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직과 역할

1946년 2월 8∼9일 북한에서는 ‘북조선 각정당·사회단체, 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확대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통일전선적 성격과 각 분야별, 지방별 정권기관적 성격이 같이 섞인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아무튼 이런 형태를 취한 것은 짧은 기간 안에 수립해야 했던 북조선임시인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 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각 집행부서 책임자와 23명의 중앙위원들을 선출했다.023023 김남식,《해방후 정당 사회단체 연구 참고자료》(국토통일원) pp.273∼274와 김용복, 앞의 논문 p.219 및 HQ. HUSAFIK, Intelligence Summary North Korea, No.7 (1946.3.5), 《주한미군 북한정보 요약》1, p.76 등을 참조하여 작성.닫기

〈집행부서〉
위원장 김일성(공산당)
부위원장 김두봉(독립동맹) 서기국 강양욱(조민당)
산업국장 이문환(무소속) 교통국장 한희진(무소속, 후임 허남희)
농림국장 이순근(공산당) 상업국장 한동찬(무소속, 후임 장시우)
체신국장 조영열(공산당) 재정국장 이봉수(공산당)
교육국장 장종식(공산당) 보건국장 윤기영(조민당)
사법국장 최용달(공산당) 보안국장 최용건(조민당)
기획부장 정진태(공산당) 선전부장 오기섭 (공산당, 후임 이청원)
노동부장* 오기섭(공산당) 총무부장 이주연(공산당)
*노동부는 1946년 9월에 설치됨.
〈중앙위원〉
김일성, 김두봉, 무정, 강양욱, 최용건, 이문환, 한희진, 이순근, 이봉수, 한동찬, 장종식, 윤기영, 최용달, 김덕영, 방우용(독립동맹), 홍기주(조민당), 현찬형(전평 북부조선총국 위원장), 이기형(조소문화협회 위원장), 강진건(북조선농민동맹 위원장), 박정애(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위원장), 홍기황(조민당), 강영근(노동조합), 방수영(민주청년동맹 위원장)

집행부서 및 중앙위원 구성에는 공산당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조민당도 일부 이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친공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미 조만식의 신탁지지 거부로 조민당의 우파적 기반은 약화되고 내막적으로는 공산당의 외곽정당화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조민당의 영향력을 감안하여 임시인위 구성에서는 조민당 소속 인물 몇 사람을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동맹의 연안파는 생각보다 적게 참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독립동맹이 아직 조민당을 대치하는 위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파는 전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당 뿐만 아니라 이제 정권기관까지 장악하게 된 김일성의 지위가 결정적으로 강화되는 한편 정권기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헤게모니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행정 10국’ 시절부터 참여했던 전문가적 인물들의 대부분이 유임되는 등, 기존 ‘행정 10국’ 체제를 급격하게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한편 협의회는 북조선임시인위의 집행부서 및 중앙위원의 선출과 더불어, 북조선임시인위가 긴급하게 실시해야 될 11개조의 당면과업을 제시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북조선의 일체 경제 정치 내지 문화 생활의 향상과 민주주의적 지방행정기관의 지도사업을 개선할 목적으로” 제시된 11개조의 긴급 당면과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 숙청 ② 일본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와 조선인 대지주의 산림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 반분소작제를 철폐,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 분여 ③ 생산 기업소를 인민생활필수품에 소요되는 기업소로 전환, ④ 철도 수운 통신 운수 등의 회복 ⑤ 금융기관 체계 정리 ⑥ 중소기업의 개량과 발전 ⑦ 노동운동의 적극 방조 ⑧ 인민교육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 ⑨ 민주주의적 인민 교양 ⑩ 식량문제 대책 수립 ⑪ 모스크바 결정의 진의의 정확한 해석 등이 그것이다.02402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건에 대한 북조선 각도 및 각군 인민위원회 대표들과 반일민주주의적 당 및 각 사회단체 대표들 회의의 결정서〉(김준엽 외 편, 《북한연구자료집》1,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 pp.46∼47.닫기 이 결정서는 첫째 항목과 마지막 항목을 제외하다면 거의 전부가 경제 및 문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북조선임시인위의 수립 의도가 내부 개혁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북조선임시인위가 수립되자 소군정사령부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군정사령부의 모든 직원은 고문관의 지위로 바뀌었고 모든 문제의 결정권은 일단 조선인 관리들이 가지는 것으로 되었다.025025 B.V. 시체찌닌,〈해방후 조선에서〉(《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함성, 1989) p.233.닫기 예상대로 북조선임시인위가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은 토지개혁이었다. 사실 당시의 시점까지 토지문제는 토지개혁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 성격과 그 실행에 뒤따를 엄청난 여파로 인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 왔었다. 그러한 고려 속에서 일제 및 친일반역자의 토지 몰수 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의 토지 몰수까지 거론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초기 주장026026 박헌영,〈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김남식 편,《남로당 연구 자료집》제1권, 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 1974) p.10과 ‘조선공산당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해방일보〉1945년 10월 3일자) 및〈인민정부 수립요강〉(김기석,《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81;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11, p.632).닫기은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확대할 필요성 때문에 일제 및 친일반역자들만의 토지 몰수라는 온건한 입장으로 물러난 상태였다.027027 조공평남지구확대위원회 ,〈정치노선에 관하여〉(《옳은 노선》, 동경: 민중신문사, 1946, pp.24∼25;《한국현대사 자료총서》11, p.459)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시정대강〉(《해방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 일지》, 민주조선사, 1949, pp.11∼12; 《한국현대사 자료총서》12, pp.280∼281).닫기 그러나 북조선임시인위의 정강은 이같은 온건한 입장과는 달리 일제 및 친일분자 뿐만 아니라 조선인 대지주의 토지 몰수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북조선임시인위는 자신의 첫 과업으로 이제까지 통일전선 문제로 유보되어 왔던 조선인 대지주의 토지 몰수까지 포함하는 대대적인 토지개혁 단행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북조선임시인위의 수립은 미소공위를 앞두고 북한의 친공적인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급속히 토지개혁을 실시할 필요성과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지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가 언제부터 진행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46년 1월 초에 세밀한 토지조사를 지시하는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이 있었으나 이것이 토지개혁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028028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 제2호〉(《조선공산당 문건 자료집》, 한림대 아시아문화 연구소, 1993) p.75.닫기 1946년 1월 하순에 개최된 조공 북조선분국의 한 회의029029 주 18) 참조.닫기는 북조선임시인위 수립과 더불어 토지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정하는 한편 박문규, 최용달, 김광진, 안길, 김책, 주영하 등으로 토지개혁법령 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한다. 이들은 약 1달 정도 준비 끝에 2월 20일경 토지개혁안을 조공 북조선분국 상무위원회로 넘겼다.03003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pp.49∼55.닫기 상무위원회에서 1주일 정도 검토된 토지개혁안은 3월 4일 개최된 조공 북조선분국 제5차 집행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그렇지만 외형상으로는 2월 23일~3월 3일까지 개최된 북조선농민연맹 대표대회가 토지개혁 문제를 검토, 북조선임시인위에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031031 《해방 후 10년 일지 1945∼1955》 (조선 중앙통신사) p.46.닫기
한편 토지개혁안은 보다 내막적으로는 소련측에 의해서 검토된 듯하다.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실시할 토지개혁의 방도를 둘러싸고 국방성 안과 외무성 안이 대립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국방성 안은 5정보 이상의 토지와 소작을 주는 지주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외무성 안은 10정보 이상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되, 10정보 이하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5정보 이상의 토지를 몰수하고, 전토지를 소작주는 지주에 대해서도 2정보 이상의 토지만을 몰수토록 했다. 또한 외무성 안은 이들 몰수 토지를 농민들의 소유로 유상 분배 할 것을 주장했다. 국방성 안이 보다 급진적이었고 이에 비해 외무성 안은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것으로 보인다.032032 전현수, 앞의 논문 p.301.닫기 북한에서 실제로 반영되었던 것은 국방성 안이었다.
북한의 공산당 내부의 검토내용, 농민연맹에 의한 검토내용, 소련측의 대립되는 안들이 어떻게 선택되고 절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토지개혁법안은 3월 5일 개최된 북조선임시인위의 총회에서 찬반토론을 거쳐 공포되었다. 그 토론에서 산업국장 이문환과 재정국장 이봉수, 평남인민위원회 위원장 홍기황 등은 제안된 안보다 보다 온건한 내용을 주장하는 반대토론을 했다 한다.033033 전현수, 위의 논문 pp.301∼302.닫기 그리하여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과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이 발표되었고, 7일에는 ‘토지개혁 실시위원회’ 조직을 규정한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에 관한 결정서〉가 발표되었으며, 8일에는 〈토지개혁법령에 관한 세칙〉이 발표되었다. 토지개혁 법령에 따르면, ① 일본국가,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 ② 반역자, 일제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 해방시 자기 지방에서 도주한 자 등의 토지가 몰수되고(제2조), ① 5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의 소유지 ② 자경치 않고 전부 소작주는 토지 ③ 계속적으로 소작주는 토지 ④ 5정보 이상 소유한 성당 승원 기타 종교단체의 소유지 등이 몰수되어 무상으로 농민에게 분여되도록 했다(제3조).034034 토지개혁법령, 임시조치법, 결정서, 시행세칙 등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 편, 《북한관계사료집》Ⅴ(1987) pp.230∼237 참조.닫기
3월 5일부터 3월말까지 진행된 북한의 토지개혁에는 북조선임시인위의 전체적인 지도 아래에서 지방에서는 도·군·면 인민위원회가 그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마을 수준에서 토지개혁을 직접적으로 집행한 것은 전국적으로 빈농 고농을 중심으로 해서 90,697명의 농민이 참여하여 조직된 12,001개의 농촌위원회였다. 이들 중심으로 토지개혁이 실행되는 동안 공산당을 비롯하여 70여 만명의 농민연맹원, 35만명의 노동조합원, 30만명의 여성동맹, 50만여 명의 민청원, 335명의 평양학원 학생, 그리고 조선민주당과 조선신민당·문화인·인민극단·예술동맹·교육자동맹 등 총 3백만명이 동원되었다. 그 결과 42만여 가구에 대하여 북한 총경지 면적 52%, 지주 소유지의 85%가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72만여 호에 걸쳐 고용농민 또는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 무상으로 분배되었다.035035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토지개혁 사업의 총결과 금후 과제〉(국사편찬위원회 편,《북한관계사료집》Ⅰ, 1982) 및 장상환,〈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 과정의 특질〉(《북한사회의 구조와 변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87) pp.98∼113 참조.닫기
한 마디로 북한에서 시행된 토지개혁은 해방 이후 당시까지 조직된 공산당 중심의 조직역량을 총동원하여 농민의 계급구조를 단 기간 내에 뒤바꾼 사회 혁명이었다. 이를 통하여 친일파와 지주 등 기존의 전통적 지배층은 이제 정치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도 그 기반을 상실함으로써 급속하게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이제까지 피지배층에 머물렀던 대부분의 농민들은 북한체제의 새로운 지지층이 되었다. 토지개혁 이후 토지를 몰수당한 사람들은 일정 정도 저항하기도 하나 결국 월남의 길을 택하거나 약화된 자신들의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한국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결정의 구체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3월 20일 개막되었다. 미소공위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어 3월 29일자 미소공위 제3호 성명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토의 절차를 발표했고, 4월 18일자 제5호 성명은 미소공위가 협의대상으로 삼을 정당·사회단체의 자격을 밝혔다. 이에 따라 소련 및 북한측에서도 이에 대한 준비가 분주하게 이루어졌다. 우선, 모스크바에서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단에 보낸 임시정부 수립안에 대한 3월 16일자 소련측 훈령과,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사령부에서 모스크바에 보낸 임시정부 각료 추천자들에 대한 3월 15일자 보고는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소련측 구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되며 정부의 장관직은 남북한의 정당·사회단체가 추천한 후보들간에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임시정부 수상에는 여운형, 부수상에는 김규석과 박헌영, 국방상에는 김일성이 거론되고 있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036036 3월 16일자 모스크바 훈령과 3월 15일자 소련군사령부의 보고에 대해서는 〈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 1994년 봄호) 및 전현수, 앞의 논문 pp.298∼300 참조.닫기
남북한의 좌익세력들도 이에 대한 대책 수립에 분주했다. 3월 21일에 개최된 조공 북조선조직위 집행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 대책안을 논의했고, 4월 2일부터 6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던 박헌영 역시 북한의 지도자들과 더불어 임시정부 수립 대책 및 미소공위 제3호 성명에 따른 대책 수립을 논의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의 범위 문제, 임시정부의 조직 문제, 임시정부에 참여할 간부의 자격 문제, 임시정부의 정강정책, 남조선 정세, 미소공위 지원대책 등 제반 문제들이 검토되었다.037037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pp.211∼226 및 같은 책 하, pp.65∼66 참조.닫기 박헌영이 북한을 다녀온 직후 남한의 좌익세력들도 4월 20일 민전중앙위원회 제2차 회의, 4월 23~24일 제2회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 등을 통하여 임시정부 수립 대책을 논의했다.038038 김남식,《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 pp.231∼233.닫기
그런 가운데 3월 23일 북조선임시인위 위원장인 김일성은 〈20개정강〉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일제잔재 숙청
② 반민주주의적 정당의 활동 금지
③ 언론, 출판, 집회, 신앙의 자유 보장 및 노동조합 등 민주주의적 사회단체의 활동 보장
④ 일반적인 직접, 평등, 무기명 투표에 의한 인민위원회의 결성
⑤ 전체 공민들의 정치, 경제생활조건상의 동등권
⑥ 인격, 주택의 신성불가침 및 재산과 개인소유물의 법적 보호
⑦ 일제 법률과 재판기관의 폐지 및 인민재판기관의 설치
⑧ 공업, 농공, 운수업 및 상업 등의 발전
⑨ 대기업소, 운수기관, 은행, 광산, 삼림의 국유화
⑩ 개인 수공업과 상업의 자유
⑪ 토지개혁
⑫ 생필품의 시장가격 제정 및 투기업자, 고리대금업자와의 투쟁
⑬ 공정한 단일 조세제
⑭ 8시간 노동제 및 최저임금제
⑮ 노동자와 사무원의 생명보험 및 노동자와 기업소의 보호제
⑯ 전반적 인민의무교육
⑰ 민족문화, 과학, 기술의 발전
⑱ 인재 양성을 위한 특별학교 설치
⑲ 과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인사들의 사업 장려 및 보조
⑳ 국가병원수의 확대, 전염병 근절 및 빈민에 대한 무료 치료039039 〈해방일보〉1946년 4월 10일.닫기

〈20개정강〉은 새로이 수립되는 민주주의적 임시정부가 기초해야 될 정강으로 발표된 것이었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위의 이름으로 발표된 〈20개정강〉의 작성 역시 소련측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3월 16일자 모스크바 훈령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18개 항목의 정강정책과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20개정강〉이 소련측 훈령의 18개 항목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040040 전현수, 앞의 논문 p.299. 특히 이 글의 주 8)의 내용 참조. 또한〈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1994년 봄호) pp.372∼373 참조.닫기 여하튼 〈20개 정강〉은 새로이 수립되는 임시정부의 제반 정책이 기초해야 될 정강으로서 제시되었으나, 제1차 미소공위가 5월 6일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의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무기휴회에 들어감으로써 그 정강이 전국적으로 실현될 전망은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3월에 토지개혁을 실시한 바 있는 북조선임시인위는 토지개혁 이후에도 〈20개정강〉에서 밝힌 주요 개혁들을 계속 시행해 나감으로써 〈20개정강〉은 북한에서 지속적인 민주개혁의 지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6월 24일 북조선임시인위는 8시간 노동, 해로운 조건 아래에서의 7시간 노동 및 소년 노동의 금지, 14세 미만자의 노동 금지,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사회보험의 실시……등을 규정한 〈북조선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을 발표했다.041041 〈제9차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북조선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에 관한 결정서〉(《북한관계 사료집》Ⅴ) pp.685∼688 참조.닫기 27일에는 〈농업 현물세에 관한 결정서〉가 발표되어 농민들은 수확량의 25%만을 현물세로 납입하게 되었다. 7월 22일에는 〈북조선의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8월 10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이 발표되어 전체 산업의 90%에 해당하는 1,034개의 주요 산업시설들이 국유화되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소련측의 3월 16일자 훈령에 포함된 18개조의 정치강령 중 국유화 관련 항목에 표현된 “직접적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제공하기 위해 작동한 전시공업 부분의 일본인 기업과 일본인-조선인 합작 주식회사는 소련과 미국 군대의 전리품으로서 국유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판단해 볼 때, 소련군 관리하의 모든 산업시설이 북한측에 이관된 것은 아닌 듯하다.042042 〈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1994년 봄호) p.372.
해방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서 행한 전리품의 반출과 조소 경제관계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전현수, 앞의 논문 pp.307∼312 참조.
닫기
결국 북조선임시인위는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개혁을 수행하는 중앙 정권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히 토지개혁을 통해서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헤게모니는 확고해졌다. 물론 거기에는 소련측의 지원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남북한 분단정권의 수립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이러한 개혁을 수행했던 북조선임시인위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김일성의 표현처럼, 북조선임시인위의 주도하에 북한에서 시행된 민주개혁은 북한만으로 한정할 경우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기초 사업”043043 김일성, 〈8.15해방 1주년을 기념하면서 조선동포에게 고함〉(《북한연구자료집》1) p.125.닫기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북한에서 실시된 이러한 민주개혁의 효과가 ‘남풍’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러한 남풍은 남한에서 반혁명의 ‘역풍’을 강화시켰고 이로 인해 통일적 임시정부의 수립이 더욱 멀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더욱이 북조선임시인위가 수행했던 제반 민주개혁의 이면에는 미소공위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북한만이라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던 소련측의 이해와 북한만의 개혁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자 서둘렀던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성급한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다.

註 023
: 김남식,《해방후 정당 사회단체 연구 참고자료》(국토통일원) pp.273∼274와 김용복, 앞의 논문 p.219 및 HQ. HUSAFIK, Intelligence Summary North Korea, No.7 (1946.3.5), 《주한미군 북한정보 요약》1, p.76 등을 참조하여 작성.
註 024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건에 대한 북조선 각도 및 각군 인민위원회 대표들과 반일민주주의적 당 및 각 사회단체 대표들 회의의 결정서〉(김준엽 외 편, 《북한연구자료집》1,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 pp.46∼47.
註 025
: B.V. 시체찌닌,〈해방후 조선에서〉(《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함성, 1989) p.233.
註 026
: 박헌영,〈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김남식 편,《남로당 연구 자료집》제1권, 고려대 아세아 문제연구소, 1974) p.10과 ‘조선공산당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해방일보〉1945년 10월 3일자) 및〈인민정부 수립요강〉(김기석,《북조선의 현상과 장래》, 조선정경연구사, 1947, p.81;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11, p.632).
註 027
: 조공평남지구확대위원회 ,〈정치노선에 관하여〉(《옳은 노선》, 동경: 민중신문사, 1946, pp.24∼25;《한국현대사 자료총서》11, p.459)와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시정대강〉(《해방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 일지》, 민주조선사, 1949, pp.11∼12; 《한국현대사 자료총서》12, pp.280∼281).
註 028
: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 제2호〉(《조선공산당 문건 자료집》, 한림대 아시아문화 연구소, 1993) p.75.
註 029
: 주 18) 참조.
註 030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pp.49∼55.
註 031
: 《해방 후 10년 일지 1945∼1955》 (조선 중앙통신사) p.46.
註 032
: 전현수, 앞의 논문 p.301.
註 033
: 전현수, 위의 논문 pp.301∼302.
註 034
: 토지개혁법령, 임시조치법, 결정서, 시행세칙 등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 편, 《북한관계사료집》Ⅴ(1987) pp.230∼237 참조.
註 035
: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토지개혁 사업의 총결과 금후 과제〉(국사편찬위원회 편,《북한관계사료집》Ⅰ, 1982) 및 장상환,〈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 과정의 특질〉(《북한사회의 구조와 변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87) pp.98∼113 참조.
註 036
: 3월 16일자 모스크바 훈령과 3월 15일자 소련군사령부의 보고에 대해서는 〈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 1994년 봄호) 및 전현수, 앞의 논문 pp.298∼300 참조.
註 037
: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pp.211∼226 및 같은 책 하, pp.65∼66 참조.
註 038
: 김남식,《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 pp.231∼233.
註 039
: 〈해방일보〉1946년 4월 10일.
註 040
: 전현수, 앞의 논문 p.299. 특히 이 글의 주 8)의 내용 참조. 또한〈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1994년 봄호) pp.372∼373 참조.
註 041
: 〈제9차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북조선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에 관한 결정서〉(《북한관계 사료집》Ⅴ) pp.685∼688 참조.
註 042
: 〈소련의 조선임시정부 수립구상〉(《역사비평》1994년 봄호) p.372.
해방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서 행한 전리품의 반출과 조소 경제관계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전현수, 앞의 논문 pp.307∼312 참조.
註 043
: 김일성, 〈8.15해방 1주년을 기념하면서 조선동포에게 고함〉(《북한연구자료집》1)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