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趙熤이 上疏에서 論列한 17가지 조목 중 植木에 관한 조목은 채택할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目  
연월일정조 13년 1789년 04월29일(음)
◯ 점목에 운운…. 유학(幼學) 조익(趙신출자)의 상소를 보면 그 하나는 읍·진(邑鎭)이나 창고가 있는 곳을 물론하고 둑[堤]을 축조하여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물을 가두며 도성 서쪽의 월암(月巖)에서 모화관(慕華館)에 이르기까지와 북쪽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만리현(萬里峴)을 둘러 우수현(雨水峴)에 이르기까지 둑을 쌓고 나무를 심으며 안현(鞍峴)의 경우도 이에 의하여 합니다. 그리고 강상(江上)의 민인이 사는 집 및 창고가 모두 빈 들에 있어 기댈 데가 없으니 일체 경영하는 일입니다. 나무를 심어 책(柵)을 만들고 둑을 쌓아 제방(堤防)을 만들어 도둑을 막고 창고를 안전하게 함은 흉포한 자들에 대비하는 뜻에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성에 있어서는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참군(參軍)이 각영(各營)을 나누어 관장하여 벌채(伐採)를 금하고 북돋고 심는 일이 모두 막고(節目)에 있으므로 지금 굳이 새로운 제도를 창출해서 번거롭게 할 것은 없습니다. 다시 절목을 들어 5영(營)에 엄중 신착하여 금송(禁松)에 관한 정사에 더욱 엄격히 해서 도성 사표(四標)안이 모두 무성하는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싶습니다. 그 하나는 송도(松都)에 석성(石城)을 쌓되 송악산(松嶽山) 좌우로부터 아래로 새로이 축조할 곳의 사이에 둑을 쌓아 나무를 심고, 금천(金川)의 읍창(邑倉)을 청석동(靑石洞)으로 옮겨 일이 있으면 금천에서 민병(民兵)을 거느리고 들어가 보호하며 책을 설치하고 또 장단(長湍) 풍덕(豊德)에서 막고의 절제를 받는 일입니다. 지금 지세와 형편으로 서문(西門)의 목줄을 논한다면 청석동은 좋으나 막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흙이나 돌은 물론하고 청석동을 지나 송도에 쌓는 다는 것은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금천의 읍창을 청석동으로 옮기는 일에 있어서는 이해와 득실을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실어 옮길 즈음에 크게 민폐가 생겨서 가벼이 논의함은 옳지 않을 듯싶으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애(嶺阨 : 고개의 관문(關門)이 있는 곳)의 방어책으로서 나무를 기르는 것보다 더한 일이 없습니다. 설한령(雪寒嶺)에서 남으로 철령(鐵嶺)에 이르기까지와 적유령(狄踰嶺)에서 서쪽으로 막령(幕嶺)에 이르기까지 소나무를 심되 마음 다해 나무를 기를 것이며 지금은 지름길이 날로 번성하니 일체 금해야 하겠습니다. 북로(北路)로 말하면 추지령(楸池嶺)안팎이 민둥산이어서 나무를 많이 길러야 하겠으나 근래 관장(官長)이 잘 금양(禁養)하지 않습니다.
통천군수(通川郡守)를 각별히 가려서 차출하는 일입니다. 설한령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와 적유령에서 막령에 이르기까지의 영애를 통제하는 형편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 소(疏)의 내용으로 보면 지세가 극히 험하다고 말하였으니 방비를 위한 방책은 본 지역의 험한데 있고 나무를 기르는 데에는 없습니다. 추지령에 있어서는 거듭된 봉우리가 깎아지른듯하여 한 지아비가 관문(關門)을 지킬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이 의심스러워하게 하려면 어찌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더구나 회양(淮陽) 한 고을이 두 고개 사이에 끼어있어 북쪽으로 철령에 동쪽으로 추지령에 모두가 진(鎭)입니다. 그리고 통천에 가려서 차출하는 일은 별로 긴요한 일이 아니므로 이는 내버려 두어야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우현(牛峴) 차령(車嶺)등 진이 대부분 고개 밖에 있어 성을 지키려 하면서 성 밖에 앉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각처의 관방(關防)이 이러하니 모두 안쪽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두 진이 고개 밖에 있음은 과연 그 말과 같습니다. 안으로 옮기는 것이 파수(把守)하는 방도이긴 하나 당초 설치에 반드시 까닭이 있고 민가와 관아(官衙)가 안정을 유지한 지 오래인데 갑자기 옮기는 것을 논의 하면 소요만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는 내버려 두어야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왜선(倭船)이 거치는 곳이 어찌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뿐이겠습니까? 추풍령(秋風嶺)은 사실 평탄한 길이므로 방수(防守)의 책략을 속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이 호남을 따라 곧바로 올라온다면 병사(兵使)가 한 모퉁이에 앉아 있는 것이 되므로 역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등래(登萊)와 기호(畿湖)는 마주하고 있어 등래로 향하는 자가 어찌 기호를 향하지 못하겠습니까? 경기의 해문(海門)을 철저히 지키려 한다면 점선(點船 : 군문 점검)하는 법을 복구시켜야 하겠고 형편이 긴요함은 강화(江華)만한 곳이 없습니다. 월곶(月串)에 통어 중군(統禦中軍)을 설치하고 덕포진(德浦津)을 풍덕(豊德)으로 옮겨 이습포(伊濕浦)와 월곶이 맞대하여 두 수로(水路)를 전적으로 장악하여 점선하며 또 행주(幸州)에 한 진(鎭)을 설치하기를 저 두 곳처럼 하는 일입니다. 왜노(倭奴)가 경계를 침범함에 있어 물과 뭍으로 그 길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평시의 방비에 어찌 혹시라도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소의 내용을 보면 오로지 점선문제를 좋은 방책으로 삼았고 월곶에 중군을 설치하고 덕포를 풍덕으로 옮기고 행주에 새 진을 설치하여 점선을 전담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말이 혹 의견이 있는 듯 싶으나 그 실에 있어서는 마침내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지금 공과 사,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서울과 지방의 함선(艦船)을 모두 모아 곳곳에서 점검하게 된다면 그 사이 허다한 폐단과 선인(船人)은 두어 해가 못되어 실업을 하게 되어 끝내는 배가 없어지게 될 것이므로 왜노의 경보를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우리 민인들이 소란스러워 질 것입니다. 사세로 미루어 볼 때에 실로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우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강화(江華)의 내성(內城)은 상금도 지킬만한 형세가 있습니다. 진보(鎭堡)와 창고가 있는 곳 및 사찰과 어호(漁戶)가 많은 곳에 아울러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영(營)과 보루(堡壘)가 마주보게 하면 적이 비록 뭍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아마도 움직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길성목장(吉城牧場)은 말이 번식되지 않으나 수십리 텅빈 곳에 사람이 없으니 말이 적은 신도(信島) 등으로 말을 옮기고 백성을 모집하여 입주시키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는 일입니다. 심도(沁都 : 강화) 한 고을은 본래 천참(天塹 : 천연 요새)입니다. 조가에서 돈대(墩臺)를 설치하고 성을 축조하는데 앞뒤의 경영은 더할 데 없다고 하겠습니다. 또 해마다 탱자[枳]를 심는 것은 이미 규정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나무를 심고 둑을 쌓는 일은 굳이 논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길성목장의 말이 번식이 되지 않고 토질이 비옥하여 비워둠은 애석하다는 말에 있어서는 과연 이 소의 내용과 같습니다.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는 수신(帥臣)에게 분부하여 형편을 살피고 사리를 논하여 장문하게 한 뒤에 품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종진(永宗鎭)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함은 지나친 일이니 인천부(仁川府)를 옛 제물진(濟物鎭)의 터로 옮기고 방어영을 설치해서 안산(安山) 부평(富平) 금천(衿川) 양천(陽川)의 육군을 관할, 영솔하게 하여 한로(旱路 : 육로)를 방어하도록 하고 또 영종과 화량(花梁)의 주사(舟師 : 수군)를 관할하여 월미도(月尾島)에 중영(中營 : 중군(中軍)의 진영)을 설치하고 전선(戰船)을 배치하여 또 수로(水路)의 방어를 겸하기를 파주(坡州) 교동(喬桐)의 예처럼 하는 일입니다. 영종진에 방어영을 설치한 것은 본래 강도(江都)의 외부지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육지로 옮겨서 설치하면 공제(控制)의 뜻을 잃는 것입니다. 또 군제(軍制)로 말하면 수륙(水陸)의 관할에 각각 분장이 있습니다. 지금 한 사람이 겸하여 총괄하는 것은 관방(官方 : 관제(官制))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역시 서로 장애가 있을 형세입니다. 또 읍을 옮기고 진을 옮길 즈음에 허다한 모순과 소요스런 실마리는 일일이 들 수 없으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화량(花梁)은 대부(大阜)만큼 긴요하지 못합니다. 진을 대부로 옮기고 감목관(監牧官)을 겸하게 해서 연흥(延興)등 여러 섬을 공제하게 하며 북쪽으로 영종진과 마주하게 하고 남쪽으로 안흥(安興)과 서로 접하게 하되 영종과 화량은 모두 변경지역의 예에 의하여 가려서 차출하는 일입니다. 해상방위의 형편은 직접 보지 못하여 진을 옮기는 것이 타당할 지 여부는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부는 곧 목장으로서 본래 한가한 토지가 아닙니다. 진을 옮기고 감목관을 겸하되 변경 땅으로 삼는 것이 그 이해와 득실은 우선 물론하고 일이 관방(官方)에 관계되어 가벼이 논의할 수 없을 듯 싶으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경상 좌병영(慶常左兵營)은 치우치게 바다 한 모퉁이에 있어 영저(嶺底) 여러 고을과의 거리가 매우 멀어 공제(控制)할 형편이 아닙니다. 지금 경주(慶州)로 옮긴다면 창설하는 폐단이 없고 공제하는 형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병영은 바다 한 모퉁이에 있고 편대(編隊)는 두루 너른 들 고을에 있습니다. 거리가 고르지 못하여 관할에 어려움이 있고 급박한 일이 있을 경우 소집할 수 없습니다. 도내의 논의는 간혹 경주로 옮기거나 혹 영천(永川)이 편하다고 하나 영을 설치한 지 여러 백년에 갑자기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가벼이 논의할 수 없으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연변의 진보(鎭堡)에 토졸(土卒)이 허약하여 대진(大鎭) 척후(斥堠)가 되지 못하고 영애(嶺阨)에 있어서는 생리(生理)를 위하여 곳에 따라 화경(火耕 : 불을 질러 경작함)을 하므로 나무가 점점 희소하며 지름길이 더욱 번성합니다. 조금 이완된 곳을 혁신하여 요해처(要害處)에 적합하게 하는 일입니다. 진보의 병사를 합하는 일은 비록 이번에 이 길의 일로 말하더라도 형세는 견제가 되고 논의는 혹 갈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관방(關防)에 관계되는 일은 한때의 논의로 단정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소의 내용에 조금 이완되고 가장 긴요한 영애라고 일반적인 논의를 하였고 처음부터 아무 진, 아무 보라고 지적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비록 따라서 시행하려고 하나 조처할 수 없으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각읍의 교원생(校院生 : 향교·서원의 유생) 및 군교(軍校)에 처음 들어가고 늙어 면제시키는 액수를 정하여 당자가 사망하거나 상중(喪中)에 있거나 무거운 죄를 범한 자 외에는 교체하여 대신 보충할 수 없으므로 비록 들어가야 할 자라 하더라도 모두 군안(軍案)에 보충하고, 취재(取才)에 있어서는 서강(書講)에 우등한 자를 교원생으로 차출하고 무예(武藝)와 병서(兵書)에 우등한 자를 군교로 차출하며 선파(璿派 : 가까운 왕족) 및 충의(忠義 : 공신적장자의 군조직)로서 감축된 수에 대신할 자를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난잡한 일이 없게 하고 사부(士夫)집의 묘노(墓奴)와 각궁(各宮)의 산양직(山梁直)에 정액이 있게 해서 아무 명색임을 막론하고 경내에 거주하는 자는 본 고을에서 관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의하여 두목(頭目)을 설치하고 본고을의 조련 때에 일체 조련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군정(軍政)이 문란하고 교원생이 난잡스러움은 언자(言者)의 말이 이때의 폐단을 적절히 지적하였습니다. 지금 일체의 법으로 갑자기 수색하는 정사를 시행하여 교원생과 군교는 서강을 고찰하고 무예를 시험하며 충의와 산직(山直)은 장적을 상고하여 액수를 정하고 대(隊)를 편성하여 조련하는 일에 있어서는 단속하는 새 예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군적(軍籍)의 증가에 앞서 민심은 소란스럽게만 할 것이므로 가벼이 논의하여서는 안될 듯 싶으니 이는 내버려 두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수군(水軍)에 요즘 산간 고을 사람이 많아 수군 조련을 맞이할 경우 현훈·구토하고 물에 빠지는 걱정까지 있으므로 지금 모두 포변(浦邊) 사람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연변 백성을 육군에 편입하고 산간 백성을 수졸(水卒)로 보충할 경우 그 거주에 따라 서로 교환하여 정하면 공가(公家)에서는 사용에 유리하고 그들은 역에 나아가는 데 편의하니 일이 온당함은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베를 거둠에 있어 많고 적음이 다르고 신역(身役)의 고되고 수월함이 현격히 달라서 각각 그 수령이 간혹 시행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그러하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 제도를 확립하면 아마도 장애되는 실마리가 있을 것이오, 또 지난번 우통례 우정규(禹禎圭)의 소(疏)로 인하여 편의 여부를 여러도에 관문으로 물었습니다. 그 보고를 기다려서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수어청과 총융청 두영을 폐지하고 남한산성은 부윤(府尹)에게 전담시키고 북한산성은 관성장(管城將)에게 전담시키며 양주(楊州) 광주(廣州) 파주(坡州) 수원(水原)을 서울의 사보(四輔 : 사방의 방어망)로 삼아 장수의 능력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고 장초(壯哨)와 아병(牙兵)은 양주·광주·파주 세 고을에 소속시키고 다른 읍에 있는 자는 본 고을의 역에 바꾸어 보충합니다.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 두 영에 번(番)을 서기 위해 올라오는 자는 한갓 왕래하는 고됨만 소비하니 두 영을 폐지한다면 표하(標下 : 전속병) 및 신역(身役)이 있는 젊고 씩씩한 자를 옮겨 정하되 부족하다면 서울에서 한가로이 노는 건장한 자를 가려서 그 수를 채우며 향군(鄕軍)의 신역을 거두어서 대신 지급하도록합니다. 그리고 경기 안 각읍을 네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켜 서울을 에워싸 호위하게 하고 식년(式年) 때마다 네 고을의 수신(守臣)이 순행하며 합동조련하는 일입니다. 두 영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은 지 오래요, 연전에는 널리 의견을 수렴하는 일까지 있었으나 조정의 논의가 일정하지 않아 이어 중지되었습니다. 대체로 군제(軍制)에 관계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설치된 지 오래이므로 형편이 장애가 많아 그러한 것인데 연혁(沿革)으로 볼 때에 가벼이 논의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장초와 아병을 양주·광주·파주 세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원역(員役)과 한가로이 노는 자를 금위영과 어영청의 편대(編隊)에 보충하는 일은 모두 두 영을 폐지한 뒤의 일이므로 굳이 세밀히 논의할 것은 없습니다.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수령과 변장(邊將)이 봄 가을로 목장에서 조련하고, 정월 7월에 각초(各哨)의 초관(哨官)이 그 기총(旗摠)과 대장(隊長)을 거느리고 역시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사이에서 사사 연습을 하고 3년에 합동조련을 하면 거의 조련을 정지하는 탄식이 없을 것이라는 일입니다. 근년에 와서 봄 가을의 조련은 대부분 정지하므로 융정(戎政)이 소홀함은 사실 매우 고민입니다. 지금 이 소의 내용 가운데 초관의 사사 연습문제는 여러 가지 폐단이 됩니다. 대체로 결원(缺員)을 뇌물을 받고 덮어두고 쓸데 없는 비용을 멋대로 요구함은 비록 서울 군문의 교졸(校卒)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이러한 근심이 있는데 더구나 지방의 초관들이 사사 조련을 핑계대어 가벼우면 수렴(收斂)하고 중한 경우 뼈 바르듯 하는 것은 이러한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는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관문(官門)에 모여 점호(點號)하는 일에 있어서는 늘 조련을 정지할 때에는 곧 조정의 영에 의하여 시행하는데 식량과 비용, 왕래하는 고됨이 없고 또 군적(軍籍)을 헛되이 소모하는 것은 없으며 자못 수련(修練)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계(器械)와 복장의 수선과 좌작(坐作) 진퇴(進退)의 연습은 오로지 모여 점호하는 때에 있으니 거듭 가르치고 신칙할 뿐입니다. 지금 굳이 별도로 조목을 세울 것은 없고 여러 도에 엄중신칙하여 마음 다해 거행해서 실효가 있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 싶습니다.
그 하나는 비록 세 군문의 수성절목(守城節目)이 있으나 아무 동네 사람이 아무 곳을 지켜야 할 지를 모릅니다. 각동(各洞)을 세 군영에 나누어 소속시켜 아무 동네에서 아무 곳의 제 몇 타(垜 : 성가퀴)를 벌여서 지킨다고 각각 정하고 동기(洞旗)에 각각 써서 그 한계를 밝히는 일입니다. 도성의 파수에 오영(五營)을 부(部)로 나누어 아무 동네 아무 마을은 어느 부, 어느 방(坊)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수성절목이 있으니 따로 기호(旗號)를 세우고 아무 타라고 쓰는 것은 잗다란 일인 듯 싶습니다. 수첩군졸(守堞軍卒)이 신지(信地)를 분명히 아는 것은 혹 군제에 보탬이 될 듯 싶으니 각영에 신칙하여 헤아려 시행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 싶습니다. 그 하나는 군기(軍器)가 점점 모양이 아닙니다. 영·읍·진이 교체될 즈음에 직접 확인하고 전하고 받아 탈이 있을 때에는 구관(舊官)에게 보수하게 한 뒤에 그 해유(解由)를 내어주고 적간 때에 탈이 있을 경우에는 관장(官長)뿐만이 아니라 그 도차지(都次知) 좌수(座首) 및 앞뒤 감색(監色)을 아울러 엄형(嚴刑)하고 율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군기를 해유에 구애시킴은 곧 나라의 법입니다. 신관과 구관이 전하고 받을 즈음에 모두 검열하고 감사와 병사가 순심(巡審)할 때에 역시 적간하여 조금이라도 파손이 있을 때에는 감색을 추궁하여 죄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역시 고을 수령도 논죄하므로 군기의 수선은 오직 도신과 수신(帥臣)이 직무의 수행을 어찌하느냐에 있습니다. 이는 여러 도에 엄중신칙하고 불시에 사열하여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을 때에는 경사(京司)에 이문(移文)해서 그 수선을 마친 뒤에야 해유를 내어주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 싶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국궁(國弓)의 모양은 비록 고제(古制)여서 활꽂이[弓弭]가 뒤로 넘어가고 이부(弛跗)가 넓지 않아 되돌려 벌이기가 쉽습니다. 『무비지(武備志)』에 그려진 호인(胡人)의 활 모양은 활줄[弦]을 활 끝에 곧게 맨 것을 군기라 이름합니다. 활은 모두 이에 의하여 조성하므로 비록 장마 때라 하더라도 활꽂이[弰]를 벗어나거나 이부가 옮기는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 군선(國船)의 모양은 투박하고 커서 움직이기에 어려움이 있어 조수가 물러가고 바람이 불리하면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합니다. 옛 송(宋)나라 양요(楊幺)가 호수(湖水)에 배를 띄워 바퀴로 물을 저으니 나는 듯이 달렸습니다. 재치 있는 자를 시켜 그 뜻을 모방하여 먼저 작은 배에 시험하여 효과가 있다면 다음 큰 배에 시험하여 이 모양에 의하여 널리 조성하고 또 선제(船制)를 감소시켜서 늘 물에 띄울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활의 이부(弛跗)를 넓히어 과연 장마 때에 부리워지지 아니하고 배를 바퀴로 저어 풍파에도 갈 수 있다면 그 이용할 수 있는 기구로서 이보다 더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제도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부리운 것을 펼쳐야만이 그 힘은 비로소 완전하고 작고 큼은 그 쓰임이 각각 다릅니다. 지금 이 활줄을 매는 데 대한 말과 배를 감소시킨다는 말은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또 송나라 양요는 곧 수구(水寇 : 수적(水賊))가운데 가장 사나운 자요, 소(疏)에 서술한 말도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아울러 내버려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생(書生)이 병사(兵事)를 말하는 것은 본래 강개(慷慨)해서입니다. 17조에 걸쳐 논한 것은 비록 혹 오활하여 시행이 어려우나 이상 몇 조는 사실 채택할 만 합니다. 그 가운데 나무 심는 일은 가장 사리에 가깝습니다. 예부터 앞날을 경영하는 지모에 특출한 자는 대부분 나무 심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군읍 사이에 간간이 무성한 숲, 키 큰 나무가 있으나 근년에 와서 대부분 포기하여 읍내(邑內)와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 텅 비어 가리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애(嶺阨)와 산성 곳곳이 민둥이 되었으니 앎이 있는 자의 탄식이 있은지 사실 오래입니다. 둘러 쌓은 둑에 나무를 기르고 못을 파서 물을 가둠은 모두 말한 바와 같이 할 수는 없으나 모든 도 여러 고을의 텅빈 요해처(要害處)에 그 형편을 살피고 사세를 헤아려 민력을 번거롭게 아니하고 일이 속히 이루어 지기를 바라지 말고 많은 나무를 심되 땔감으로 작벌하는 일을 엄금하여 공과 사가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강도(江都)및 여러 산성관 여러 영애의 가장 긴요한 곳에 각별히 금하고 길러서 혹시라도 여전히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관문(關文)을 보내 엄중신칙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아뢰니 회계(回啓)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