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 660년 07월09일(음) )

이 날에 [소(蘇)]정방(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282282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에 있던 포구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장암(長岩)’·‘손량(孫梁)’·‘지화포(只火浦)’·‘백강(白江)’으로,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20년조에는 ‘백강(白江)’으로 기록되었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56~757쪽 주 53) 참조. 한편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조 | 《삼국유사》 권1, 기이2 태종춘추공조 |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현경(顯慶) 5년조《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 5년 8월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었다.닫기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金)]유신(庾信) 등이 (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283283 당(唐)나라 군사의 진영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남쪽인 석성면 부근이었고, 김유신(金庾信)이 당나라 군사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2~183쪽 주 210) 참조).닫기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284284 김문영(金文永)’이라고도 하였다.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독군(督軍)으로 참전하였으며, 661년(문무왕 원년)에는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이 되었다. 668년(문무왕 8)에는 대아찬(大阿湌)으로서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사천성(蛇川城)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670년에는 군관(軍官)과 함께 백제의 고지(故地) 12성(城)을 재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683년(신문왕 3)에는 이찬(伊湌)으로서 신문왕(神文王)의 혼례(婚禮)를 주선하였고, 694년(효소왕 3)에는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닫기 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285285 ‘섭족부이(躡足附耳)’의 준말로, 남의 발을 밟아 일깨우고 귓속말로 남몰래 귀띔해서 주의를 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장량(張良)이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발을 밟고 귓속말을 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3쪽 주 212) 참조).닫기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註 282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에 있던 포구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장암(長岩)’·‘손량(孫梁)’·‘지화포(只火浦)’·‘백강(白江)’으로,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 20년조에는 ‘백강(白江)’으로 기록되었다.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56~757쪽 주 53) 참조. 한편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조 | 《삼국유사》 권1, 기이2 태종춘추공조 |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百濟傳)《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현경(顯慶) 5년조《책부원귀(冊府元龜)》 권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 5년 8월조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었다.
註 283
당(唐)나라 군사의 진영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남쪽인 석성면 부근이었고, 김유신(金庾信)이 당나라 군사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2~183쪽 주 210) 참조).
註 284
김문영(金文永)’이라고도 하였다.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독군(督軍)으로 참전하였으며, 661년(문무왕 원년)에는 수약주총관(首若州摠管)이 되었다. 668년(문무왕 8)에는 대아찬(大阿湌)으로서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사천성(蛇川城)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670년에는 군관(軍官)과 함께 백제의 고지(故地) 12성(城)을 재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683년(신문왕 3)에는 이찬(伊湌)으로서 신문왕(神文王)의 혼례(婚禮)를 주선하였고, 694년(효소왕 3)에는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註 285
‘섭족부이(躡足附耳)’의 준말로, 남의 발을 밟아 일깨우고 귓속말로 남몰래 귀띔해서 주의를 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장량(張良)이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발을 밟고 귓속말을 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유래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3쪽 주 2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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