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661년 07월17일(음) )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金庾信)027027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인문(仁問)028028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진주(眞珠)029029 신라 장군인 김진주(金眞珠, ?~662)를 말한다. 선덕여왕 8년(639)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고, 태종무열왕 6년(659)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천존(天存)과 함께 보좌하였으며,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인 풍훈(風訓)은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있다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 군사의 향도(嚮導)가 되기도 하였다.닫기흠돌(欽突)030030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장군 김흠돌(金欽突,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7월에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고,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워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신문왕 1년(68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대당(大幢)031031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慶州)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장군(將軍)으로, 천존(天存)03203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죽지(竹旨)03303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竹旨)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陳純, 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닫기천품(天品)034034 신라의 장군으로 문무왕 1년(661)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참전하였고, 668년에도 귀당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각간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 조주(助州)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신라로 돌아왔다.닫기을 귀당(貴幢)035035 신라 지방군단의 하나이다. 수도 경주 부근에 설치한 대당(大幢)과 더불어 6정(停)에 속하였다.닫기 총관(摠管)036036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품일(品日)037037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충상(忠常)038038 백제의 좌평(佐平)이었다가 신라에 투항하여 활동하였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의자왕 20년(660)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황산(黃山)에서 계백(堦伯)가 서로 맞서 싸울 때, 좌평으로 출전하였다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뒤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어서 태종무열왕 8년(661)에 품일(品日)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는 데 힘썼다가 백제 부흥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닫기의복(義服)039039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하주(下州) 장군으로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는데, 뒤늦게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 문무왕 8년(668)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이었던 ‘의복(宜福)’이나 이때에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던 ‘의복(義福)’은 모두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상주(上州)040040 신라 중고기에 경상북도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으로, 흔히 사벌주(沙伐州)라고 하지만, 신라본기와 지리지 등의 내용이 달라 정확한 영역을 알 수는 없다.닫기 총관으로, 진흠(眞欽)041041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62이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김천존(金天存)·죽지(竹旨) 등과 함께 백제군에게 패배한 신라군을 도와 돌아오고 하였고, 이해에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다음해에는 남천주(南川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김진주(金眞珠)와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중신(衆臣)042042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이 출정할 때 진흠(眞欽)·자간(自簡) 등과 함께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는 백제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공을 세웠다.닫기자간(自簡)043043 백제 출신으로 활약한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의 달솔(達率)로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과 함께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1년(661)에 하주(下州)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하주(下州)044044 신라 중고기에 창녕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이다. 곧 비사벌(比斯伐)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닫기 총관으로, 군관(軍官)045045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 수세(藪世)046046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70이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의 백제 유민을 무찔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의 보장왕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갔으며, 670년에 한성주(漢城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꾀하였다가 김진주(金眞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닫기, 고순(高純)047047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백제 부흥군이 머물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닫기남천주(南川州)048048 신라 중고기에 한강 일대인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곧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북한산주(北漢山州)와 남천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할 때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닫기 총관으로, 술실(述實)049049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달관(達官)05005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제거한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10년(670)에는 장군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천관(天官) 등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 부흥군이 장악하였던 75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전투 중 후퇴하였다 하였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닫기문영(文穎)051051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수약주(首若州)052052 신라 때 강원도 일대를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으로,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불렸는데, 문무왕 13년(673)에 수약주(首若州) 또는 오근내(烏斤乃)로 고쳐 불렸다.닫기 총관으로, 문훈(文訓)05305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닫기진순(眞純)054054 진순(陳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관리로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죽지(竹旨)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닫기하서주(河西州)055055 신라 중고기에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부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이다. 곧 지증왕 6년(505)에 실직(悉直)이 설치되었고 그 뒤 하슬라(何瑟羅)에도 주(州)가 두어졌다. 하서주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8세기에도 계속 쓰였다.닫기 총관으로, 진복(眞福)056056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진복(眞服)이라고도 쓴다. 문무왕 1년(661)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백제의 유민을 물리쳐 상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부장군(副將軍)으로 인문(仁問)·양도(良圖)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을 전하여 역시 상을 받았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문무왕 8년(668) 3월까지 재임하였고, 곧이어 대당(大幢) 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공을 세웠다. 신문왕 1년(681) 8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효소왕 3년(694)까지 재임하였던 듯하다.닫기을 서당(誓幢)057057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를 두었다.닫기 총관으로, 의광(義光)058058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낭당(郎幢) 장군으로 임명되어 사비성(泗沘城)을 침공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물리쳤고, 그 뒤 돌아올 때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과 함께 각산(角山)에서 백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격파하고 나서 백제군의 진 안으로 들어가 2,000여명을 목베었다. 문무왕 1년(661)에는 낭당총관(摠管)에 임명되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유민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닫기을 낭당(郎幢)059059 신라 중앙 군제(軍制)인 9서당(九誓幢)의 하나로, 진평왕 47년(625)에 설치되었다가 문무왕 17년(677)에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고쳐 불렸다. 옷깃의 색깔은 자록색(紫綠色)으로 9서당 중 가장 먼저 설치된 녹금서당(綠衿誓幢)과 함께 신라인으로만 구성된 군대였다. 최고지휘관인 장군 2명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명, 대대감(隊大監) 5명, 제감(弟監) 4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少監) 23명, 대척(大尺) 20명, 군사당주(軍師幢主) 1명,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4명,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대감(大匠大監) 1명, 보기감(步騎監) 4명, 착금감(著衿監) 18명 등이 편제되었다.닫기 총관으로, 위지(慰知)06006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계금(罽衿) 대감(大監)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닫기를 계금(罽衿)061061 신라의 군대인 계금당(罽衿幢)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1년(654)에 설치되었으며, 누런 빛깔의 계색(罽色) 군복을 입었다. 대대감(隊大監, 領騎兵) 아래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領騎兵), 화척(火尺, 領騎兵), 삼천당주(三千幢主), 삼천감(三千監) 등이 편제되었는데, 기병을 이끌었던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닫기 대감(大監)062062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닫기으로 삼았다.

註 027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
註 028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
註 029
신라 장군인 김진주(金眞珠, ?~662)를 말한다. 선덕여왕 8년(639)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고, 태종무열왕 6년(659)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천존(天存)과 함께 보좌하였으며,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인 풍훈(風訓)은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있다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 군사의 향도(嚮導)가 되기도 하였다.
註 030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장군 김흠돌(金欽突,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7월에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고,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워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신문왕 1년(68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註 031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慶州)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
註 03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
註 03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竹旨)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陳純, 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
註 034
신라의 장군으로 문무왕 1년(661)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참전하였고, 668년에도 귀당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각간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 조주(助州)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신라로 돌아왔다.
註 035
신라 지방군단의 하나이다. 수도 경주 부근에 설치한 대당(大幢)과 더불어 6정(停)에 속하였다.
註 036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
註 037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
註 038
백제의 좌평(佐平)이었다가 신라에 투항하여 활동하였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의자왕 20년(660)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황산(黃山)에서 계백(堦伯)가 서로 맞서 싸울 때, 좌평으로 출전하였다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그뒤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이 되어서 태종무열왕 8년(661)에 품일(品日)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는 데 힘썼다가 백제 부흥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
註 039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하주(下州) 장군으로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는데, 뒤늦게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다. 문무왕 8년(668)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이었던 ‘의복(宜福)’이나 이때에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던 ‘의복(義福)’은 모두 동일인으로 보인다.
註 040
신라 중고기에 경상북도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으로, 흔히 사벌주(沙伐州)라고 하지만, 신라본기와 지리지 등의 내용이 달라 정확한 영역을 알 수는 없다.
註 041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62이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김천존(金天存)·죽지(竹旨) 등과 함께 백제군에게 패배한 신라군을 도와 돌아오고 하였고, 이해에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다음해에는 남천주(南川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김진주(金眞珠)와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註 042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이 출정할 때 진흠(眞欽)·자간(自簡) 등과 함께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는 백제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공을 세웠다.
註 043
백제 출신으로 활약한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의 달솔(達率)로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과 함께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을 받고 총관(摠管)에 임명되었다. 문무왕 1년(661)에 하주(下州)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註 044
신라 중고기에 창녕 일대를 다스렸던 행정구역이다. 곧 비사벌(比斯伐)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註 045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
註 046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70이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의 백제 유민을 무찔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의 보장왕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갔으며, 670년에 한성주(漢城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꾀하였다가 김진주(金眞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註 047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백제 부흥군이 머물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註 048
신라 중고기에 한강 일대인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남도 일부 지역을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이다. 곧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 하류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뒤에 북한산주(北漢山州)와 남천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전국을 9주로 편성할 때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註 049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註 05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제거한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10년(670)에는 장군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천관(天官) 등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 부흥군이 장악하였던 75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전투 중 후퇴하였다 하였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註 051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
註 052
신라 때 강원도 일대를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으로,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불렸는데, 문무왕 13년(673)에 수약주(首若州) 또는 오근내(烏斤乃)로 고쳐 불렸다.
註 05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
註 054
진순(陳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관리로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죽지(竹旨)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註 055
신라 중고기에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부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이다. 곧 지증왕 6년(505)에 실직(悉直)이 설치되었고 그 뒤 하슬라(何瑟羅)에도 주(州)가 두어졌다. 하서주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8세기에도 계속 쓰였다.
註 056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진복(眞服)이라고도 쓴다. 문무왕 1년(661)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백제의 유민을 물리쳐 상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부장군(副將軍)으로 인문(仁問)·양도(良圖)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을 전하여 역시 상을 받았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문무왕 8년(668) 3월까지 재임하였고, 곧이어 대당(大幢) 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공을 세웠다. 신문왕 1년(681) 8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효소왕 3년(694)까지 재임하였던 듯하다.
註 057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를 두었다.
註 058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낭당(郎幢) 장군으로 임명되어 사비성(泗沘城)을 침공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물리쳤고, 그 뒤 돌아올 때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과 함께 각산(角山)에서 백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격파하고 나서 백제군의 진 안으로 들어가 2,000여명을 목베었다. 문무왕 1년(661)에는 낭당총관(摠管)에 임명되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유민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
註 059
신라 중앙 군제(軍制)인 9서당(九誓幢)의 하나로, 진평왕 47년(625)에 설치되었다가 문무왕 17년(677)에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고쳐 불렸다. 옷깃의 색깔은 자록색(紫綠色)으로 9서당 중 가장 먼저 설치된 녹금서당(綠衿誓幢)과 함께 신라인으로만 구성된 군대였다. 최고지휘관인 장군 2명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명, 대대감(隊大監) 5명, 제감(弟監) 4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少監) 23명, 대척(大尺) 20명, 군사당주(軍師幢主) 1명,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4명,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대감(大匠大監) 1명, 보기감(步騎監) 4명, 착금감(著衿監) 18명 등이 편제되었다.
註 06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계금(罽衿) 대감(大監)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註 061
신라의 군대인 계금당(罽衿幢)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1년(654)에 설치되었으며, 누런 빛깔의 계색(罽色) 군복을 입었다. 대대감(隊大監, 領騎兵) 아래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領騎兵), 화척(火尺, 領騎兵), 삼천당주(三千幢主), 삼천감(三千監) 등이 편제되었는데, 기병을 이끌었던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
註 062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
주제분류
정치>행정>관인>인사·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