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침과 복신이 여러 무리를 모아 세력을 확장하다 ( 660년 (음) )

이때 도침(道琛)146146 백제의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복신과의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 죽임을 당한 부흥군의 지도자이다.닫기은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 후에는 우리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147147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닫기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使者)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大將)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148148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닫기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149149 이 내용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용삭 3월조에 나온다. 그러나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은 약간 다르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닫기 신라 왕 춘추나라의 조서(詔書)150150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로 금문(金文)·조(詔)·조명(詔命)·조유(詔諭)·조책(詔冊)·조칙(詔勅)이라고도 한다.닫기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151151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을 말한다.닫기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흠고사(古泗)152152 오늘날의 전북 고부 지방으로 보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58쪽).닫기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흠갈령도(葛嶺道)153153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충북 영동, 정읍에서 순창으로 통하는 치도(峙道), 노령산맥에서 태인·고부로 통하는 루트 등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777쪽).닫기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154154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져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 동일한 표현으로 실려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춘 2월에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는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豆良尹城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자 이에 놀란 무열왕이 金純·眞欽 등으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으며, 敗軍이 加召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곧 퇴군한 것으로 되어 있다.닫기 얼마 후에 복신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155155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으로 되어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는 “福信尋殺道琛 專摠國兵”으로 나온다.닫기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大使)156156 군주의 명을 받들어 일을 거행하는 정사(正使)를 말하며 군주를 대표하는 최고위 사자(使者)이다.닫기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157157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졌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2년(661) 추7월조에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다.닫기

註 146
백제의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복신과의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 죽임을 당한 부흥군의 지도자이다.
註 147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註 148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註 149
이 내용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 高宗 용삭 3월조에 나온다. 그러나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은 약간 다르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註 150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로 금문(金文)·조(詔)·조명(詔命)·조유(詔諭)·조책(詔冊)·조칙(詔勅)이라고도 한다.
註 151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을 말한다.
註 152
오늘날의 전북 고부 지방으로 보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358쪽).
註 153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충북 영동, 정읍에서 순창으로 통하는 치도(峙道), 노령산맥에서 태인·고부로 통하는 루트 등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777쪽).
註 154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져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 동일한 표현으로 실려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춘 2월에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는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켜 豆良尹城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자 이에 놀란 무열왕이 金純·眞欽 등으로 하여금 급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으며, 敗軍이 加召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곧 퇴군한 것으로 되어 있다.
註 155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동일한 표현으로 되어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하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원년 3월조에는 “福信尋殺道琛 專摠國兵”으로 나온다.
註 156
군주의 명을 받들어 일을 거행하는 정사(正使)를 말하며 군주를 대표하는 최고위 사자(使者)이다.
註 157
이 내용은 《구당서》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신당서》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빠졌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0 唐紀16 고종 용삭 2년(661) 추7월조에 동일한 표현이 실려 있다.
주제분류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