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太宗)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 경신(庚申)에 인문(仁問)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나라의 고종(高宗)은 좌호위대장군형국공 소정방(左虎682682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닫기衛大將軍荊國公 蘇定方)683683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33 소정방).닫기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左衛將軍 劉伯英684684 당 괵주(虢州) 사람으로 당 태종대에 휴주도독(雟州都督)이 되었고, 고종대에는 계주도독(桂州都督)이 되어 두주(竇州)·의주(義州)의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 되어 평양도총관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中國歷代人名事典≫, 上海古籍出版社, 1996, 678쪽).닫기) 자(字)는 인원(仁遠)685685 중국의 조음 대빈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이었다. 일찍이 고구려와 설연타 등의 정벌에 참여하였고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공격하였다. 용삭 3년(663)에는 웅진성의 유진랑장으로서 유인궤와 함께 부여풍 및 일본의 백제 구원군을 백강구에서 토멸하여 우위위장군 노성현공을 제수받았으며, 인덕 원년(664)과 2년(665)의 두 차례에 걸쳐 당의 칙사로서 신라와 백제의 화친 서맹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건봉 2년(667) 이세적 고구려 원정 때 기약일에 늦었기 때문에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에 유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과 좌호위장군 풍사귀(左虎衛將軍 馮士貴)686686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닫기좌효위장군 방효공(左驍衛將軍 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벌케 했다 향기(鄕記)에 이르기를 군사는 12만 2천 7백 11인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사(唐史)에는 상세하게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지휘하여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687687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있는 덕적도(德積島)이다. (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닫기에 이르니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註 682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註 683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33 소정방).
註 684
당 괵주(虢州) 사람으로 당 태종대에 휴주도독(雟州都督)이 되었고, 고종대에는 계주도독(桂州都督)이 되어 두주(竇州)·의주(義州)의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 되어 평양도총관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中國歷代人名事典≫, 上海古籍出版社, 1996, 678쪽).
註 685
중국의 조음 대빈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이었다. 일찍이 고구려와 설연타 등의 정벌에 참여하였고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공격하였다. 용삭 3년(663)에는 웅진성의 유진랑장으로서 유인궤와 함께 부여풍 및 일본의 백제 구원군을 백강구에서 토멸하여 우위위장군 노성현공을 제수받았으며, 인덕 원년(664)과 2년(665)의 두 차례에 걸쳐 당의 칙사로서 신라와 백제의 화친 서맹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건봉 2년(667) 이세적 고구려 원정 때 기약일에 늦었기 때문에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에 유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686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註 687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있는 덕적도(德積島)이다. (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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