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다 ( 651년 02월(음) )

〔5년(651)〕 2월에 품주(稟主)001001 품주(稟主): 신라의 초기 정치기구의 하나로서 재정(財政)과 왕정의 기밀을 담당하였다(李基白).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왕정의 기밀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로 개편하면서 재정을 담당하는 창부(倉部)를 별도로 신설하였다. 품주는 조주(祖主) 또는 조주(租主)라고도 불렸는데, 품주의 기원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원래는 ‘조(租)’였는데, 인쇄하는 과정에서 조(祖)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보거나(李丙燾) ‘조(祖)’와 ‘조(租)’가 원래 통하는 글자였다는 견해가(李弘稙) 제기되었으나, ‘조(祖)’자는 원래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사당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품주의 원형인 조주(祖主)는 국조신(國祖神) 또는 전통적인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와 제당(祭堂)을 관장하던 존재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金昌錫, 2001). 품주는 원래 제사 관련 직임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정치기구가 증설되면서 품주로부터 조부(調府), 창부(倉部) 등이 분화되고 품주는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김창석, 2004, 127~129쪽). 한편 조주(祖主)라고도 부른 품주는 신라 초기에 시조묘 제사를 관장하는 여사제(女司祭)에서 기원하였고, 6부민이 바친 신곡(新穀)이나 공납물을 보관한 신창(神倉)을 여사제가 관리한 전통 때문에 조주를 품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해하고, 6세기 전반까지 품주에서 공납물의 수취뿐만 아니라 정부와 왕실의 운영경비를 충당하였다가 진평왕 44년(622)에 내성(內省)을 신설하면서 왕실재정은 내성이 관장하고, 정부재정은 품주가 관장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으며,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면서 품주의 업무 일부를 분장하는 관서로서 창부(倉部)를 별도로 설치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全德在, 2005).
〈참고문헌〉
李弘稙, 1971, 「三國史記의 ‘租’의 용법」,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李基白, 1974, 「稟主考」,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李丙燾, 1976,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昌錫, 2001, 「新羅 倉庫制의 성립과 租稅 運送」, 『韓國古代史硏究』 22
김창석, 2004,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一潮閣
全德在, 2005, 「新羅 中央財政機構의 性格과 變遷」, 『新羅文化』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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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집사부(執事部)002002 집사부(執事部):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설치된 관청이다. 신라 중앙행정기구 상의 위치, 기능 등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이 기사의 뒷부분 서술에 보이듯이 왕정의 기밀 사무를 담당한 핵심 관부였음(李基白, 1974,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은 분명하다. 흥덕왕 4년(829)에 집사성(執事省)으로 개칭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을 중시(中侍: 후에 시중(侍中)으로 개칭)라고 불렀고, 차관은 전대등(典大等: 후에 시랑(侍郞)으로 개칭)이었다. 이밖에 집사부에 대사(大舍) 2인, 사지(舍知) 2인, 사(史) 14인이 있었다.닫기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집사(執事) 중시(中侍)003003 집사(執事) 중시(中侍): 집사는 집사부(執事部)를 가리키고, 중시는 집사부의 장관을 말한다.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職官)상(上) 집사성(執事省)조에서 “중시는 1명이었는데, 진덕왕 5년(651)에 설치하였다.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으며, 관등이 대아찬에서 이찬까지인 자를 임용하였다.”라고 전한다. 경덕왕 6년(747)에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중시를 시중으로 바꾸었다고 보인다. 종래에 중대에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화백회의와 귀족세력의 대표자인 상대등의 권력이 퇴조한 반면에 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시중)가 새로운 정치적 요직, 즉 오늘날의 수상에 비견되는 요직으로 부상하고, 이것이 전제왕권의 방파제와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가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됨에 따라 집사부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고 이해한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다(李基白, 1974; 1993). 학계에서 전제왕권론 및 집사부 중시(시중)와 상대등의 역관계 변화 등에 관한 통설적 이해에 대해 활발한 비판이 이루어지면서(李仁哲; 李泳鎬; 하일식; 김영하), 현재 중시(시중)는 상대등이나 병부령보다 직급은 낮았으나 국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임기는 3년이었으며,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국왕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퇴임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李基白, 1974,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李基白, 1993, 「新羅 專制政治의 成立」, 『韓國史 轉換期의 問題들』, 지식산업사
李仁哲, 1993, 「新羅의 群臣會議와 宰相制度」, 『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李泳鎬, 1995, 「新羅 中代의 政治와 權力構造」, 慶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하일식, 2006 『신라 집권관료제 연구』, 혜안
김영하, 2007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론과 지배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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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아 기밀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註 001
품주(稟主): 신라의 초기 정치기구의 하나로서 재정(財政)과 왕정의 기밀을 담당하였다(李基白).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왕정의 기밀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로 개편하면서 재정을 담당하는 창부(倉部)를 별도로 신설하였다. 품주는 조주(祖主) 또는 조주(租主)라고도 불렸는데, 품주의 기원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원래는 ‘조(租)’였는데, 인쇄하는 과정에서 조(祖)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보거나(李丙燾) ‘조(祖)’와 ‘조(租)’가 원래 통하는 글자였다는 견해가(李弘稙) 제기되었으나, ‘조(祖)’자는 원래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사당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품주의 원형인 조주(祖主)는 국조신(國祖神) 또는 전통적인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와 제당(祭堂)을 관장하던 존재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金昌錫, 2001). 품주는 원래 제사 관련 직임과 관계를 맺고 있었고, 정치기구가 증설되면서 품주로부터 조부(調府), 창부(倉部) 등이 분화되고 품주는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었다고 볼 수 있다(김창석, 2004, 127~129쪽). 한편 조주(祖主)라고도 부른 품주는 신라 초기에 시조묘 제사를 관장하는 여사제(女司祭)에서 기원하였고, 6부민이 바친 신곡(新穀)이나 공납물을 보관한 신창(神倉)을 여사제가 관리한 전통 때문에 조주를 품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해하고, 6세기 전반까지 품주에서 공납물의 수취뿐만 아니라 정부와 왕실의 운영경비를 충당하였다가 진평왕 44년(622)에 내성(內省)을 신설하면서 왕실재정은 내성이 관장하고, 정부재정은 품주가 관장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으며,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면서 품주의 업무 일부를 분장하는 관서로서 창부(倉部)를 별도로 설치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全德在, 2005).
〈참고문헌〉
李弘稙, 1971, 「三國史記의 ‘租’의 용법」,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李基白, 1974, 「稟主考」,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李丙燾, 1976,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金昌錫, 2001, 「新羅 倉庫制의 성립과 租稅 運送」, 『韓國古代史硏究』 22
김창석, 2004,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一潮閣
全德在, 2005, 「新羅 中央財政機構의 性格과 變遷」, 『新羅文化』 25
註 002
집사부(執事部):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설치된 관청이다. 신라 중앙행정기구 상의 위치, 기능 등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이 기사의 뒷부분 서술에 보이듯이 왕정의 기밀 사무를 담당한 핵심 관부였음(李基白, 1974,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은 분명하다. 흥덕왕 4년(829)에 집사성(執事省)으로 개칭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을 중시(中侍: 후에 시중(侍中)으로 개칭)라고 불렀고, 차관은 전대등(典大等: 후에 시랑(侍郞)으로 개칭)이었다. 이밖에 집사부에 대사(大舍) 2인, 사지(舍知) 2인, 사(史) 14인이 있었다.
註 003
집사(執事) 중시(中侍): 집사는 집사부(執事部)를 가리키고, 중시는 집사부의 장관을 말한다.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職官)상(上) 집사성(執事省)조에서 “중시는 1명이었는데, 진덕왕 5년(651)에 설치하였다.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으며, 관등이 대아찬에서 이찬까지인 자를 임용하였다.”라고 전한다. 경덕왕 6년(747)에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중시를 시중으로 바꾸었다고 보인다. 종래에 중대에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화백회의와 귀족세력의 대표자인 상대등의 권력이 퇴조한 반면에 집사부와 그 장관인 중시(시중)가 새로운 정치적 요직, 즉 오늘날의 수상에 비견되는 요직으로 부상하고, 이것이 전제왕권의 방파제와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가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됨에 따라 집사부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고 이해한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다(李基白, 1974; 1993). 학계에서 전제왕권론 및 집사부 중시(시중)와 상대등의 역관계 변화 등에 관한 통설적 이해에 대해 활발한 비판이 이루어지면서(李仁哲; 李泳鎬; 하일식; 김영하), 현재 중시(시중)는 상대등이나 병부령보다 직급은 낮았으나 국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임기는 3년이었으며,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국왕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퇴임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李基白, 1974, 「新羅 執事部의 成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李基白, 1993, 「新羅 專制政治의 成立」, 『韓國史 轉換期의 問題들』, 지식산업사
李仁哲, 1993, 「新羅의 群臣會議와 宰相制度」, 『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李泳鎬, 1995, 「新羅 中代의 政治와 權力構造」, 慶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하일식, 2006 『신라 집권관료제 연구』, 혜안
김영하, 2007 「신라 중대의 전제왕권론과 지배체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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