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과 장안성 ( 427년 (음) )

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027027 고구려 20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413~491년이다. 본명은 거련(巨連 혹은 巨璉). 개토왕(開土王)의 원자(元子). 재위 15년인 427년에 평양(平壤)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재위 기간은 북연(北燕), 송(宋), 위(魏) 등 중국세력과 적극적인 조공(朝貢)외교를 통하여 안정을 꾀하였다. 반면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에 대해서는 군사 행동을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특히 475년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개로왕(盖鹵王)을 죽이고 이어 백제를 웅진(熊津)으로 후퇴시켰다. 491년에 98세로 사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 15년(427년)에 평양(平壤)028028 여기서의 평양은 천도가 단행된 이후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부터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까지의 도읍지였던 초기 궁성지인 안학궁성(安鶴宮城)을 말한다. 그 위치는 지금의 평양시 동북쪽 대성산 아래에 위치한 안학궁(安鶴宮)터이다. 이후 평원왕 28년(586년)에 다시 지금의 평양 중심지 일대의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겨갔는데 장안성(長安城) 또한 평양성이라 불리었다(역주 이승호).닫기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평원왕(平原王)029029 고구려 25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59~590년이다. 혹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양성(陽成) 혹은 탕(湯). 양원왕(陽原王)의 장자(長子)이다.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국도(國道)를 장안성(長安城)으로 이도(移都)하였다. 수(隋)가 진(陳)을 멸하고 통일하자 수의 침공에 대비하였다.(고구려본기, 제7 평원왕 및 역주 표영관)닫기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030030 고구려 후기 수도로서 안학궁성(安鶴宮城)에서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재차 옮겨간 곳으로 오늘날 평양시 중심부 일대의 장안성(長安城)을 말한다(역주 이승호).닫기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이 지나 보장왕(寶臧王)031031 고구려 28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642~668년이다. 본명은 장(藏) 혹은 보장(寶藏). 고구려가 멸망한 까닭에 시호(諡號)는 없다. 건무왕(建武王)의 동생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로, 건무왕이 재위 25년에 개소문(蓋蘇文)에게 살해당한 이후 개소문에 의해 즉위하였다. 개소문의 건의로 도교(道敎)를 당(唐)으로부터 수입하였다.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국도가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 9·10 보장왕 상·하 및 역주 표영관).닫기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朱蒙王)으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歷年)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년)에 (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032032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의 위치와 그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크게는 국내성(집안) 동쪽의 지금의 길림성 태자하(東台子)유적으로 보는 견해와 지금의 평양 일대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국원왕 4년(344)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던 사실과 같은 왕 41년(371)에는 평양에서 백제와의 전쟁 중 고국원왕이 전사한 사실을 함께 전하고 있어 이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보이는 평양 동황성(平壤東黃城)은 현 평양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민덕식, 「고국원왕대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시고」, 《차문섭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 1989 | 임기환, 「고구려 평양천도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 137, 2007, 3~4쪽)닫기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고려] 서경(西京)033033 고려시대의 삼경(三京)의 하나로 고구려 멸망 이후 방치된 채로 남아있던 평양지역을 고려시대에 다시 복구하여 서경(西京)으로 삼았다(역주 이승호).닫기의 동쪽 목멱산(木覓山)034034 지금의 평양시 동쪽에 있는 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平壤府) 산천조(山川條)에 따르면, 목멱산은 평양부(平壤府) 동쪽 4리에 있으며, 황성(黃城)의 고지(古址)가 있는데 또는 동성(絧城)이라고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8쪽)닫기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035035 패수(浿水)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서 전한다. 먼저 《사기(史記)》에서는 한(漢)이 요동고새(遼東古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으며,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당시의 패수(浿水) 위치를 가늠케 해주는데, 이 기록에 따라 패수(浿水)를 요하(遼河) 또는 그 지류로 보는 견해, 압록강(鴨綠江)으로 보는 견해, 청천강(淸川江)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패수(浿水)가 평양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수(浿水)는 대동강(大同江)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서 백제 시조가 북으로 패강(浿江)을 경계로 삼았고, 당(唐) 황제가 패강(浿江) 서쪽 포구(西浦)에 정박하여 엽전을 깔고 내려 송악군(松岳郡)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강(浿江)은 예성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8~359쪽) 이처럼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며, 또한 사서마다 각기 다른 강을 패수(浿水)로 지칭하고 있어 논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서(唐書)》의 기록을 인용하여 평양 남쪽에 위치한 강이라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수(浿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역주 이승호).닫기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036036 중국 당대(唐代)에 산동반도(山東半島) 북단에 설치한 주(州)이다(역주 이승호).닫기에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037037 패강(浿江)은 패수(浿水), 즉 여기서는 대동강(大同江)을 말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平壤府) 산천(山川) 대동강조(大同江條)에 따르면, 평양부(平壤府) 동쪽 1리에 있으며,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고 하고 있어, 패수(浿水)가 한편 패강(浿江)이라고도 불리었음을 전한다(역주 이승호).닫기 입구의초도(椒島)038038 오늘날 대동강 입구로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풍해면(豊海面) 서쪽에 있는 섬.(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9쪽)닫기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양제(隋煬帝)039039 수(隋)의 제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605~617년이다. 대운하를 비롯하여 여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계속하여 국력의 쇠퇴와 민란의 발생을 초래하였다. 또한 혼란한 와중에도 현실을 외면하고 사치와 향락 속에 지내다가 끝내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인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근위장(近衛將)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되었다(역주 이승호).닫기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註 027
고구려 20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413~491년이다. 본명은 거련(巨連 혹은 巨璉). 개토왕(開土王)의 원자(元子). 재위 15년인 427년에 평양(平壤)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재위 기간은 북연(北燕), 송(宋), 위(魏) 등 중국세력과 적극적인 조공(朝貢)외교를 통하여 안정을 꾀하였다. 반면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에 대해서는 군사 행동을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특히 475년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개로왕(盖鹵王)을 죽이고 이어 백제를 웅진(熊津)으로 후퇴시켰다. 491년에 98세로 사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및 역주 표영관)
註 028
여기서의 평양은 천도가 단행된 이후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부터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까지의 도읍지였던 초기 궁성지인 안학궁성(安鶴宮城)을 말한다. 그 위치는 지금의 평양시 동북쪽 대성산 아래에 위치한 안학궁(安鶴宮)터이다. 이후 평원왕 28년(586년)에 다시 지금의 평양 중심지 일대의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겨갔는데 장안성(長安城) 또한 평양성이라 불리었다(역주 이승호).
註 029
고구려 25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59~590년이다. 혹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양성(陽成) 혹은 탕(湯). 양원왕(陽原王)의 장자(長子)이다.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국도(國道)를 장안성(長安城)으로 이도(移都)하였다. 수(隋)가 진(陳)을 멸하고 통일하자 수의 침공에 대비하였다.(고구려본기, 제7 평원왕 및 역주 표영관)
註 030
고구려 후기 수도로서 안학궁성(安鶴宮城)에서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재차 옮겨간 곳으로 오늘날 평양시 중심부 일대의 장안성(長安城)을 말한다(역주 이승호).
註 031
고구려 28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642~668년이다. 본명은 장(藏) 혹은 보장(寶藏). 고구려가 멸망한 까닭에 시호(諡號)는 없다. 건무왕(建武王)의 동생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로, 건무왕이 재위 25년에 개소문(蓋蘇文)에게 살해당한 이후 개소문에 의해 즉위하였다. 개소문의 건의로 도교(道敎)를 당(唐)으로부터 수입하였다.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국도가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 9·10 보장왕 상·하 및 역주 표영관).
註 032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의 위치와 그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크게는 국내성(집안) 동쪽의 지금의 길림성 태자하(東台子)유적으로 보는 견해와 지금의 평양 일대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국원왕 4년(344)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던 사실과 같은 왕 41년(371)에는 평양에서 백제와의 전쟁 중 고국원왕이 전사한 사실을 함께 전하고 있어 이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보이는 평양 동황성(平壤東黃城)은 현 평양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민덕식, 「고국원왕대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시고」, 《차문섭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 1989 | 임기환, 「고구려 평양천도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 137, 2007, 3~4쪽)
註 033
고려시대의 삼경(三京)의 하나로 고구려 멸망 이후 방치된 채로 남아있던 평양지역을 고려시대에 다시 복구하여 서경(西京)으로 삼았다(역주 이승호).
註 034
지금의 평양시 동쪽에 있는 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平壤府) 산천조(山川條)에 따르면, 목멱산은 평양부(平壤府) 동쪽 4리에 있으며, 황성(黃城)의 고지(古址)가 있는데 또는 동성(絧城)이라고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8쪽)
註 035
패수(浿水)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서에서 전한다. 먼저 《사기(史記)》에서는 한(漢)이 요동고새(遼東古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으며,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당시의 패수(浿水) 위치를 가늠케 해주는데, 이 기록에 따라 패수(浿水)를 요하(遼河) 또는 그 지류로 보는 견해, 압록강(鴨綠江)으로 보는 견해, 청천강(淸川江)으로 보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패수(浿水)가 평양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수(浿水)는 대동강(大同江)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서 백제 시조가 북으로 패강(浿江)을 경계로 삼았고, 당(唐) 황제가 패강(浿江) 서쪽 포구(西浦)에 정박하여 엽전을 깔고 내려 송악군(松岳郡)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강(浿江)은 예성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8~359쪽) 이처럼 사서에 기록된 패수(浿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며, 또한 사서마다 각기 다른 강을 패수(浿水)로 지칭하고 있어 논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서(唐書)》의 기록을 인용하여 평양 남쪽에 위치한 강이라 하였으니, 여기서의 패수(浿水)는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역주 이승호).
註 036
중국 당대(唐代)에 산동반도(山東半島) 북단에 설치한 주(州)이다(역주 이승호).
註 037
패강(浿江)은 패수(浿水), 즉 여기서는 대동강(大同江)을 말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51 평양부(平壤府) 산천(山川) 대동강조(大同江條)에 따르면, 평양부(平壤府) 동쪽 1리에 있으며,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라고 하고 있어, 패수(浿水)가 한편 패강(浿江)이라고도 불리었음을 전한다(역주 이승호).
註 038
오늘날 대동강 입구로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풍해면(豊海面) 서쪽에 있는 섬.(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9쪽)
註 039
수(隋)의 제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605~617년이다. 대운하를 비롯하여 여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계속하여 국력의 쇠퇴와 민란의 발생을 초래하였다. 또한 혼란한 와중에도 현실을 외면하고 사치와 향락 속에 지내다가 끝내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인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근위장(近衛將)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되었다(역주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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