌려 주소서.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연수에게 보내 말하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세력이 강한 신하가 그 주인을 죽인 까닭에 죄를 물으려 왔으며 교전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들의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공급되지 않아 그대들의 여러 성을 빼앗은 것이다. 그대의 나라가 신하의 예를 닦는다면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하였다. 연수는 이를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이세적은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장손무기우진달(牛進達)은 정예 병력 1만 1천을 기습병력으로 삼아 거느리고 산의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을 거느리고,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히고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을 내려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분발하여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별똥별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연수 등이 홀로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병력을 정돈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도록 명령하니, 여러 군대가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진격하였다. 연수 등은 두려워 병력을 나누어 막으려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다. 용문인(龍門人) 설인귀(薛仁貴)080080 설인귀(615~684)는 출신이 빈천하였으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였다. 고구려 침공 때 전위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고구려의 南蘇, 木底, 蒼巖 등 城과 부여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에 진주하였다. 그외 吐谷渾, 突厥 정벌에도 공을 세웠다(《신당서》 권111 薛仁貴傳).닫기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크게 소리치며 진에 깊이 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이 아군은 흩어 쓰러졌다. 대군이 이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아군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081081 한대에 雜號將軍으로 두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宿衛의 직무를 관장하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從5品 下의 武散官으로 두어졌다.닫기의 벼슬을 내렸다. 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수비하였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이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무기는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돌아갈 길을 끊으니, 연수혜진이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청하니, 황제가 욕살 이하 관장 3천 5백인을 가려 내지(內地)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3천 3백인은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082082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86, 331쪽).닫기 획득한 말이 5만 필과 소가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083083 표면에 칠을 하여 햇빛에 빛나도록 만든 화려한 갑옷이다. 백제에서도 사용되었다(《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27년조). 고구려 군인들의 武裝 모습은 고분벽화(藥水里, 大安里, 安岳3호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고구려 군인들의 갑옷은 대개 札甲이었으며 馬面甲과 馬鎧도 사용하였다. 騎馬戰術을 주로 하는 고구려 군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高句麗古墳壁畵史料集(2)》, 東京, 1985, 33~34쪽).닫기 1만 벌이고 다른 기계도 그 정도였다. 거둥했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084084 현재의 요령성 遼陽의 서남쪽에 있는 首山이다. ‘驆’은 흔히 ‘蹕’로도 쓴다. 원래 馬首山이라 했던 곳인데 唐 太宗이 고구려 遠征 중에 머문 곳이어서 駐蹕山이라 이름하게 되었다.닫기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

註 072
현재의 중국 요녕성 해성시 동남 15km의 英城子屯에 있는 고구려 山城이 그 터로 여겨진다.
註 073
고구려의 城의 장관이다. ‘褥’은 《翰苑》·《通典》 등에서 ‘傉’으로 썼다. 《翰苑》 번이부(蕃夷部) 고려전 인용의 高麗記에 “又其諸大城置傉薩 比都督 諸城置處閭(近支) 比刺史 亦謂之道使”라 한 데서 大城의 장관을 지칭한다. 都督과 기능이 비슷하다는 데서 여러 성을 총괄하여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서(隋書)》 권81 고려전에는 “官有…凡十二等 復有內評 外評 五部褥薩”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욕살은 5部 즉 內·東·西·南·北部의 중요한 軍鎭에 각각 두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5~158쪽). 그러나 이 五部는 욕살의 출신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074
고구려의 大城의 장관인 褥薩 직위에 있던 인물이다. 《冊府元龜》 帝王 來遠部에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라 한 데서 그의 당시의 관등이 位頭大兄이었음과, 後部 즉 絶奴部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後部 방면의 욕살’(軍主는 곧 욕살)로 이해하고 고연수의 성은 곧 ‘高’씨이고 그가 桂婁部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8쪽). 그러나 계루부 출신 이외에도 국가에 큰 공을 세워 高氏를 賜姓받는 예가 있었다. 高慈墓誌銘(《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2, 509~517쪽)에 高慈의 20대조 高密에게 고씨가 사성된 예가 그것이다(《삼국사기》 권17 주석 78 참조). 당 태종이 安市城을 공격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성 외곽에서 당군과 싸웠으나 패하고 결국 당에 항복하였다.
註 075
고구려의 大城의 장관인 욕살 직위에 있던 인물이다. 《冊府元龜》 帝王 來遠部에 《大兄前部軍主高惠眞》라 하였으므로 그의 당시 관등은 大兄이었음과, 前部 즉 灌奴部 출신임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그러나 이를 ‘前部 방면의 욕살’로 이해하고 고연수의 성은 곧 ‘高’씨이고 그가 계루부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事組織》, 158쪽). 그러나 賜姓 등의 방법으로 계루부 출신 이외의 인물이 高氏 姓을 지닐 수도 있었다. 고연수와 함께 안시성을 원조하여 당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당에 항복하였다.
註 076
《삼국지》 권30 魏書 고구려전에 “對盧를 두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를 두면 對盧를 두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沛者와 직능이 같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족장적 신분층에 속하던 것이 고구려의 관계조직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철준,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229쪽).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沛者는 이미 여러 차례 나오나 對盧는 이곳에서 처음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沛者를 ‘那部’의 최고 유력자에게 주는 것으로, 對盧를 ‘那部’가 변화된 ‘方位部’의 유력한 大加에게 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임기환, 「고구려 초기 관계조직의 성립과 운영」, 《경희사학》 19, 1995, 63쪽).
註 077
당나라 태종을 말한다.
註 078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8 唐紀 太宗 貞觀 19년 6월조에는 ‘左衛大將軍’이라고 하였다. 左衛大將軍의 관품은 정3품이었다.
註 079
突厥의 都布可汗을 자칭하다가 薛延陀에게 패한 후 唐나라로 귀화하였다. 龜茲, 西突厥 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죽은 후 昭陵(당 태종 능)에 배장되었으며 시호는 元이다.
註 080
설인귀(615~684)는 출신이 빈천하였으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였다. 고구려 침공 때 전위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고구려의 南蘇, 木底, 蒼巖 등 城과 부여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에 진주하였다. 그외 吐谷渾, 突厥 정벌에도 공을 세웠다(《신당서》 권111 薛仁貴傳).
註 081
한대에 雜號將軍으로 두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宿衛의 직무를 관장하였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從5品 下의 武散官으로 두어졌다.
註 082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86, 331쪽).
註 083
표면에 칠을 하여 햇빛에 빛나도록 만든 화려한 갑옷이다. 백제에서도 사용되었다(《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27년조). 고구려 군인들의 武裝 모습은 고분벽화(藥水里, 大安里, 安岳3호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고구려 군인들의 갑옷은 대개 札甲이었으며 馬面甲과 馬鎧도 사용하였다. 騎馬戰術을 주로 하는 고구려 군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高句麗古墳壁畵史料集(2)》, 東京, 1985, 33~34쪽).
註 084
현재의 요령성 遼陽의 서남쪽에 있는 首山이다. ‘驆’은 흔히 ‘蹕’로도 쓴다. 원래 馬首山이라 했던 곳인데 唐 太宗이 고구려 遠征 중에 머문 곳이어서 駐蹕山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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