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등을 대장군·총관에 임명하다 ( 661년 07월17일(음) )

〔원년(661)〕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001001 대장군(大將軍):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신라에 대장군, 상장군(上將軍), 하장군(下將軍)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중대 이후에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을 크게 대장군, 상장군, 하장군으로 구분하였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이 기록에서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았다는 것은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편성한 신라 행군군단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는 의미이지, 대장군, 상장군, 하장군 가운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는 의미로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6~7세기 신라군 1개 전쟁 수행 조직 지휘부의 기본구조가 (정)장군-부장군이며, 복수의 조직을 연합 편성할 때에는 각 조직의 지휘부 위에 대장군이 배치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최상기, 2020, 「新羅 將軍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80~185쪽).닫기으로, 인문·진주(眞珠)002002 진주(眞珠): 김진주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8년(639) 2월조 참조.닫기·흠돌(欽突)003003 흠돌(欽突): 김흠돌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사료에 등장하며, 문무왕 8년(668)에는 대아찬으로서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의 딸은 신문왕(神文王)의 비(妃) 김씨로서, 태자 시절에 혼인시켰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아버지의 난에 연좌되어 출궁(出宮)되었다. 김흠돌은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謀叛)하였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흠돌이 모반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8 신라본기제8 신문왕 원년 8월조 참조.닫기을 대당004004 대당(大幢): 대당은 6정(停) 가운데 왕경에 주둔한 군단을 가리킨다. 대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참조.닫기장군(大幢將軍)005005 대당장군(大幢將軍): 대당의 지휘관을 말한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으로, 천존(天存)006006 천존(天存): 천존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649) 8월조 참조.닫기·죽지(竹旨)007007 죽지(竹旨): 죽지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649) 8월조 참조.닫기·천품(天品)008008 천품(天品):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가,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대아찬으로서 다시 귀당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귀당009009 귀당(貴幢):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斯多含)조에 신라가 진흥왕(眞興王) 23년(562) 대가야를 정벌할 때에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통해 신라에서 진흥왕 23년(562) 이전에 귀당을 창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귀당이란 명칭에 주목하여, 진흥왕 23년 이전에 신라 수도에 사는 6부 지배자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왕경에 주둔한 귀당이란 군단을 편성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 132, 31~32쪽). 한편, 이 기록 이외에 본서 권47 열전제7 눌최(訥催)조에 진평왕 46년(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속함성(速含城: 경상남도 함양) 등을 공격하자,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출병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문무왕 2년(662) 정월 기록에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물리쳤다고 전한다. 본서 권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문무왕 13년(673)에 6정의 하나인 상주정(上州停)을 귀당으로 고쳤다고 전하나, 문무왕 13년 이전 기록에 귀당에 대한 정보가 여럿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무관조의 기록과 본서 권제47 열전제7 취도(驟徒)조에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고구려(보덕국)의 남은 적이 보덕성(報德城: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읍)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핍실(逼實)이 귀당제감(貴幢弟監)에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을 종합하여 보건대, 문무왕 13년(673)에 당시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하고 있던 정군단인 상주정과 귀당을 합친 이후에 그것을 귀당이라고 불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 13년에 상주정을 귀당이라고 고쳤다고 잘못 기록한 것은 왕경에 주둔한 귀당을 일선으로 옮겨 상주정과 합친 이후, 그 정군단(停軍團)을 귀당이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상주정과 왕경에 주둔하였던 귀당을 합친 이후, 귀당의 지휘관인 장군의 정원은 4명이었고, 진골로서 관직이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 상대등)까지인 자를 임용하였으며, 장군 예하에는 대관대감(大官大監),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화척(火尺)이란 군관과 더불어 군사당주·감(軍師幢主·監), 대장척당주·감(大匠尺幢·監), 보기당주·보기감(步騎幢主·步騎監),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등의 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닫기총관(貴幢摠管)010010 총관(摠管): 기존에 출정군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는데, 문무왕 원년(661)부터 총관(摠管)으로 임명되기 시작한다.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下) 외관(外官)조에 따르면 지방관인 군주(軍主)가 문무왕 원년에 총관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지만,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에 보이는 총관은 대장군(大將軍)이나 대당총관(大幢摠管) 및 낭당총관(郎幢摠管), 계금대감(罽衿大監) 등과 함께 임명되고 있어, 주(州)를 관할하는 지방관으로서 군주에서 개칭된 총관과는 성격이 다르다. 당(唐)나라의 행군제도(行軍制度)에 속한 전시의 임시직 행군총관(行軍摠管)에서 영향을 받은 출정군의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으로 보인다(최상기, 77~81쪽). 지방관으로서의 총관과 군단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이 병존하고 있었던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보아, 문무왕 원년 7월 17일의 명단 중에서 상주·하주·남천주·수약주·하서주총관 등은 주(州)의 지방관으로서의 총관이며, 대당·귀당·서당·낭당총관 등은 군단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이라고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韓準洙, 89~92쪽). 다만 신라측에서 총관으로 임명한 첫 사례로 확인되는 것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1월 22일조에 백제에서 항복한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 및 달솔(達率) 자간(自簡) 등이다.
〈참고문헌〉
최상기, 2015, 「6~7세기 신라 장군(將軍)의 역할과 운용」, 『역사와 현실』 97
韓準洙,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닫기
으로, 품일(品日)011011 품일(品日): 김품일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21일조 참조.닫기·충상(忠常)012012 충상(忠常): 충상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9일조 참조.닫기·의복(義服)013013 의복(義服): 의복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을 상주014014 상주(上州): 상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총관(上州摠管)015015 상주총관(上州摠管): 상주총관은 상주지역에 주둔한 6정군단의 하나로서 상주정(上州停)이라고도 부른 일선정(一善停)을 중심으로 하여 편성한 행군군단의 지휘관을 가리킨다. 주(州)를 단위로 편성된 행군군단을 다른 기록에서는 주군(州軍) 또는 주병(州兵)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상주군 또는 상주병에는 일선정의 군사뿐만 아니라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외여갑당(外餘甲幢: 외법당外法幢)도 포함되었으며, 6정군단의 사령관인 군주 또는 총관이 행군군단을 지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선덕왕 때부터 전쟁을 위해 출정(出征)하는 행군군단을 편성한 경우에는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인 군주(軍主) 또는 총관을 배제하고 임시로 고위 관직자를 복수로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州)의 성격 변화와 군주(軍主)」, 『역사와 현실』 40). 하주총관(下州摠管)과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도 상주총관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닫기으로, 진흠(眞欽)016016 진흠(眞欽): 진흠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중신(衆臣)017017 중신(衆臣):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하주총관으로 임명되고,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품일(品日)·문충(文忠)·(義官)·천관(天官) 등과 함께 백제 고지(故地) 공격에 참전하였다가, 진영에서 퇴각한 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얻었지만 사면을 받아 면직되었다.닫기·자간(自簡)018018 자간(自簡):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1월 22일조에 백제에서 항복한 이들을 임용하는 중에 달솔(達率) 자간(自簡)에게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주고 총관의 관직에 충원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백제인으로서 당시 함께 총관에 충원되었던 충상(忠常)도 이때 상주총관이 된다.닫기을 하주019019 하주(下州): 하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총관(下州摠管)으로, 군관(軍官)020020 군관(軍官): 김군관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남천주총관(南川州總管)이 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여, 문무왕 4년(664) 정월에는 아찬으로서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에 임명되고, 7월에는 인문(仁問)·품일(品日)·문영(文穎) 등과 함께 고구려 돌사성을 공격하였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잡찬(迊湌)으로서 한성주(漢城州) 행군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했으며,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백제 고지(故地)를 공격하여 열두 성(城)을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다. 문무왕 20년(680)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문왕(神文王) 원년(681) 8월 28일에 김흠돌의 역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자(嫡子) 한 명과 함께 자진(自盡)의 명을 받아 사망하였다. 처형 때의 교서(敎書)에는 관직과 관등이 병부령 이찬으로 되어 있어, 당시 상대등과 병부령을 겸직하였던 것인지, 상대등에서 해임되고 병부령의 관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김흠돌의 모반에 연루되었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던 군관의 태도를 ‘골품귀족의 관료화’ 사례로 간주한 견해도 있다(박명호, 2008, 「신문왕의 敎書를 통해 본 金軍官의 정치적 성격 -骨品貴族의 官僚化 시각에서-」, 『韓國史學報』 31).닫기·수세(藪世)021021 수세(藪世):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 9월 21일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적(李勣)이 보장왕(寶藏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大臣) 등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갈 때 따라갔다. 문무왕 10년(670)에 백제의 무언가를 취하여 신라에 반하는 행동을 하려다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김진주(金眞誅)에게 주살당하였는데, 본서의 해당 부분에 결락이 있어 주살 직전 그의 마지막 행적은 정확하지 않다.닫기·고순(高純)022022 고순(高純): 고순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군관·수세와 더불어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에 임명된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남천주023023 남천주(南川州): 남천주는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한다. 남천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9년(568) 10월조 참조.닫기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024024 술실(述實):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달관·문영과 더불어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달관(達官)025025 달관(達官):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술실·문영과 더불어 수약주총관(首若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문무왕 10년(670) 7월 백제 고지(故地)의 공격에 참여하였으나, 중신(衆臣)·의관(義官)·흥원(興元) 등과 함께 진영에서 퇴각한 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얻었지만 사면을 받아 면직되었다.닫기·문영(文穎)026026 문영(文穎): 김문영을 말한다. 문영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 7월 9일조 참조.닫기을 수약주027027 수약주(首若州): 수약주를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에 해당한다. 선덕왕 6년(637)에 신주의 영역 가운데 강원도 영서지역을 떼어내어 우수(강원도 춘천)를 주치(州治)로 하는 우수주를 설치하였고, 나머지 신주의 영역을 망라하여 한산주(漢山州)라고 불렀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州)의 성격 변화와 군주(軍主)」, 『역사와 현실』 40, 63~66쪽). 문무왕 8년(668) 봄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북한 강원도 안변)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문무왕 8년에 주치를 우수에서 비열홀로 옮겨 비열홀주를 설치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한다. 신라는 이후 문무왕 13년(673)에 비열홀정(比列忽停)을 혁파하고 우수정(牛首停)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치(州治) 역시 비열홀에서 우수로 옮기면서 우수주(수약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본서 권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3년(673) 8월 기록에 수약주 주양성(走壤城: 강원도 춘천시 봉의산고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우수주를 삭주(朔州)로 고쳤다.닫기총관(首若州摠管)으로, 문훈(文訓)028028 문훈(文訓):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진순(眞純)과 더불어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이 되었다가, 이듬해(662) 정월에는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조에 따르면, 이 해 12월에 중시 문훈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668) 4월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단 편성 가운데 잡찬(迊飡) 문훈(文訓)이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임명되었고, 문무왕 15년(675) 9월에는 숙위(宿衛) 학생(學生) 김풍훈(金風訓)을 향도(鄕導)로 삼아 쳐들어 온 설인귀(薛仁貴)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찬으로 중시에 임명되었던 문훈은 나이가 많았고, 또한 이미 사망하였다고 전하므로, 668년 이후 잡찬의 관등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문훈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크다.닫기·진순(眞純)029029 진순(眞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문훈(文訓)과 더불어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이 되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이찬으로서 경정(京停) 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진순(陳純)과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조에서 진순(陳純)의 순(純)은 춘(春)으로도 되어 있다고 주석을 달았는데, 진춘(陳春)은 진덕왕(眞德王) 3년(649) 8월에 김유신·죽지(竹旨)·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한 장군(將軍)으로 등장한다.닫기을 하서주030030 하서주(河西州):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한다. 하서주, 즉 하슬라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5 신라본기제5 선덕왕 8년(639) 2월조 참조.닫기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031031 진복(眞福):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서당총관(誓幢摠管)이 되었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문훈(文訓)의 뒤를 이어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고구려 정벌을 위해 편성한 행군군단 중 김인문·김흠순·김천존·김문충·김지경·김양도·김개원·김흠돌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에 임명되었다고 나오는데, 관등이 잡찬(迊飡)으로 나와 3년 전보다 오히려 한 등급 낮다고 전한다. 기록에 착오가 있는 것인지, 중간에 관등의 강등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신문왕(神文王) 원년(681) 8월에는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다.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 나오는, 즉 661년 12월 10일에 부장군(副將軍)으로서 김유신과 함께 군량미를 운송하였던 진복(眞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닫기을 서당032032 서당(誓幢): 서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닫기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義光)033033 의광(義光): 의광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닫기을 낭당034034 낭당(郎幢): 낭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닫기총관(郎幢摠管)으로, 위지(慰知)035035 위지(慰知): 위지는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계금대감(罽衿大監)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를 계금036036 계금(罽衿): 계금당(罽衿幢)을 말한다. 계금당은 태종무열왕 원년(654)에 창설된 기병군단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11월 22일조에 계금졸(罽衿卒) 선복(宣福)이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할 때에 공을 세워 급찬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전하는데,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 후 백제 잔적을 토벌할 때에 계금당이 출전하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본서 권6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조에 고구려 정벌을 위해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 아찬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총관(罽衿幢總管)에 임명하였다고 전하여서 계금당이 행군군단의 일원으로 편성되어 자주 전선에 투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본서 권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 계금당조에 계금당에 기병을 담당하는 제감(弟監)과 화척(火尺)이란 군관이 배속되어 있고, 그 예하의 지원부대로서 착금기당(著衿騎幢) 6개를 두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계금당이 기병 위주로 편성된 군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무열왕 7년 11월에 계금졸(罽衿卒) 선복이 공을 세워 급찬의 관등을 수여받은 사실에 주목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진골과 두품신분의 자제 가운데 기마술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여 계금당을 편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35~36쪽). 한편 계금당 소속 군관들이 주로 마병(馬兵)과 기병(騎兵)을 통솔하고 있어 기본적으로 국왕 직속의 기병 군단으로서 보병이 일부 배속되었으며, 이후 중앙의 계금당과 한산주(漢山州) 계당(罽幢)이 분할 배치되고, 우수주(牛首州) 계당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이계당(二罽幢)이 완성되었다고 한다(韓準洙, 92~98쪽 및 104~105쪽). 계금당에는 대대감(隊大監) 1명, 제감(弟監) 1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少監) 6명, 화척(火尺) 7명, 착금기당주(着衿騎幢主) 6명, 착금감(着衿監) 6명 등이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韓準洙,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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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罽衿大監)037037 계금대감(罽衿大監): 본서 권제40 잡지9 직관하(下) 무관조에는 계금당에 편제된 대감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계금대감은 계금당의 대대감(隊大監)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무관조에 보이지 않는 계금당총관이나 계금졸(罽衿卒) 또한 본서 신라본기에서는 확인되고 있어, 계금대감도 그와 같은 사례로 보아 전시(戰時)에 계금당의 조직이 임시로 확대되었다고 간주한 견해도 있다(한준수,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97쪽).닫기으로 삼았다.038038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衿大監)으로 삼았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 고구려 정벌을 위해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다른 군단에 장군 또는 총관(總管)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에 반해, 계금당의 경우는 다른 지휘관보다 한 등급 낮은 대감(大監)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닫기

註 001
대장군(大將軍):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신라에 대장군, 상장군(上將軍), 하장군(下將軍)이 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중대 이후에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을 크게 대장군, 상장군, 하장군으로 구분하였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이 기록에서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았다는 것은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편성한 신라 행군군단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는 의미이지, 대장군, 상장군, 하장군 가운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는 의미로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6~7세기 신라군 1개 전쟁 수행 조직 지휘부의 기본구조가 (정)장군-부장군이며, 복수의 조직을 연합 편성할 때에는 각 조직의 지휘부 위에 대장군이 배치되었다고 이해한 견해가 있다(최상기, 2020, 「新羅 將軍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80~185쪽).
註 002
진주(眞珠): 김진주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8년(639) 2월조 참조.
註 003
흠돌(欽突): 김흠돌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사료에 등장하며, 문무왕 8년(668)에는 대아찬으로서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의 딸은 신문왕(神文王)의 비(妃) 김씨로서, 태자 시절에 혼인시켰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아버지의 난에 연좌되어 출궁(出宮)되었다. 김흠돌은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모반(謀叛)하였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흠돌이 모반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8 신라본기제8 신문왕 원년 8월조 참조.
註 004
대당(大幢): 대당은 6정(停) 가운데 왕경에 주둔한 군단을 가리킨다. 대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참조.
註 005
대당장군(大幢將軍): 대당의 지휘관을 말한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06
천존(天存): 천존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649) 8월조 참조.
註 007
죽지(竹旨): 죽지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649) 8월조 참조.
註 008
천품(天品):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가,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대아찬으로서 다시 귀당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09
귀당(貴幢):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斯多含)조에 신라가 진흥왕(眞興王) 23년(562) 대가야를 정벌할 때에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통해 신라에서 진흥왕 23년(562) 이전에 귀당을 창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귀당이란 명칭에 주목하여, 진흥왕 23년 이전에 신라 수도에 사는 6부 지배자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왕경에 주둔한 귀당이란 군단을 편성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 132, 31~32쪽). 한편, 이 기록 이외에 본서 권47 열전제7 눌최(訥催)조에 진평왕 46년(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속함성(速含城: 경상남도 함양) 등을 공격하자,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출병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문무왕 2년(662) 정월 기록에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물리쳤다고 전한다. 본서 권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문무왕 13년(673)에 6정의 하나인 상주정(上州停)을 귀당으로 고쳤다고 전하나, 문무왕 13년 이전 기록에 귀당에 대한 정보가 여럿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무관조의 기록과 본서 권제47 열전제7 취도(驟徒)조에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고구려(보덕국)의 남은 적이 보덕성(報德城: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읍)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핍실(逼實)이 귀당제감(貴幢弟監)에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을 종합하여 보건대, 문무왕 13년(673)에 당시 일선(一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주둔하고 있던 정군단인 상주정과 귀당을 합친 이후에 그것을 귀당이라고 불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 13년에 상주정을 귀당이라고 고쳤다고 잘못 기록한 것은 왕경에 주둔한 귀당을 일선으로 옮겨 상주정과 합친 이후, 그 정군단(停軍團)을 귀당이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상주정과 왕경에 주둔하였던 귀당을 합친 이후, 귀당의 지휘관인 장군의 정원은 4명이었고, 진골로서 관직이 상당(上堂)에서 상신(上臣: 상대등)까지인 자를 임용하였으며, 장군 예하에는 대관대감(大官大監),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화척(火尺)이란 군관과 더불어 군사당주·감(軍師幢主·監), 대장척당주·감(大匠尺幢·監), 보기당주·보기감(步騎幢主·步騎監),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등의 군관이 배속되어 있었다.
註 010
총관(摠管): 기존에 출정군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는데, 문무왕 원년(661)부터 총관(摠管)으로 임명되기 시작한다. 본서 권제40 잡지제9 직관하(下) 외관(外官)조에 따르면 지방관인 군주(軍主)가 문무왕 원년에 총관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지만,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에 보이는 총관은 대장군(大將軍)이나 대당총관(大幢摠管) 및 낭당총관(郎幢摠管), 계금대감(罽衿大監) 등과 함께 임명되고 있어, 주(州)를 관할하는 지방관으로서 군주에서 개칭된 총관과는 성격이 다르다. 당(唐)나라의 행군제도(行軍制度)에 속한 전시의 임시직 행군총관(行軍摠管)에서 영향을 받은 출정군의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으로 보인다(최상기, 77~81쪽). 지방관으로서의 총관과 군단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이 병존하고 있었던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보아, 문무왕 원년 7월 17일의 명단 중에서 상주·하주·남천주·수약주·하서주총관 등은 주(州)의 지방관으로서의 총관이며, 대당·귀당·서당·낭당총관 등은 군단 지휘관으로서의 총관이라고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韓準洙, 89~92쪽). 다만 신라측에서 총관으로 임명한 첫 사례로 확인되는 것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1월 22일조에 백제에서 항복한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 및 달솔(達率) 자간(自簡) 등이다.
〈참고문헌〉
최상기, 2015, 「6~7세기 신라 장군(將軍)의 역할과 운용」, 『역사와 현실』 97
韓準洙,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註 011
품일(品日): 김품일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21일조 참조.
註 012
충상(忠常): 충상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9일조 참조.
註 013
의복(義服): 의복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14
상주(上州): 상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15
상주총관(上州摠管): 상주총관은 상주지역에 주둔한 6정군단의 하나로서 상주정(上州停)이라고도 부른 일선정(一善停)을 중심으로 하여 편성한 행군군단의 지휘관을 가리킨다. 주(州)를 단위로 편성된 행군군단을 다른 기록에서는 주군(州軍) 또는 주병(州兵)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상주군 또는 상주병에는 일선정의 군사뿐만 아니라 군(郡)을 단위로 편성된 외여갑당(外餘甲幢: 외법당外法幢)도 포함되었으며, 6정군단의 사령관인 군주 또는 총관이 행군군단을 지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선덕왕 때부터 전쟁을 위해 출정(出征)하는 행군군단을 편성한 경우에는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인 군주(軍主) 또는 총관을 배제하고 임시로 고위 관직자를 복수로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州)의 성격 변화와 군주(軍主)」, 『역사와 현실』 40). 하주총관(下州摠管)과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도 상주총관과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註 016
진흠(眞欽): 진흠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17
중신(衆臣):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하주총관으로 임명되고,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품일(品日)·문충(文忠)·(義官)·천관(天官) 등과 함께 백제 고지(故地) 공격에 참전하였다가, 진영에서 퇴각한 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얻었지만 사면을 받아 면직되었다.
註 018
자간(自簡):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1월 22일조에 백제에서 항복한 이들을 임용하는 중에 달솔(達率) 자간(自簡)에게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주고 총관의 관직에 충원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백제인으로서 당시 함께 총관에 충원되었던 충상(忠常)도 이때 상주총관이 된다.
註 019
하주(下州): 하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20
군관(軍官): 김군관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남천주총관(南川州總管)이 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여, 문무왕 4년(664) 정월에는 아찬으로서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에 임명되고, 7월에는 인문(仁問)·품일(品日)·문영(文穎) 등과 함께 고구려 돌사성을 공격하였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는 잡찬(迊湌)으로서 한성주(漢城州) 행군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했으며,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백제 고지(故地)를 공격하여 열두 성(城)을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다. 문무왕 20년(680)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문왕(神文王) 원년(681) 8월 28일에 김흠돌의 역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자(嫡子) 한 명과 함께 자진(自盡)의 명을 받아 사망하였다. 처형 때의 교서(敎書)에는 관직과 관등이 병부령 이찬으로 되어 있어, 당시 상대등과 병부령을 겸직하였던 것인지, 상대등에서 해임되고 병부령의 관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김흠돌의 모반에 연루되었지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던 군관의 태도를 ‘골품귀족의 관료화’ 사례로 간주한 견해도 있다(박명호, 2008, 「신문왕의 敎書를 통해 본 金軍官의 정치적 성격 -骨品貴族의 官僚化 시각에서-」, 『韓國史學報』 31).
註 021
수세(藪世):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 9월 21일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적(李勣)이 보장왕(寶藏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大臣) 등 20여 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갈 때 따라갔다. 문무왕 10년(670)에 백제의 무언가를 취하여 신라에 반하는 행동을 하려다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김진주(金眞誅)에게 주살당하였는데, 본서의 해당 부분에 결락이 있어 주살 직전 그의 마지막 행적은 정확하지 않다.
註 022
고순(高純): 고순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군관·수세와 더불어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에 임명된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23
남천주(南川州): 남천주는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한다. 남천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29년(568) 10월조 참조.
註 024
술실(述實):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달관·문영과 더불어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25
달관(達官):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술실·문영과 더불어 수약주총관(首若州總管)이 되었다. 이후 문무왕 10년(670) 7월 백제 고지(故地)의 공격에 참여하였으나, 중신(衆臣)·의관(義官)·흥원(興元) 등과 함께 진영에서 퇴각한 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얻었지만 사면을 받아 면직되었다.
註 026
문영(文穎): 김문영을 말한다. 문영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 7월 9일조 참조.
註 027
수약주(首若州): 수약주를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에 해당한다. 선덕왕 6년(637)에 신주의 영역 가운데 강원도 영서지역을 떼어내어 우수(강원도 춘천)를 주치(州治)로 하는 우수주를 설치하였고, 나머지 신주의 영역을 망라하여 한산주(漢山州)라고 불렀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州)의 성격 변화와 군주(軍主)」, 『역사와 현실』 40, 63~66쪽). 문무왕 8년(668) 봄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북한 강원도 안변)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문무왕 8년에 주치를 우수에서 비열홀로 옮겨 비열홀주를 설치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한다. 신라는 이후 문무왕 13년(673)에 비열홀정(比列忽停)을 혁파하고 우수정(牛首停)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치(州治) 역시 비열홀에서 우수로 옮기면서 우수주(수약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본서 권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3년(673) 8월 기록에 수약주 주양성(走壤城: 강원도 춘천시 봉의산고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우수주를 삭주(朔州)로 고쳤다.
註 028
문훈(文訓):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진순(眞純)과 더불어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이 되었다가, 이듬해(662) 정월에는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조에 따르면, 이 해 12월에 중시 문훈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668) 4월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단 편성 가운데 잡찬(迊飡) 문훈(文訓)이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임명되었고, 문무왕 15년(675) 9월에는 숙위(宿衛) 학생(學生) 김풍훈(金風訓)을 향도(鄕導)로 삼아 쳐들어 온 설인귀(薛仁貴)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찬으로 중시에 임명되었던 문훈은 나이가 많았고, 또한 이미 사망하였다고 전하므로, 668년 이후 잡찬의 관등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문훈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크다.
註 029
진순(眞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문훈(文訓)과 더불어 하서주총관(河西州摠管)이 되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이찬으로서 경정(京停) 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진순(陳純)과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조에서 진순(陳純)의 순(純)은 춘(春)으로도 되어 있다고 주석을 달았는데, 진춘(陳春)은 진덕왕(眞德王) 3년(649) 8월에 김유신·죽지(竹旨)·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한 장군(將軍)으로 등장한다.
註 030
하서주(河西州):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한다. 하서주, 즉 하슬라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5 신라본기제5 선덕왕 8년(639) 2월조 참조.
註 031
진복(眞福):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7월 17일에 서당총관(誓幢摠管)이 되었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문훈(文訓)의 뒤를 이어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에 고구려 정벌을 위해 편성한 행군군단 중 김인문·김흠순·김천존·김문충·김지경·김양도·김개원·김흠돌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에 임명되었다고 나오는데, 관등이 잡찬(迊飡)으로 나와 3년 전보다 오히려 한 등급 낮다고 전한다. 기록에 착오가 있는 것인지, 중간에 관등의 강등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신문왕(神文王) 원년(681) 8월에는 서불한(舒弗邯)으로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다.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 나오는, 즉 661년 12월 10일에 부장군(副將軍)으로서 김유신과 함께 군량미를 운송하였던 진복(眞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註 032
서당(誓幢): 서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
註 033
의광(義光): 의광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
註 034
낭당(郎幢): 낭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8) 2월조 참조.
註 035
위지(慰知): 위지는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 계금대감(罽衿大監)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36
계금(罽衿): 계금당(罽衿幢)을 말한다. 계금당은 태종무열왕 원년(654)에 창설된 기병군단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11월 22일조에 계금졸(罽衿卒) 선복(宣福)이 백제의 잔적(殘賊)을 토벌할 때에 공을 세워 급찬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전하는데,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 후 백제 잔적을 토벌할 때에 계금당이 출전하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본서 권6 문무왕 8년(668) 6월 21일조에 고구려 정벌을 위해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 아찬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총관(罽衿幢總管)에 임명하였다고 전하여서 계금당이 행군군단의 일원으로 편성되어 자주 전선에 투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본서 권40 잡지제9 직관하(下) 무관 계금당조에 계금당에 기병을 담당하는 제감(弟監)과 화척(火尺)이란 군관이 배속되어 있고, 그 예하의 지원부대로서 착금기당(著衿騎幢) 6개를 두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계금당이 기병 위주로 편성된 군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무열왕 7년 11월에 계금졸(罽衿卒) 선복이 공을 세워 급찬의 관등을 수여받은 사실에 주목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진골과 두품신분의 자제 가운데 기마술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여 계금당을 편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35~36쪽). 한편 계금당 소속 군관들이 주로 마병(馬兵)과 기병(騎兵)을 통솔하고 있어 기본적으로 국왕 직속의 기병 군단으로서 보병이 일부 배속되었으며, 이후 중앙의 계금당과 한산주(漢山州) 계당(罽幢)이 분할 배치되고, 우수주(牛首州) 계당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이계당(二罽幢)이 완성되었다고 한다(韓準洙, 92~98쪽 및 104~105쪽). 계금당에는 대대감(隊大監) 1명, 제감(弟監) 1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少監) 6명, 화척(火尺) 7명, 착금기당주(着衿騎幢主) 6명, 착금감(着衿監) 6명 등이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韓準洙,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전덕재, 2018,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 132
註 037
계금대감(罽衿大監): 본서 권제40 잡지9 직관하(下) 무관조에는 계금당에 편제된 대감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계금대감은 계금당의 대대감(隊大監)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무관조에 보이지 않는 계금당총관이나 계금졸(罽衿卒) 또한 본서 신라본기에서는 확인되고 있어, 계금대감도 그와 같은 사례로 보아 전시(戰時)에 계금당의 조직이 임시로 확대되었다고 간주한 견해도 있다(한준수, 2017, 「신라 통일기 罽衿幢·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한국학논총』 47, 97쪽).
註 038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衿大監)으로 삼았다: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 고구려 정벌을 위해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다른 군단에 장군 또는 총관(總管)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에 반해, 계금당의 경우는 다른 지휘관보다 한 등급 낮은 대감(大監)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인>인사·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