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다 ( 660년 (음) )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073073 금군(禁軍)의 주요 장령(將令)을 말한다.닫기소정방(蘇定方)074074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이다. 당나라 태종 때 동·서 돌궐을 항복시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에 예속시켰다.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했다.닫기을 신구도 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075075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이다.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熊津道大摠管’으로, 《신당서》 권3 本紀 고종 顯慶 5년 3월조에는 ‘神兵道行軍大摠管’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元戎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7월조에 인용된 高麗沙門 道顯의 《日本世記》에는 ‘大將軍蘇定方’으로만 나온다. 神丘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攻擊路의 하나이다.닫기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076076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장군. 이 유백영의 직함에 대해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장군으로 나오나,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副大摠管冠軍大將軍△△△衛將軍상주국(上柱國)下博公’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조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左驍衛將軍劉伯英’으로 나오고 있다.닫기과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077077 우무위(右武衛)는 당나라의 16위의 하나이며, 우무위에 속한 장군은 2명으로 품계는 종3품이었다.닫기풍사귀(馮士貴)078078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66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지휘한 장군의 하나였다. 이 풍사귀의 직함에 대해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右武衛장군으로 나온다.닫기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079079 좌효위(左驍衛)는 당나라의 16위(衛)의 하나. 처음에는 효기(驍騎)였지만, 수나라가 좌우효위(左右驍衛)로 고쳤다. 당나라 때에는 효기(驍騎)의 ‘기(騎)’를 제거하고, 효위부(驍衛部)라고 하였다.닫기방효공(龐孝公)080080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唐軍을 지휘한 장군의 하나였다.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驍衛將軍 龐孝泰’로 나오는데 양자는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닫기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081081 백제를 공격해 온 당나라 군대의 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춘3월조에는 “水陸13萬△△伐百濟”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라 하여 구체적인 군사의 숫자와 더불어 이 군대를 싣고 온 배의 수도 기록하고 있다.닫기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都行軍摠管)082082 당나라 軍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당나라가 신라 무열왕에게 준 지위. 동일한 관명이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 《신당서》 권3 본기 高宗 顯慶 5년 3월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현경 5년조에도 나온다. 嵎夷道는 당나라 군대의 進擊路의 하나이다. ‘嵎夷’라는 명칭은 《尙書》 堯典에 “宅嵎夷曰暘谷”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 都督府一十三縣條에는 嵎夷縣이 나온다.닫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083083 중국 산동성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하였는데, 현재에도 이곳에 성산이라는 지명이 있다.닫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084084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위치하며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덕물도와 소야도(蘇耶島)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소정방이 직접 상륙한 곳은 소야도였다고 한다(김영관,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A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9, 168쪽).닫기에 이르자085085 이 부분은 《신당서》 권111 열전 蘇定方傳, 《신당서》 권220 백제전 및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서는 “自城山濟海 至熊津口”로 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7월조의 注에는 “或本云 今年七月十日 大唐蘇定方率船師 軍于尾資之津…”이라 하여 당나라 軍이 尾資津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尾資津을 錦江河口 즉 伎伐浦로 보는 견해도 있고, 忠南 保寧郡 熊川面의 彌造浦로 보는 견해도 있다(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下, 岩波書店, 東京, 345쪽의 頭注 30 참조).닫기, 신라 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086086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 6월조에는 “王與庾信 眞珠 天存等 領兵出京…又命太子與大將軍金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精兵五萬應之”라 하여 김유신 외에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다.닫기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087087 백제는 18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자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백제는 신라군이 5월 26일경 경주를 출발할 무렵 그 동향을 주목하였지만 북쪽의 남천정으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으로 오판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에 당군과 신라군이 덕물도에서 만나 백제 공격에 대한 전략을 마련한 후 해로를 통해 남진할 기미를 보이면서 황급히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김영관,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A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9, 183쪽).닫기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기를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常永)088088 백제 의자왕대의 사람. 達率의 관등을 지녔으며,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 오자 속전속결을 반대하였다. 그후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와 함께 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다. 이때 그의 관등은 佐平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후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一吉湌의 관등과 摠管의 직을 제수받았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참조.닫기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군(唐軍)은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나라 군사들이 진격하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089089 전남 장흥군 장흥읍 일원의 백제시대 행정 구역이다. 장흥읍 외에 부산면(夫山面)·안량면(安良面)·유치면(有治面) 지역도 포함된다.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 때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닫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090090 오늘날의 금강은 웅진 부근에서는 웅진강(熊津江), 사비 부근에서는 사비하(泗沘河), 하구는 백강(白江)으로 불렀다. 백제시대에 금강 하구는 기벌포(伎伐浦) 또는 지화포(只火浦)로 불렸는데, 백강은 기벌포의 이칭이었다. 그리고 백강은 서천과 군산 사이에 위치한 금강 하구를 의미한 것으로 판단된다(「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522쪽).닫기 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탄현(炭峴)091091 沈峴 또는 眞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현재의 大田광역시 東區와 충북 沃川郡 郡北面의 경계가 되는 食藏山 馬道嶺에 비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1977, 401쪽).닫기 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092092 나제 양국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논산시 연산면에 이르는 험준한 산과 골짜기를 경계로 하여 국경을 마주하였다. 백제는 금산에서 황산벌이 위치한 연산 지역으로 들어오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좁은 협곡이나 고개에 축조된 산성을 활용하였다. 백제는 연산면 모촌리에서 남쪽으로 14km 정도에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용계원에 용계산성을 축조하여 그 부근을 통과하는 좁은 계속 사이의 길을 감시하였다. 또한 용계원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쑥고개 위에는 탄현산성이 위치하였으며, 금산에서 연산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남이면 역평리에서 건천리로 통하는 해발 500m 고개 위에는 보루 성격의 백령산성이 위치하였고, 또 다른 주요 교통로에 해당되는 읍내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진산성과 부암리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박순발·성정용, 「종합고찰」, 《논산 황산벌 전적지》, 충남대 백제연구소, 2000, 118~123쪽). 따라서 탄현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표고 148m 지점의 숯고개(또는 쑥고개)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전영래, 「탄현에 관한 연구」, 《전북유적조사보고》 13, 전주시립박물관, 1982, 1982).닫기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여,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093093 성충흥수는 일찍부터 당의 침입 가능성을 예상하고, 당의 수군이 금강을 통하여 백제의 수도 부여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 하구인 기벌포 부근에 방어망을 구축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자왕과 신라와 전쟁을 주도하던 장군 의직(義直) 등은 당의 침입 가능성을 경시하였다. 의자왕은 서해의 험준함을 믿고 당의 공격에 거의 대비를 하지 않았다.닫기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오게 하여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094094 백제 의자왕대의 장군.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 階伯傳과 官昌傳에는 階伯으로,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관등은 達率이었다. 한편 김정호의 《大東地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이라 하여 階伯은 姓이고 이름은 升임을 전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취신하면 階伯은 이름이 아니고 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百濟同姓이라는 것은 백제왕실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하면 계백이라는 성은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한 支派가 階伯이라는 성을 칭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주성,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참조 | 이 시기 姓氏의 分枝化에 대해서는 노중국, 「백제의 귀족가문 연구-木劦(木)氏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48, 1994 참조. 그리고 계백이 전사한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47 열전 階伯傳 및 官昌傳 참조).닫기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095095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차지하는 넓은 들로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험준한 곳에 설치한 3영은 백제의 변경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던 연산 지역의 산성에 마련되었다. 계백이 3영을 설치한 곳은 산직리산성(장골산성), 웅치산성(곰치산성), 황령산성으로 보고 있다(홍사준, 「탄현고」, 《역사학보》 35·36, 1967, 1967, 77~78쪽).닫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096096 백제는 국경 부근에 위치한 탄현에 일차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였고, 그 배후에 해당되는 연산 일원에 황령산성, 깃대봉보루, 산직리산성, 국사봉보루, 모촌리산성, 외성리산성 등을 1열 횡대의 학익진 형태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 산성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함지산 밑에 황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이 능선에 배치된 성곽이 뚫리면 수도 부여까지 거의 평지를 통해 일사천리로 밀리게 되기 때문에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하였다(성주탁, 「대전 지역 고대산성고」, 《백제연구》 5, 1974, 166~167쪽).닫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097097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나오지 않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만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 餘皆潰走”라 하여 이 싸움에서 백제는 수천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닫기 이때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098098 본 기사는 《신당서》 권111 열전 蘇定方傳의 “直趨眞都城”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直趨眞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直趨其都城”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直趨都城一舍止”라 되어 있다. 문맥상에서 미루어 볼 때 熊津江口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唐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都城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보는 것이 순조롭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勘校本에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其都城”을 取信하여 中宗壬申刊本의 ‘直趨眞都城’을 ‘直趨其都城’으로 고쳤다. 한편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眞都城이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닫기 30리099099 30리를 일사(一舍)라고 하는 데,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425쪽).닫기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100100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사비성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금강의 남안에 상륙한 후 강변을 따라 직공하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군은 당군이 기벌포로 진입하려고 하자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강을 따라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소정방은 상륙 부대를 이끌고 자신이 직접 육지에 올랐다. 소정방은 기벌포 부근의 해안이 진흙이어서 군대가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고 군사를 상륙시켜 산 위에 진을 쳤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하여 진을 펼친 곳은 금강 하구둑 부근의 군산시 성산면 성산리와 나포면 서포리 일대에 위치한 해발 227m의 오성산으로 추정된다(「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470쪽). 오성산은 금강의 입구에 접하여 다섯 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산 정상에 서면 금강의 중류와 하류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동진강과 만경강의 줄기까지 전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정방이 상륙하는 상황을 전하는 《여지도서》 임피현 고적조의 기사는 오성산과 기벌포 일대에서 치렀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닫기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孝)101101 가 태자로 나온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융(隆)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닫기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102102 의자왕은 백제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거절하였다. 또한 의자왕의 여러 왕자들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진영으로 가서 사죄를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부여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의자왕은 적군이 물밀듯이 육박하자 성충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태자 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을 떠났다.닫기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103103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嫡孫文思》로,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과 같은 책 권111 열전 蘇定方傳에는 《義慈孫》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隆子文思》로 나온다. 文思의 아버지가 본 기사에는 孝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隆으로 나오는 것은 의자왕의 태자를 《삼국사기》에서는 孝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隆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닫기가 왕의 아들 104104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여기서는 왕자로만 나온다.닫기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105105 의자왕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떠난 후 나당연합군은 부소산성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이 떠난 후 부소산성은 둘째 아들 태(泰)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켰는데 왕자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의자왕의 탈출과 왕실의 내분이 발생하자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백제군은 왕자 융(隆)과 대좌평 천복(千福)이 당군에 투항한데 이어, 부소산성에 고립된 왕자 태도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사비성과 부소산성은 의자왕이 웅진으로 떠난 후 집권층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허무하게 나당연합군에 점령되고 말았다.닫기 이때 왕과 태자 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106106 사비도성을 벗어나 웅진으로 피난을 떠난 의자왕의 항복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웅진방령 녜식(禰植)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의자왕을 사로잡아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역사의 재조명》, 소화, 1995, 196쪽).닫기소정방이 왕과 태자 (孝), 왕자 (泰), (隆), (演)107107 의자왕의 아들.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 및 대신(大臣)과 장사(壯士)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나라 서울108108 당나라의 수도 長安을 말한다. 현재의 중국 西安이다.닫기로 호송하였다.109109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열흘 째 되는 날이었다. 백제는 소정방이 당군을 이끌고 덕물도에 도착한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700년 사직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닫기 백제는 원래 5부(部)110110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최고의 지방 통치조직으로 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를 말한다. 五方과 같은 것이다. 백제 말기에 와서 方과 部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部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軍管區로서 6~10개의 郡을 포괄하였고, 또 小城으로 표현되는 縣들을 統屬하고 있었다. 部(方)의 장은 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五部의 中心治所는 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및 《翰苑》 백제조에 인용된 《括地志》에 의해 方과 方城의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中方-古沙城, 東方-得安城, 南方-久知下城(卞城), 西方-刀先城(力先城), 北方-熊津城(固麻城). 이 방성은 대개가 험한 산에 의지하여 돌로 쌓았으며, 1200~7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今西龍, 「百濟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所收, 1934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235~236쪽 |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1988 | 박현숙,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 김영심,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참조).닫기 37군(郡)111111 백제의 지방 통치조직의 하나. 方(部)과 城(縣)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郡은 내부에 몇개의 城(縣)들을 통속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郡制는 泗泚遷都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 遂復故地”에 나오는 ‘6郡’은 성왕대의 郡制의 실시를 방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郡의 長은 郡將(《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또는 郡令(《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이라 하였다. 郡에는 郡將이 3명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郡將은 德率의 관등 소지자가 맡는 것이 원칙이나 黑齒常之가 달솔로서 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보듯이 달솔의 관등소지자도 맡기도 하였다.닫기 2백 성(城)112112 백제의 지방 통치조직 중 최하의 조직. 《翰苑》 백제조에 “郡縣置道使”라는 기사는 郡 아래에 縣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縣은 바로 城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城(縣)의 장은 城主(《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또는 道使(《翰苑》 백제조)로 불리웠다. 그런데 지방관이 파견된 성의 수에 대해 본 기사는 200성이라 하고 있지만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250현으로, 《삼국사기》 36 잡지 지리3에는 104현으로 나오고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이 중 본 기사의 200성과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의 250현은 백제 당시의 현의 수의 변동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地理志의 104현은 신라가 새로운 기준에서 지방 통치조직을 편제하면서 축소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닫기 76만 호(戶)113113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 백제의 戶數에 대해서는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 및 《通典》 권181 邊防一 百濟條에는 《戶76萬》으로 나온다. 그러나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으로 나오고 있고,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변한·백제조에는 “百濟全盛之時 十五萬二千三百戶”라 나오고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닫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련漣)·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114114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다섯개의 도독부. 그 명칭은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都督府이다. 이 중 중심이 된 것은 웅진도독부였다. 이 5도독부 중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웅진도독부(현재의 충남 공주시)와 덕안도독부(현재의 충남 論山郡 恩津面)이다. 德安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3 전주 德殷郡條에는 “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이라 한 기사 참조. 그러나 백제 멸망 후 곧 각처에서 부흥군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도독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6에 5도독부는 보이지 않고 대신 1都督府-7州制만 보이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따라서 이 5도독부제는 한갖 圖上의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구당서》 권83 열전 제33 소정방전에는 “百濟悉平 分其地爲六州”라 하여 백제를 평정한 후 그 故地를 6州로 편성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나, 대다수의 사료들이 5都督府를 둔 것으로 되어 있어 6州로의 편성은 취신하기 어렵다.(5도독부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는 천관우,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단국대학교, 1979 참조. 이 5도독부 가운데 핵심인 웅진도독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이도학,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1987 참조).닫기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115115 동일한 내용이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凡置五都督府 三七州 二百五十縣”이라 하여 주와 현의 수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5도독부제가 폐지된 후 웅진도독부 하에 두어진 州·縣의 수에 대해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 도독부조에는 1도독부-7주-51현으로 나온다.닫기,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116116 州의 장관을 말한다. 刺史는 漢의 武帝가 部刺史를 두고 詔條를 받들어 郡國을 監察하는 일을 관장하게 함에서 비롯되었다. 魏晉시대에는 要衝地의 州에 두고 都督으로써 刺史를 兼領하게 하였다. 漢·魏·晉대의 刺史에 대해서는 和田 淸,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1932, 65~67 및 98~100쪽 참조. 唐代의 지방 통치조직은 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라 하였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州縣制라고 하는 당의 지방 통치조직을 백제고지에 시행하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 나오는 1도독부-7주-51현제이다.닫기·현령(縣令)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郎將)117117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유인원의 職啣으로 行左驍衛郞將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左郞將 1명과 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官品은 분명하지 않으나 五府의 낭장의 관품이 正5品上이어서 그것에 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신당서》 권49 상 백관4 상 16衛條 및 《구당서》 권44 직관3 武官條 참조).닫기유인원(劉仁願)118118 600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돌아간 후 도성을 지키는 최고 책임을 맡았다.닫기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119119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도호부 아래에 주와 현을 두어 지방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37군 200성을 37주 250현으로 재편하고 그 장관으로 자사와 현령을 두었으며, 도독·자사·현령은 모두 백제 출신의 유력자들을 발탁하였다. 유인원은 사비성에 주둔하면서 공주·논산·남원·예산군 덕산·영산강 유역 일원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유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분열책을 구사하였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71~76쪽).닫기 또한 좌위낭장(左衛郎將)120120 이 구절은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 그대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왕문도는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돌연히 병이 생겨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는 차이가 난다.닫기왕문도(王文度)121121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참전하였으며, 그 후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닫기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122122 당나라의 문산계(文散階)의 하나이며, 정3품이다.닫기 위위경(衛尉卿)123123 중국 당나라 관제의 하나로 관품은 종3품이며, 기계문물(器械文物)과 궁문위둔병(宮門衛屯兵) 등의 임무를 관장하였다.닫기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124124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최후의 황제로 자는 원종(元宗)·호종(皓宗)이며 별명은 팽조(彭祖)이다.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정후(烏程侯)에 책봉되었으며,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창업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에서 우창[武昌]으로 일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였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다.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남하하여 쳐들어온 진(晋)나라 대군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후에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나 뒤에 서진(西晋)의 수도 낙양(洛陽)에서 죽었다.닫기, 진숙보(陳叔寶)125125 진숙보(陳叔寶, 553~604)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진(陳)의 제5대 황제(재위:582~589)이었다. 자는 원수(元秀)이며, 진(陳)나라의 후주(後主)로 칭해지는 인물로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닫기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을 사가경(司稼卿)126126 창고 등의 일을 관장한 사가사(司稼司)의 장관으로 관품은 종3품이다.닫기으로 임명하였다. 왕문도(王文度)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인궤(劉仁軌)127127 중국 당나라 고종 때의 무장으로 자는 정칙(正則)이다. 유인원(劉仁願)을 도와 백제 부흥군을 격퇴한 뒤,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다.닫기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註 073
금군(禁軍)의 주요 장령(將令)을 말한다.
註 074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이다. 당나라 태종 때 동·서 돌궐을 항복시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에 예속시켰다.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했다.
註 075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받은 직함이다.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같은 관명이 나온다. 그러나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熊津道大摠管’으로, 《신당서》 권3 本紀 고종 顯慶 5년 3월조에는 ‘神兵道行軍大摠管’으로,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元戎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7월조에 인용된 高麗沙門 道顯의 《日本世記》에는 ‘大將軍蘇定方’으로만 나온다. 神丘道는 唐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일시적으로 정한 攻擊路의 하나이다.
註 076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장군. 이 유백영의 직함에 대해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衛장군으로 나오나,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副大摠管冠軍大將軍△△△衛將軍상주국(上柱國)下博公’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高宗 顯慶 5년조와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左驍衛將軍劉伯英’으로 나오고 있다.
註 077
우무위(右武衛)는 당나라의 16위의 하나이며, 우무위에 속한 장군은 2명으로 품계는 종3품이었다.
註 078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66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군대를 지휘한 장군의 하나였다. 이 풍사귀의 직함에 대해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도 右武衛장군으로 나온다.
註 079
좌효위(左驍衛)는 당나라의 16위(衛)의 하나. 처음에는 효기(驍騎)였지만, 수나라가 좌우효위(左右驍衛)로 고쳤다. 당나라 때에는 효기(驍騎)의 ‘기(騎)’를 제거하고, 효위부(驍衛部)라고 하였다.
註 080
중국 당나라 태종대의 인물.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唐軍을 지휘한 장군의 하나였다.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左驍衛將軍 龐孝泰’로 나오는데 양자는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
註 081
백제를 공격해 온 당나라 군대의 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춘3월조에는 “水陸13萬△△伐百濟”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라 하여 구체적인 군사의 숫자와 더불어 이 군대를 싣고 온 배의 수도 기록하고 있다.
註 082
당나라 軍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당나라가 신라 무열왕에게 준 지위. 동일한 관명이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 《신당서》 권3 본기 高宗 顯慶 5년 3월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현경 5년조에도 나온다. 嵎夷道는 당나라 군대의 進擊路의 하나이다. ‘嵎夷’라는 명칭은 《尙書》 堯典에 “宅嵎夷曰暘谷”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 都督府一十三縣條에는 嵎夷縣이 나온다.
註 083
중국 산동성의 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하였는데, 현재에도 이곳에 성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註 084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위치하며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덕물도와 소야도(蘇耶島)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소정방이 직접 상륙한 곳은 소야도였다고 한다(김영관,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A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9, 168쪽).
註 085
이 부분은 《신당서》 권111 열전 蘇定方傳, 《신당서》 권220 백제전 및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서는 “自城山濟海 至熊津口”로 되어 있다. 한편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 7월조의 注에는 “或本云 今年七月十日 大唐蘇定方率船師 軍于尾資之津…”이라 하여 당나라 軍이 尾資津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尾資津을 錦江河口 즉 伎伐浦로 보는 견해도 있고, 忠南 保寧郡 熊川面의 彌造浦로 보는 견해도 있다(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下, 岩波書店, 東京, 345쪽의 頭注 30 참조).
註 086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 6월조에는 “王與庾信 眞珠 天存等 領兵出京…又命太子與大將軍金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精兵五萬應之”라 하여 김유신 외에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다.
註 087
백제는 18만에 이르는 대규모의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자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백제는 신라군이 5월 26일경 경주를 출발할 무렵 그 동향을 주목하였지만 북쪽의 남천정으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으로 오판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에 당군과 신라군이 덕물도에서 만나 백제 공격에 대한 전략을 마련한 후 해로를 통해 남진할 기미를 보이면서 황급히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김영관,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작전과 백제의 방어전략」, 《STRATEGY21》, 한국해양전략연구소, 1999, 183쪽).
註 088
백제 의자왕대의 사람. 達率의 관등을 지녔으며, 당나라 군대가 쳐들어 오자 속전속결을 반대하였다. 그후 660년 7월 계백이 거느린 결사대와 함께 黃山에서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로 잡혔다. 이때 그의 관등은 佐平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출전하면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신라군에 항복한 후 660년 11월에 신라 무열왕으로부터 一吉湌의 관등과 摠管의 직을 제수받았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참조.
註 089
전남 장흥군 장흥읍 일원의 백제시대 행정 구역이다. 장흥읍 외에 부산면(夫山面)·안량면(安良面)·유치면(有治面) 지역도 포함된다.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 때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 보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註 090
오늘날의 금강은 웅진 부근에서는 웅진강(熊津江), 사비 부근에서는 사비하(泗沘河), 하구는 백강(白江)으로 불렀다. 백제시대에 금강 하구는 기벌포(伎伐浦) 또는 지화포(只火浦)로 불렸는데, 백강은 기벌포의 이칭이었다. 그리고 백강은 서천과 군산 사이에 위치한 금강 하구를 의미한 것으로 판단된다(「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522쪽).
註 091
沈峴 또는 眞峴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현재의 大田광역시 東區와 충북 沃川郡 郡北面의 경계가 되는 食藏山 馬道嶺에 비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1977, 401쪽).
註 092
나제 양국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논산시 연산면에 이르는 험준한 산과 골짜기를 경계로 하여 국경을 마주하였다. 백제는 금산에서 황산벌이 위치한 연산 지역으로 들어오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좁은 협곡이나 고개에 축조된 산성을 활용하였다. 백제는 연산면 모촌리에서 남쪽으로 14km 정도에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용계원에 용계산성을 축조하여 그 부근을 통과하는 좁은 계속 사이의 길을 감시하였다. 또한 용계원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쑥고개 위에는 탄현산성이 위치하였으며, 금산에서 연산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남이면 역평리에서 건천리로 통하는 해발 500m 고개 위에는 보루 성격의 백령산성이 위치하였고, 또 다른 주요 교통로에 해당되는 읍내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진산성과 부암리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박순발·성정용, 「종합고찰」, 《논산 황산벌 전적지》, 충남대 백제연구소, 2000, 118~123쪽). 따라서 탄현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표고 148m 지점의 숯고개(또는 쑥고개)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전영래, 「탄현에 관한 연구」, 《전북유적조사보고》 13, 전주시립박물관, 1982, 1982).
註 093
성충흥수는 일찍부터 당의 침입 가능성을 예상하고, 당의 수군이 금강을 통하여 백제의 수도 부여로 향하지 못하도록 그 하구인 기벌포 부근에 방어망을 구축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자왕과 신라와 전쟁을 주도하던 장군 의직(義直) 등은 당의 침입 가능성을 경시하였다. 의자왕은 서해의 험준함을 믿고 당의 공격에 거의 대비를 하지 않았다.
註 094
백제 의자왕대의 장군.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명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47 열전 階伯傳과 官昌傳에는 階伯으로,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는 偕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그의 관등은 達率이었다. 한편 김정호의 《大東地志》 부여 寺院條에는 “階伯(名升 百濟同姓…)”이라 하여 階伯은 姓이고 이름은 升임을 전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취신하면 階伯은 이름이 아니고 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百濟同姓이라는 것은 백제왕실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하면 계백이라는 성은 왕족 부여씨에서 분지되어 나온 한 支派가 階伯이라는 성을 칭하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김주성,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참조 | 이 시기 姓氏의 分枝化에 대해서는 노중국, 「백제의 귀족가문 연구-木劦(木)氏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48, 1994 참조. 그리고 계백이 전사한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47 열전 階伯傳 및 官昌傳 참조).
註 095
황산벌은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차지하는 넓은 들로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삼영(三營)을 설치하고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기다렸다. 계백이 험준한 곳에 설치한 3영은 백제의 변경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던 연산 지역의 산성에 마련되었다. 계백이 3영을 설치한 곳은 산직리산성(장골산성), 웅치산성(곰치산성), 황령산성으로 보고 있다(홍사준, 「탄현고」, 《역사학보》 35·36, 1967, 1967, 77~78쪽).
註 096
백제는 국경 부근에 위치한 탄현에 일차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였고, 그 배후에 해당되는 연산 일원에 황령산성, 깃대봉보루, 산직리산성, 국사봉보루, 모촌리산성, 외성리산성 등을 1열 횡대의 학익진 형태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 산성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함지산 밑에 황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이 능선에 배치된 성곽이 뚫리면 수도 부여까지 거의 평지를 통해 일사천리로 밀리게 되기 때문에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하였다(성주탁, 「대전 지역 고대산성고」, 《백제연구》 5, 1974, 166~167쪽).
註 097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나오지 않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만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百濟據熊津江口以拒之 定方進擊破之 百濟死者數千人 餘皆潰走”라 하여 이 싸움에서 백제는 수천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註 098
본 기사는 《신당서》 권111 열전 蘇定方傳의 “直趨眞都城”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直趨眞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直趨其都城”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 권1 紀異篇 태종춘추공조에는 “直趨都城一舍止”라 되어 있다. 문맥상에서 미루어 볼 때 熊津江口에서 백제 저항군을 격파한 唐나라 군대가 곧 바로 그 都城으로 진격해 간 것으로 보는 것이 순조롭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勘校本에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其都城”을 取信하여 中宗壬申刊本의 ‘直趨眞都城’을 ‘直趨其都城’으로 고쳤다. 한편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眞都城이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註 099
30리를 일사(一舍)라고 하는 데, 군대가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425쪽).
註 100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사비성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금강의 남안에 상륙한 후 강변을 따라 직공하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군은 당군이 기벌포로 진입하려고 하자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강을 따라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소정방은 상륙 부대를 이끌고 자신이 직접 육지에 올랐다. 소정방은 기벌포 부근의 해안이 진흙이어서 군대가 빠져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고 군사를 상륙시켜 산 위에 진을 쳤다.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하여 진을 펼친 곳은 금강 하구둑 부근의 군산시 성산면 성산리와 나포면 서포리 일대에 위치한 해발 227m의 오성산으로 추정된다(「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470쪽). 오성산은 금강의 입구에 접하여 다섯 개의 높고 낮은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산 정상에 서면 금강의 중류와 하류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동진강과 만경강의 줄기까지 전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정방이 상륙하는 상황을 전하는 《여지도서》 임피현 고적조의 기사는 오성산과 기벌포 일대에서 치렀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註 101
가 태자로 나온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융(隆)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
註 102
의자왕은 백제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거절하였다. 또한 의자왕의 여러 왕자들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진영으로 가서 사죄를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부여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의자왕은 적군이 물밀듯이 육박하자 성충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태자 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註 103
《구당서》 권83 열전 蘇定方傳에는 《嫡孫文思》로,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과 같은 책 권111 열전 蘇定方傳에는 《義慈孫》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顯慶 5년 8월조에는 《隆子文思》로 나온다. 文思의 아버지가 본 기사에는 孝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隆으로 나오는 것은 의자왕의 태자를 《삼국사기》에서는 孝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隆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註 104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여기서는 왕자로만 나온다.
註 105
의자왕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떠난 후 나당연합군은 부소산성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이 떠난 후 부소산성은 둘째 아들 태(泰)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켰는데 왕자들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의자왕의 탈출과 왕실의 내분이 발생하자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동요하는 민심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백제군은 왕자 융(隆)과 대좌평 천복(千福)이 당군에 투항한데 이어, 부소산성에 고립된 왕자 태도 형세가 어렵고 급박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사비성과 부소산성은 의자왕이 웅진으로 떠난 후 집권층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허무하게 나당연합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註 106
사비도성을 벗어나 웅진으로 피난을 떠난 의자왕의 항복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웅진방령 녜식(禰植)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의자왕을 사로잡아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의 부흥전쟁연구」, 《역사의 재조명》, 소화, 1995, 196쪽).
註 107
의자왕의 아들.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다.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108
당나라의 수도 長安을 말한다. 현재의 중국 西安이다.
註 109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열흘 째 되는 날이었다. 백제는 소정방이 당군을 이끌고 덕물도에 도착한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700년 사직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註 110
전국을 다섯으로 나눈 최고의 지방 통치조직으로 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를 말한다. 五方과 같은 것이다. 백제 말기에 와서 方과 部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部는 광역의 행정구역 겸 軍管區로서 6~10개의 郡을 포괄하였고, 또 小城으로 표현되는 縣들을 統屬하고 있었다. 部(方)의 장은 方領이라고 하였으며 달솔의 관등소지자가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五部의 中心治所는 方城이라고 하였는데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 및 《翰苑》 백제조에 인용된 《括地志》에 의해 方과 方城의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中方-古沙城, 東方-得安城, 南方-久知下城(卞城), 西方-刀先城(力先城), 北方-熊津城(固麻城). 이 방성은 대개가 험한 산에 의지하여 돌로 쌓았으며, 1200~7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今西龍, 「百濟五方五部考」, 《百濟史硏究》 所收, 1934 |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235~236쪽 | 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1988 | 박현숙,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6 | 김영심,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참조).
註 111
백제의 지방 통치조직의 하나. 方(部)과 城(縣)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郡은 내부에 몇개의 城(縣)들을 통속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郡制는 泗泚遷都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凡六郡之地 遂復故地”에 나오는 ‘6郡’은 성왕대의 郡制의 실시를 방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郡의 長은 郡將(《周書》 권49 열전 백제전) 또는 郡令(《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이라 하였다. 郡에는 郡將이 3명 파견된 것이 특징이다. 郡將은 德率의 관등 소지자가 맡는 것이 원칙이나 黑齒常之가 달솔로서 風達郡將이 된 것에서 보듯이 달솔의 관등소지자도 맡기도 하였다.
註 112
백제의 지방 통치조직 중 최하의 조직. 《翰苑》 백제조에 “郡縣置道使”라는 기사는 郡 아래에 縣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縣은 바로 城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城(縣)의 장은 城主(《日本書紀》 권19 欽明紀 4년조) 또는 道使(《翰苑》 백제조)로 불리웠다. 그런데 지방관이 파견된 성의 수에 대해 본 기사는 200성이라 하고 있지만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250현으로, 《삼국사기》 36 잡지 지리3에는 104현으로 나오고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이 중 본 기사의 200성과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의 250현은 백제 당시의 현의 수의 변동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地理志의 104현은 신라가 새로운 기준에서 지방 통치조직을 편제하면서 축소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註 113
백제 멸망 당시의 호수. 백제의 戶數에 대해서는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 및 《通典》 권181 邊防一 百濟條에는 《戶76萬》으로 나온다. 그러나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으로 나오고 있고,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변한·백제조에는 “百濟全盛之時 十五萬二千三百戶”라 나오고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註 114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다섯개의 도독부. 그 명칭은 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都督府이다. 이 중 중심이 된 것은 웅진도독부였다. 이 5도독부 중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웅진도독부(현재의 충남 공주시)와 덕안도독부(현재의 충남 論山郡 恩津面)이다. 德安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3 전주 德殷郡條에는 “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이라 한 기사 참조. 그러나 백제 멸망 후 곧 각처에서 부흥군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웅진도독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도독부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6에 5도독부는 보이지 않고 대신 1都督府-7州制만 보이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따라서 이 5도독부제는 한갖 圖上의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구당서》 권83 열전 제33 소정방전에는 “百濟悉平 分其地爲六州”라 하여 백제를 평정한 후 그 故地를 6州로 편성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나, 대다수의 사료들이 5都督府를 둔 것으로 되어 있어 6州로의 편성은 취신하기 어렵다.(5도독부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서는 천관우, 「마한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단국대학교, 1979 참조. 이 5도독부 가운데 핵심인 웅진도독부의 조직에 대해서는 이도학, 「웅진도독부의 지배조직과 대일본정책」, 《백산학보》 34, 1987 참조).
註 115
동일한 내용이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凡置五都督府 三七州 二百五十縣”이라 하여 주와 현의 수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5도독부제가 폐지된 후 웅진도독부 하에 두어진 州·縣의 수에 대해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 도독부조에는 1도독부-7주-51현으로 나온다.
註 116
州의 장관을 말한다. 刺史는 漢의 武帝가 部刺史를 두고 詔條를 받들어 郡國을 監察하는 일을 관장하게 함에서 비롯되었다. 魏晉시대에는 要衝地의 州에 두고 都督으로써 刺史를 兼領하게 하였다. 漢·魏·晉대의 刺史에 대해서는 和田 淸, 《支那官制發達史》, 汲古書院, 1932, 65~67 및 98~100쪽 참조. 唐代의 지방 통치조직은 州縣制였는데 주의 장관을 자사라 하였다.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州縣制라고 하는 당의 지방 통치조직을 백제고지에 시행하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 나오는 1도독부-7주-51현제이다.
註 117
定林寺址五層石塔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유인원의 職啣으로 行左驍衛郞將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의 낭장은 좌효위낭장을 말한다. 좌효위에는 左郞將 1명과 右郞將 1명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官品은 분명하지 않으나 五府의 낭장의 관품이 正5品上이어서 그것에 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신당서》 권49 상 백관4 상 16衛條 및 《구당서》 권44 직관3 武官條 참조).
註 118
600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돌아간 후 도성을 지키는 최고 책임을 맡았다.
註 119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도호부 아래에 주와 현을 두어 지방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37군 200성을 37주 250현으로 재편하고 그 장관으로 자사와 현령을 두었으며, 도독·자사·현령은 모두 백제 출신의 유력자들을 발탁하였다. 유인원은 사비성에 주둔하면서 공주·논산·남원·예산군 덕산·영산강 유역 일원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유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분열책을 구사하였다(노중국,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71~76쪽).
註 120
이 구절은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 그대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에는 왕문도는 三年山城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돌연히 병이 생겨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는 차이가 난다.
註 121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참전하였으며, 그 후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註 122
당나라의 문산계(文散階)의 하나이며, 정3품이다.
註 123
중국 당나라 관제의 하나로 관품은 종3품이며, 기계문물(器械文物)과 궁문위둔병(宮門衛屯兵) 등의 임무를 관장하였다.
註 124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 최후의 황제로 자는 원종(元宗)·호종(皓宗)이며 별명은 팽조(彭祖)이다.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정후(烏程侯)에 책봉되었으며, 제3대 황제인 손휴(孫休)의 뒤를 이어 264년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진(晋)왕조가 창업하자, 9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수도를 건업(建業)에서 우창[武昌]으로 일시 이전하였다.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였고 주색에 빠져 폭정을 하였다. 그 때문에 호족세력의 지지를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남하하여 쳐들어온 진(晋)나라 대군에게 항복하였다(280년). 오나라는 4대 58년으로 멸망하였고, 손호는 항복한 후에 귀명후(歸命侯)의 작위를 받았으나 뒤에 서진(西晋)의 수도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註 125
진숙보(陳叔寶, 553~604)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진(陳)의 제5대 황제(재위:582~589)이었다. 자는 원수(元秀)이며, 진(陳)나라의 후주(後主)로 칭해지는 인물로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註 126
창고 등의 일을 관장한 사가사(司稼司)의 장관으로 관품은 종3품이다.
註 127
중국 당나라 고종 때의 무장으로 자는 정칙(正則)이다. 유인원(劉仁願)을 도와 백제 부흥군을 격퇴한 뒤,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다.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