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 660년 11월22일(음) )

22일에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서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여,332332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때 무열왕(武烈王)김유신(金庾信)에게 대각간(大角干)이라는 비상위(非常位)를 주었다고 기록되었다.닫기 계금졸(罽衿卒)333333 신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계금당(罽衿幢)에 속한 군졸(軍卒)이다.닫기선복(宣服)334334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급찬(級湌)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6두품(頭品)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급찬(級湌)으로 삼고, 군사(軍師)335335 신라 군제(軍制)의 하나인 군사당(軍師幢)의 하급 무관직(武官職)이다. 군사당은 604년(진평왕 26)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군관(軍官)은 군사당주(軍師幢主)와 군사감(軍師監)으로 구성되었다. 군사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9쪽 주 244) 참조.닫기두질(杜迭)336336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외위(外位) 고간(高干)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을 고간(高干)337337 신라 외위(外位) 11관등 중에서 3위의 관등으로,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9위인 급찬(級湌)에 해당한다.닫기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338338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전사하여 공을 세워서 관작을 차등있게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에게 관작을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모두 그 재능을 헤아려서 임용하였는데,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달솔(達率)339339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2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수서(隋書)》 권81,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대솔(大率)’로 기록되었으며, 《주서(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달솔의 정원은 30명이고, 방(方)의 장관인 방령(方領)에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다.닫기자간(自簡)340340 660년(의자왕 20)에 달솔(達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받았다. 이후 661년(문무왕 원년) 7월에는 하주총관(下州摠管)이 되어 백제 유민들과의 옹산성(甕山城) 전투에 참전하였다.닫기은 일길찬(一吉湌)3413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7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기록되었다.닫기의 관등을 주어 총관(總管)의 직을 맡겼고, 은솔(恩率)342342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3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기록되었다.닫기무수(武守)343343 660년(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대감(大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는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을 주어 대감(大監)의 직을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344344 660년(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제감(弟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弟監)의 직을 맡게 하였다.


註 332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이때 무열왕(武烈王)김유신(金庾信)에게 대각간(大角干)이라는 비상위(非常位)를 주었다고 기록되었다.
註 333
신라 중앙 군제(軍制)의 하나인 계금당(罽衿幢)에 속한 군졸(軍卒)이다.
註 334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급찬(級湌)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6두품(頭品)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335
신라 군제(軍制)의 하나인 군사당(軍師幢)의 하급 무관직(武官職)이다. 군사당은 604년(진평왕 26)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군관(軍官)은 군사당주(軍師幢主)와 군사감(軍師監)으로 구성되었다. 군사에 대한 연구 성과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89쪽 주 244) 참조.
註 336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외위(外位) 고간(高干)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337
신라 외위(外位) 11관등 중에서 3위의 관등으로,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9위인 급찬(級湌)에 해당한다.
註 338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정벌할 때 전사하여 공을 세워서 관작을 차등있게 받은 것으로 미루어 지방 세력으로 추정되지만,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339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2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수서(隋書)》 권81,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대솔(大率)’로 기록되었으며, 《주서(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달솔의 정원은 30명이고, 방(方)의 장관인 방령(方領)에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다.
註 340
660년(의자왕 20)에 달솔(達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받았다. 이후 661년(문무왕 원년) 7월에는 하주총관(下州摠管)이 되어 백제 유민들과의 옹산성(甕山城) 전투에 참전하였다.
註 341
신라 경위(京位) 17관등 중에서 7위의 관등이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7, 직관(職官) 상(上)에는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기록되었다.
註 342
백제 16관등 중에서 제3관등으로 ‘솔(率)’계(系) 관등의 하나이다. 《주서(周書)》 권49, 열전(列傳) 백제전(百濟傳)에는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였으며, 정원은 없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註 343
660년(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대감(大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344
660년(의자왕 20)에 은솔(恩率)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신라의 무열왕(武烈王)에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과 제감(弟監)의 직을 받았다. 이외의 다른 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주제분류
정치>군사>군사조직>보훈
정치>행정>관인>포상·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