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4】 개항 전후로부터 현재까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  
【14】 개항 전후로부터 현재까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서
보고서
조선 -

1883년 8월 6일



역사가들은 조선을 중국 제국에 병합하는 종속관계를 12세기로 회상합니다. 그 관계는 처음부터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과 황제에게 조선왕의 임명을 요청하는 의무로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은 별개의 나라를 이루어 왔고, 경계를 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중립지대에 의해 중국과 분리되어 왔습니다. 그 후에 이 보유 영토는 점점 인구가 늘어 압록강이 양국간의 유일한 경계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지배력을 근동 시베리아로 확장하자마자 인접한 조선 반도에 관심을 기울인 첫 번째 유럽 국가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러시아가 아무르강 연안에 매년 증가하는 조선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데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날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영토 내에서 설치 가능했던 여느 항구들보다 더 나은 항구들을 언젠가 조선에서 찾으려는 바램에서 촉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침투 도발을 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의 영향력이 조선 영토를 바짝 죄어오기 □□□.
다른 유럽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1866년까지 조선 정부와 진지한 외교 관계를 맺은 흔적이 없고, 그 시기에 프랑스 측(로즈 제독 시대)과 미국측 상선(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두 가지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 이 시도들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원정은 서양 열강과 중국 제국 및 일본 제국 사이에 이미 체결한 것과 동일한 조약을 조선에 강요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미국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공동원정을 제의한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1876년까지 중국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열강도 조선 정부와 명확하고도 정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는데 일본이 첫 번째로 교류를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1876년 2월 26일 일본은 서울에 미카도 정권 공사관의 설치와 부산항을 포함한 3개 항구의 개항을 규정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통상협약 6개월 후에 이 합의를 완결했는데 일본인들은 조선 영토 여러 곳에서 통상을 하고, 장기임대로 토지를 빌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 성격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특별 조항을 통해 도쿄 정부는 일본군대의 깃발을 달고 있는 난파선의 승무원들에게 선처할 것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일본 영사관들은 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을 맡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규정을 조일조약에 넣은 것은, 미카도 정권의 생각 속에 자신들을 조선에서의 유럽의 개척자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일본은 1878년 지방당국에 체포된 카톨릭 선교사를 구하기 위한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등장이 중국인들의 감정을 일으켰고, 베이징 궁정은 서울에 주재하는 그의 이웃을 추월하려고 서둘렀습니다. 즉 그 행동은 도쿄 정부의 행동보다 더욱 신속했고, 리델 주교를 무사히 국경으로 되돌아오게 한 것이 중국 공안이었습니다.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이 1878년 5월 11일 리델 주교에 관해 총리아문에게 건넨 서신에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사실을 참고로 유념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건 이후 중국의 영향력은 서울에서 이내 확고해졌으며, 아마도 중국의 은밀한 활동 탓에, 조약의 실행을 얻어내는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카도 정부는 그에게 부여된 권리를 남용하려 하지 않고 극도의 조심성으로 냉철함을 유지했습니다. 우선 부산이라는 유일한 항구의 개항과 영사관의 설치에 만족했습니다. 조선인들은 □□□ 사실 국제거래의 진정한 금지를 이루는 15%~20%의 내국세를 제정하면서도, 자신들이 동의한 규정을 파기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은 새로운 협상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이때 일본이 서구열강 특히 미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원하는 다양한 성격의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그 대가로 후일 이 나라들과 조선 사이의 중재역할을 제의했습니다. 도쿄 내각에 의해 계속된 협상은 1880년 1월까지 연장되었고, 원산진과 경기도 두 곳의 새로운 항구가 개항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이 미국에 행한 일들이 수용되었으며, 슈펠트 제독은 부산에 가서, 조선 궁정과 교류에 들어가기 위해 일본 당국의 협력을 요청 했습니다. 그러나 유용한 양도권을 모두 얻은 미카도 정부는 더 이상 서구 열강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서 다른 모든 국가들을 배제하고, 서울에서 합의된 규정의 특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슈펠트 제독의 바램에 동참 하기는커녕 미카도 정부는 그를 설득하여 그의 계획을 단념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얼마간 미카도 정부는 그의 독점적인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협상했고, 1882년 제국 행정부와 관세를 제정하는 책임을 맡은 조선 사절단을 도쿄에 파견해도 좋다는 허가를 얻어냈습니다.
만일 중국 정부가 도쿄 내각이 빠져 나온 그 역할을 서둘러 파악하지 않았다면 미카도 정부 정책의 급변이 미국 교섭위원을 곤경에 처하게 했을 것입니다. 베이징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쯔리 총독이 조선 궁정에 보낸 서신에서 처음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리홍장은 조선 영토를 개방할 것을 조선 궁정에 권고했는데, 이는 러시아 혹은 일본의 탐욕에 대항하는 수비대를 만들려는 것이며 특히 기독교의 전교 및 아편 수입과 관련하여 무력으로 강요될 수 있는 조건보다 더 나은 조건들을 합의하에 얻어내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서울 궁정과 유럽 열강 사이의 중재 역할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리홍장의 의도는 베이징주재 유럽 대표들과 총리아문의 의도와 같았습니다. 쯔리 총독의 첫 의뢰국인 미국은 서울 궁정 측의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마젠창의 협력과 후원 아래, 슈펠트 제독은 1882년 5월에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협정에 대한 소식은 다른 열강들에게 미국에 의한 개방노선을 따르자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런던으로부터 온 지시에 의하여, 영국인 윌리스 제독이 서울을 방문했고, 슈펠트 조약과 유사한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 장관은 영국 및 미국과 같은 유리한 점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조약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장래 협약의 기초를 세울 목적으로 텐진주재 프랑스 영사 딜롱 씨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종교적 □□□으로 인해 우리가 처한 특별한 상황에서 오는 몇몇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딜롱 씨는 리홍장의 중재와 마 정부위원의 협력을 얻어냈습니다. 즉 조약에 서명하지도 않고, 어떤 식으로든 프랑스 정부를 끌어들이지도 않고서 그는 열강이 앞서 체결한 것과 같은 조약을 프랑스에 약속하는 서면 계약을 서울발로 보고했습니다. 부레 씨는 결정적인 협약을 체결하러 조선으로 가는데 필요한 지침들을 파리에 요청하는 것을 유보했습니다. 딜롱 씨의 뒤를 이어 독일 공사가 몸소 서울을 방문하여, 미미한 수정을 제외하고는 미국 조약과 유사한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외무부에 의해 규정된 □□□ 태도와 부레 씨의 신중함이 정당한 것이었음이 곧 그 사건들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1882년 7월 말, 서울의 폭동 속에서 일본 사절은 하층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정박중인 영국 초계정 부근에서 은신해야만 했습니다. 이 소식에, 도쿄 정부는 이 모욕을 앙갚음하려고 2척의 군함과 1,500명의 군인을 파견했습니다. 베이징 궁정에서도 그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4,000명의 군사를 파견했습니다.
중국 군대만이 서울시내로 들어가 실각했던 왕을 복귀시키고, 음모의 우두머리들을 진압했습니다. 사실 중국 정부는, 미카도 정권에 의해 요구된 배상과 관련하여, 일본이 조선 정부와 직접 담판하도록 내버려두었으나, 그곳에 자리를 잡고서, 배상의 실마리를 보장했으며, 1882년 9월 베이징 관영신문에 게재된 유럽 공사관들에게 □□□ 포고문에서 중국 황제에 대해 조선이 두 번째 서열의 조공국으로 좁은 의미의 종속관계임을 인정했습니다. 리홍장에게 매수된 두 명의 관리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독일 공사관의 옛 통역관)는 서울 궁정의 고문으로 앉아 있습니다. 결국 서구 열강의 통상에는 15%~20%의 출입국세를 부과하는 반면, 중국의 경우엔 5%로 제한하는데 이러한 통상규정은 중국에 예외적인 것입니다.
일본 사절에 대한 테러는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킵니다. 런던과 베를린의 대사관 사무국은 그들의 파견 사절이 체결한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습니다. 오직 미국 정부만이 슈펠트 조약을 받아들였고, 조선왕에게 대표 한 명을 즉각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서울 궁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중국의 지배 아래로 다시 들어가는 순간에 그렇게 서울 궁정의 독립을 인정한 것입니다.

현재의 구제적인 상황
중국:중국의 패권은 서울에서 명백하게 발휘합니다 ; 중국은 자국의 무역을 위한 특별규정들을 조선에 강요했는데, 중국은 이 규정들이 최혜국 대우의 기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거기서 오는 독점적 이익을 확보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일본으로서는 몇몇 항구의 개항과 넓게 경계지어진 지역에서 상인들이 여행할 권리, 그리고 만약의 경우 자국민들을 위해 영사관원들이 개입할 모든 편리함을 얻어냈습니다. 즉 1882년의 협약은 조선왕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러시아는 조선 정부와 통상협약을 체결할 생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경협약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슈펠트 조약이 비준되었습니다. 미국의 한 대표가 조선 궁정에 주재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독일:런던과 베를린 내각은 윌리스 제독과 브란트 씨에 의해 서명된 조약 청훈의 비준을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베이징주재 공사 해리 파크스 경이 정부에 의해서 협상 재개의 임무를 맡으리라고 단언합니다. 게다가 그는 비스마르크 공의 신속한 요청에 따라 독일을 위해 같은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프랑스 정부는 조선문제에 있어서 계약의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조선 정부가 서구열강에게 한 것과 동일한 조약을 보장하는 서면의 약속을 마음대로 행사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행동을 서두르는 것이 이로운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서울의 최근 사건들은 중국 정부의 우세를 아주 명백하게 드러냈습니다. 1882년 9월 27일 제국 포고문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명확히 시인했는데 조선 문제의 해결이 베이징에서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고 조선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때가 온다면, 우리는 서울 궁정과 특별한 조치의 협상을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될 것이며, 텐진조약 조항의 적용을 조선의 지방에서 보장할 책임과 그 임무가 귀속되는 중국 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우리 목적이 달성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봉신국, 즉 두 번째 서열의 조공국이 종주국에서 앞서 받아들인 규정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최근 정보에 따르면 만일 협상이 직접 그 나라와 개시되었다면 틀림없이 그러할 것입니다). 한편 만일 우리가 1860년 프랑스·중국조약보다 상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리 이해관계에 덜 우호적인 협약을 조선과 체결하기로 한다면, 베이징 내각은 이것을 구실 삼아 스스로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는 협정들에 대한 수정까지도 갑자기 들고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