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泉野錄解說
[一]


本書는 大韓帝國 末年의 有名한 詩人이요 節士인 梅泉黃玹 先生이 記述한 韓末의 秘史이다。


黃玹全羅南道 求禮 사람으로서 本은 長水, 字는 雲卿이요, 號를 梅泉이라 한다。


本來 光陽에 世居하였으나, 뒤에 求禮에 移住한 것이다。


哲宗六年(西紀一八五五) 乙卯 十二月 十一日에 光陽縣 西石村에서 出生하였는데, 어려서부터 聰明이 過人하여, 한번 배운 것은 平生 잊어버리지 아니 하였으며, 十一歲에 能히 漢詩를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여, 神童이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靑年 時代에 科擧를 보기 爲하여 서울에 올라와, 當時 文章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秋琴 姜瑋·寗齋 李建昌·滄江 金澤榮·茂亭 鄭萬朝等과 交遊하였는데, 特히 李建昌·金澤榮과 가장 親하게 지내었다。


高宗二十年(西紀一八八三) 癸未에 保擧科에 應試하여, 初試 初場에 그 글이 첫째로 當選되었으나, 試官韓章錫이 그 시골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로 나려놓았으며, 이어 會試를 보이지 아니한 까닭에 드듸어 故鄕으로 나려가, 求禮 智異山 밑으로 移舍하여, 隱遁 生活을 하려고 하였다。


그후, 兩親의 命을 어기지 못하여, 高宗二十五年 戊子에 다시 서울에 올라와 生員會試에 應試하여, 壯元으로 及第하였다。


그러나 이때 우리 나라는 壬午軍亂과 甲申政變의 뒤를 이어, 淸·日 兩國이 서로 侵略을 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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爭하고, 高宗과 閔妃 및 政府의 모든 官吏들이 極度로 腐敗하여, 國家와 民族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고, 權力과 私利 私慾을 탐내어 國事가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黃玹은 드듸어 벼슬에 뜻을 버리고, 求禮 鄕第로 나려가, 居室을 苟安이라 하고, 書籍 三千餘卷을 쌓고, 杜門不出, 讀書로 歲月을 보내었다。


서울에 있는 여러 親舊들이 가끔 편지를 보내서,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같이 일할 것을 勸告하였으나, 그는 곧 「그대들이 어찌 나를 귀신 나라 미친 사람 가운데로 끌어드려, 같은 귀신이 되게 하고, 미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느냐」하고, 도리어 책망하였으며, 當時 文學과 벼슬이 높은 申箕善·李道宰가 여러번 出世할 것을 勸告하였으나, 또한 拒絶하였다。


그 동안 우리 나라에는 淸日戰爭과 甲午更張·乙未事變·露舘播遷等 큰 事件이 연다라 일어나고, 뒤이어 露·日 兩國이 侵略을 競爭하므로 말미암아, 國事가 더욱 망칙하게 되었다。


光武九年(西紀一九○五) 乙巳에 露日戰爭이 끝난 뒤, 日本이 우리 나라 政府를 强壓하여, 所謂 保護條約을 締結하고, 統監府를 서울에 設置하여, 우리 나라를 支配하게 되자, 黃玹은 數年前에 淸國으로 들어간 金澤榮의 뒤를 따라 淸國으로 가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漢代의 忠臣 梅福을 비롯하여 옛날 亂世에 몸을 깨끄시 가진 사람 열 사람을 뽑아서, 그 行蹟을 그림으로 그리고 詩를 지어, 十幅 屛風을 만들어 左右에 둘러놓고, 스스로 慰勞하고 勉勵하였다。


隆熙四年(西紀一九一○) 八月에 日本이 韓國을 合併하여 나라가 亡하게 되자, 黃玹은 다음과 같은 遺詩 四首를 써 놓고, 多量의 鴉片을 먹고 自決하였다。


이것이 隆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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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 九月 十日(陰八月 六日), 享年이 五十六。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妖氛晻翳帝星移, 九闕沉沉晝漏遲,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沉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曾無支厦半椽功, 只是成人不是忠, 止意僅能追尹糓, 當時愧不躡陳東。


黃玹은 天性이 매우 强直하여, 惡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고, 비록 權力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面駁하여 마지 아니하였으므로, 勢道家에게 好感을 주지 못하였다。


그의 學問은 過去 우리 나라 學者들이 많이 걸어가던 陳腐한 性理學을 버리고, 文章과 史學에 힘을 기우려, 歷代의 治亂 盛衰는 말할 것도 없고, 兵·刑·錢糓의 制度에 이르기까지, 보지 아니한 것이 없고, 利用 厚生을 主로 하는 西洋의 新學問까지 留意하여, 經濟로 自任하였다。


그의 漢詩는 國內에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金澤榮을 通하여 淸國 學者들에게 紹介되어, 淸國까지 그 이름이 높이 나타났다。


遺著로 梅泉集·梅泉野錄·東匪紀略等이 있는데, 梅泉集金澤榮의 編次로 이미 上海에서 出版되어, 널리 世上에 퍼져 있거니와, 梅泉野錄東匪紀略은 아직 原稿 그대로 求禮 本家에 秘藏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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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梅泉野錄은 高宗元年(西紀一八六四) 甲子 大院君 執政으로부터 純宗 隆熙四年(西紀一九一○) 庚戌 韓日 合邦에 이르기까지 무릇 四十七年間, 우리 나라 最近世의 事實을 記錄한 것으로서, 모두 黃玹 自身이 보고 들은대로 記錄한 것이나, 最終의 隆熙四年 八月 二十二日 合邦詔書부터 九月 十日(陰 八月 六日) 黃玹이 殉節할 때까지의 記事는 그 門人 高墉柱가 追記한 것이다。


本書는 七册六卷으로 成立되었는데, 各册의 內容을 表示하면 다음과 같다。


第一册 卷一上, 高宗元年 甲子부터―同二十四年丁亥까지 第二册 卷一下, 高宗二十五年 戊子부터―同三十年 癸巳까지 卷二, 高宗三十一年 甲午 正月부터―同年 六月까지 第三册 卷二, 高宗三十一年 甲午 七月부터―光武二年 戊戌까지 第四册 卷三, 光武三年 己亥부터―同七年 癸卯까지 第五册 卷四, 光武八年 甲辰부터―同九年 乙巳 十月까지 第六册 卷五, 光武九年 乙巳 十一月부터―隆熙元年 丁未 七月까지 第七册 卷六, 隆熙元年 丁未 八月부터―同四年 庚戌 八月까지 以上과 같이 高宗元年 甲子부터 同三十年 癸巳까지 三十年間의 記事를 一册半(第一册과 第二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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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前半)에 記錄하고, 高宗三十一年 甲午부터 隆熙四年 庚戌 까지 十五年間의 事實을 第二册의 後半 以下 五册半에 記錄한 것으로써, 本書는 甲午 以前이 簡略하고, 以後가 仔細하다는 것을 알수있으며, 體裁에 있어서도 甲午 以前은 隨聞隨錄한 것이요, 以後는 編年體로 記錄한 것이다。


따라서 本書의 主要 部分은 甲午 以後에 있으나, 一册半(卷一上下)에 收錄되어 있는 甲午 以前이라 할지라도, 大院君의 執政과 安東 金氏의 沒落, 大院君 十年間의 獨裁 政治, 閔妃와 大院君과의 軋轢, 閔妃와 그 一族의 亂政, 日本 勢力의 侵透, 壬午軍亂과 淸國의 干涉, 甲申政變, 淸日 兩國의 角逐等, 高宗 即位 以後 三十年間의 內政 外交와 其他 重要한 事實을 하나도 빼지 아니하고, 大槪 年代 順으로 記錄하였으며, 卷二 以下 甲午 以後는 完全한 編年體의 體裁를 가추어, 年月日 順으로 東學亂과 淸日戰爭, 日帝의 侵略과 甲午更張, 乙未事變, 露國勢力의 浸透와 高宗의 露舘播遷, 露日의 竸爭과 開戰, 乙巳 保護條約 締結 以後, 우리 나라 主權을 强奪하기 爲한 日帝의 모든 奸計와 施策, 親日派 民族 叛逆者의 賣國 行爲, 이를 反對하는 義兵과 義士의 活動, 貪官 汚吏의 非行等, 實로 다른 書籍에서 얻어 볼 수 없는 貴重한 事實을 많이 記載하고, 또 新文化의 影響을 받아 날로 變遷해 가는 社會的 經濟的 文化的 事實을 많이 收錄하였다。


要컨대 本書는 高宗 純宗 兩代 四十七年間 망해 가는 우리 나라의 實情을 春秋筆法에 依하여 記錄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 最近世史 研究의 가장 重要한 資料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特히 우리 나라를 支配 或은 侵略하기 爲한 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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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과 露國의 凶計, 日本의 奸計等을 餘地 없이 說破하여, 讀者로 하여금 義憤을 참지 못하게 하였으며, 나라를 망친 高宗과 閔妃의 亂政, 貪官 汚吏의 非行, 親日派 民族 叛逆者의 賣國 行爲等을 숨김 없이 暴露하여, 後世의 亂臣 賊子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였으며, 國家와 民族을 爲하여 가진 苦生을 다하여 가면서 倭賊과 鬪爭하다가 壯烈한 最後를 마친 義兵과 義士의 行蹟을 詳細히 記述하여, 우리에게 愛國心을 북돋우어 주고 있다。


[三]


本書는 우리 나라를 侵略한 日帝의 모든 奸計와, 當時 權力을 잡고 있던 親日派 民族 叛逆者 및 貪官 汚吏의 非行을 餘地 없이 暴露하여, 時局에 抵觸되는 바가 많으므로, 黃玹은 殉節할 때, 子孫들에게 이 册을 外人에게 보이지 말 것을 付托하였으며, 子孫들이 또한 極秘에 부치고 深藏하였으므로, 本書의 存在는 全然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原本 한 벌만 가지고는 湮滅할 우려가 있으므로, 子孫들은 副本 數部를 作成하고, 그 一部를 上海에 있는 滄江 金澤榮에게 보내서 校正을 請한 일이 있었다。


金澤榮韓史綮梅泉野錄을 引用한 것은 이 까닭이며, 韓史綮에 依하여 梅泉野錄이 있는 줄 처음으로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原本을 얻어 볼 도리는 없었다。


그런데 一九三九年 解說子가 國史編纂委員會의 前身인 朝鮮史編修會에 在職할 때, 韓末의 義兵 史料를 採訪하기 爲하여, 全羅北道 地方에 出張하여, 南原邑에 居住하는 朴政植氏에게 梅泉野錄의 副本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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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發見하고, 借覽하는 同時에, 梅泉 親筆의 原本을 求하기 爲하여, 全羅南道 求禮郡 光義面梅泉 本家에 갔던 바, 梅泉의 長允 黃巖顯(只今은 死亡) 氏가 全然 그런 册이 없다 하고, 頑强히 拒絶하므로, 하는 수 없이 朴政植氏 所藏의 副本만 빌려 가지고 도라와 그 副本을 作成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아직 우리 國土가 日帝의 治下에 놓여 있었으므로, 朝鮮史編修會에서도 이 것을 公開하지 아니하고 極秘에 부쳤던 것이다。


解放된 오늘날 조금도 이 것을 忌諱할 必要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最近世史 研究에 絶對 必要한 資料이므로, 今番에 이를 韓國史料叢書 第一로 上梓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梅泉 手筆의 原本을 보지 아니하고, 副本만 가지고 出版하는 것은 매우 危險한 일이므로, 昨年 여름에 다시 求禮 本家에 가서, 梅泉의 次允 黃渭顯氏에게 原本의 借覽을 請하였던 바, 이번에는 快히 承諾하고, 原本과 金澤榮이 校正한 副本을 빌려주므로, 本會 所藏의 副本과 對照한 後에 出版에 부친 것이다。


檀紀四二八八年一月 日 申奭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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