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永宗鎭 應行節目에 대해 아뢰는 備邊司의 啓目/後錄  
연월일숙종 16년 1690년 10월12일(음)
본사의 계목(啓目)에 이르기를
"영종첨사(永宗僉使)가 설진(設鎭)하고 있는 자연도(紫燕島)는 강도(江都)에서 한 참에 왕래할 수 있는 곳에 있고 지형은 거북 모양같아 동쪽이 머리이고 서쪽이 꼬리인데 동으로 육지까지는 나룻길로 10리이나 조수와 순풍을 기다려 비로소 왕래할 수 있으며 그 서쪽은 큰 바다로 쑥 빠져 있습니다. 이른바 동쪽 머리의 모양이 거북같다 한 것은 딱 잘려 사람의 머리통과 같습니다. 조수가 남북에서 흘러들어 오는데 돌을 쌓아올려 길을 만들어 왕래하고 있습니다. 첨사의 진영은 이곳에 있는데 둘레는 2~3리에 불과합니다. 섬 전체의 둘레는 길이가 30리 가량이고 넓이는 15리 가량이니 합하여 계산하면 45리(평방)입니다. 섬의 서쪽에서 남으로 내달려 용류도(龍流島)를 이루고 있는데 중간에는 조수가 왕래하여 물이 떨어져야만 통행할 수 있습니다. 첨사 진영 전면에 있는 선착장은 들을 높이 쌓아올려 배를 잘 조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박하기 어려우며 기타 3면은 각각 10여 리의 땅이나 조수가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는데 만조시에는 배가 다닐 수 있으나 조수가 물러가면 배가 얕은 여울목에 걸리는 폐단이 있습니다. 조수가 물러간 뒤에는 10여 리가 진흙펄이 되는데 사람이 빠져 통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배나 사람이 모두 다니지 못하며 가운데에 두 개의 작은 개펄 사이에 만곡(彎曲)하여 있는데 비록 만조(滿潮)를 당하더라도 그 지방 사람이 아니면 길을 찾아 배를 젓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섬 전체에서 배를 댈 곳은 진영의 전면 1백보(步) 남짓밖에 없습니다. 또 삼남의 조선(漕船)은 반드시 나루 앞 작은 바다로 해서 올라오는데 이는 이른바 수로(水路)의 인후(咽喉)요 강도의 문호이니 비단 해방(海防)만을 위하여 설진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강화의 통로를 확보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종만호는 옛날에는 바닷가 육지에 있었는데 신유년 (숙종 7년 (1681))에 첨사로 올리고 이 섬으로 진영을 옮겨 어영청의 파총(把摠)을 겸하게 하여 수어케 하였으나 군병은 적고 양향(糧餉)은 부족하며 기계도 허술하고 지위도 낮아 조정에서 중진을 설치하려던 뜻에는 미흡하였습니다. 이번에 방어사로 올리고 첨사를 겸하였으며 이어 어영청의 천총(千摠)을 겸하게 하였으니 특별히 무변(武弁)을 가려 보내서 공효를 기대(企待)하는 만큼 소임도 중하고 체면도 자별합니다. 응행 절목(應行節目)이 없을 수 없겠으므로 아래에 조열(條列)하오니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후록(後錄)
1. 본진은 기왕 방어사로 올려 독립진 진영으로 설치하였은즉 수사(水使)의 관하에 들지 않았으니 수군 조련의 왕래는 말할 것도 없다. 전최(殿最)는 본도의 순찰사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며 본진 소속의 방패선(防牌船)·사후선(伺候船) 등도 본진에서 관리하여 완급에 대비하게 한다.
1. 만약 변란을 만났을 때에 혹 겨울철을 당하면 강화와 갑곶진(甲串津)은 흐르는 성엣장이 강을 덮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니 인천부(仁川府)에서는 영종진을 건너서 강화에 가야 하는데 이 진보를 설치한 것도 나라에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인천 쪽에 대변선(待變船) 몇 척과 영종 쪽에 대변선 몇 척을 비국에서 참작하여 만들어 주되 인천의 나룻배는 반드시 나루 근처의 실속있는 원주민으로 사공과 격군(格軍)을 택정하게 하고 양처의 선척 수효와 사공·격군 성명을 성책(成冊)하여 비국으로 올려보낼 것이다. 비국에서는 이를 주관하여 검칙하며 2월에서 8월까지는 생업에 이용하도록 내주고 9월에서 정월까지는 양쪽 나루에 매어두되 얼음에 교착하지 못하게 하여 대변(待變)의 소용이 되도록 한다.
1. 전부터 본진에 소속된 어영군 5초(哨) 외에 1초를 더 충정하여 양사(兩司 : 사는 대오의 단위)로 만들고 파총 2 인을 차출한다.
1. 본진의 방군(防軍) 원수(元數)는 3백 37명인데 잡탈(雜頉)과 궐액(闕額)이 태반이니 원액 외에 3백 37명을 더 주어 총계 6백 74명으로 하되 병조에서 수괄(搜括)한 경기호서의 불법으로 소속된 양정(良丁)을 떼어주어 종전의 귈액은 본읍에서 보충하도록 한다.
1. 양향(糧餉)은 경기 해서의 각 읍과 각 아문의 곡물 가운데 비국에서 참작하여 덜어내어 본진에 떼어주고 부근읍에 풀어주고 받아들이기를 강도와 남한(南漢)의 예와 똑같이 하게 한다.
1. 방어사의 요미(料米)와 노비와 말의 요(料)는 한결같이 소강(所江)의 예대로 대동(大同)의 쌀과 콩으로 제해 주고 회감한다.
1. 진영의 막사와 창고를 짓는 일은 방어사가 내려간 뒤에 작량(酌量)하여 비국에 보고하고 비국에서는 형편에 따라 돌보아주어 점차 건조하게 한다.
1. 자망군관(自望軍官) 4인의 노마료(奴馬料)는 소강방어영의 예대로 상평청의 모곡으로 지급하고 집에 있는 군관 역시 소강의 예대로 2백 명을 한정하여 형편닿는 대로 모집해들이되 잡역은 침책하지 못하게 한다.
1. 군기와 선박을 수리하라고 이미 방군을 더 주었으니 방어사가 요리하여 추진한다.
1. 군병의 춘추 조련과 시사(試射)·시방(試放)은 전례대로 시행하되 시상물은 방어사가 바로 어영청의 천총이고 군병 역시 어영청의 군병이니 어영청에서 마련해준다.
1. 본도에 있는 충훈부의 염분(鹽盆) 8좌(座)와 궁가의 염분 2좌 및 기타 어전(漁箭)은 모두 본진에 소속시켜 본진에서 수세하여 군기를 수리 보충하는 물력으로 삼도록 한다.
1. 본진의 장관은 해조로 하여금 전례대로 삭수(朔數)를 계산하여 직첩을 내주어 격권(激勸)할 수 있도록 한다.
1. 본진은 종전에 약간의 노비가 있었는데 소강은 반절을 감하고 인근의 각 고을 각 관사의 노비는 각 5구(口)를 떼어주게 한다.
1. 인천부의 포진(鋪陳)·그릇·염장(鹽醬)·젓갈류는 조정에서 이미 준비하였는데 영종진에도 유사시에 대비할 각종 물품이 있어야 하겠고, 인천에서 영종도에 이르는 중간에 어을미도(於乙未島)가 있는데 거기에 기와집을 지어 유사시에 어가가 쉬시는 곳으로 삼기로 한 것은 모두 뜻이 있는 일이니 그중에서 갖추어야 할 물건은 일일이 준비하고 준비한 뒤에 혹 오래 묵어 쓰지 못할 것이 있으면 해마다 개비(改備)한다. 집도 개조하여야 하면 개조하고 수리하여야 할 것 같으면 수리하여야 한다고 일일이 비국에 보고하면 비국에서는 형편에 따라 돌보아준다. 인천부에 있는 잡물(雜物)은 방어사 역시 검칙하기를 강화의 예와 똑같이 하고 수효는 성책하며 올려보내서 비국에서 주관하게 한다.
1. 영리(營吏) 한 사람을 대솔하되 요미는 다른 영리의 예대로 하여 각 읍에 분정(分定)한다.
1. 방어사가 타는 기마(騎馬) 1필과 복마(卜馬) 2필 및 마두(馬頭) 1인은 기역(畿驛)에서 정해 주되 신구의 교대나 군무를 직접 품의할 일로 상경할 때만 내주게 한다.
1. 방어영에서 항상 쓰는 종이와 필묵과 계목지(啓目紙)·전문지(箋文紙)·봉과(封裏)등의 물건값은 선혜청에서 참작하여 조례를 전하여 지급한다.
1. 방어사의 인신은 해조로 하여금 새로 만들어 주게 한다.
1, 방어사는 종2품이지만 그 중에서도 병조는 주병 아문(主兵衙門)이므로 서목(書目)을 갖추어 첩정(牒呈)하지 않을 수 없고 각 도의 감사는 비록 종2품 아문이라고는 하나 순찰사를 겸대하고 있으니 본도 감사는 서목을 가추어 첩정하고 다른 도의 감사는 서목 없이 첩정한다.
1. 미진한 조항은 추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