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渤海靺鞨339339 渤海靺鞨傳 渤海靺鞨이라고 稱하는 靺鞨의 集團名은 中國 史書에는 『舊唐書』 및 『舊唐書』의 이 句節을 옮긴 『舊五代史』의 渤海靺鞨傳이라는 傳名 밖에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의 撰者가 渤海王國의 主體를 渤海靺鞨로 指稱한 참뜻을 지금으로서는 推斷하기 어렵다.
『舊唐書』渤海靺鞨傳은 渤海人에 의해 쓰여진 글이 없다는 점에서 渤海의 國勢나 그 盛衰의 경과를 아는 데 『新唐書』渤海傳과 더불어 渤海史硏究의 基本史料가 되고 있다. 그러나 『舊唐書』渤海靺鞨傳과 『新唐書』渤海傳에는 그 기록이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어 많은 異說을 낳고 있다.
『舊唐書』渤海靺鞨傳은 渤海의 出自·建國過程·位置 및 中國(唐)과의 交涉記事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出自에 대해서 ‘高[句]麗의 別種’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해 『新唐書』渤海傳에서는 栗末渤海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 있어서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었다. 中國과의 交涉記事도 唐 萬歲通天 年間(696)부터 開成 年間(836~840, 渤海 彛震 7~11)가지의 朝貢 및 册封記事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舊唐書』의 記事가 『册封元龜』의 所傳과 일치하는 점이 많은 것에서 그 정확성은 『新唐書』渤海傳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史料的 價値에 있어서는 『舊唐書』渤海靺鞨傳의 대부분이 唐朝와의 交涉記事로 이루어져 있고 그 나머지 渤海國의 狀態에 대한 記述은 없는 데에서 『舊唐書』는 『新唐書』渤海傳 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 『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한국일보사.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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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340340 渤海 渤海라는 名稱은 渤海王國을 뜻하는 것 뿐 아니라 그 以前부터 이미 (가)海洋名 (나)郡名으로 쓰여져 내려 오고 있었다.
(가)海洋名: 『列子』「湯問」의 ‘渤海의 東은 그 幾億萬里인지 모른다’는 것을 비롯하여 『史記』 「封禪書」의 三神山이 있는 海洋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는 記事에 이어 ‘諸仙人 및 不死의 藥이 그곳에 있다’는 神秘한 海洋으로 적혀 있다.
그 位置는 지금의 黃海의 一部이며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內海이다.
(나) 郡名: 『漢書』「地理志」渤海郡條에 보이는 顔師古의 註에 ‘渤海의 濱에 있으며 이(海洋名)에 따라 (郡의) 이름이 지어졌다’라고 되어 있다.
漢代의 渤海郡은 河北省 河間縣 以東에서 滄縣까지의 지역이며, 北은 安次縣·南은 山東省 無棣縣까지로 比定되고 있다.
한편 顧祖禹의 『讀史方輿紀要』에 따르면 그 후 南北朝時代에 이르러 南朝 宋이 山東省 高苑縣 西北에 渤海郡을 僑置하자(山東省 靑州府條), 東魏에서는 河北省 東光縣에 同一名의 郡을 두었다(河間府條).
그 후 隋의 大業 3년(607)에는 山東省 惠民縣에 두었던 滄州를 渤海郡으로 改稱한 것으로 되어 있다(山東濟南條).
≪參考文獻≫
『史記』卷28「封禪書」
『漢書』卷28上「地理志」渤海郡條.
『讀史方輿紀要』卷13 河間府條; 卷31 山東濟南條; 卷35 山東省 靑州府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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靺鞨341341 靺鞨 古代에서 中世에 걸쳐 滿洲 東半部와 黑龍江 下流의 시베리아 地方에 살던 部族의 이름이다.
이 部族이 中國正史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勿吉傳에 ‘勿吉’이라는 이름으로 ‘高句麗’의 北에 있으며 옛 肅愼國’에 속하는 部族으로 적혀 있다.
특히 北魏 孝文帝의 延興 年間(471~477)에는 勿吉이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파견하게 되어 北魏에서 지금의 吉林 附近까지의 路順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勿吉은 『北史』勿吉傳에 ‘一曰靺鞨’이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隋·唐時代에는 靺鞨로 表記되었다.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靺鞨은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뉘어져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 및 黑龍江 下流까지, 東南은 長白山一帶의 넓은 地域에 걸쳐 散居하면서도 統一을 이룩하지 못한 低文化族을 總稱한 것이다.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白山部와 粟末部가 高句麗에 倂合되어 粟末靺鞨의 酋長 突地稽는 그의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逃走하여 隋의 保護를 받았으며, 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靺鞨도 部로서의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조>
『隋書』靺鞨傳 註 2)
靺鞨
靺鞨이란 原音이 Moxo, 또는 Moho로서 滿洲의 女眞語의 물(水)을 뜻하는 Muke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Grebenščikov에 의하면 靺鞨(Moxo)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나타내는 滿洲語의 Muke에서 나오고, 挹婁(Yelou)라는 명칭은 巢窟·洞穴을 뜻하는 滿洲語의 J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Contu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이로 보아 靺鞨이란 말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勿吉(Wu-tsi)이란 말이 “森林에서 生活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과 서로 對比된다. 다시 말하면 滿洲의 自然環境과 氣候區分에 따른다면, 북쪽 寒冷帶 濕潤氣候(Dwb)의 森林地域(Taiga)에서 狩獵을 爲主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勿吉(Wu-tsi)이라고 한 데 비하여, 남쪽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의 강가·평야지역에서 農耕生活을 하거나 狩獵生活에서 農耕生活로 移行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을 靺鞨(Moxo)이라고 한 듯하다. 靺鞨의 7部가 散在한 地域은 대체로 북쪽으로 黑龍江에서 남쪽으로는 豆滿江 一帶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는데, 그 남쪽에 있었던 諸部는 상당히 農耕生活로 移行하였으나 그 북쪽에 있었던 諸部는 古代의 肅愼·挹婁와 마찬가지로 未開한 原始的 狩獵·漁撈生活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滿洲에 있어서의 生活樣式과 그 文化 정도는 바로 이 自然環環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黑龍江 流域에 있었던 黑水靺鞨이 가장 肅愼·挹婁·勿吉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三上次男은 이들을 한 單位로 묶어 古Asia族으로 보고, 그 나머지 6部는 Tungus系로 보고 있다(『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p.223~244).
S.M. Shirokogoroff에 의하면 勿吉(Wu-tsi)을 靺鞨(Moxo)에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곤란하니 靺鞨이 勿吉에 대하여 그 政治的 支配를 마쳤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러한 名稱이 하나의 독립된 呼稱으로서는 滿洲族에 吸收되었던 몇 개의 種族單位 가운데 우연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政治關係의 用語에서는 그 모습이 사라졌을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고, 이미 논한 바와 같이 勿吉(Wu-tsi)후예들의 언어는 靺鞨(Moxo)의 言語와는 다르므로(靺鞨의 지도적 단위의 언어라고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靺鞨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고, 하나의 종족단위는 아니었으나 渤海나 女眞 등과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이었다고 하여, 勿吉과 靺鞨은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 연관관계가 없으며, 靺鞨이란 種族의 名稱이 아니라 정치세력을 형성한 집단에 대하여 붙여진 호칭이었다고 하였다(『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 그는『金史』에 의하여 7C 隋의 皇帝가 栗末靺鞨 등의 7部 名稱을 붙인 것을 예로 들면서, 靺鞨(Moxo)이라는 名稱은 中國人들이 그렇게 불렀던 주민들에 의하여(우연히 滿洲라는 이름이 나타났던 것처럼) 새로 채택한 이름이거나, 혹은 이러한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사용되었던 것을 中國人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던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며, 하여튼 그것은 極東地方에서 보통 흔한 바와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의 이름이었다고 하여, 靺鞨이라는 名稱은 中國과 靺鞨사이에 있었던 南方 Tungus집단들에 의하여 中國에 전하여졌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앞의 책, pp.362~364). 다시 말하면 中國人은 이러한 南方 Tungus집단에 의하여 勿吉·靺鞨세력과 격리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挹婁·勿吉·靺鞨 자신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물(河川)에 사는 사람”·“숲(森林)에 사는 사람” 또는 “洞窟에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南方 Tungus族 즉, 滿洲族의 조상들이 이러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靺鞨과 勿吉의 名稱은 특수한 어떤 종족을 일컫던 것이 아니라, 그 自然環境에 따라 다른 生活樣式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던 南方 Tungus집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時代에 따라 비록 그 名稱은 달랐으나, 17C 淸나라 Nurhaci(努兒哈赤)가 滿洲族을 統一할 때까지 寒冷帶 濕潤氣侯(Dwb)에서 狩獵生活하던 사람들과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에서 農耕生活을 하던 사람을 대비하여 일컬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隋·唐時代: 勿吉-靺鞨
遼 時 代: 生女眞-熟女眞
明 時 代:兀狄哈-兀良哈
明 末 淸 初: 新滿洲族-舊滿洲族
(ice mandu) (fe mandu)
이처럼 滿洲의 歷史에 있어서 種族系統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가진 데 비하여, 그 自然環境에 따른 生活樣式에 의한 區分은 時代마다 일정한 對比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勿吉과 靺鞨이 中國과 關係를 가졌던 사실을『魏書』·『北齊書』·『册府元龜』등을 통해 조사해 보면, 勿吉은 北魏의 延興 5年(475)부터 中國에 國貢을 시작하여 東魏의 武定 5年(547)에 이르기까지 北魏·東魏時代 5C 후반에서 6C 중엽까지 약 1세기 가량 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北齊時代에는 勿吉은 사라지고 그 대신 靺鞨이 등장한다. 北齊시대의 그 朝貢關孫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天保 5年(554) 肅愼朝貢
河淸 2年(563) 靺鞨朝貢
河淸 3年(564) 靺鞨朝貢
天統 元年(565) 靺鞨朝貢
天統 2年(566) 靺鞨朝貢
天統 3年(567) 大莫婁·靺鞨朝貢
天統 4年(568) 靺鞨朝貢
天統 5年(569) 大莫婁朝貢
武平 元年(570) 靺鞨朝貢
武平 3年(572) 勿吉朝貢
武平 4年(573) 靺鞨朝貢
武平 6年(575) 靺鞨朝貢
이상에서 보면 靺鞨의 朝貢은 北齊의 河淸 2年(563)에 시작하여 武平 6年(575)까지 여러차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北魏·東魏時代와는 달리, 北齊시대에는 肅愼도 天保 5年(554)에 朝貢하고, 또 勿吉도 武平 3年(572)에 朝貢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肅愼·勿吉·靺鞨이 동일한 系統의 種族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史書의 편찬자가 그 名稱을 바꾸어 記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勿吉·靺鞨 이전의 肅愼까지 함부로 바꾸어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勿吉을 Muki로 본다면, 勿吉의 轉音으로 靺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勿吉·靺鞨을 混用하였을 可能性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이나 池內宏에 의하면 이러한 勿吉·靺鞨과 肅愼의 種族 갈래를 同一한 系統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政治세력으로 해석하였다(津田左右吉,「勿吉考」pp.1~37, 池內宏,「勿吉考」pp.1~70).
즉, 魏代에는 勿吉部落 아래에 하나의 政治세력을 형성하였으나 隋代에 와서 이러한 諸部落이 분열하여 그 사이에 아무런 統制를 받지 않게 되자 그 세력에 큰 變化를 가져와 勿吉部落은 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靺鞨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大莫婁 같은 이웃 種族이 中國에 朝貢할 수 있었던 것도 勿吉이 세력을 잃자 그 壓制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말하자면 朝貢의 中斷은 勢力의 실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5C中葉에서 6C中葉까지 약 1세기 가량은 勿吉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나, 北魏·東魏時代가 끝나자 北齊時代에는 勿吉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靺鞨의 7部가 등장하여 그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간주된다.
≪參考文獻≫
『魏書』卷100「列傳」勿吉國條.
『北齊書』卷4「文宣帝紀」; 卷7「武成帝紀」; 卷8「後主帝紀」
『册府元龜』卷969「外臣部」朝貢條.
津田左右吉,「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 1915.
池內宏,「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5, 1937(『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S. M. Sirokogoroff,『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1929.
A. V. Grebenščikov,『Contr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參考文獻≫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長 順, 『吉林通志』卷10「沿革志」上 吉林屬城及府廳州縣沿革全表.
松井等, 「渤海國 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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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祚榮342342 大祚榮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를 大祚榮으로 明記하고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唐에 처음 叛旗를 들어 東走하여 渤海王國의 기틀을 잡았던 것을 大祚榮의 父인 乞乞仲象으로 기록하고 있다. 學界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적지않은 論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처음 池內宏은 乞乞仲像과 大祚榮은 同一人으로서 乞乞仲象은 建國前 營州住在時의 本名이며, 大祚榮은 建國後 中國式으로 改名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渤海國의 建國者에 대한 池內宏의 論旨는 『新唐書』·『舊唐書』 兩書의 서로 어긋나는 記事를 折衷·調和시키려는 데 있었으며, 津田左右吉도 이에 同調하였으나(「渤海考」p.110), 이 推斷은 곧 鳥山喜一에 의해 ‘too logical’이라는 理由로 否定되었다(『渤海史考』p.33). 이 問題는 그 후 1933年 10月에 있었던 白鳥庫吉의 學術講演에서 거론되어 乞乞仲象과 大祚榮의, 同一人說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乞乞仲像은 靺鞨人이었다는 說이 主張되었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參考文獻≫
池內宏, 「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卷 1號, 1914(『滿洲史硏究』中世篇 第1册, 193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東京奉公會.
白鳥庫吉,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 44編 12號,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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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 本高麗別種也.343343 高麗別種 渤海王國의 主體에 대하여 『舊唐書』에는 ‘高[句]麗別種’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 …… 本粟末靺鞨附高[句]麗者…’라 하여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高句麗領土로 倂合된 松花江 流域의 粟末靺鞨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서도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에 있어서 東牟山(太白山 東北인 敦化縣으로 推斷)을 根據로 하였다는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따라 渤海王室의 出自를 靺鞨 7部 中 長白山 附近에 居住하던 白山部出身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考」p.118).
津田左右吉에 이어 鳥山喜一은 『新·舊唐書』에 보이는 엇갈리는 記事를 절충하여 渤海王國의 開國者인 大祚榮은 高句麗別部出身이나, 그 王國을 形成한 主體는 靺鞨族이라는 主張을 내놓았다(『渤海史考』pp.33~34).
한편 池內宏은 治者階級은 소위 ‘渤海靺鞨’이며 이 王國은 기타의 靺鞨部도 참여한 靺鞨族國家인 것으로 推斷하였다(「鐵利考」p.84).
이와 같이 『新·舊唐書』의 記事만 가지고 渤海王國의 主體가 어느 族에 속하는지 穿鑿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臆斷의 境地를 벗어날 수 없었으나, 이 問題에 관하여 획기적인 見解를 發表한 것은 白鳥庫吉이다. 즉, 그는 1933年 渤海國 上京發掘物展覽會에 즈음한 學術講演에서 ① 『續日本紀』神龜 5年條에 渤海王國 大武藝가 日本에 보낸 國書에서 ‘復高[句]麗之舊居 有扶餘之遺谷’이라 하여 高句麗의 光復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天平寶宇 3年條에도 그 自身을 ‘高麗國王大欽茂 …… ’라 自稱하고 또 日本에서의 返書에도 ‘敬問高麗王 …… ’이라고 渤海王을 高句麗王으로 칭하였다는 점 ② 日本側記錄에 보이는 日本에 派遣된 渤海使臣 85名 中 12名이 옛 高句麗王姓인 高氏이고 기타의 副使를 합쳐 거의가 漢族名이며 滿洲名은 靺鞨隨行員 6名 뿐이었던 점 ③ 唐에서도 이 王國을 表面上으로는 渤海라고 稱하지만 一般人은 역시 高[句]麗라고 칭하였던 점 등을 들어 開國者 大祚榮은 『舊唐書』의 記事대로 高句麗人이며, 王과 上流階級을 形成한 中樞勢力은 高句麗遺民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으나, 被支配層은 靺鞨이었을 것이며, 渤海王國의 正體는 高句麗遺民이 靺鞨族을 利用하여 國家光復에 成功한 것이라고 하였다. 白鳥庫吉이 異論이 많았던 渤海의 五京制度까지도 高句麗 本來의 制度를 따랐으며 다만 上京을 北에 두었던 것은 中國의 影響이라고 부언한 것도 渤海가 高句麗王朝의 延長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는 試圖에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그러나 韓國史의 獨自的인 展開를 否定하는 植民地史觀의 體系化를 그 學的 生活의 信條로 삼고 있던 稻葉岩吉의 奇論이 잇달아 發表되었다. 즉, 그는 靺鞨을 種族名으로 보지 않고 梵語에서의 ‘大’의 뜻인 Maha로 우겨 ‘大人’의 뜻으로 새겨,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姓大氏’의 大氏를 그 譯字로 보았다. 따라서 種人의 名稱으로서는 肅愼에서 곧 女眞(直)으로 되는 것이며, 女眞의 名稱은 契丹 以後의 것이 아니고 渤海의 始祖 乞乞仲象의 乞乞이 즉 女直(『遼史』의 表記)의 初音이라는 것이다. 즉. 仲象·祚榮은 女眞人의 巨酋이며 그 巨酋가 中心이 되어 渤海王國을 建設하였던 것이다. 이 王國은 女眞人만의 힘이 아니고 高句麗遺民의 合力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舍利乞乞仲象’의 舍利가 女眞語의 ‘泉’의 뜻이며 高句麗大姓 泉氏(泉蓋蘇文의 家門)과 關係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渤海王國의 主權者 및 支配階級은 松花·黑龍 兩江의 女眞人이었던 것 같으나, 그 文化는 거의 高句麗人에게 장악되고 있었다는 要旨이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pp.108~113). 古代 滿洲族에 대한 號稱의 系列조차 無視하고 난데없이 梵語까지 이에 結付시킨 이 奇論은 渤海史와 高句麗史와의 關係를 認定하지 않으려는 底意에서 나온 것이 너무도 分明하기에 學界에서는 처음부터 疎外되고 있다.
渤海王室과 그 中樞勢力을 高句麗로 보지 않으려는 日本學界의 경향은 第2次世界大戰後에도 이어져 和田淸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 大祚榮의 出自를 ‘高麗別種’이라는 ‘別’字가 붙는 것으로 보아 高句麗의 同族이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粟末靺鞨’을 ‘高麗別種’으로 表現한 것이라고 推斷하였다(「渤海國地理考」p.59).
한편 韓國學界에서는 李承休의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柳得恭의 『渤海考』 등에서 大祚榮의 出身이 ‘本高麗別種也’라는 이 記事에만 依據하여, 渤海史를 韓國史의 體系에 넣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 내려 왔으나, 日本學界의 이와 같은 異說에 자극받아 大祚榮과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을 이루었던 種族의 究明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 朴時亨은 『三國史記』「新羅本紀」元聖王 6年 3月條의 ‘以一吉凔伯魚 使北國’ 또는 憲德王 4年 秋9月條에 보이는 ‘遣級滄崇正 使北國’이라는 ‘北國’은 渤海國을 가리킨 것이며, 新羅에서 韓國史를 新羅를 南國으로 한 南北朝史로 보아 同族意識에서의 一時的인 領主임을 認識하고서의 號稱이었다는 等의 推斷過程을 거쳐 渤海王室이 高句麗係임을 力說하고 있다(「渤海史硏究のために」pp.169~211).
그리고 朱榮憲은 渤海王國의 古墳·都市와 建築·瓦當 등 遺物을 高句麗의 그것과 比較하여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高句麗의 繼承者로서의 渤海國文化를 說明하려고 試圖한 바 있다(『渤海文化』pp.138~167).
한편 李龍範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大祚榮의 出自를 否定하고 ‘ ……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 ’라고 한 것이라던가, 最初의 建國地인 『舊唐書』의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고 있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는 당시의 東北亞細亞史의 硏究로서는 無理가 많다는 점,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階層 및 文化의 內容 등을 들어 渤海王國의 主體는 高句麗遺民이었음을 主張하였다(「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
이 問題에 관한 硏究의 視角을 中國과 蘇聯으로 돌려보면 먼저 中國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意味에서 問題가 많은 『滿洲源流考』「部族」渤海條를 비롯하여 長順의 『吉林通志』·王世遵의 『寧安縣志』에서의 古典的 硏究와, 1919年에 唐晏이 엮은 『渤海國志』나 1931年에 黃維翰이 엮은 『渤海國記』 등에는 大祚榮의 出自가 깊이 究明된 자취가 없다.
이 問題의 해명에 本格的으로 努力을 기울인 것은 1934年에 金毓黻이 엮은 『渤海國志長編』부터이다.
즉, 金毓黻은 『渤海國志長編』의 여러 項目에서 渤海王國이 靺鞨族의 國家인 것을 堅持하다가 叢考의 一項에서만은 日本側史料에 依據하여 渤海王國이 高句麗의 後繼者인 것을 認定한 바 있다.
中國政權이 수립된 후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를 비롯하여 豆滿江 流域의 渤海遺跡發掘 및 貞惠公主墓·貞孝公主墓의 調査에서 많은 成果를 올렸으나, 中國學界가 보여준 이와 같은 硏究熱의 거의 대부분이 ‘渤海史是我們偉大祖國 以漢族主體的多民族史州中的 重要篇章’이라는 즉, 中國史속의 少數民族史의 一分野로 하려는 데 있었기에 渤海文化 中에 高句麗的 要素를 충분히 認定하면서도 그 主體를 高句麗 遺民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王承禮, 「敦化六頂化渤海墓淸理發掘記」p.200).
王承禮는 唐代의 渤海王國을 『新唐書』渤海傳의 서술대로 ‘是粟末靺鞨’이라 斷定하고서 遺蹟을 發掘하였던 것이며, 그는 다시 1982年의 發掘報告書에서는 ‘總之渤海文化可以說就是唐文化 渤海文學就是唐代各民族學的組成部分 …… ’이라고까지 極言하여(「唐代渤海貞惠公主墓誌和貞孝公主墓的比較硏究」p.185), 渤海王國에 미친 高句麗의 文化要素까지도 말살하려는 傾向조차 보이고 있다.
中國學者의 이와 같은 경향은 陳顯昌에게도 보이고 있다(「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pp.85~89; 「渤海貞惠公主墓碑的硏究」pp.69~70).
한편 1860년의 露·淸北京條約으로 渤海王國의 定理府·率賓府를 포함한 지금의 沿海州를 차지하게 된 帝政 러시아의 渤海史硏究의 傳統을 이어받은 蘇聯에서의 渤海建國者에 관한 見解는 또 日本이나 中國과는 다른 것이 있다.
즉, 1852年에 發表된 V. Gorskii의 『滿洲家屬의 始期』 以後 P. Katalov·M.G. Shevelev·F.F. Busse·D.M. Pozdnev 등의 渤海史硏究를 이어받은 소련 學界의 경향은 最近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A.P. Okladnikov에게서 그 一面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極東考古學調査隊를 이끌고 沿海州 一帶의 調査發掘成果를 바탕으로 내린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대한 Okladnikov의 結論은 渤海王國의 文化가 高句麗·新羅와 가장 共通性이 많은 것은 認定되나, 그 王國의 主體種族만은 高句麗가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대로 粟末靺鞨이었다고 主張하고 있다(「The Mo-Ho Tribes and the P'o-Hai State」pp.170~200; 『Советского Папьнего Бостока』pp.194~205).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관한 소련학자들의 이와 같은 主張은 渤海王國의 率賓府, 定理府 등 沿海州를 領土로 占有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渤海史의 一部가 그들의 地方史 또는 少數民族史의 一部라고 하는 政策的인 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渤海國史를 高句麗史와 連結지어 韓國史의 體系에 넣어 說明하는 것보다 이미 歷史에서 그 자취가 없어진 靺鞨族과 連結짓는 것이 有利한 까닭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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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旣滅, 祚榮率家屬徙居營州.344344 營州 建國傳說時代부터 近世까지 中國에서 불리어져 내려왔던 地名이다.
(가) 建國傳說期의 州名: 營州에 대하여 『爾雅』「釋地」에는 ‘ …… 燕曰幽州 齊曰營州 …… ’라고 하여 이른바 黃帝 또는 顓頊의 九州 속에 넣고, 『疏』에는 「博物志」에 ‘ …… 營與靑同 海東有靑丘 齊有營丘 豈是名乎’라고 하여 지금의 山東半島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顧祖禹의 『讀史方輿紀要』歷代州域形勢 唐虞三代條에는 ‘ …… 舜攝帝位命禹平水土 以冀·靑地廣 ·…… 又東北醫無閭地 爲幽州 又分靑州東北遼東之地 爲營州書曰 肇十有二州’라고 하여 中國建國傳說의 帝王 舜이 靑州의 東北 遼東의 地를 나누어 營州로 하여 全國이 12州가 되었다고 한다.
(나) 後趙의 地名: 羯族政權의 石虎가 지금의 北部中國 灤河·永平 附近에 설치한 州名이며(『晋書』「石季龍載記」), 『資治通鑑』「晋紀」의 胡三省注에는 遼西·北平의 2郡을 領하였다고 한다.
(다) 北魏시대의 營州: 『魏書』「地形志」의 ‘營州治和龍城 太延二年爲鎭 眞君五年(A.D. 444) 改置 永安未陷 天平初(A.D. 534)復’이라는 記事에 따르면 北魏에서 置한 營州의 治所는 今日의 熱河省 朝陽인 和龍城이었다. 昌黎·建德·遼東·樂良·冀湯·冀陽·營丘의 7郡을 領하였다.
한편 『讀史方輿紀要』直隷 萬全都指揮使司 附見 大寧城條에
古營州地 夏商時冀州地 周爲幽州地 春秋時 亦爲山戎地 戰國時屬燕 秦屬遼西郡兩漢因之 …… 宋元嘉十三年(436) 後魏取其地 亦置昌黎 建德等郡 兼置營州置焉 …… 隋開皇三年 取其地 廢郡 仍曰營州 唐初爲韓唐莫奚所據 貞觀十九年 征高[句]麗 駐驛于此 諸奚臣附 因復置營州 幷置饒樂都護府 天寶後府廢 ……
라고 한 것으로 보면 唐初부터 營州는 唐帝國이 東北控制의 據點으로 삼아 왔었다.
大祚榮과 靺鞨의 乞四比羽가 무리를 이끌고 東走하였다는 營州는 唐帝國의 東北地方控制의 據點이었던 現在의 朝陽 附近이다.
<참조>
『宋書』高句麗傳 註 8)
營州
營州는 옛 12州의 하나로 舜이 靑州의 東南 遼東의 땅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한다.
대략 지금의 河北省에서 遼寧省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歷代의 營州는 그 領域과 治所가 다소 변하여 갔다. 당대인 晋代에는 전하는 바 없었으나 北魏의 營州는 『魏書』「地形志」에 의하면 領郡이 6이고 領縣이 14이며, 治所는 지금의 熱河省 朝陽縣인 和龍城이다.
≪參考文獻≫
『爾雅』卷7「釋地」
『疏』「博物志」
『魏書』卷 106「地形志」上.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1 歷代州域形勢 唐虞三代條; 卷18 直隷萬全都指揮使司 附見 大寧城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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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歲通天年, 契丹345345 契丹 東部 蒙古에서 일어난 部族名이다. 西紀 907年에서 1,124年까지의 遼帝國을 세운 部族이며, 東은 滿洲의 渤海故地, 西로는 內外蒙古의 全域과 一時는 中央亞細亞까지, 南은 北京·天津을 包含하는 長城內의 漢民族地域에 걸치는 大帝國을 建設하였다.
(가) 唐 以前의 契丹族
‘契丹’의 이름이 中國史書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契丹傳이다. 文獻은 아니지만 더 오래 되는 것은 現在 熱河省 朝陽縣의 東인 義縣 附近의 萬佛洞에 있는 北魏 ‘景明三年(502)五月九日造’라는 銘이 있는 刻文 中의 ‘尉喩契丹員使員 外散騎常侍韓貞 …… ’이라는 文字이다.
즉, 北魏의 使者 韓貞이 契丹으로 가는 途中에 이곳에 들려 새겼던 것이다.
『魏書』契丹傳을 비롯한 中國史書가 전하는 것을 종합하여 보면 北魏 初의 契丹族은 Siramuren(西刺木倫)이라는 大河의 南方에서 遊牧生活을 하던 騎馬民族이었다. Siramuren은 그 南에서 東北流하여 Siramuren과 合流後 遼河를 이루는 老哈河(遼代의 土河)와 더불어 東蒙古의 兩大河이다. 또한 唐代 以前에는 作樂水·饒樂水·弱洛水·如洛瓌水라 칭해지고 唐 以後에는 漢水·梟羅箇沒里·世里沒里로 칭해진 河水이며, 契丹族 成長의 젖줄이었다.
이 部族은 5世紀 後半에는 廣開土王의 膨脹政策을 繼承推進한 高句麗의 遼河서쪽 進出과 西方의 柔然의 侵軼을 두려워하여 北魏에 內附를 칭하고, 그 保護下에 白狼水(大凌河)의 東方 一帶에 南移하게 되었다. 契丹別部인 出伏部 등의 契丹族이 高句麗에 臣屬한 것도 契丹의 이 南遷의 混動期인 것으로 보인다(『遼史』 「營衛志」 部族條).
그 후 北齊의 무렵에는 다시 더 南下한 것 같으며 文宣帝가 天保 4年에 契丹을 親征하였을 때는 平州(河北城 盧龍縣)에서 軍을 나누어 北上하여 이를 大破하고, 營州에 이르러 班師하였던 것이다(松井等, 「契丹勃興史」pp.140~145;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나) 唐初의 契丹
中國의 統一國家를 이룩한 隋代에 이르러서도 契丹에 대한 高句麗의 危脅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隋書』「煬帝本紀」大業 8年 正月 壬午條에 보이는 煬帝의 高句麗에 대한 宣戰의 詔書에 ‘ …… 曾不懷思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 ’이라고 高句麗의 契丹包攝을 비난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李龍範, 앞의 논문).
隋가 滅亡하고 唐이 건국되자 唐 太宗은 契丹西에 隣接하여 契丹과 겨루어 오던 遊牧民族인 庫莫奚를 支配하기 위하여 지금의 Siramuren 上流 巴林石橋 附近에 饒樂都護府(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37)를 설치하고, 아울러 契丹을 지배하기 위하여 營州 附近에 松漠都護府 (松井等, 앞의 논문, pp.155~156)를 設置하였다.
唐初의 契丹은 『遼史』에서의 소위 大賀氏 八部時代이었으며, 唐 太宗이 總首인 窟哥를 都督으로 任命하여 國姓 李氏를 賜하고, 그 麾下의 諸酋를 各各 刺使의 官職에 任命하여 懷柔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中樞部는 營州 附近에서 살면서 唐帝國의 保護를 받는 熟蕃的 生活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則天武后의 萬歲通天 年間에 叛한 松漠都督 李盡忠이 營州 城傍에서 일어나 곧 營州城을 陷落시키고 長官 趙文翽를 殺害했다는 것은 그 主力이 營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을 말하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參考文獻≫
『隋書』卷4「煬帝本紀」大業 8年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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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盡忠346346 李盡忠 契丹人으로서 松漠都督이 되어 唐 高宗 永徽 5年에 高句麗의 攻擊을 新城에서 막아 이를 大破하였던 李窟哥의 孫子이다. 則天武后의 萬歲通天 元年(696)에 그의 妻兄인 契丹人 孫萬榮과 더불어 營州(現 朝陽縣) 附近에서 唐에 叛亂을 일으켜 營州를 陷落시키고 營州都督 趙文翽를 殺害하였다.
武后가 28將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자 그 軍은 大敗하여 孫萬榮은 叛兵의 前鋒으로서 長城 以南에 侵入하였던 것이나 同年 10月 李盡忠은 卒하였다.
李盡忠의 이 叛亂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翌年인 神功 元年 6月에 孫萬榮이 그의 奴에게 被殺된 後였다(松井等, 「契丹勃興史」pp.155~162).
≪參考文獻≫
松井等, 「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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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叛,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保阻以自固. 盡忠旣死, 則天347347 則天[武后] 唐帝國 第3代 高宗의 后이다. 幷州 文水人이며 武士彠의 딸이다. 14歲에 宮에 들어가 太宗을 섬겨 寵愛를 받았으나 太宗의 崩去 後에는 唐室의 慣例에 따라 諸嬪들과 같이 比丘尼가 되었다.
그 후 美色으로 새로 즉위한 高宗의 命에 따라 다시 入宮하여 嬪의 身分인 昭儀로서 高宗의 총애를 홀로 차지하고 正后를 모함하여 축출한 후 皇后가 되었다.
高宗이 신체적으로나 정신면에도 허약한 것을 기화로 唐帝國의 정치와 군사권력을 독점하더니, 683년 12월 高宗이 崩去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中宗을 다음 해인 嗣聖 元年(684) 2月에 廢位시키고, 高宗의 第8子 豫王 旦을 세워 睿宗이라 하였으나, 모든 國政은 大小를 막론하고 그 손아귀에 넣었다.
특히 垂拱 2年(686) 2月에 稱制한 후에는 이미 唐室은 隴西 李氏의 王權이 아닌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이어 唐室의 屬籍을 없애고 宗室의 태반을 숙정한 후 690年 9月에는 國號를 周로 바꾸고 則天武后 스스로가 帝를 칭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705년 正月 中宗이 復位할 때까지의 15년간 唐帝國의 王權은 명실공히 武氏王朝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參考文獻≫
『舊唐書』卷6「則天武后本紀」
『新唐書』卷4「則天順聖武皇后本紀」; 卷76「則天武皇后列傳」
趙翼, 『二十二史箚記』卷19「唐女禍」·「武后之忍」·「武后納諫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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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348348 天門嶺 天門嶺의 位置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와의 分水嶺을 이루고 있는 長嶺子가 遼東에서 渤海의 國都에 이르러서는 道路의 要衝地라는 점과, 大祚榮이 營州에서 東方으로 탈출하여 지금의 輝發河邊에 있었던 것을 唐軍이 추격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지금의 長嶺子를 넘었을 것이라는 推斷에 따라 이를 遼寧省 東南方의 長嶺子로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p.410~411).
한편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 太白山의 東北인 東牟山이었던 바 天門嶺은 이 東牟山이 아닌가 推定하였다(「渤海考」pp.112~113).
≪參考文獻≫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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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王師大敗, 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349349 奚 庫莫奚라고 하는 部族名을 줄인 것이며 契丹族과 더불어 東胡의 別種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部族의 原住地에 대하여는 白鳥庫吉이 『魏書』庫莫奚傳의 ‘登國三年(388) 太祖(拓跋珪)親自出討 至弱洛水(Siramuren)南 大破之 獲其四部落馬牛羊豕十餘萬’이라는 記事와 『新唐書』奚傳의 記事를 참조하여 Siramuren 上流·老哈河流域으로 推斷한 바 있다(「東胡民族考」p.1,134).
『魏書』庫莫奚傳에 따르면 5世紀末에서 6世紀初에는 安州의 北, 즉 지금의 萬里長城 古北口外의 地域이 모두 庫莫奚의 住地였던 것으로 보인다.
唐 太宗이 지금의 Siramuren인 饒樂水 上流에 饒樂都護府를 設置한 것은 이 奚族을 統治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契丹族과 많은 마찰도 있었으나, 遼代에는 奚大王府를 두어 이들을 統治하였다.
<참조>
『新唐書』高句麗傳 註 75)

4세기부터 東部 蒙古 老哈河유역에서 遊牧하던 鮮卑族의 一部族으로 漢水유역의 契丹族과 인접해 있었다. 처음에는 庫英奚라 불리었으나 隋代 이후에는 奚라 略稱하였다. 7세기 前半에 唐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중엽 安史의 亂으로 唐의 國力이 쇠해지자 크게 세력을 떨쳐 國家를 세웠다가 10세기에 遼에 멸망하였다.
≪參考文獻≫
『魏書』卷100「列傳」庫莫奚條.
白鳥庫吉, 「東胡民族考」『史學雜誌』21編 7號,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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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降突厥,350350 突厥 蒙古系로 믿어지는 柔然族의 屬部였으며 土耳其의 民族으로서, 그 名稱은 土耳其系와 同一한 言語上의 特徵을 가진 全民族에게까지 호칭되기에 이르렀다.
Pelliot는 突厥이라는 漢名을 蒙古系語(柔然) ‘Türküt’라는 語의 複數形인 것이 틀림없으며, ‘Türk’는 ‘强力’을 뜻한다고 하였다(『L’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p.787).
5世紀初에는 居住地인 Altai山麓에서 鐵工으로 成長하였으며, 6世紀初부터 그 一部인 에 柔然에 대하여 自立을 企圖하는 운동을 자주 일으키더니 551年에는 北魏와 제휴하여 柔然의 可汗 阿那壤을 攻殺하였다.
突厥部酋 土門(Bumin)이 551년 Orkhon上源에 龍庭을 設置하였으나 翌年인 552年에 死歿하자 그 領土는 分割되고 土門可汗의 長子 木杆(553~572)이 內外蒙古의 全域을 領有하여 이에 東突厥汗國이 出現되었다.
한편 土門의 弟인 葉護(突厥官名, 汗) 室點密(Istämi)은 Zungaria·黑Irtish河·伊黎河·Talas河 流域의 統治權을 얻어 西突厥汗國을 建設하였다.
突厥의 이 兩汗國 中에서 高句麗와 政治·軍事·外交面에서 긴밀한 접촉을 가졌던 것은 東突厥汗國이었다. 즉, 東突厥의 木杆可汗時에 그 勢力은 Siramuren流域까지 진출하여 560年 頃에는 契丹族에도 그 支配權이 미치게 되어 西進을 企圖하던 高句麗와의 對立을 피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東突厥은 그 후 木杆可汗의 子인 位鉢可汗(573~581)에 이어 沙略鉢可汗(581~587)의 存在時부터 突厥族團結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약 3世紀間의 分斷을 극복하고 581년에 統一國家인 隋帝國을 이룩한 文帝 楊堅이 突厥勢力의 擴張에 危懼心을 품고 그 分散策을 外交政策으로 추진한 까닭이다.
隋의 突厥勢力分離策으로 東과 西의 兩突厥汗國이 크게 對立되었을 뿐 아니라 東突厥內部의 攩亂策으로 東突厥의 勢力도 분열되었다.
즉 東突厥의 都籃可汗(587~600)時에 反對勢力을 형성한 突利를 隋에서 수용·보호하여 그 餘黨을 모아 Ordos에 거주하게 하고 屬邦으로 하였던 까닭이다. 이로써 東突厥의 政權은 隋의 보호를 받던 突利와 그의 아들인 始畢可汗의 손에 장악되었다.
隋·唐帝國의 交替라는 政治的 混亂時期에 있어서 東突厥은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新可汗 頡利(620~631)는 西紀 624年에 唐都인 長安을 포위하는 등 唐 太宗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바도 있었다.
이와 같은 東突厥의 氣勢가 꺾인 것은 630年에 太宗에 의하여 거의 殲滅的인 敗戰을 겪고서부터이며 그 후 약 50年間은 唐에 順從하는 蠻族集團에 지나지 않은 存在가 되었다.
唐 高宗의 優柔不斷과 則天武后의 陰謀가 화근이 되어 西北아시아와 西南아시아에서의 唐勢의 全面的인 退縮은 突厥族의 세력만회에는 더 없는 호기였다. 高宗治世의 後半期初인 665年에 西突厥의 獨立回復에 이어 吐蕃(Tibet)의 ‘비단길’侵入이 그 著例였다.
특히 東突厥이 옛 王家의 末裔인 骨咄祿(Qoutlough·幸福한 사람)을 받들고 再起한 것은 唐에 큰 위협을 던졌던 것이다. 東洋史에서 유명한 Orkhon河畔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文에 보이는 Eliterich可汗은 바로 이 骨咄可汗인 것이다.
이 東突厥汗國은 Orkhon河上源인 烏德鞬山(Otükänd, 지금의 汗愛山脈)에서 再建되어 매년 長城 附近과 山西를 유린하고 687年 4月에는 北京 西北方의 昌平까지도 그들의 騎兵이 出沒하는 形勢에 이르렀다.
이 骨咄祿可汗의 歿後에 즉위한 黙啜可汗(691~716)의 在任時는 東突厥의 最盛期였다. 그는 자주 唐에 侵入하여 北京 附近에까지 出沒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契丹에 대항하기 위하여 唐과 협력한 일도 있었고, 大祚榮에게 東走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契丹人의 松漠都督 李盡忠과 同盟을 맺은 일도 있었다.
東突厥은 黙啜可汗의 戰死後 毗伽可汗(Bilgä, 716~734) 時까지 그 國勢가 持續되었던 것이나, 이 毗伽可汗이 毒殺된 후에는 內部에 혼란이 일어나 744年 그 屬下인 土耳其種族인 回鶻族(Uighur)에 의하여 滅亡되었다(René Grousset, 『アジア遊牧民族史』pp.128~160).
[突厥과 高句麗]
東突厥과 高句麗가 직접 접촉하고 있었던 一例는 『隋書』「煬帝本紀」大業 3年 8月 乙酉條에 隋 煬帝가 啓民可汗(突利)의 牙帳으로 巡遊하여 우연히 그곳에서 嬰陽王이 보낸 高句麗使臣을 목격하고 ‘歸語爾王 當早來朝見 不然者 吾與啓民巡彼土矣’라고 한 記事에서 엿볼 수 있다.
이 時期에 있어서의 契丹支配를 둘러싼 突厥·隋·高句麗의 극심한 對立이 이 記事에 잘 나타나 있다(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한편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의 毗伽可汗碑와 屈特勤(Kul Tegin)碑에 土門·室點密 兩可汗 死亡時 弔問한 國名이 적혀 있는 바 ‘앞에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bökli cölügil(國)·tabrač(唐)·türüt(吐蕃)·par(波斯) …… ’ 또는 交戰한 바 있는 國名에 ‘앞에는 해뜨는 쪽으로 bökli可汗에까지 …… ’라고 하는 ‘bökli cölügil’ 또는 ‘bökli’에 대하여는 解讀에 많은 異論이 전개되었다.
즉, ‘bökli cölügil’에 대하여 Radlott는 ‘bökli草原의 部族’이라 飜譯하고(『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 또 V. Thomsen은 ‘먼 bökli族’으로 解釋한 바 있다(『Inscriptions del Orkhon』).
한편 岑仲勉은 『通典』高句麗條의 ‘其後 東部大人蓋蘇文 弑其王高武 立其姪藏爲主 自爲莫離支 …… ’라는 記事를 들어 ‘莫離支’의 莫離는 곧 ‘Bökli’의 音寫라고 하여 官名이 國名으로 轉化한 것으로 보았다(「跋突厥文闕特勤碑」pp.253~254).
‘bökli cölügil’에 대한 諸解釋에서 이를 韓國史와 關連시킨 것이 岩佐精一郞이다. 즉, 그는 貊句麗(Miak-Kjiu-Lie)의 ‘M’音은 土耳其語系에서는 ‘B’音으로 轉音되는 까닭에 ‘Biak-Kjiu-Lie’로 되며 그것이 다시 ‘bökli’가 되었다는 音韻上에서뿐아니라, 貞觀 18年에 있었던 唐 太宗의 高句麗 親征에 突厥部의 各部酋가 多數 唐軍에 參戰하였다는 歷史的 事實을 들어 貊句麗 즉, 高句麗인 것으로 推斷하고, ‘bökli’ 뿐아니라 ‘cölüg’는 後日에 그 解讀을 기약하면서도 ‘아마도 蒙古에 高麗를 指稱하는 「莎郞合」·「肅良合」과 關係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pp.51~59).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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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é Grousset著·後藤十三雄譯, 『アジア遊牧民族史』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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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路阻絶,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衆東保桂婁校勘 201201 『新唐書』「渤海傳」에는 ‘挹婁’로 되어 있다.닫기之故地,351351 桂婁之故地 『舊唐書』渤海靺鞨傳에 大祚榮이 무리를 이끌고 東으로 나와 ‘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東牟山에 웅거하여 城을 쌓고 …… ’에서 보이는 ‘桂婁’는 『三國志』「東夷傳」에서 高句麗의 5族中 王族인 桂婁部의 옛 땅이라는 뜻인 것이 틀림없다.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 高句麗 ‘桂婁部의 옛 땅’으로 적혀 있을 뿐 아니라 『舊唐書』渤海靺鞨傳에는 唐에서 大祚榮의 嫡子를 ‘桂婁郡王’으로 封하였던 것이 明記되어 있고, 『册府元龜』에는 大祚榮의 嫡子 大武藝 뿐 아니라 唐 玄宗의 開元 8年에는 大武藝의 嫡子 大都利行에게도 ‘桂婁郡王’을 承襲케 하였다는 記事가 보인다.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이 記事는 渤海王國과 高句麗와의 關係 뿐 아니라 東牟山 附近이 桂婁部의 故地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는 경우에는 高句麗社會를 構成하는 五族 中에서 桂婁部에 관하여 종래와 다른 解釋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大祚榮이 建國을 이룩하게 된 地域名에 대하여 곧 異說이 나왔다.
즉, 王溥의 『五代會要』渤海條에 渤海王國의 主體를 ‘高句麗之別種’이라 한 것은 『舊唐書』渤海靺鞨傳과 同一하나, 이 記事의 앞에 ‘本號靺鞨’이라고 하여 靺鞨族과 ‘高句麗別種’을 동일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으로 삼았던 地域을 가르켜 ‘保據挹婁之故地’라 하여 『舊唐書』에 보이는 ‘桂婁’를 ‘挹婁’로 바꾸어 記錄하고 있다.
王溥는 渤海王國의 主體가 高句麗를 形成한 소위 5族 外의 어떤 支派였던 것으로 보았던 까닭에
‘本號靺鞨 蓋高句麗別種也’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地域에 대해 어떤 典據에 따라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典據도 분명치 않은 이 王溥의 改字를 더 發展시킨 것이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渤海建國者의 出自 및 그 建國地에 관한 記事이다.
즉, 『新唐書』渤海傳에서는 『五代會要』의 ‘渤海 蓋高句麗別種也’가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로 바뀌어졌을 뿐 아니라 그 建國地에 대하여도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를 ‘挹婁之東牟山’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新唐書』가 渤海의 建國地를 ‘挹婁之東牟山’이라 한 것은 어떤 證明이 있어서가 아니라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라는 記事에 다시 『新唐書』渤海靺鞨傳의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라는 一句를 連結하여 표현한 記事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新唐書』에서 渤海王國을 建國한 主體種族을 粟末靺鞨로 斷定한 論據도 분명치 않다.
즉, 『新唐書』渤海傳에서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으로 되어 있는 粟末靺鞨은 北流 松花江의 吉林 地方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靺鞨族을 指稱한 것이며,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그 巨酋 突地稽의가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遁走하여 隋의 開皇 初부터 遼西의 柳城(郡治 營州)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部族이다.
따라서 突地稽의 一族이 大氏라는 明證이 없을 뿐 아니라 이 粟末部의 主動勢力이 遼西에서 東走하여 渤海王國을 建國하였다고 하면, 이는 『新唐書』渤海傳의 ‘附高麗者’가 될 수 없다. 또 突地稽의 率衆遁走 時 그곳에 殘存하여 高句麗의 下部隷民으로 있던 粟末靺鞨로 본다면 ‘附高麗者’라는 一句와는 부합되나, 『新·舊唐書』에 보이는 渤海建國者의 遼西로부터의 東走事實과는 전연 어긋난다.
한편 王溥의 『五代會要』에 보이는 渤海王國의 建國地인 ‘挹婁之故地’의 ‘挹婁’는 漢代 以後 魏·晋 까지 漢民族이 대체로 南으로는 長白山에서 北으로는 松花江, 東으로는 沿海州 一帶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에 거주하던 未開民을 總稱한 것이며, 이 名稱에 포괄되는 種族의 槪念과 地域은 극히 막연하였던 것이다. 北魏 以後 隋代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의 部族은 粟末靺鞨을 비롯하여 그 住地에 따라 7部로 區分되어 號稱되고 있었다(『後漢書』挹婁傳; 『晋書』肅愼氏傳; 『魏書』勿吉國傳; 『隋書』靺鞨傳).
한편 『新唐書』渤海傳에서는 第10代 宣王 大仁秀가 海北諸部를 平定하여 大境字를 開拓한 사실 등을 서술하고 ‘至是遂爲海東盛國’이라고 하며 그 行政區域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行政區域이 『舊唐書』나 기타 史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點으로 보아 張建章의 『渤海國記』같은 것에 依據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渤海疆域의 比定에는 『新唐書』가 유일한 基本史料로 되어 있지만, 『新唐書』에서는
地有五京 十五府 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 曰龍泉府 …… 其南爲中京 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
라고 上京과 中京의 行政區域을 설명한 데 이어 ‘Ꞑ貊故地爲東京’·‘沃沮故地爲南京’·‘高麗故地爲西京’·‘扶餘故地爲扶餘府’·‘挹婁故地爲定理府’·‘率賓故地爲率賓府’·‘拂涅故地爲東平府’·鐵利故地爲鐵利府’·‘越喜故地爲懷遠府’ 등 渤海王國의 地名을 밝히는 데에 옛 部族居住地域名을 이끌어 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이 記事에서 中京의 說明에는 옛 居住部族名을 밝히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五代會要』나 이를 追從한 『新唐書』에서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것으로 明記되어 있는 ‘挹婁의 故地’가 渤海王國의 ‘定理府’로 적혀 있는 것은 이 문제의 해결에 매우 주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中京顯德府는 第3代 文王이 上京으로 遷都하기 전까지 首都였던 古都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古都 中京에만 原住部族名이 빠져 있어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여기서 ‘挹婁之故地’로 되어 있는 定理府는 渤海王國의 行政中心部에서 본다면 邊僻地인 現 蘇聯領 沿海州의 Suchan으로 比定되고 있는 까닭이다(和田淸, 「渤海國地理考」p.87).
원래 挹婁의 故地로 보아도 무방한 上京龍泉府는 ‘肅愼의 故地’ 또는 ‘率賓의 故地’·‘高麗의 故地’로 세분하여 놓고 豆滿江 下流域인 中京顯德府만은 그러한 이름을 붙여 밝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現在의 Nikolsk附近으로 比定되는 率賓府와 (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18; 和田淸, 앞의 논문, p.84 및 p.107) 유독 인접하고 있는 定理府만 ‘挹婁의 故地’로 指稱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大祚榮의 建國地가 沿海州가 아닌 것은 渤海史에서는 周知의 사실로 되어 있는만치 『新唐書』의 撰者가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라는 記事를 받아들여 大祚榮의 建國地마저 ‘挹婁之東牟山’으로 하여 같은 渤海傳에서 前後가 矛盾되는 記事를 남긴 것은 杜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新唐書』의 撰者 뿐 아니라 日本의 松井等(앞의 논문, p.409)·津田左右吉(「渤海考」pp.114~117)·今西龍(「高句麗五族五部考」p.411) 등이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渤海國의 建國地에 대한 ‘桂婁之故地’라는 記事를 부정하고 『新唐書』의 ‘挹婁之東牟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渤海史硏究에 있어서 『新唐書』渤海傳의 권위에 억압되어 추종하는데 지나지 않은 느낌이 보이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上記 日本學者들의 見解에 비하면 金毓黻의 見解는 확실히 참신한 면을 보이고 있다.
즉, 大祚榮 嫡男의 渤海郡王에 대하여 그가 ‘桂婁는 高句麗의 一部族名이었으며, 大氏를 桂婁郡王에 册封한 것은 그 祖先이 옛날 여기에서 살았기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 틀림없다. 뒤에 建國한 땅에 桂婁의 이름이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확실히 卓見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建國地에 대하여 ‘挹婁는 肅愼의 別名이며 그 居住하는 바의 地는 매우 넓어 지금의 吉林 東北部의 땅이 모두 이에 屬한다. 大氏가 建國한 곳은 실로 挹婁이며, 『新唐書』에 桂婁를 고쳐 挹婁라 한 것은 實을 얻었다고 할 것’이라고 한 데 이르러서는 그 論旨展開에서 矛盾撞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누구라도 느끼게 될 것이다(『渤海國志長編』「叢考」).
그의 이와 같은 一貫性없는 論旨는 高句麗王室인 桂婁部의 起源도 北夫餘에서 南下하여 佟佳江 流域에 定着하여 高句麗國을 形成하였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은 中國人이 古代부터 지녀 내려온 先入見이 中世에도 그대로 繼承되어 그것이 현재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까닭으로 보인다.
① 『三國志』「東夷傳」에 보이는 高句麗王國을 形成한 5族에서 消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 또는 『三國史記』에 보이는 椽那部·貫那部·桓那部·藻那部 등의 ‘奴’ 또는 ‘那’가 붙는 部族은 滿洲語 ‘na’에 비추어 보면 ‘水邊溪谷에 居住하는’ 部族이었다는 說에서 본다면 桂婁部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보이는 蓋馬國·句茶國·曷思國·黃龍國과 같은 佟佳江 流域 外의 小國과 같은 즉, 三品彰英이 命名한 이른바 ‘那集團’에 屬하지 않은 部族일 것이다(「高句麗の五族に就いて」). 이것은 이미 三品彰英이 說破한 바 있는 豆滿江 流域의 北沃沮도 高句麗와 同族이었다는 見解에 비추어 보아도 결코 무리한 假說은 아닐 것이다.
② 上記와 같이 高句麗의 成長過程을 豆滿江 流域까지 擴大하여 본다면 「廣開土王碑」에
東夫餘 舊鄒牟屬民 中叛不貢 王躬往□ 軍到餘城 …… 於是旋還 又慕化隨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鴨盧 ……
라는 記事는 充分히 檢討되어야 하겠다.
즉, 이 記事에 보이는 ‘味仇婁’는 『三國志』「東夷傳」東沃沮條의 ‘置[買]溝婁’와 同書 「毋丘儉傳」의 買溝[婁]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그것이 豆滿江 下流의 어느 地點인 것은 『三國志』「毋丘儉傳」의 宮(東川王)을 쫓아 魏軍이 ‘過沃沮(지금의 咸興 附近)千有餘里 至肅愼界 …… ’하였다는 記事에서도 알 수 있다.
이 味仇婁가 있는 東夫餘는 西晋의 太康 6年(285)에 夫餘本國이 慕容廆에 破國되어 그 王 依羅의 自殺 후, 依羅의 子弟들이 東間島로 亡命한 뒤 永樂 20年(410)에 廣開土王의 征伐로 討滅되기까지 存續한 亡命政權이었다. 豆滿江下流인 東間島 地方이 「廣開土王碑」에 ‘옛날 鄒牟(朱蒙)의 屬民이었다가 …… 中叛不貢’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地域과 高句麗와의 關係는 高句麗 建國 初부터 밀접하였던 것이며, ‘中叛不貢’의 관계가 된 것은 太康 6年에 東夫餘政權이 이 지역을 占據한 후라고 보아야 하겠다.
豆滿江 下流인 北沃沮가 ‘鄒牟屬民’의 면목을 충분히 나타냈던 歷史上의 事件으로는 毋丘儉의 來侵時에 桂婁部 出身인 高句麗王室이 취한 防戰態勢였다.
즉, 正始 5年(東川王 18年)의 魏軍來攻으로 首都인 丸都가 유린되고 다시 翌 6年의 來攻으로 왕국의 와해까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이 抗戰에서 桂婁部王室이 취한 최후의 防禦線이 바로 豆滿江 下流인 지금의 東間島였던 것은 『三國志』「毋丘儉傳」이나 「東夷傳」東沃沮條에 설명되고 있다.
『三國志』「東夷傳」 高句麗條에는 「魏書」가 撰述되는 무렵의 高句麗 政治權力의 變遷을 설명하여 비록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權이 옮겨졌지만, 消奴部도 宗廟를 세우고 王者의 特權이며 義務였던 靈星·社稷의 祭祀를 거행하고 家臣을 둘 수 있게 되어, 아직 桂婁部에 의한 강력한 中央集權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단계였던 당시로서 미증유의 國難에 대응하는 桂婁部王權이 그들과 전혀 연고없이 豆滿江 下流로 피하여 防禦態勢를 정비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③ 豆滿江 下流는 會寧의 闊潤·慶興의 鹿屯島海汀·富川의 多曷洞·鏡城 등 朝鮮王朝 初期부터 鐵의 貢納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나, 이 지역의 鐵生産이 결코 朝鮮王朝에 들어서면서부터 開鑛되었다고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女眞의 興起가 이 지역의 鐵生産에 힘입었던 바 컸던 것은 『金史』에도 明證이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渤海國이 그 代表的 産物로 자랑하던 ‘位城支鐵’이라고 하는 것도 이 豆滿江 下流의 鐵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54年에서 1961年에 걸쳐 咸鏡北道 茂山邑 虎谷里에서 發見된 初期鐵器時代의 遺物이 西紀前 4世紀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高句麗國이 형성되는 西曆紀元을 前後하는 시기에 豆滿江 下流의 鐵資源開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④ 이제 『新唐書』渤海傳에서 渤海의 地名을 밝히는 데 있어 유독 某某故地라는 것이 빠져 있는 中京顯德府의 位置를 살펴보면, 가장 그 位置比定에 異說이 많았으나 1934年의 鳥山喜一의 發掘報告로서 豆滿江 下流로 流入하는 海蘭河와 朝陽川 兩江 流域의 吉林省 和龍縣 西古城子인 것으로 밝혀져 定說로 되었다(「渤海の國都東京城に就いて」).
中京顯德府로 比定되어 정설로 된 西古城子는 일찍이 津田左右吉에 의하여 中京顯德府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視되어 왔던 敦化縣에서 100有餘里 南쪽에 있으며, 敦化縣에는 大祚榮이 뒤쫓는 唐軍을 피하여 東으로 빠져 나와 建國의 터전을 잡았던 山城이 六頂山 一帶에 櫛比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 비추어 보아 『舊唐書』渤海靺鞨傳에 大祚榮이 渤海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桂婁之故地’는 바로 敦化縣과 和龍縣 등 豆滿江 北岸인 것이 거의 틀림없다. 『舊唐書』의 撰者는 唐에 남아 있던 확실한 文獻에 의거하였을 것이나, 『新唐書』의 撰者는 『五代會要』에 의거하여 이를 ‘挹婁’로 고치고 보니 渤海國의 다른 지역같이 中京顯德府에 ‘某某故地’를 붙일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唐에서 大祚榮의 嫡男을 桂婁郡主에 封한 사실까지도 刪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高句麗國을 形成한 5族中 桂婁部의 原住地를 豆滿江 下流에 비정하는 것이 우리의 國史常識과 너무 어긋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능숙한 製鐵技術을 바탕으로 한 축적된 국력으로 佟佳江 流域의 小政治集團인 소위 ‘那集團’을 支配한 것이 高句麗王權이 아닌가 보고자 한다.
李龍範은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 ‘絶奴部 世與王婚 加古鄒加 …… ’라고 한 것은 豆滿江 流域에서 佟佳江 流域으로 진출한 桂婁部가 이 지역의 旣存勢力인 絶奴部와의 通婚策으로 自部의 孤立化를 調整하면서 專制王權을 굳혀 갔던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高句麗의 成長과 鐵」pp.31~90;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高句麗遺裔」pp.4~18).
≪參考文獻≫
『三國志』卷28「毋丘儉傳」; 卷30「東夷傳」高句麗條·東沃沮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渤海條.
『册府元龜』卷956「外臣部」種族條; 卷964「外臣部」封册條.
『五代會要』卷30 渤海條.
張建章, 『渤海國記』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高句麗遺裔」『中世東北亞細亞史硏究』1975, 亞細亞文化社.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9「叢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の國都東京城に就いて」『朝鮮と建築』14卷 6號, 1935.
今西龍, 「高句麗五族五部考」『朝鮮古史の硏究』1937.
三品彰英,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輯, 1950.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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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婁 新書卷二一九北狄傳作「挹婁」. 據東牟山352352 東牟山 東牟山의 位置에 대하여는 『資治通鑑』玄宗 開元 元年條 胡三省注에는 『新唐書』「地理志」(실은 「安祿山傳」)을 引用하여 ‘天門嶺在土護眞河北三百里’라 하고 있다. 土護眞河는 熱河省 老哈河인 바 唐軍에 쫓긴 高句麗餘類가 이와 같은 地方으로 遁走할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同名異地로 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의 分水嶺에 長嶺子라는 것이 있는 바, 이것을 곧 天門嶺이라고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411). 그러나 그 위치비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津田左右吉의 敦化縣說(「渤海考」pp.123~124), 和田淸이 비정한 지금의 老爺山脈 中의 北甑說(「渤海國地理考」p.62 및 p.74) 등으로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9年 8月 이후 中國學者들의 渤海國 古蹟發掘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이 東牟山은 현재의 敦化縣治의 敖東城 一帶인 것으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化되고 있다. 이것은 敦化城에서 南으로 5km 地點인 六頂山에서 渤海王國 第3代 文王 大欽茂의 第2女 貞惠公主의 墓와 그 墓에서 出土한 墓碑 등에 비추어 보아, 이 地域이 『新唐書』渤海傳에 上京龍泉府로 遷都하기 이전 渤海王國 初期의 首都로 되어 있는 이른바 ‘舊國’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 中國學者들의 일치된 見解인 것이다(金毓黻,「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pp.75~78;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p.298; 王承禮,「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0 및 p.584;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pp.208~209).
≪參考文獻≫
『資治通鑑』卷210「唐紀」26 玄宗 開元 元年條.
金毓黻,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考古學報』1956年 2期.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 6期.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年 11期;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3號.
松井等,「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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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築城以居之.

校勘 201
『新唐書』「渤海傳」에는 ‘挹婁’로 되어 있다.
註 339
渤海靺鞨傳 : 渤海靺鞨이라고 稱하는 靺鞨의 集團名은 中國 史書에는 『舊唐書』 및 『舊唐書』의 이 句節을 옮긴 『舊五代史』의 渤海靺鞨傳이라는 傳名 밖에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의 撰者가 渤海王國의 主體를 渤海靺鞨로 指稱한 참뜻을 지금으로서는 推斷하기 어렵다.
『舊唐書』渤海靺鞨傳은 渤海人에 의해 쓰여진 글이 없다는 점에서 渤海의 國勢나 그 盛衰의 경과를 아는 데 『新唐書』渤海傳과 더불어 渤海史硏究의 基本史料가 되고 있다. 그러나 『舊唐書』渤海靺鞨傳과 『新唐書』渤海傳에는 그 기록이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어 많은 異說을 낳고 있다.
『舊唐書』渤海靺鞨傳은 渤海의 出自·建國過程·位置 및 中國(唐)과의 交涉記事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出自에 대해서 ‘高[句]麗의 別種’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해 『新唐書』渤海傳에서는 栗末渤海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 있어서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었다. 中國과의 交涉記事도 唐 萬歲通天 年間(696)부터 開成 年間(836~840, 渤海 彛震 7~11)가지의 朝貢 및 册封記事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舊唐書』의 記事가 『册封元龜』의 所傳과 일치하는 점이 많은 것에서 그 정확성은 『新唐書』渤海傳보다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史料的 價値에 있어서는 『舊唐書』渤海靺鞨傳의 대부분이 唐朝와의 交涉記事로 이루어져 있고 그 나머지 渤海國의 狀態에 대한 記述은 없는 데에서 『舊唐書』는 『新唐書』渤海傳 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 『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 出版部.
李龍範, 『古代의 滿洲關係』1976, 한국일보사.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洋學報』36卷 4號, 1954(『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東洋文庫)
註 340
渤海 : 渤海라는 名稱은 渤海王國을 뜻하는 것 뿐 아니라 그 以前부터 이미 (가)海洋名 (나)郡名으로 쓰여져 내려 오고 있었다.
(가)海洋名: 『列子』「湯問」의 ‘渤海의 東은 그 幾億萬里인지 모른다’는 것을 비롯하여 『史記』 「封禪書」의 三神山이 있는 海洋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는 記事에 이어 ‘諸仙人 및 不死의 藥이 그곳에 있다’는 神秘한 海洋으로 적혀 있다.
그 位置는 지금의 黃海의 一部이며 遼東半島와 山東半島와의 사이에 끼어 있는 內海이다.
(나) 郡名: 『漢書』「地理志」渤海郡條에 보이는 顔師古의 註에 ‘渤海의 濱에 있으며 이(海洋名)에 따라 (郡의) 이름이 지어졌다’라고 되어 있다.
漢代의 渤海郡은 河北省 河間縣 以東에서 滄縣까지의 지역이며, 北은 安次縣·南은 山東省 無棣縣까지로 比定되고 있다.
한편 顧祖禹의 『讀史方輿紀要』에 따르면 그 후 南北朝時代에 이르러 南朝 宋이 山東省 高苑縣 西北에 渤海郡을 僑置하자(山東省 靑州府條), 東魏에서는 河北省 東光縣에 同一名의 郡을 두었다(河間府條).
그 후 隋의 大業 3년(607)에는 山東省 惠民縣에 두었던 滄州를 渤海郡으로 改稱한 것으로 되어 있다(山東濟南條).
≪參考文獻≫
『史記』卷28「封禪書」
『漢書』卷28上「地理志」渤海郡條.
『讀史方輿紀要』卷13 河間府條; 卷31 山東濟南條; 卷35 山東省 靑州府條.
註 341
靺鞨 : 古代에서 中世에 걸쳐 滿洲 東半部와 黑龍江 下流의 시베리아 地方에 살던 部族의 이름이다.
이 部族이 中國正史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勿吉傳에 ‘勿吉’이라는 이름으로 ‘高句麗’의 北에 있으며 옛 肅愼國’에 속하는 部族으로 적혀 있다.
특히 北魏 孝文帝의 延興 年間(471~477)에는 勿吉이 使者 乙力支를 北魏에 파견하게 되어 北魏에서 지금의 吉林 附近까지의 路順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勿吉은 『北史』勿吉傳에 ‘一曰靺鞨’이라고 적혀 있는 바와 같이 隋·唐時代에는 靺鞨로 表記되었다.
『隋書』靺鞨傳에 따르면 靺鞨은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의 7部로 나뉘어져 松花江 上流인 伯都訥에서부터 松花江 下流 및 黑龍江 下流까지, 東南은 長白山一帶의 넓은 地域에 걸쳐 散居하면서도 統一을 이룩하지 못한 低文化族을 總稱한 것이다.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白山部와 粟末部가 高句麗에 倂合되어 粟末靺鞨의 酋長 突地稽는 그의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逃走하여 隋의 保護를 받았으며, 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靺鞨도 部로서의 존립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조>
『隋書』靺鞨傳 註 2)
靺鞨
靺鞨이란 原音이 Moxo, 또는 Moho로서 滿洲의 女眞語의 물(水)을 뜻하는 Muke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Grebenščikov에 의하면 靺鞨(Moxo)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나타내는 滿洲語의 Muke에서 나오고, 挹婁(Yelou)라는 명칭은 巢窟·洞穴을 뜻하는 滿洲語의 J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Contuibution to the Problem of the History of the Amurland』).
이로 보아 靺鞨이란 말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勿吉(Wu-tsi)이란 말이 “森林에서 生活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과 서로 對比된다. 다시 말하면 滿洲의 自然環境과 氣候區分에 따른다면, 북쪽 寒冷帶 濕潤氣候(Dwb)의 森林地域(Taiga)에서 狩獵을 爲主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勿吉(Wu-tsi)이라고 한 데 비하여, 남쪽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의 강가·평야지역에서 農耕生活을 하거나 狩獵生活에서 農耕生活로 移行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을 靺鞨(Moxo)이라고 한 듯하다. 靺鞨의 7部가 散在한 地域은 대체로 북쪽으로 黑龍江에서 남쪽으로는 豆滿江 一帶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는데, 그 남쪽에 있었던 諸部는 상당히 農耕生活로 移行하였으나 그 북쪽에 있었던 諸部는 古代의 肅愼·挹婁와 마찬가지로 未開한 原始的 狩獵·漁撈生活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왜냐하면 滿洲에 있어서의 生活樣式과 그 文化 정도는 바로 이 自然環環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黑龍江 流域에 있었던 黑水靺鞨이 가장 肅愼·挹婁·勿吉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三上次男은 이들을 한 單位로 묶어 古Asia族으로 보고, 그 나머지 6部는 Tungus系로 보고 있다(『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pp.223~244).
S.M. Shirokogoroff에 의하면 勿吉(Wu-tsi)을 靺鞨(Moxo)에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곤란하니 靺鞨이 勿吉에 대하여 그 政治的 支配를 마쳤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러한 名稱이 하나의 독립된 呼稱으로서는 滿洲族에 吸收되었던 몇 개의 種族單位 가운데 우연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政治關係의 用語에서는 그 모습이 사라졌을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하고, 이미 논한 바와 같이 勿吉(Wu-tsi)후예들의 언어는 靺鞨(Moxo)의 言語와는 다르므로(靺鞨의 지도적 단위의 언어라고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靺鞨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고, 하나의 종족단위는 아니었으나 渤海나 女眞 등과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이었다고 하여, 勿吉과 靺鞨은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 연관관계가 없으며, 靺鞨이란 種族의 名稱이 아니라 정치세력을 형성한 집단에 대하여 붙여진 호칭이었다고 하였다(『Social Organization of the Northern Tungus』). 그는『金史』에 의하여 7C 隋의 皇帝가 栗末靺鞨 등의 7部 名稱을 붙인 것을 예로 들면서, 靺鞨(Moxo)이라는 名稱은 中國人들이 그렇게 불렀던 주민들에 의하여(우연히 滿洲라는 이름이 나타났던 것처럼) 새로 채택한 이름이거나, 혹은 이러한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사용되었던 것을 中國人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던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며, 하여튼 그것은 極東地方에서 보통 흔한 바와 같이 하나의 政治組織의 이름이었다고 하여, 靺鞨이라는 名稱은 中國과 靺鞨사이에 있었던 南方 Tungus집단들에 의하여 中國에 전하여졌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앞의 책, pp.362~364). 다시 말하면 中國人은 이러한 南方 Tungus집단에 의하여 勿吉·靺鞨세력과 격리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挹婁·勿吉·靺鞨 자신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물(河川)에 사는 사람”·“숲(森林)에 사는 사람” 또는 “洞窟에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南方 Tungus族 즉, 滿洲族의 조상들이 이러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靺鞨과 勿吉의 名稱은 특수한 어떤 종족을 일컫던 것이 아니라, 그 自然環境에 따라 다른 生活樣式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던 南方 Tungus집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時代에 따라 비록 그 名稱은 달랐으나, 17C 淸나라 Nurhaci(努兒哈赤)가 滿洲族을 統一할 때까지 寒冷帶 濕潤氣侯(Dwb)에서 狩獵生活하던 사람들과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에서 農耕生活을 하던 사람을 대비하여 일컬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隋·唐時代: 勿吉-靺鞨
遼 時 代: 生女眞-熟女眞
明 時 代:兀狄哈-兀良哈
明 末 淸 初: 新滿洲族-舊滿洲族
(ice mandu) (fe mandu)
이처럼 滿洲의 歷史에 있어서 種族系統은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가진 데 비하여, 그 自然環境에 따른 生活樣式에 의한 區分은 時代마다 일정한 對比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勿吉과 靺鞨이 中國과 關係를 가졌던 사실을『魏書』·『北齊書』·『册府元龜』등을 통해 조사해 보면, 勿吉은 北魏의 延興 5年(475)부터 中國에 國貢을 시작하여 東魏의 武定 5年(547)에 이르기까지 北魏·東魏時代 5C 후반에서 6C 중엽까지 약 1세기 가량 朝貢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北齊時代에는 勿吉은 사라지고 그 대신 靺鞨이 등장한다. 北齊시대의 그 朝貢關孫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天保 5年(554) 肅愼朝貢
河淸 2年(563) 靺鞨朝貢
河淸 3年(564) 靺鞨朝貢
天統 元年(565) 靺鞨朝貢
天統 2年(566) 靺鞨朝貢
天統 3年(567) 大莫婁·靺鞨朝貢
天統 4年(568) 靺鞨朝貢
天統 5年(569) 大莫婁朝貢
武平 元年(570) 靺鞨朝貢
武平 3年(572) 勿吉朝貢
武平 4年(573) 靺鞨朝貢
武平 6年(575) 靺鞨朝貢
이상에서 보면 靺鞨의 朝貢은 北齊의 河淸 2年(563)에 시작하여 武平 6年(575)까지 여러차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北魏·東魏時代와는 달리, 北齊시대에는 肅愼도 天保 5年(554)에 朝貢하고, 또 勿吉도 武平 3年(572)에 朝貢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肅愼·勿吉·靺鞨이 동일한 系統의 種族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史書의 편찬자가 그 名稱을 바꾸어 記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勿吉·靺鞨 이전의 肅愼까지 함부로 바꾸어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勿吉을 Muki로 본다면, 勿吉의 轉音으로 靺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勿吉·靺鞨을 混用하였을 可能性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이나 池內宏에 의하면 이러한 勿吉·靺鞨과 肅愼의 種族 갈래를 同一한 系統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政治세력으로 해석하였다(津田左右吉,「勿吉考」pp.1~37, 池內宏,「勿吉考」pp.1~70).
즉, 魏代에는 勿吉部落 아래에 하나의 政治세력을 형성하였으나 隋代에 와서 이러한 諸部落이 분열하여 그 사이에 아무런 統制를 받지 않게 되자 그 세력에 큰 變化를 가져와 勿吉部落은 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靺鞨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大莫婁 같은 이웃 種族이 中國에 朝貢할 수 있었던 것도 勿吉이 세력을 잃자 그 壓制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말하자면 朝貢의 中斷은 勢力의 실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5C中葉에서 6C中葉까지 약 1세기 가량은 勿吉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나, 北魏·東魏時代가 끝나자 北齊時代에는 勿吉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靺鞨의 7部가 등장하여 그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간주된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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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齊書』卷4「文宣帝紀」; 卷7「武成帝紀」; 卷8「後主帝紀」
『册府元龜』卷969「外臣部」朝貢條.
津田左右吉,「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 1915.
池內宏,「勿吉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卷15, 1937(『滿鮮史硏究』上世篇 第1册, 1951)
三上次男,『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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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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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井等, 「渤海國 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註 342
大祚榮 :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를 大祚榮으로 明記하고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唐에 처음 叛旗를 들어 東走하여 渤海王國의 기틀을 잡았던 것을 大祚榮의 父인 乞乞仲象으로 기록하고 있다. 學界에서는 渤海王國의 建國者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적지않은 論爭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처음 池內宏은 乞乞仲像과 大祚榮은 同一人으로서 乞乞仲象은 建國前 營州住在時의 本名이며, 大祚榮은 建國後 中國式으로 改名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pp.1~13). 渤海國의 建國者에 대한 池內宏의 論旨는 『新唐書』·『舊唐書』 兩書의 서로 어긋나는 記事를 折衷·調和시키려는 데 있었으며, 津田左右吉도 이에 同調하였으나(「渤海考」p.110), 이 推斷은 곧 鳥山喜一에 의해 ‘too logical’이라는 理由로 否定되었다(『渤海史考』p.33). 이 問題는 그 후 1933年 10月에 있었던 白鳥庫吉의 學術講演에서 거론되어 乞乞仲象과 大祚榮의, 同一人說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乞乞仲像은 靺鞨人이었다는 說이 主張되었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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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史考』1915, 東京奉公會.
白鳥庫吉, 「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 44編 12號, 1933
註 343
高麗別種 : 渤海王國의 主體에 대하여 『舊唐書』에는 ‘高[句]麗別種’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渤海傳에는 ‘ …… 本粟末靺鞨附高[句]麗者…’라 하여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高句麗領土로 倂合된 松花江 流域의 粟末靺鞨로 되어 있어 渤海史硏究에서도 가장 異說이 많은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問題에 대하여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에 있어서 東牟山(太白山 東北인 敦化縣으로 推斷)을 根據로 하였다는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따라 渤海王室의 出自를 靺鞨 7部 中 長白山 附近에 居住하던 白山部出身으로 推斷한 바 있다(「渤海考」p.118).
津田左右吉에 이어 鳥山喜一은 『新·舊唐書』에 보이는 엇갈리는 記事를 절충하여 渤海王國의 開國者인 大祚榮은 高句麗別部出身이나, 그 王國을 形成한 主體는 靺鞨族이라는 主張을 내놓았다(『渤海史考』pp.33~34).
한편 池內宏은 治者階級은 소위 ‘渤海靺鞨’이며 이 王國은 기타의 靺鞨部도 참여한 靺鞨族國家인 것으로 推斷하였다(「鐵利考」p.84).
이와 같이 『新·舊唐書』의 記事만 가지고 渤海王國의 主體가 어느 族에 속하는지 穿鑿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臆斷의 境地를 벗어날 수 없었으나, 이 問題에 관하여 획기적인 見解를 發表한 것은 白鳥庫吉이다. 즉, 그는 1933年 渤海國 上京發掘物展覽會에 즈음한 學術講演에서 ① 『續日本紀』神龜 5年條에 渤海王國 大武藝가 日本에 보낸 國書에서 ‘復高[句]麗之舊居 有扶餘之遺谷’이라 하여 高句麗의 光復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天平寶宇 3年條에도 그 自身을 ‘高麗國王大欽茂 …… ’라 自稱하고 또 日本에서의 返書에도 ‘敬問高麗王 …… ’이라고 渤海王을 高句麗王으로 칭하였다는 점 ② 日本側記錄에 보이는 日本에 派遣된 渤海使臣 85名 中 12名이 옛 高句麗王姓인 高氏이고 기타의 副使를 합쳐 거의가 漢族名이며 滿洲名은 靺鞨隨行員 6名 뿐이었던 점 ③ 唐에서도 이 王國을 表面上으로는 渤海라고 稱하지만 一般人은 역시 高[句]麗라고 칭하였던 점 등을 들어 開國者 大祚榮은 『舊唐書』의 記事대로 高句麗人이며, 王과 上流階級을 形成한 中樞勢力은 高句麗遺民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으나, 被支配層은 靺鞨이었을 것이며, 渤海王國의 正體는 高句麗遺民이 靺鞨族을 利用하여 國家光復에 成功한 것이라고 하였다. 白鳥庫吉이 異論이 많았던 渤海의 五京制度까지도 高句麗 本來의 制度를 따랐으며 다만 上京을 北에 두었던 것은 中國의 影響이라고 부언한 것도 渤海가 高句麗王朝의 延長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는 試圖에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渤海國に就いて」pp.92~98).
그러나 韓國史의 獨自的인 展開를 否定하는 植民地史觀의 體系化를 그 學的 生活의 信條로 삼고 있던 稻葉岩吉의 奇論이 잇달아 發表되었다. 즉, 그는 靺鞨을 種族名으로 보지 않고 梵語에서의 ‘大’의 뜻인 Maha로 우겨 ‘大人’의 뜻으로 새겨,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姓大氏’의 大氏를 그 譯字로 보았다. 따라서 種人의 名稱으로서는 肅愼에서 곧 女眞(直)으로 되는 것이며, 女眞의 名稱은 契丹 以後의 것이 아니고 渤海의 始祖 乞乞仲象의 乞乞이 즉 女直(『遼史』의 表記)의 初音이라는 것이다. 즉. 仲象·祚榮은 女眞人의 巨酋이며 그 巨酋가 中心이 되어 渤海王國을 建設하였던 것이다. 이 王國은 女眞人만의 힘이 아니고 高句麗遺民의 合力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舍利乞乞仲象’의 舍利가 女眞語의 ‘泉’의 뜻이며 高句麗大姓 泉氏(泉蓋蘇文의 家門)과 關係가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渤海王國의 主權者 및 支配階級은 松花·黑龍 兩江의 女眞人이었던 것 같으나, 그 文化는 거의 高句麗人에게 장악되고 있었다는 要旨이다.(「金靜庵氏著渤海國志長編を讀みて」pp.108~113). 古代 滿洲族에 대한 號稱의 系列조차 無視하고 난데없이 梵語까지 이에 結付시킨 이 奇論은 渤海史와 高句麗史와의 關係를 認定하지 않으려는 底意에서 나온 것이 너무도 分明하기에 學界에서는 처음부터 疎外되고 있다.
渤海王室과 그 中樞勢力을 高句麗로 보지 않으려는 日本學界의 경향은 第2次世界大戰後에도 이어져 和田淸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서 大祚榮의 出自를 ‘高麗別種’이라는 ‘別’字가 붙는 것으로 보아 高句麗의 同族이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粟末靺鞨’을 ‘高麗別種’으로 表現한 것이라고 推斷하였다(「渤海國地理考」p.59).
한편 韓國學界에서는 李承休의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柳得恭의 『渤海考』 등에서 大祚榮의 出身이 ‘本高麗別種也’라는 이 記事에만 依據하여, 渤海史를 韓國史의 體系에 넣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어져 내려 왔으나, 日本學界의 이와 같은 異說에 자극받아 大祚榮과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을 이루었던 種族의 究明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또 朴時亨은 『三國史記』「新羅本紀」元聖王 6年 3月條의 ‘以一吉凔伯魚 使北國’ 또는 憲德王 4年 秋9月條에 보이는 ‘遣級滄崇正 使北國’이라는 ‘北國’은 渤海國을 가리킨 것이며, 新羅에서 韓國史를 新羅를 南國으로 한 南北朝史로 보아 同族意識에서의 一時的인 領主임을 認識하고서의 號稱이었다는 等의 推斷過程을 거쳐 渤海王室이 高句麗係임을 力說하고 있다(「渤海史硏究のために」pp.169~211).
그리고 朱榮憲은 渤海王國의 古墳·都市와 建築·瓦當 등 遺物을 高句麗의 그것과 比較하여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高句麗의 繼承者로서의 渤海國文化를 說明하려고 試圖한 바 있다(『渤海文化』pp.138~167).
한편 李龍範은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大祚榮의 出自를 否定하고 ‘ ……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 ’라고 한 것이라던가, 最初의 建國地인 『舊唐書』의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고 있는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는 당시의 東北亞細亞史의 硏究로서는 無理가 많다는 점,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階層 및 文化의 內容 등을 들어 渤海王國의 主體는 高句麗遺民이었음을 主張하였다(「渤海王國의 形成과 高句麗遺族」).
이 問題에 관한 硏究의 視角을 中國과 蘇聯으로 돌려보면 먼저 中國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意味에서 問題가 많은 『滿洲源流考』「部族」渤海條를 비롯하여 長順의 『吉林通志』·王世遵의 『寧安縣志』에서의 古典的 硏究와, 1919年에 唐晏이 엮은 『渤海國志』나 1931年에 黃維翰이 엮은 『渤海國記』 등에는 大祚榮의 出自가 깊이 究明된 자취가 없다.
이 問題의 해명에 本格的으로 努力을 기울인 것은 1934年에 金毓黻이 엮은 『渤海國志長編』부터이다.
즉, 金毓黻은 『渤海國志長編』의 여러 項目에서 渤海王國이 靺鞨族의 國家인 것을 堅持하다가 叢考의 一項에서만은 日本側史料에 依據하여 渤海王國이 高句麗의 後繼者인 것을 認定한 바 있다.
中國政權이 수립된 후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를 비롯하여 豆滿江 流域의 渤海遺跡發掘 및 貞惠公主墓·貞孝公主墓의 調査에서 많은 成果를 올렸으나, 中國學界가 보여준 이와 같은 硏究熱의 거의 대부분이 ‘渤海史是我們偉大祖國 以漢族主體的多民族史州中的 重要篇章’이라는 즉, 中國史속의 少數民族史의 一分野로 하려는 데 있었기에 渤海文化 中에 高句麗的 要素를 충분히 認定하면서도 그 主體를 高句麗 遺民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다(王承禮, 「敦化六頂化渤海墓淸理發掘記」p.200).
王承禮는 唐代의 渤海王國을 『新唐書』渤海傳의 서술대로 ‘是粟末靺鞨’이라 斷定하고서 遺蹟을 發掘하였던 것이며, 그는 다시 1982年의 發掘報告書에서는 ‘總之渤海文化可以說就是唐文化 渤海文學就是唐代各民族學的組成部分 …… ’이라고까지 極言하여(「唐代渤海貞惠公主墓誌和貞孝公主墓的比較硏究」p.185), 渤海王國에 미친 高句麗의 文化要素까지도 말살하려는 傾向조차 보이고 있다.
中國學者의 이와 같은 경향은 陳顯昌에게도 보이고 있다(「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pp.85~89; 「渤海貞惠公主墓碑的硏究」pp.69~70).
한편 1860년의 露·淸北京條約으로 渤海王國의 定理府·率賓府를 포함한 지금의 沿海州를 차지하게 된 帝政 러시아의 渤海史硏究의 傳統을 이어받은 蘇聯에서의 渤海建國者에 관한 見解는 또 日本이나 中國과는 다른 것이 있다.
즉, 1852年에 發表된 V. Gorskii의 『滿洲家屬의 始期』 以後 P. Katalov·M.G. Shevelev·F.F. Busse·D.M. Pozdnev 등의 渤海史硏究를 이어받은 소련 學界의 경향은 最近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A.P. Okladnikov에게서 그 一面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極東考古學調査隊를 이끌고 沿海州 一帶의 調査發掘成果를 바탕으로 내린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대한 Okladnikov의 結論은 渤海王國의 文化가 高句麗·新羅와 가장 共通性이 많은 것은 認定되나, 그 王國의 主體種族만은 高句麗가 아니고 『新唐書』渤海傳의 記事대로 粟末靺鞨이었다고 主張하고 있다(「The Mo-Ho Tribes and the P'o-Hai State」pp.170~200; 『Советского Папьнего Бостока』pp.194~205).
渤海王國의 主體種族에 관한 소련학자들의 이와 같은 主張은 渤海王國의 率賓府, 定理府 등 沿海州를 領土로 占有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渤海史의 一部가 그들의 地方史 또는 少數民族史의 一部라고 하는 政策的인 意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渤海國史를 高句麗史와 連結지어 韓國史의 體系에 넣어 說明하는 것보다 이미 歷史에서 그 자취가 없어진 靺鞨族과 連結짓는 것이 有利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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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44
營州 : 建國傳說時代부터 近世까지 中國에서 불리어져 내려왔던 地名이다.
(가) 建國傳說期의 州名: 營州에 대하여 『爾雅』「釋地」에는 ‘ …… 燕曰幽州 齊曰營州 …… ’라고 하여 이른바 黃帝 또는 顓頊의 九州 속에 넣고, 『疏』에는 「博物志」에 ‘ …… 營與靑同 海東有靑丘 齊有營丘 豈是名乎’라고 하여 지금의 山東半島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顧祖禹의 『讀史方輿紀要』歷代州域形勢 唐虞三代條에는 ‘ …… 舜攝帝位命禹平水土 以冀·靑地廣 ·…… 又東北醫無閭地 爲幽州 又分靑州東北遼東之地 爲營州書曰 肇十有二州’라고 하여 中國建國傳說의 帝王 舜이 靑州의 東北 遼東의 地를 나누어 營州로 하여 全國이 12州가 되었다고 한다.
(나) 後趙의 地名: 羯族政權의 石虎가 지금의 北部中國 灤河·永平 附近에 설치한 州名이며(『晋書』「石季龍載記」), 『資治通鑑』「晋紀」의 胡三省注에는 遼西·北平의 2郡을 領하였다고 한다.
(다) 北魏시대의 營州: 『魏書』「地形志」의 ‘營州治和龍城 太延二年爲鎭 眞君五年(A.D. 444) 改置 永安未陷 天平初(A.D. 534)復’이라는 記事에 따르면 北魏에서 置한 營州의 治所는 今日의 熱河省 朝陽인 和龍城이었다. 昌黎·建德·遼東·樂良·冀湯·冀陽·營丘의 7郡을 領하였다.
한편 『讀史方輿紀要』直隷 萬全都指揮使司 附見 大寧城條에
古營州地 夏商時冀州地 周爲幽州地 春秋時 亦爲山戎地 戰國時屬燕 秦屬遼西郡兩漢因之 …… 宋元嘉十三年(436) 後魏取其地 亦置昌黎 建德等郡 兼置營州置焉 …… 隋開皇三年 取其地 廢郡 仍曰營州 唐初爲韓唐莫奚所據 貞觀十九年 征高[句]麗 駐驛于此 諸奚臣附 因復置營州 幷置饒樂都護府 天寶後府廢 ……
라고 한 것으로 보면 唐初부터 營州는 唐帝國이 東北控制의 據點으로 삼아 왔었다.
大祚榮과 靺鞨의 乞四比羽가 무리를 이끌고 東走하였다는 營州는 唐帝國의 東北地方控制의 據點이었던 現在의 朝陽 附近이다.
<참조>
『宋書』高句麗傳 註 8)
營州
營州는 옛 12州의 하나로 舜이 靑州의 東南 遼東의 땅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한다.
대략 지금의 河北省에서 遼寧省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歷代의 營州는 그 領域과 治所가 다소 변하여 갔다. 당대인 晋代에는 전하는 바 없었으나 北魏의 營州는 『魏書』「地形志」에 의하면 領郡이 6이고 領縣이 14이며, 治所는 지금의 熱河省 朝陽縣인 和龍城이다.
≪參考文獻≫
『爾雅』卷7「釋地」
『疏』「博物志」
『魏書』卷 106「地形志」上.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1 歷代州域形勢 唐虞三代條; 卷18 直隷萬全都指揮使司 附見 大寧城條.
註 345
契丹 : 東部 蒙古에서 일어난 部族名이다. 西紀 907年에서 1,124年까지의 遼帝國을 세운 部族이며, 東은 滿洲의 渤海故地, 西로는 內外蒙古의 全域과 一時는 中央亞細亞까지, 南은 北京·天津을 包含하는 長城內의 漢民族地域에 걸치는 大帝國을 建設하였다.
(가) 唐 以前의 契丹族
‘契丹’의 이름이 中國史書에 처음 보이는 것은 『魏書』契丹傳이다. 文獻은 아니지만 더 오래 되는 것은 現在 熱河省 朝陽縣의 東인 義縣 附近의 萬佛洞에 있는 北魏 ‘景明三年(502)五月九日造’라는 銘이 있는 刻文 中의 ‘尉喩契丹員使員 外散騎常侍韓貞 …… ’이라는 文字이다.
즉, 北魏의 使者 韓貞이 契丹으로 가는 途中에 이곳에 들려 새겼던 것이다.
『魏書』契丹傳을 비롯한 中國史書가 전하는 것을 종합하여 보면 北魏 初의 契丹族은 Siramuren(西刺木倫)이라는 大河의 南方에서 遊牧生活을 하던 騎馬民族이었다. Siramuren은 그 南에서 東北流하여 Siramuren과 合流後 遼河를 이루는 老哈河(遼代의 土河)와 더불어 東蒙古의 兩大河이다. 또한 唐代 以前에는 作樂水·饒樂水·弱洛水·如洛瓌水라 칭해지고 唐 以後에는 漢水·梟羅箇沒里·世里沒里로 칭해진 河水이며, 契丹族 成長의 젖줄이었다.
이 部族은 5世紀 後半에는 廣開土王의 膨脹政策을 繼承推進한 高句麗의 遼河서쪽 進出과 西方의 柔然의 侵軼을 두려워하여 北魏에 內附를 칭하고, 그 保護下에 白狼水(大凌河)의 東方 一帶에 南移하게 되었다. 契丹別部인 出伏部 등의 契丹族이 高句麗에 臣屬한 것도 契丹의 이 南遷의 混動期인 것으로 보인다(『遼史』 「營衛志」 部族條).
그 후 北齊의 무렵에는 다시 더 南下한 것 같으며 文宣帝가 天保 4年에 契丹을 親征하였을 때는 平州(河北城 盧龍縣)에서 軍을 나누어 北上하여 이를 大破하고, 營州에 이르러 班師하였던 것이다(松井等, 「契丹勃興史」pp.140~145;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나) 唐初의 契丹
中國의 統一國家를 이룩한 隋代에 이르러서도 契丹에 대한 高句麗의 危脅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隋書』「煬帝本紀」大業 8年 正月 壬午條에 보이는 煬帝의 高句麗에 대한 宣戰의 詔書에 ‘ …… 曾不懷思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 ’이라고 高句麗의 契丹包攝을 비난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李龍範, 앞의 논문).
隋가 滅亡하고 唐이 건국되자 唐 太宗은 契丹西에 隣接하여 契丹과 겨루어 오던 遊牧民族인 庫莫奚를 支配하기 위하여 지금의 Siramuren 上流 巴林石橋 附近에 饒樂都護府(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37)를 설치하고, 아울러 契丹을 지배하기 위하여 營州 附近에 松漠都護府 (松井等, 앞의 논문, pp.155~156)를 設置하였다.
唐初의 契丹은 『遼史』에서의 소위 大賀氏 八部時代이었으며, 唐 太宗이 總首인 窟哥를 都督으로 任命하여 國姓 李氏를 賜하고, 그 麾下의 諸酋를 各各 刺使의 官職에 任命하여 懷柔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中樞部는 營州 附近에서 살면서 唐帝國의 保護를 받는 熟蕃的 生活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則天武后의 萬歲通天 年間에 叛한 松漠都督 李盡忠이 營州 城傍에서 일어나 곧 營州城을 陷落시키고 長官 趙文翽를 殺害했다는 것은 그 主力이 營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을 말하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參考文獻≫
『隋書』卷4「煬帝本紀」大業 8年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註 346
李盡忠 : 契丹人으로서 松漠都督이 되어 唐 高宗 永徽 5年에 高句麗의 攻擊을 新城에서 막아 이를 大破하였던 李窟哥의 孫子이다. 則天武后의 萬歲通天 元年(696)에 그의 妻兄인 契丹人 孫萬榮과 더불어 營州(現 朝陽縣) 附近에서 唐에 叛亂을 일으켜 營州를 陷落시키고 營州都督 趙文翽를 殺害하였다.
武后가 28將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자 그 軍은 大敗하여 孫萬榮은 叛兵의 前鋒으로서 長城 以南에 侵入하였던 것이나 同年 10月 李盡忠은 卒하였다.
李盡忠의 이 叛亂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翌年인 神功 元年 6月에 孫萬榮이 그의 奴에게 被殺된 後였다(松井等, 「契丹勃興史」pp.155~162).
≪參考文獻≫
松井等, 「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註 347
則天[武后] : 唐帝國 第3代 高宗의 后이다. 幷州 文水人이며 武士彠의 딸이다. 14歲에 宮에 들어가 太宗을 섬겨 寵愛를 받았으나 太宗의 崩去 後에는 唐室의 慣例에 따라 諸嬪들과 같이 比丘尼가 되었다.
그 후 美色으로 새로 즉위한 高宗의 命에 따라 다시 入宮하여 嬪의 身分인 昭儀로서 高宗의 총애를 홀로 차지하고 正后를 모함하여 축출한 후 皇后가 되었다.
高宗이 신체적으로나 정신면에도 허약한 것을 기화로 唐帝國의 정치와 군사권력을 독점하더니, 683년 12월 高宗이 崩去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中宗을 다음 해인 嗣聖 元年(684) 2月에 廢位시키고, 高宗의 第8子 豫王 旦을 세워 睿宗이라 하였으나, 모든 國政은 大小를 막론하고 그 손아귀에 넣었다.
특히 垂拱 2年(686) 2月에 稱制한 후에는 이미 唐室은 隴西 李氏의 王權이 아닌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이어 唐室의 屬籍을 없애고 宗室의 태반을 숙정한 후 690年 9月에는 國號를 周로 바꾸고 則天武后 스스로가 帝를 칭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705년 正月 中宗이 復位할 때까지의 15년간 唐帝國의 王權은 명실공히 武氏王朝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參考文獻≫
『舊唐書』卷6「則天武后本紀」
『新唐書』卷4「則天順聖武皇后本紀」; 卷76「則天武皇后列傳」
趙翼, 『二十二史箚記』卷19「唐女禍」·「武后之忍」·「武后納諫之人」
註 348
天門嶺 : 天門嶺의 位置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와의 分水嶺을 이루고 있는 長嶺子가 遼東에서 渤海의 國都에 이르러서는 道路의 要衝地라는 점과, 大祚榮이 營州에서 東方으로 탈출하여 지금의 輝發河邊에 있었던 것을 唐軍이 추격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지금의 長嶺子를 넘었을 것이라는 推斷에 따라 이를 遼寧省 東南方의 長嶺子로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p.410~411).
한편 津田左右吉은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 太白山의 東北인 東牟山이었던 바 天門嶺은 이 東牟山이 아닌가 推定하였다(「渤海考」pp.112~113).
≪參考文獻≫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註 349
奚 : 庫莫奚라고 하는 部族名을 줄인 것이며 契丹族과 더불어 東胡의 別種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部族의 原住地에 대하여는 白鳥庫吉이 『魏書』庫莫奚傳의 ‘登國三年(388) 太祖(拓跋珪)親自出討 至弱洛水(Siramuren)南 大破之 獲其四部落馬牛羊豕十餘萬’이라는 記事와 『新唐書』奚傳의 記事를 참조하여 Siramuren 上流·老哈河流域으로 推斷한 바 있다(「東胡民族考」p.1,134).
『魏書』庫莫奚傳에 따르면 5世紀末에서 6世紀初에는 安州의 北, 즉 지금의 萬里長城 古北口外의 地域이 모두 庫莫奚의 住地였던 것으로 보인다.
唐 太宗이 지금의 Siramuren인 饒樂水 上流에 饒樂都護府를 設置한 것은 이 奚族을 統治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契丹族과 많은 마찰도 있었으나, 遼代에는 奚大王府를 두어 이들을 統治하였다.
<참조>
『新唐書』高句麗傳 註 75)

4세기부터 東部 蒙古 老哈河유역에서 遊牧하던 鮮卑族의 一部族으로 漢水유역의 契丹族과 인접해 있었다. 처음에는 庫英奚라 불리었으나 隋代 이후에는 奚라 略稱하였다. 7세기 前半에 唐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중엽 安史의 亂으로 唐의 國力이 쇠해지자 크게 세력을 떨쳐 國家를 세웠다가 10세기에 遼에 멸망하였다.
≪參考文獻≫
『魏書』卷100「列傳」庫莫奚條.
白鳥庫吉, 「東胡民族考」『史學雜誌』21編 7號, 1910.
註 350
突厥 : 蒙古系로 믿어지는 柔然族의 屬部였으며 土耳其의 民族으로서, 그 名稱은 土耳其系와 同一한 言語上의 特徵을 가진 全民族에게까지 호칭되기에 이르렀다.
Pelliot는 突厥이라는 漢名을 蒙古系語(柔然) ‘Türküt’라는 語의 複數形인 것이 틀림없으며, ‘Türk’는 ‘强力’을 뜻한다고 하였다(『L’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p.787).
5世紀初에는 居住地인 Altai山麓에서 鐵工으로 成長하였으며, 6世紀初부터 그 一部인 에 柔然에 대하여 自立을 企圖하는 운동을 자주 일으키더니 551年에는 北魏와 제휴하여 柔然의 可汗 阿那壤을 攻殺하였다.
突厥部酋 土門(Bumin)이 551년 Orkhon上源에 龍庭을 設置하였으나 翌年인 552年에 死歿하자 그 領土는 分割되고 土門可汗의 長子 木杆(553~572)이 內外蒙古의 全域을 領有하여 이에 東突厥汗國이 出現되었다.
한편 土門의 弟인 葉護(突厥官名, 汗) 室點密(Istämi)은 Zungaria·黑Irtish河·伊黎河·Talas河 流域의 統治權을 얻어 西突厥汗國을 建設하였다.
突厥의 이 兩汗國 中에서 高句麗와 政治·軍事·外交面에서 긴밀한 접촉을 가졌던 것은 東突厥汗國이었다. 즉, 東突厥의 木杆可汗時에 그 勢力은 Siramuren流域까지 진출하여 560年 頃에는 契丹族에도 그 支配權이 미치게 되어 西進을 企圖하던 高句麗와의 對立을 피할 수 없게 된 까닭이다.
東突厥은 그 후 木杆可汗의 子인 位鉢可汗(573~581)에 이어 沙略鉢可汗(581~587)의 存在時부터 突厥族團結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약 3世紀間의 分斷을 극복하고 581년에 統一國家인 隋帝國을 이룩한 文帝 楊堅이 突厥勢力의 擴張에 危懼心을 품고 그 分散策을 外交政策으로 추진한 까닭이다.
隋의 突厥勢力分離策으로 東과 西의 兩突厥汗國이 크게 對立되었을 뿐 아니라 東突厥內部의 攩亂策으로 東突厥의 勢力도 분열되었다.
즉 東突厥의 都籃可汗(587~600)時에 反對勢力을 형성한 突利를 隋에서 수용·보호하여 그 餘黨을 모아 Ordos에 거주하게 하고 屬邦으로 하였던 까닭이다. 이로써 東突厥의 政權은 隋의 보호를 받던 突利와 그의 아들인 始畢可汗의 손에 장악되었다.
隋·唐帝國의 交替라는 政治的 混亂時期에 있어서 東突厥은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新可汗 頡利(620~631)는 西紀 624年에 唐都인 長安을 포위하는 등 唐 太宗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바도 있었다.
이와 같은 東突厥의 氣勢가 꺾인 것은 630年에 太宗에 의하여 거의 殲滅的인 敗戰을 겪고서부터이며 그 후 약 50年間은 唐에 順從하는 蠻族集團에 지나지 않은 存在가 되었다.
唐 高宗의 優柔不斷과 則天武后의 陰謀가 화근이 되어 西北아시아와 西南아시아에서의 唐勢의 全面的인 退縮은 突厥族의 세력만회에는 더 없는 호기였다. 高宗治世의 後半期初인 665年에 西突厥의 獨立回復에 이어 吐蕃(Tibet)의 ‘비단길’侵入이 그 著例였다.
특히 東突厥이 옛 王家의 末裔인 骨咄祿(Qoutlough·幸福한 사람)을 받들고 再起한 것은 唐에 큰 위협을 던졌던 것이다. 東洋史에서 유명한 Orkhon河畔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文에 보이는 Eliterich可汗은 바로 이 骨咄可汗인 것이다.
이 東突厥汗國은 Orkhon河上源인 烏德鞬山(Otükänd, 지금의 汗愛山脈)에서 再建되어 매년 長城 附近과 山西를 유린하고 687年 4月에는 北京 西北方의 昌平까지도 그들의 騎兵이 出沒하는 形勢에 이르렀다.
이 骨咄祿可汗의 歿後에 즉위한 黙啜可汗(691~716)의 在任時는 東突厥의 最盛期였다. 그는 자주 唐에 侵入하여 北京 附近에까지 出沒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契丹에 대항하기 위하여 唐과 협력한 일도 있었고, 大祚榮에게 東走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契丹人의 松漠都督 李盡忠과 同盟을 맺은 일도 있었다.
東突厥은 黙啜可汗의 戰死後 毗伽可汗(Bilgä, 716~734) 時까지 그 國勢가 持續되었던 것이나, 이 毗伽可汗이 毒殺된 후에는 內部에 혼란이 일어나 744年 그 屬下인 土耳其種族인 回鶻族(Uighur)에 의하여 滅亡되었다(René Grousset, 『アジア遊牧民族史』pp.128~160).
[突厥과 高句麗]
東突厥과 高句麗가 직접 접촉하고 있었던 一例는 『隋書』「煬帝本紀」大業 3年 8月 乙酉條에 隋 煬帝가 啓民可汗(突利)의 牙帳으로 巡遊하여 우연히 그곳에서 嬰陽王이 보낸 高句麗使臣을 목격하고 ‘歸語爾王 當早來朝見 不然者 吾與啓民巡彼土矣’라고 한 記事에서 엿볼 수 있다.
이 時期에 있어서의 契丹支配를 둘러싼 突厥·隋·高句麗의 극심한 對立이 이 記事에 잘 나타나 있다(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
한편 Kosho Tsaidam의 古突厥碑의 毗伽可汗碑와 屈特勤(Kul Tegin)碑에 土門·室點密 兩可汗 死亡時 弔問한 國名이 적혀 있는 바 ‘앞에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bökli cölügil(國)·tabrač(唐)·türüt(吐蕃)·par(波斯) …… ’ 또는 交戰한 바 있는 國名에 ‘앞에는 해뜨는 쪽으로 bökli可汗에까지 …… ’라고 하는 ‘bökli cölügil’ 또는 ‘bökli’에 대하여는 解讀에 많은 異論이 전개되었다.
즉, ‘bökli cölügil’에 대하여 Radlott는 ‘bökli草原의 部族’이라 飜譯하고(『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 또 V. Thomsen은 ‘먼 bökli族’으로 解釋한 바 있다(『Inscriptions del Orkhon』).
한편 岑仲勉은 『通典』高句麗條의 ‘其後 東部大人蓋蘇文 弑其王高武 立其姪藏爲主 自爲莫離支 …… ’라는 記事를 들어 ‘莫離支’의 莫離는 곧 ‘Bökli’의 音寫라고 하여 官名이 國名으로 轉化한 것으로 보았다(「跋突厥文闕特勤碑」pp.253~254).
‘bökli cölügil’에 대한 諸解釋에서 이를 韓國史와 關連시킨 것이 岩佐精一郞이다. 즉, 그는 貊句麗(Miak-Kjiu-Lie)의 ‘M’音은 土耳其語系에서는 ‘B’音으로 轉音되는 까닭에 ‘Biak-Kjiu-Lie’로 되며 그것이 다시 ‘bökli’가 되었다는 音韻上에서뿐아니라, 貞觀 18年에 있었던 唐 太宗의 高句麗 親征에 突厥部의 各部酋가 多數 唐軍에 參戰하였다는 歷史的 事實을 들어 貊句麗 즉, 高句麗인 것으로 推斷하고, ‘bökli’ 뿐아니라 ‘cölüg’는 後日에 그 解讀을 기약하면서도 ‘아마도 蒙古에 高麗를 指稱하는 「莎郞合」·「肅良合」과 關係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pp.51~59).
≪參考文獻≫
『隋書』卷3「煬帝本紀」上 大業 3年條.
『通典』卷186 高句麗條
李龍範,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岑仲勉, 「跋突厥文闕特勤碑」『輔仁學誌』6의 1·2合期.
岩佐精一郞, 「古突厥碑文のbökli及びPar Purumに就いて」1933.
山野川秀美, 「突厥碑文譯註」『滿蒙論叢』4, 1943.
V. Thomsen, 『Inscriptions del Orkhon』1896.
Padlott, 『Die Alttürkischen Inscriptions del Orkhon』1897.
Pelliot, 『I’ongine de T’ou-Kiue: nom chinois de Turcs T’oung-pao』1915.
René Grousset著·後藤十三雄譯, 『アジア遊牧民族史』1944.
註 351
桂婁之故地 : 『舊唐書』渤海靺鞨傳에 大祚榮이 무리를 이끌고 東으로 나와 ‘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東牟山에 웅거하여 城을 쌓고 …… ’에서 보이는 ‘桂婁’는 『三國志』「東夷傳」에서 高句麗의 5族中 王族인 桂婁部의 옛 땅이라는 뜻인 것이 틀림없다.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 高句麗 ‘桂婁部의 옛 땅’으로 적혀 있을 뿐 아니라 『舊唐書』渤海靺鞨傳에는 唐에서 大祚榮의 嫡子를 ‘桂婁郡王’으로 封하였던 것이 明記되어 있고, 『册府元龜』에는 大祚榮의 嫡子 大武藝 뿐 아니라 唐 玄宗의 開元 8年에는 大武藝의 嫡子 大都利行에게도 ‘桂婁郡王’을 承襲케 하였다는 記事가 보인다.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이 記事는 渤海王國과 高句麗와의 關係 뿐 아니라 東牟山 附近이 桂婁部의 故地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는 경우에는 高句麗社會를 構成하는 五族 中에서 桂婁部에 관하여 종래와 다른 解釋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大祚榮이 建國을 이룩하게 된 地域名에 대하여 곧 異說이 나왔다.
즉, 王溥의 『五代會要』渤海條에 渤海王國의 主體를 ‘高句麗之別種’이라 한 것은 『舊唐書』渤海靺鞨傳과 同一하나, 이 記事의 앞에 ‘本號靺鞨’이라고 하여 靺鞨族과 ‘高句麗別種’을 동일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으로 삼았던 地域을 가르켜 ‘保據挹婁之故地’라 하여 『舊唐書』에 보이는 ‘桂婁’를 ‘挹婁’로 바꾸어 記錄하고 있다.
王溥는 渤海王國의 主體가 高句麗를 形成한 소위 5族 外의 어떤 支派였던 것으로 보았던 까닭에
‘本號靺鞨 蓋高句麗別種也’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建國의 터전을 마련한 地域에 대해 어떤 典據에 따라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桂婁之故地’를 ‘挹婁之故地’로 바꾸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典據도 분명치 않은 이 王溥의 改字를 더 發展시킨 것이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渤海建國者의 出自 및 그 建國地에 관한 記事이다.
즉, 『新唐書』渤海傳에서는 『五代會要』의 ‘渤海 蓋高句麗別種也’가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로 바뀌어졌을 뿐 아니라 그 建國地에 대하여도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를 ‘挹婁之東牟山’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新唐書』가 渤海의 建國地를 ‘挹婁之東牟山’이라 한 것은 어떤 證明이 있어서가 아니라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라는 記事에 다시 『新唐書』渤海靺鞨傳의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라는 一句를 連結하여 표현한 記事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新唐書』에서 渤海王國을 建國한 主體種族을 粟末靺鞨로 斷定한 論據도 분명치 않다.
즉, 『新唐書』渤海傳에서 渤海王國의 主體勢力으로 되어 있는 粟末靺鞨은 北流 松花江의 吉林 地方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靺鞨族을 指稱한 것이며, 高句麗의 팽창에 따라 그 巨酋 突地稽의가 部衆을 이끌고 遼西로 遁走하여 隋의 開皇 初부터 遼西의 柳城(郡治 營州)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部族이다.
따라서 突地稽의 一族이 大氏라는 明證이 없을 뿐 아니라 이 粟末部의 主動勢力이 遼西에서 東走하여 渤海王國을 建國하였다고 하면, 이는 『新唐書』渤海傳의 ‘附高麗者’가 될 수 없다. 또 突地稽의 率衆遁走 時 그곳에 殘存하여 高句麗의 下部隷民으로 있던 粟末靺鞨로 본다면 ‘附高麗者’라는 一句와는 부합되나, 『新·舊唐書』에 보이는 渤海建國者의 遼西로부터의 東走事實과는 전연 어긋난다.
한편 王溥의 『五代會要』에 보이는 渤海王國의 建國地인 ‘挹婁之故地’의 ‘挹婁’는 漢代 以後 魏·晋 까지 漢民族이 대체로 南으로는 長白山에서 北으로는 松花江, 東으로는 沿海州 一帶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에 거주하던 未開民을 總稱한 것이며, 이 名稱에 포괄되는 種族의 槪念과 地域은 극히 막연하였던 것이다. 北魏 以後 隋代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의 部族은 粟末靺鞨을 비롯하여 그 住地에 따라 7部로 區分되어 號稱되고 있었다(『後漢書』挹婁傳; 『晋書』肅愼氏傳; 『魏書』勿吉國傳; 『隋書』靺鞨傳).
한편 『新唐書』渤海傳에서는 第10代 宣王 大仁秀가 海北諸部를 平定하여 大境字를 開拓한 사실 등을 서술하고 ‘至是遂爲海東盛國’이라고 하며 그 行政區域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行政區域이 『舊唐書』나 기타 史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點으로 보아 張建章의 『渤海國記』같은 것에 依據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渤海疆域의 比定에는 『新唐書』가 유일한 基本史料로 되어 있지만, 『新唐書』에서는
地有五京 十五府 六十二州 以肅愼故地爲上京 曰龍泉府 …… 其南爲中京 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
라고 上京과 中京의 行政區域을 설명한 데 이어 ‘Ꞑ貊故地爲東京’·‘沃沮故地爲南京’·‘高麗故地爲西京’·‘扶餘故地爲扶餘府’·‘挹婁故地爲定理府’·‘率賓故地爲率賓府’·‘拂涅故地爲東平府’·鐵利故地爲鐵利府’·‘越喜故地爲懷遠府’ 등 渤海王國의 地名을 밝히는 데에 옛 部族居住地域名을 이끌어 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이 記事에서 中京의 說明에는 옛 居住部族名을 밝히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五代會要』나 이를 追從한 『新唐書』에서 大祚榮이 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것으로 明記되어 있는 ‘挹婁의 故地’가 渤海王國의 ‘定理府’로 적혀 있는 것은 이 문제의 해결에 매우 주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中京顯德府는 第3代 文王이 上京으로 遷都하기 전까지 首都였던 古都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古都 中京에만 原住部族名이 빠져 있어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여기서 ‘挹婁之故地’로 되어 있는 定理府는 渤海王國의 行政中心部에서 본다면 邊僻地인 現 蘇聯領 沿海州의 Suchan으로 比定되고 있는 까닭이다(和田淸, 「渤海國地理考」p.87).
원래 挹婁의 故地로 보아도 무방한 上京龍泉府는 ‘肅愼의 故地’ 또는 ‘率賓의 故地’·‘高麗의 故地’로 세분하여 놓고 豆滿江 下流域인 中京顯德府만은 그러한 이름을 붙여 밝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現在의 Nikolsk附近으로 比定되는 率賓府와 (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18; 和田淸, 앞의 논문, p.84 및 p.107) 유독 인접하고 있는 定理府만 ‘挹婁의 故地’로 指稱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大祚榮의 建國地가 沿海州가 아닌 것은 渤海史에서는 周知의 사실로 되어 있는만치 『新唐書』의 撰者가 『五代會要』의 ‘挹婁之故地’라는 記事를 받아들여 大祚榮의 建國地마저 ‘挹婁之東牟山’으로 하여 같은 渤海傳에서 前後가 矛盾되는 記事를 남긴 것은 杜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新唐書』의 撰者 뿐 아니라 日本의 松井等(앞의 논문, p.409)·津田左右吉(「渤海考」pp.114~117)·今西龍(「高句麗五族五部考」p.411) 등이 『舊唐書』渤海靺鞨傳에 보이는 渤海國의 建國地에 대한 ‘桂婁之故地’라는 記事를 부정하고 『新唐書』의 ‘挹婁之東牟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渤海史硏究에 있어서 『新唐書』渤海傳의 권위에 억압되어 추종하는데 지나지 않은 느낌이 보이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上記 日本學者들의 見解에 비하면 金毓黻의 見解는 확실히 참신한 면을 보이고 있다.
즉, 大祚榮 嫡男의 渤海郡王에 대하여 그가 ‘桂婁는 高句麗의 一部族名이었으며, 大氏를 桂婁郡王에 册封한 것은 그 祖先이 옛날 여기에서 살았기에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 틀림없다. 뒤에 建國한 땅에 桂婁의 이름이 있어서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확실히 卓見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建國地에 대하여 ‘挹婁는 肅愼의 別名이며 그 居住하는 바의 地는 매우 넓어 지금의 吉林 東北部의 땅이 모두 이에 屬한다. 大氏가 建國한 곳은 실로 挹婁이며, 『新唐書』에 桂婁를 고쳐 挹婁라 한 것은 實을 얻었다고 할 것’이라고 한 데 이르러서는 그 論旨展開에서 矛盾撞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누구라도 느끼게 될 것이다(『渤海國志長編』「叢考」).
그의 이와 같은 一貫性없는 論旨는 高句麗王室인 桂婁部의 起源도 北夫餘에서 南下하여 佟佳江 流域에 定着하여 高句麗國을 形成하였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은 中國人이 古代부터 지녀 내려온 先入見이 中世에도 그대로 繼承되어 그것이 현재까지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까닭으로 보인다.
① 『三國志』「東夷傳」에 보이는 高句麗王國을 形成한 5族에서 消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 또는 『三國史記』에 보이는 椽那部·貫那部·桓那部·藻那部 등의 ‘奴’ 또는 ‘那’가 붙는 部族은 滿洲語 ‘na’에 비추어 보면 ‘水邊溪谷에 居住하는’ 部族이었다는 說에서 본다면 桂婁部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보이는 蓋馬國·句茶國·曷思國·黃龍國과 같은 佟佳江 流域 外의 小國과 같은 즉, 三品彰英이 命名한 이른바 ‘那集團’에 屬하지 않은 部族일 것이다(「高句麗の五族に就いて」). 이것은 이미 三品彰英이 說破한 바 있는 豆滿江 流域의 北沃沮도 高句麗와 同族이었다는 見解에 비추어 보아도 결코 무리한 假說은 아닐 것이다.
② 上記와 같이 高句麗의 成長過程을 豆滿江 流域까지 擴大하여 본다면 「廣開土王碑」에
東夫餘 舊鄒牟屬民 中叛不貢 王躬往□ 軍到餘城 …… 於是旋還 又慕化隨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鴨盧 ……
라는 記事는 充分히 檢討되어야 하겠다.
즉, 이 記事에 보이는 ‘味仇婁’는 『三國志』「東夷傳」東沃沮條의 ‘置[買]溝婁’와 同書 「毋丘儉傳」의 買溝[婁]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그것이 豆滿江 下流의 어느 地點인 것은 『三國志』「毋丘儉傳」의 宮(東川王)을 쫓아 魏軍이 ‘過沃沮(지금의 咸興 附近)千有餘里 至肅愼界 …… ’하였다는 記事에서도 알 수 있다.
이 味仇婁가 있는 東夫餘는 西晋의 太康 6年(285)에 夫餘本國이 慕容廆에 破國되어 그 王 依羅의 自殺 후, 依羅의 子弟들이 東間島로 亡命한 뒤 永樂 20年(410)에 廣開土王의 征伐로 討滅되기까지 存續한 亡命政權이었다. 豆滿江下流인 東間島 地方이 「廣開土王碑」에 ‘옛날 鄒牟(朱蒙)의 屬民이었다가 …… 中叛不貢’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地域과 高句麗와의 關係는 高句麗 建國 初부터 밀접하였던 것이며, ‘中叛不貢’의 관계가 된 것은 太康 6年에 東夫餘政權이 이 지역을 占據한 후라고 보아야 하겠다.
豆滿江 下流인 北沃沮가 ‘鄒牟屬民’의 면목을 충분히 나타냈던 歷史上의 事件으로는 毋丘儉의 來侵時에 桂婁部 出身인 高句麗王室이 취한 防戰態勢였다.
즉, 正始 5年(東川王 18年)의 魏軍來攻으로 首都인 丸都가 유린되고 다시 翌 6年의 來攻으로 왕국의 와해까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던 이 抗戰에서 桂婁部王室이 취한 최후의 防禦線이 바로 豆滿江 下流인 지금의 東間島였던 것은 『三國志』「毋丘儉傳」이나 「東夷傳」東沃沮條에 설명되고 있다.
『三國志』「東夷傳」 高句麗條에는 「魏書」가 撰述되는 무렵의 高句麗 政治權力의 變遷을 설명하여 비록 消奴部에서 桂婁部로 王權이 옮겨졌지만, 消奴部도 宗廟를 세우고 王者의 特權이며 義務였던 靈星·社稷의 祭祀를 거행하고 家臣을 둘 수 있게 되어, 아직 桂婁部에 의한 강력한 中央集權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단계였던 당시로서 미증유의 國難에 대응하는 桂婁部王權이 그들과 전혀 연고없이 豆滿江 下流로 피하여 防禦態勢를 정비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③ 豆滿江 下流는 會寧의 闊潤·慶興의 鹿屯島海汀·富川의 多曷洞·鏡城 등 朝鮮王朝 初期부터 鐵의 貢納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나, 이 지역의 鐵生産이 결코 朝鮮王朝에 들어서면서부터 開鑛되었다고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女眞의 興起가 이 지역의 鐵生産에 힘입었던 바 컸던 것은 『金史』에도 明證이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 『新唐書』渤海傳에 보이는 渤海國이 그 代表的 産物로 자랑하던 ‘位城支鐵’이라고 하는 것도 이 豆滿江 下流의 鐵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54年에서 1961年에 걸쳐 咸鏡北道 茂山邑 虎谷里에서 發見된 初期鐵器時代의 遺物이 西紀前 4世紀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高句麗國이 형성되는 西曆紀元을 前後하는 시기에 豆滿江 下流의 鐵資源開發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④ 이제 『新唐書』渤海傳에서 渤海의 地名을 밝히는 데 있어 유독 某某故地라는 것이 빠져 있는 中京顯德府의 位置를 살펴보면, 가장 그 位置比定에 異說이 많았으나 1934年의 鳥山喜一의 發掘報告로서 豆滿江 下流로 流入하는 海蘭河와 朝陽川 兩江 流域의 吉林省 和龍縣 西古城子인 것으로 밝혀져 定說로 되었다(「渤海の國都東京城に就いて」).
中京顯德府로 比定되어 정설로 된 西古城子는 일찍이 津田左右吉에 의하여 中京顯德府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視되어 왔던 敦化縣에서 100有餘里 南쪽에 있으며, 敦化縣에는 大祚榮이 뒤쫓는 唐軍을 피하여 東으로 빠져 나와 建國의 터전을 잡았던 山城이 六頂山 一帶에 櫛比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 비추어 보아 『舊唐書』渤海靺鞨傳에 大祚榮이 渤海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桂婁之故地’는 바로 敦化縣과 和龍縣 등 豆滿江 北岸인 것이 거의 틀림없다. 『舊唐書』의 撰者는 唐에 남아 있던 확실한 文獻에 의거하였을 것이나, 『新唐書』의 撰者는 『五代會要』에 의거하여 이를 ‘挹婁’로 고치고 보니 渤海國의 다른 지역같이 中京顯德府에 ‘某某故地’를 붙일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唐에서 大祚榮의 嫡男을 桂婁郡主에 封한 사실까지도 刪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高句麗國을 形成한 5族中 桂婁部의 原住地를 豆滿江 下流에 비정하는 것이 우리의 國史常識과 너무 어긋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능숙한 製鐵技術을 바탕으로 한 축적된 국력으로 佟佳江 流域의 小政治集團인 소위 ‘那集團’을 支配한 것이 高句麗王權이 아닌가 보고자 한다.
李龍範은 『三國志』「東夷傳」高句麗條에 ‘絶奴部 世與王婚 加古鄒加 …… ’라고 한 것은 豆滿江 流域에서 佟佳江 流域으로 진출한 桂婁部가 이 지역의 旣存勢力인 絶奴部와의 通婚策으로 自部의 孤立化를 調整하면서 專制王權을 굳혀 갔던 것으로 推斷한 바 있다(「高句麗의 成長과 鐵」pp.31~90;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高句麗遺裔」pp.4~18).
≪參考文獻≫
『三國志』卷28「毋丘儉傳」; 卷30「東夷傳」高句麗條·東沃沮條.
『新唐書』卷219「北狄列傳」渤海條.
『册府元龜』卷956「外臣部」種族條; 卷964「外臣部」封册條.
『五代會要』卷30 渤海條.
張建章, 『渤海國記』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高句麗遺裔」『中世東北亞細亞史硏究』1975, 亞細亞文化社.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9「叢考」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鳥山喜一, 「渤海の國都東京城に就いて」『朝鮮と建築』14卷 6號, 1935.
今西龍, 「高句麗五族五部考」『朝鮮古史の硏究』1937.
三品彰英,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輯, 1950.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註 352
東牟山 : 東牟山의 位置에 대하여는 『資治通鑑』玄宗 開元 元年條 胡三省注에는 『新唐書』「地理志」(실은 「安祿山傳」)을 引用하여 ‘天門嶺在土護眞河北三百里’라 하고 있다. 土護眞河는 熱河省 老哈河인 바 唐軍에 쫓긴 高句麗餘類가 이와 같은 地方으로 遁走할 수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同名異地로 볼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松井等은 輝發河와 渾河의 分水嶺에 長嶺子라는 것이 있는 바, 이것을 곧 天門嶺이라고 比定한 바 있다(「渤海國の疆域」p.411). 그러나 그 위치비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津田左右吉의 敦化縣說(「渤海考」pp.123~124), 和田淸이 비정한 지금의 老爺山脈 中의 北甑說(「渤海國地理考」p.62 및 p.74) 등으로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9年 8月 이후 中國學者들의 渤海國 古蹟發掘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이 東牟山은 현재의 敦化縣治의 敖東城 一帶인 것으로 比定되어 거의 定說化되고 있다. 이것은 敦化城에서 南으로 5km 地點인 六頂山에서 渤海王國 第3代 文王 大欽茂의 第2女 貞惠公主의 墓와 그 墓에서 出土한 墓碑 등에 비추어 보아, 이 地域이 『新唐書』渤海傳에 上京龍泉府로 遷都하기 이전 渤海王國 初期의 首都로 되어 있는 이른바 ‘舊國’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 中國學者들의 일치된 見解인 것이다(金毓黻,「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pp.75~78;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p.298; 王承禮,「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pp.575~580 및 p.584;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pp.208~209).
≪參考文獻≫
『資治通鑑』卷210「唐紀」26 玄宗 開元 元年條.
金毓黻,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硏究的補充」『考古學報』1956年 2期.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年 6期.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流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年 11期; 「敦化六頂山渤海墓淸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年 3號.
松井等,「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和田淸, 「渤海國地理考」『東亞史硏究』(滿洲篇),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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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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