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045045 ≪삼국유사≫에 나오는 ‘東京’은 고려시대에 불렸던 것으로 모두 경주를 지칭한다(村上四男撰, ≪삼국유사고≫, 1994).닫기 안일 호장046046 고려 시대 때 호장은 부호장과 더불어 해당 고을의 향리들을 지휘하며 말단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는데, 70세가 되어 퇴역한 호장은 안일호장이라고 칭하고 직전(職田)의 반을 지급하였다.닫기정효가에 있는 고본 ≪수이전(殊異傳)≫047047 통일신라 후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한문설화집으로 원명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다. 현전하는 ≪수이전≫은 신라의 설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닫기에 실린 원광법사전에 말한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인이다. 처음 중이 되어 불법을 배웠고 나이 30세에 조용히 머물면서 도를 닦을 것을 생각하여 홀로 삼기산(三岐山)048048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산으로 금곡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 원광의 부도가 안치된 금곡사가 있다(정영호, 「원광법사와 삼지산 금곡사」, ≪사총≫ 17·18합, 고려대학교 사학회, 1973, 210쪽).닫기에 살았다.
4년 후 한 비구가 와서 거처와 멀지 않은 곳에 별도로 난야049049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닫기를 만들고 2년을 거하였는데 사람됨이 강맹하고 주술을 잘 하였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경전을 독송하는데 홀연히 신비로운 소리가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잘하는도다. 잘하는도다. 너의 수행이여! 무릇 수행하는 자는 비록 많으나 법대로 하는 자는 드물다. 지금 옆에 사는 비구를 보니 빠르게 주술을 닦지만 얻는 바가 없으니 시끄러운 소리는 남의 정념(靜念)을 괴롭히고, 사는 곳은 내가 지나는 길로 매일 가고 오고 하는데 약간 미운 마음이 생긴다. 법사는 나를 위하여 말해서 옮겨가게 하라. 만약 오래 거하면 내가 문득 죄업을 만들까 두렵다.” 다음날 법사가 가서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비구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재앙이 있을 것이다.” 비구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수행이 지극한 자가 어찌 마귀에 현혹되는 바가 되는가?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걱정하는가?”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내가 말한 일에 대해 비구가 어찌 대답하였는가?” 법사는 신이 노할까 두려워 대답하였다. “아직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다 들었다. 법사는 어찌 말을 더하는가? 단지 잠자코 있어 내가 하는 바를 보아라.” 드디어 작별하고 갔다. 밤중에 우뢰와 벼락 같은 소리가 나서, 다음날 그것을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있었던 난야를 메우고 있었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가 보니 어떠한가?”법사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보니 심히 놀랍고 두렵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내 나이는 거의 삼천년에 가깝고 신통력이 가장 성하니 이 작은 일이 어찌 놀래기에 족하겠는가. 또한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은 도달하지 않는 바가 없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가 오직 이 곳에 거한다고 하더라도 비록 스스로 이로운 행동은 있을 것이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다. 현재 고명(高名)을 드높이지 않으면 미래에 승과(勝果)050050 뛰어난 증과이다. 이는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인데, 최종의 증과는 성불이다.닫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어찌 중국에서 불법을 채득하여 동해에서 몽매한 중생을 이끌지 않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중국에서 도(道)를 배우는 것은 본디 바라는 바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능히 스스로 통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이 중국으로 들어갈 때 하는 바의 계책을 자세히 알려주니 법사는 그 말에 따라 중국으로 갔다. 11년을 머물렀는데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였고 겸하여 유학(儒學)을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庚申)(600년)051051 원광이 귀국한 해를 진평왕 22년 병신으로 보는 것은 ≪삼국사기≫와도 부합된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2년조).닫기 ≪삼국사≫에는 다음해 신유(辛酉)에 왔다고 한다.법사가 장차 지팡이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려 하여 이에 중국 조빙사를 따라 귀국하였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하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이르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그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 사이를 갔다 돌아오니 어떠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히 돌아오기를 마쳤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신에게 계(戒)를 받아 세세생생에 서로 구제하는 약속을 맺었다.” 또한 부탁하여 말하기를 “신의 진용(眞容)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이 말하였다. “법사가 만약 나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하늘 끝을 보라.” 법사가 다음날 그곳을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미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였습니다.” 인하여 이 골짜기를 비장산(臂長山)052052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산으로 삼지산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 고로(古老)들의 설명에 따르면, 비장산(臂長山)이란 이름은 긴 능선의 산줄기가 팔뚝과 같이 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정영호, 「원광법사와 삼지산 금곡사」, ≪사총≫ 17·18합, 고려대학교 사학회, 1973, 202쪽).닫기이라고 불렀다. 신이 말하였다. “비록 이 몸이 있으나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되지 않아 그 고개에 몸을 버릴 것이다.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혼을 전송하라.” 약속한 날짜를 기다려가서 보니 한 검은 늙은 여우가 있었는데 검기가 칠흑 같았다. 단지 헐떡거리다가 숨을 쉬지 않고 조금 뒤에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오니 신라의 왕과 신하가 법사를 공경하며 스승으로 삼았다. 항상 대승경전053053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등이 대표적인데, 원광이 강하였단는 대승경전은 원광이 심취하여 배우기도 하고 강하였다는 ≪열반경≫, ≪성실론≫, ≪반야경≫, ≪섭대승론≫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이기백, 「원광과 그의 사상」, ≪신라사상사연구≫, 1986, 일조각, 106쪽).닫기을 강론하였다. 이때 고구려·백제가 항상 변경을 침입하니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隋)나라에 병사를 청하고자 唐이라고 써야 마땅하다.05405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0년조에도 ‘欲請隋兵 以征高句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문의 수(隋)나라가 옳으며, 이를 당(唐)으로 본 것은 일연의 착각으로 생각된다.닫기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을 것을 부탁하였다.055055 이때 원광은 자신은 비록 승려이나 왕의 명이니 따르겠다고 하면서 걸병표(乞兵表)를 지었는데, 이를 원광과 전제왕권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현신앙(巫覡信仰)을 신봉하는 귀족 세력에 대한 원광의 반항과 귀족 세력을 꺽으려는 전제왕권과의 결합은 육두품 이하의 하급귀족들과의 결합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이기백, 「원광과 그의 사상」,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반면 원광의 걸병표 작성을 원광 자신의 이원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원광은 이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라 하면서도 또한 신라의 신민임을 이유로 명을 받들었다. 이와 같이 원광은 세속법과 불법을 이원적으로 파악하였는데, 이것은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 호국활동과는 달리 항상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세속오계를 가르칠 때도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과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불법의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신종원, 「원광과 진평왕대의 점찰법회」,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166쪽).닫기 황제가 이를 보고 30만 병사로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학(儒學)에도 두루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
향년 84세에 입적하였고 명활성(明活城)056056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명활산 정상부에 자리 잡은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 등과 함께 외적의 침입에 있어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성으로 기능하였다.닫기 서쪽에 장사지냈다.”

註 045
≪삼국유사≫에 나오는 ‘東京’은 고려시대에 불렸던 것으로 모두 경주를 지칭한다(村上四男撰, ≪삼국유사고≫, 1994).
註 046
고려 시대 때 호장은 부호장과 더불어 해당 고을의 향리들을 지휘하며 말단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는데, 70세가 되어 퇴역한 호장은 안일호장이라고 칭하고 직전(職田)의 반을 지급하였다.
註 047
통일신라 후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한문설화집으로 원명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다. 현전하는 ≪수이전≫은 신라의 설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註 048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산으로 금곡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 원광의 부도가 안치된 금곡사가 있다(정영호, 「원광법사와 삼지산 금곡사」, ≪사총≫ 17·18합, 고려대학교 사학회, 1973, 210쪽).
註 049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원을 말한다.
註 050
뛰어난 증과이다. 이는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인데, 최종의 증과는 성불이다.
註 051
원광이 귀국한 해를 진평왕 22년 병신으로 보는 것은 ≪삼국사기≫와도 부합된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2년조).
註 052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산으로 삼지산이라고도 한다. 이 지역 고로(古老)들의 설명에 따르면, 비장산(臂長山)이란 이름은 긴 능선의 산줄기가 팔뚝과 같이 길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정영호, 「원광법사와 삼지산 금곡사」, ≪사총≫ 17·18합, 고려대학교 사학회, 1973, 202쪽).
註 053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등이 대표적인데, 원광이 강하였단는 대승경전은 원광이 심취하여 배우기도 하고 강하였다는 ≪열반경≫, ≪성실론≫, ≪반야경≫, ≪섭대승론≫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이기백, 「원광과 그의 사상」, ≪신라사상사연구≫, 1986, 일조각, 106쪽).
註 05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0년조에도 ‘欲請隋兵 以征高句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문의 수(隋)나라가 옳으며, 이를 당(唐)으로 본 것은 일연의 착각으로 생각된다.
註 055
이때 원광은 자신은 비록 승려이나 왕의 명이니 따르겠다고 하면서 걸병표(乞兵表)를 지었는데, 이를 원광과 전제왕권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현신앙(巫覡信仰)을 신봉하는 귀족 세력에 대한 원광의 반항과 귀족 세력을 꺽으려는 전제왕권과의 결합은 육두품 이하의 하급귀족들과의 결합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이기백, 「원광과 그의 사상」,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반면 원광의 걸병표 작성을 원광 자신의 이원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원광은 이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라 하면서도 또한 신라의 신민임을 이유로 명을 받들었다. 이와 같이 원광은 세속법과 불법을 이원적으로 파악하였는데, 이것은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 호국활동과는 달리 항상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세속오계를 가르칠 때도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과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불법의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신종원, 「원광과 진평왕대의 점찰법회」,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166쪽).
註 056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명활산 정상부에 자리 잡은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 등과 함께 외적의 침입에 있어서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성으로 기능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