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23년만인 건초(建初)471471 후한 장제(章帝)의 연호로 76~8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4년 기묘(己卯)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䟽川丘) 속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 신(神)이 명령하기를 “내 뼈를 조심스럽게 묻어라.” 했다. 그 두개골의 둘레는 3척 2촌이고 몸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나 되었다. 치아[齒]는 서로 붙어 마치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이는 소위 천하에 당할 자 없는 역사의 골격이었다.472472 석탈해는 ≪삼국유사≫에서 세 가지의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첫째는 어업 세력으로서의 성격이다. 탈해가 바닷길을 거쳐 신라로 들어왔고, 또 혁거세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지는 해척(海尺)의 어미, 아진의선이 도와주어 중앙정계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야장(冶匠)으로서의 성격으로 경주에 들어와 거짓 계략을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을 때 그의 선조가 대장장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삼는다. 셋째는 무장(武將)으로서의 성격이다. 탈해는 체구가 커서 천하에 적이 없는 장사의 골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탈해는 발달한 철제무기와 도구를 배경으로 동해 일대에서 어업·해상 세력을 장악한 무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천관우, 「삼국의 국가형성」(상) ≪한국학보≫ 2, 1970| 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1980).닫기 [이것을]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 안에 안치하자 신이 다시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영을 내려 그 곳에 모시게 하였다 한편 돌아가신 이후 제27세 문호왕(文虎王)대인 조로(調露)473473 당 고종의 연호로 679~680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경진(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 0680-03-15L0) 밤에 태종474474 신라의 태종 무열왕을 말한다. 무열왕은 661년에 사망하였으므로 본 기록은 문무왕의 오기인 듯하다.닫기의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 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 ‘내가 바로 탈해다.’ 라고 하며 소천구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라 부른다.

註 471
후한 장제(章帝)의 연호로 76~83년에 사용하였다.
註 472
석탈해는 ≪삼국유사≫에서 세 가지의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첫째는 어업 세력으로서의 성격이다. 탈해가 바닷길을 거쳐 신라로 들어왔고, 또 혁거세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지는 해척(海尺)의 어미, 아진의선이 도와주어 중앙정계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야장(冶匠)으로서의 성격으로 경주에 들어와 거짓 계략을 써서 호공의 집을 빼앗을 때 그의 선조가 대장장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삼는다. 셋째는 무장(武將)으로서의 성격이다. 탈해는 체구가 커서 천하에 적이 없는 장사의 골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탈해는 발달한 철제무기와 도구를 배경으로 동해 일대에서 어업·해상 세력을 장악한 무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천관우, 「삼국의 국가형성」(상) ≪한국학보≫ 2, 1970| 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1980).
註 473
당 고종의 연호로 679~680년에 사용하였다.
註 474
신라의 태종 무열왕을 말한다. 무열왕은 661년에 사망하였으므로 본 기록은 문무왕의 오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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