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入校狀況

제1차 國共合作 시기인 1927년 말까지 黃埔本校 및 武漢分校에는 다수의 한인이 교관 및 학생·입오생으로 입교하였고, 이와 더불어 교도단 및 황포본교 예하 각급 시설에도 상당수가 수용되어 있었다.071071 楊昭全 等編,《關內地域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匯編》上册(료녕민족출판사, 1987) p.145.닫기 이들의 정확한 수효와 신상을 파악하기는 지난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인들은 입교시 모두 韓國과 中國의 이중국적을 소지하였고,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일제 정보망의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 분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072072 邵毓麟, 河正玉 역,〈臨政獨立闘爭과 中國의 援助〉(《政經研究》1977년 6월호) p.348.닫기
개교 이래 황포군교는 피압박민족 후원을 목적으로 몽고·대만·싱가폴·월남인들과 더불어 한인에 대해 특별입학 조처를 시행하였고, 특히 한인 입교생은 ‘給費生’으로 우대받았다.073073 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 및 박창욱 주편, 앞의 책 p.52.닫기 1∼5기 정규과정 입교생의 경우만 하더라도 34명으로 집계되는 한인의 수효는 여타 ‘피압박민족’ 출신뿐 아니라, 甘肅·遼寧·吉林·黑龍江 등 소규모 성 단위 출신 인원을 상회한다.074074 1∼5기 입교생 중 소단위지역 출신을 살펴보면 甘肅省 6명, 遼寧省 11명, 吉林省 3명, 黑龍江省 1명, 蒙古 6명, 臺灣 2명, 싱가폴 1명, 越南 1 명이었다(《군교사료》p.93).닫기 그리하여 입교시기가 8개월에 1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인의 경우에는 수시로 入伍生 과정의 입교가 허락되었다. 그 결과 한인 입교생들은 學生軍의 일원으로 각지 병영에 수용되어 경비업무와 사관과정 입교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받았다. 1927년 5월 무렵 廣東省 일원의 각급 군사시설에는 230여명의 한인 입교생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075075 1927년 말에 작성된 일제정보자료에 근거한 황포군교 소속 또는 보조시설로 활용되던 광주 근교의 각급 군사시설에 수용 중이던 한인의 상황은, 黄埔軍校 14명, 黃埔敎導團 56명, 沙河兵營 15명, 漁珠學生軍(漁珠砲台守備) 36명, 深圳要塞 51명, 廣州東山陸軍病院 20명, 中山大學 57명계 229명이었다고 한다(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
이 가운데 沙河兵營은 入伍生部隊를 가리키고, 漁珠砲台 및 深圳要塞에 파견된 인원은 학생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水野直樹, 앞의 논문 p.54).
닫기
그러나 중국의 변방지역인 雲南·新疆·黑龍江省 등을 비롯한 각지에서 모집된 입교생들을 조직화하고, 이들을 國民革命軍의 대오로 재편성하는 작업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출신지역 뿐 아니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제반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체감의 결여를 극복하고, 이들을 國民革命軍의 骨幹으로 조련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군사교육에 우선하여 소속감 주입과 동질성 확인 작업이 요구되었다. 입교생활 중 “廣東人·蒙古人·韓國人을 막론하고” 모든 일상대화는 중국의 ‘普通話’를 사용하고, 당조직 이외에는 일체의 ‘감정결합적인’ 소단체나 동향회 등의 협의적 조직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규정076076 《군교사료》p.92.닫기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일방편이었다.
입교생들의 입교기간을 살펴보면, 北伐戰 과정에서 입교한 1∼5기생들은 國民革命軍의 인적수요 충당을 위해 3년의 수학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1 년여 남짓의 단기간 교육을 통해 실전에 배치되었다. 이후 8·9·10기생에게는 3년여 동안의 계통적인 교육이 실시되었지만, 이후로는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발발 등으로 인해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한인의 황포군교 입교는 3기생부터의 일이었다. 1924년 5월 5일의 1기생 입교와 8월 14일의 2기생 입교는 中國國民黨 제1차 全國代表大會 참석 대표들을 통한 위탁 분할모집 방식을 통한 비밀모집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재중 한인의 입교 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실은 시간적·공간적 여건에 부합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인의 입교는 陳果夫의 상해에서의 모집활동처럼 입교생 모집이 황포군교 주관의 집단적·반공개적 형태로 진행되던 1924년 중반 이후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이는 3기생이 1924년 겨울부터 廣州·上海 등지에서 모집·선발077077 〈各期同學概況〉(《22期同學錄》)닫기된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이후 1926년 1월 졸업한078078 참고로 한인이 다수 입교하였던 3·4·5기생의 재학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기생 : 1924.5.5 입교 1924.11 졸업
2기생 : 1924.8.14 입교 1925.9 졸업
3기생 :1925.7.1 개학 1926.1 졸업
4기생 : 1926.3.8 개학 1926.10 졸업
5기생 : 1926.11.15 개학 1927.8 졸업
무한분교 5기생 : 1924.2.12 개학 1927.7 졸업
3·4·5기생의 ‘개학’ 시기는 學生隊의 개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개학’ 수개월 전에 이미 황포군교에 입교하여 入伍生 과정을 거쳤다. 즉 3기생은 1924년 겨울에 입교하였고, 4기생은 1926년 1월 입교하였다. 또 5기생은 1926년 3월에 입교하였다(〈各期同學槪況〉 《22 期同學錄》).
닫기
3기생 1,233명 가운데에는 5명의 한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3기생 졸업명단에 의하면 李彬·李逸泰·車廷信·張聖哲·劉鐵仙의 이름이 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步兵科 소속이었으며, 李逸泰를 제외한 4명은 출신지역이 ‘韓國’ 또는 ‘朝鮮’으로 명기되어 있다.079079 《군교사료》pp.539∼548 및 ‘第三期同學姓名籍貫表’〈先期同學〉pp.9∼14, 《22期同學錄》.닫기 이일태는 출신지역을 奉天省 庄河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3기생 입교 사실은《中央陸軍軍官學校第五期同學錄》에 의해 뒷받침된다.080080 5기생 입교시 區隊長으로 황포군교에 재직 중이었던 李逸泰의 출신지역은 ‘韓國平北'으로 기재되어 있다(《黄埔軍校同學錄》p.158).닫기
4기생에는 24명의 한인이 입교하였는데, 이는 각 기별 한인 입교생 중 가장 많은 수효였다. 이들의 소속을 살펴보면, 보병과 : 朴孝三·朴建雄·王子良·尹義進·田義昌·李愚懿·李集中·李鍾元·李鐘煥·金鐘·姜平國·柳遠郁·崔林·崔泳澤·楊儉·盧一龍·權晙, 포병과 : 吳世振, 공병과 : 金洪默, 정치과 : 文善在·朴益濟 . 白紅·勞世芳·盧建이었다.081081 《군교사료》p.553∼587 및 ‘第四期同學姓名籍貫表’ 〈先期同學〉 pp.14∼25, 《22期同學錄》.닫기 이들 가운데 義烈團員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朴孝三·王子良 李集中·李箕焕·金鐘·姜平國·崔林(金元鳳)·崔泳澤·楊儉·盧龍·權晙·盧建 등이다.
5기생에는 5명의 한인이 입교하였다.《中央軍事政治學校第五期同學錄》에 의하면 申岳·金浩元·安維才·張興·張翼의 이름이 확인되는데, 이 둘은 步兵科 소속이었다.082082 《黃埔軍校同學錄》p.167·175·181·184·187.닫기 6기생에는 9 명의 한인이 입교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들은 第1總隊 騎兵科: 金貞文·金明山·金恩濟, 第2總隊 步兵科 : 李春岩·崔文鏞·吳尙善·魯植·申硕雨·金瑾濟(재학중 사망)이었다.083083 위의 책 p.281·282·285·324·325·329·339.닫기 이외에 6기생 출신의 한 중국인 회상에 의하면 ‘金昌滿’이라는 인물도 6기 졸업생이었다고 한다.084084 楊昭全 等編, 앞의 책 p.159.
그런데 6기생 金昌滿이 위의 9명 중 한 사람일 가능성도 있고, 또 후일 朝鮮獨立同盟의 간부를 거쳐 북한정권에서 副首相 등을 역임하다가 1966년 숙청당한 김창만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닫기
황포군교 졸업생 명부에 의거한 한인입교생의 신원을 살펴보면 다음의〈表 1〉과 같다.
그런데 위의 3∼6기생은 黃埔·南京本校를 졸업한 한인에 국한된 것이고, 이들 외에 1927년 2월 개교한 武漢分校에도 다수의 한인이 입교하였다. 북벌군의 초급간부 확충을 목적으로 설립된 武漢分校는 1926년 말 황포본교 5기생 일부를 이동 수용시킨 뒤, 다시 입교생을 모집하였다. 무한분교는 제1차 국공합작의 파국과 함께 1927년 8월 이후 폐쇄되었다. 政治部·訓練部 및 學生總隊(포병·공병·정치대대)로 편제된 무한분교 1,200여 명 남녀 입교생의 출신지역은 四川省(男)·湖南省(女)이 제일 많았다.085085 《군교사료》pp.417∼418.닫기
武漢分校 한인 입교생은 황포본교에서 이동한 5기생과 함께 北伐軍 제4군 소속사병, 武漢·上海·南京·長沙 등지의 각급 학교 재학생, 龍井의 大成·東興中學 출신이 대종을 이루었는데, 1927년 말 광주봉기 직전 무한분교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입교중이었다.086086 현룡순·리정문·허룡구 편,《조선족백년사화》2(료녕인민출판사, 1985) pp.32∼33.닫기 이들 중 5기생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은 6기 入伍生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한분교 입교생의 신원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밝혀지지 않는다. 武漢分校의 한인 입교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27년 留鄂韓國革命靑年會에서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제출용으로 작성한 문서를 꼽을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해 파악되는 한인의 입교상황을 살펴보면, 정치과:陳公木·陳甲秀·安東民·安子山·史劍仁·汪炬·關鍬·趙國棟·安東晚.宋旭東·金俊·劉光世·金致廷·李鐘(14명) 포병과 : 柳源道·朴泰變·陳龍鶴·白珪·李建·崔承淵·金熙喆·朴禹均·李春植·李碧波(10명) 등이었고, 이들은 모두 留卾建國革命靑年會 회원이었다.087087 《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닫기 이들 외에 무한분교 5기생으로 재학한 인물은 朴始昌이었다.088088 金德亨 편저, 《韓國의 名家》(일지사, 1976) p. 177 및《공훈록》5, p.952.닫기
〈표 1〉 黃埔軍官學校 韓人入校生(3∼6期) 名單
期別姓名所屬別字年齡籍貫通信處
3李彬步兵隊情波21韓國 咸鏡北道吉林省 汪淸縣 百草溝 商埠地
3李逸泰香湖21奉天 庄河廣州市 大沙頭 飛機學校
3車廷信志一23朝鮮廣東大學李晃轉(航空)
3張聖哲聖哲25韓國廣東大學李晃轉(航空)
3劉鐵仙滄波23朝鮮 漢城黑龍江滿洲里(航空)
4姜平國步科1團
步兵1連
滄海25韓國北京西安門內茅屋胡同7號
4柳遠郁步兵2連春海21韓國北京西安門內茅屋胡同7號潤松交
4朴孝三步兵3連海云21韓國 咸鏡咸鏡南道成興郡成興面中荷里90號
4朴建雄步兵4連·20韓國奉天 興京縣 汪淸門
4崔林步兵5連·26朝鮮慶尙南道 密陽郡 城內
4楊儉·24韓國慶尙南道 密陽郡 密陽面 內一洞
4田義昌步兵6連·20韓國 北平北京東城北新橋 梯子胡同16號
4李愚懿步兵7連·23韓國奉天 柳河 三源浦 東明學校
4權晙武山27韓國江蘇金山洗涇西市508號彭宅轉
4李集中步兵9連松峰27韓國 全羅北道 全州郡上海法界望志路北永吉里222號
4王子良丹坡26韓國 慶南慶南 山淸郡 丹城面 城山里
4尹義進步科2團
步兵1連
·21韓國鏡城上海法界望志路南永吉里38號交
4崔泳澤步科2團
步兵1連
·20韓國 鏡城吉林省哈爾賓道外南大道街路西8號
4金鐘步兵3連石園26朝鮮廣東大學校 姜世宇轉交
4李鍾元步兵5連·24韓國上海 古拔路 吉祥里
4盧一龍步兵6連·21韓國未詳
4李箕煥步兵7連義木24韓國 開城廣東大學 文科 崔園轉
4吳世振砲科大隊
砲兵1隊
槿虎24韓國奉天興京縣旺淸門
4金洪默工科大學
普通工兵隊
·23朝鮮 漢城漢城授恩桐5番地轉
4白紅政治科大隊
政治大隊1隊
·23韓國南京管家橋太平巷第2號車利錫交
4勞世芳政治科大隊
政治大隊1隊
金森26韓國 平壤廣東省廣州國立廣東大學校
4朴益濟·25韓國廣州 大沙頭 航空學校 劉鐵仙交
4文善在政治大隊2隊·24韓國韓國 黑龍江省 通河縣 松江醫院
4盧建政治大隊3隊·20朝鮮朝鮮 平北 定州郡 城內 輔仁醫院
5申岳步科1學生隊籍湖30韓國京幾道 楊平郡 江下面 全壽里
5安維才步科2學生隊志成20朝鮮北京宣外大敎場6條1號趙士轉交
5張翼𤍵進18韓國吉林省 延吉縣 龍井村 八城商會轉
5金浩元·20韓國奉天省 通化縣 崗山 二道溝 大泉眠 東泰盛交
5張興黑石33韓國朝鮮京城府3丁目
6金貞文1總隊騎兵隊
騎兵1連
·25韓國韓國平壤府鷄里84
6金明山·22朝鮮朝鮮平壤府倉田里14番地
6金恩濟騎兵2連·21韓國朝鮮 平北 定州郡 菖山面
6李春岩2總隊步兵科
1中隊
靜波23吉林上海法界望志路121號
6崔文鏞·24韓國京幾道開城郡松都面滿月町2010
6吳尙善·25韓國京城京城 中央私立學校
6魯植2中隊錦波19韓國朝鮮 京幾道 利川郡 栗面 山星里
6申碩兩3中隊斗波26韓國忠淸北道 報恩郡 三升面 元南里
6金瑾濟在學中 死亡·23韓國·
* 湖南省檔案館 校編,《黃埔軍校同學錄》(長沙: 湖南人民出版社, 1989) 참조
위의 인물 가운데 陳公木(金相善)은 5기생으로 추정되고,089089 陳公木이 “1926년 4월 황포본교에 입교하여 1927년 무한분교로 이전한 뒤 이해 6월 무한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다"는 기록은 그가 5기생임을 뒷받침한다(梶村秀樹·姜德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六,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8).닫기 6기생으로는 安子山이 入伍生 中隊 정치과 제2대대 제6대 소속이었다.090090 範繼文, 〈記武漢分校〉(《第1次國共合作時期的黄捕軍校》) p.387 및 水野直樹, 앞의 논문 p.82 주 64) 참조.닫기 비록 1927년 12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에서는, 5기생 졸업시기인 이해 7월 졸업한 한인이 17명이었다.091091 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닫기고 하지만, 대다수 입교생의 5· 6기 및 본과·입오생 과정 이수 사실뿐 아니라 졸업여부 마저 정확하게 판별되지 않는다.092092 이외에 莊海平이란 인물이 무한분교를 졸업하고 張發奎 부대에 일시 복무하였다고 하는데 (《공훈록》5, p.769), 그는 광주봉기에 참여한 무한분교 교도단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닫기 그 이유는 1927년 4월 장개석의 반공쿠데타 이후 武漢分校 입교생의 대다수가 이해 5월 中央獨立師로 재편성되어 中共黨 지도하에 12월의 廣州蜂起에 주력부대로 참가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물론 무한분교 폐교 후 입교생들은 남경본교로 편입되었지만, 남경본교 6기의 한인 졸업생이 불과 10여 명 미만으로 확인되는 점을 감안하면 200여 명을 헤아렸다는 武漢分校의 한인 입교생의 대부분은 南昌蜂起·廣州蜂起로 이어지는 國共合作의 파국 현장에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북벌기인 1920년대 중반이후 설립된 潮州·南寧·長沙分校의 한인 입교상황은 파악되지 않지만, 이 시기 국민혁명군 장교로 재직 중이던 金弘壹의 회고에 의하면 1926년 적어도 두 사람의 한인이 潮州分校를 졸업하였다.093093 金弘壹,《大陸의 憤怒: 老兵의 回想記》(文潮社, 1972) pp.218∼219에 의하면 1926년말 廣東省 汕頭 주둔 東路軍總司令部의 견습관으로 근무 중이던 ‘崔君’·‘韓君’은 潮州分校 출신이었다고 한다.닫기 이외의 각지분교 및 본교의 한인입교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주된 이유는 한인 입교생들이 성명과 출신지역을 위장하였음으로 인해 졸업생명부 상에서도 구체적인 신원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황포군교를 졸업한 인물이 상당수 존재하였다.094094 산견되는 단편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재만 한인사회 출신인 申春·曺基錫 등이 1927년, 황포군교를 졸업하였다(金東和·金哲洙·李昌役·吳基松 편저, 《연변당사사건과 인물》, 연변인민출판사, 1988, p.457·468). 5기생에 해당되는 이들 중 申春은 최용건이 인솔한 黄埔軍校特務營 第2連의 일원으로 광주봉기에 참여한 뒤 東滿으로 가서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하였다고 한다(韓俊光 주편,《中國朝鮮族人物傅》, 연변인민출판사, 1990, p.31). 또〈東亞日報〉1928년 5월 19일자 보도에 의하면 “廣東士官學校를 졸업한 鄭遠이 풍옥상군과 연락, 봉천 방면에서 모종의 활동을 계획하던 중 경북경찰부 형사대에 의해 만주에서 체포되었다”한다. 또 李京守·朱烈·崔鼎武·배순명·윤호·김준·박근만·박근수 등의 인물이 3·4기생으로 黃埔本校와 武漢分校에 입학하였다고 하는데(김양·복찬웅·김우안, 《광주봉기와 조선용사들》, 목단강 :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8, p.16), 이들은 정규 사관교육 과정이 아닌 단기간의 예비교육 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보인다.닫기 그리고 1920년대 전기간을 통해 시도되었던 한인의 황포군교 입교는 1932년 尹奉吉義擧를 계기로 강화되는 韓中聯合의 국제적 연대를 배경으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 결과 1930·40년대 中央陸軍軍官官校를 졸업한 한인은 수십 명을 헤아린다.095095 7기생 이후 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를 졸업한 한인 명단을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陸軍軍官學校第二十二期二總隊同學錄》에 등재된 각 期別 졸업생 명단을 기본으로 한 다음의 명단에는 입교시 변성명을 사용한 인물들이 다수 누락되었을 한계성이 있는 불충분한 조사임을 전제한다.
期別입교생 명단
7李石
8李根浩·羅月煥
9·
10王仲良(羅泰變)·高一鳴(高時福)·王衡(安椿生)·王信虎·趙東潤·盧泰俊(李無雄)·金東洙·韓大元·金高斗·王子仁·李義興·金東一·陳東明·申啓瑞·雷雲·陳國東(金裕哲)
11張炳勳·趙烈光·李志剛(李相勳)·陳樂三·曹晃(王楫五·于暻伊)·崔英賓·劉章煥·王守義·劉敏·崔陽成·金炳華·李鐵重·李雲山(張致文·李雲煥)·關健(黃載衍)·葉鴻德·康志山(蔣載福)·李靑山(金貞彩)·吳柱國(白贊基)·李國華(韓道源)·李鐵夫(金世雄)·金海石(朴珍守·朴景一)·徐洪·歐陽軍(朴基成)·李炫瑾
12盧福善·金用楙·陳敬誠(申松植)·金泰三·金鐵
13·
14·
15兪海濬
16李奎鶴·金應三(韓道明)
17朴英俊
18宋冕秀·王永秀(閔泳秀)
19李允章
20金重鎭·姜弘模·李建國·張哲夫
21趙東麟
22金英勳·朴胃澤·金現奎·朴天馬·李時燁·金重達·金明奎·安昌道·吳明弼·鄭基燁·張海德·朴允鎬·權必鉉·張定根·金正仁·安秀成·金是九·金致三·李成滿·朴成男·許志秀·徐三喆·李鶴瑞·金炳哲·金光進·文時旭(林勇彪)·李元坤·金露·金銀錫·康一永·李學律·趙東熙·白賢一·李時奉·金大衛·金炳善·文昌德·朴在俊·羅泰奎·韓昌變·崔龍山·金龍浩·文昌興·金恩嶺·金白雲·金一鍵·裵豪元·吳貴星·文仁俊·李元敬·楊致昊
참고자료 :《陸軍軍官學校第二十二期二總隊同學錄》,《공훈록》6,《韓國獨立史》下, 《思想情勢視察報吿集》 2·3,《韓國獨立運動證言資料集》등.
닫기
한편 황포군교에는 다수의 한인이 교관 및 지휘관 등으로 재직하였다. 최초의 한인 교관 은 雲南講武學校 16기 출신 楊林(楊寧)이었다. 그는 3기생 學生總隊 제4대 隊長직에 있었고, 계급은 上尉였다.096096 《군교사료》p.513. 당시 中國國民華命軍의 계급체계는, 將星級이 上將·中將·少將, 領官級이 上校·中校··少校, 尉官級이 上尉·中尉·少尉·准尉였다.닫기 4기생 입교시기에는 양림이 技術助敎로 군무하였고,097097 《군교사료》p.516.닫기 3기 졸업생이기도 한 李彬이 政治科大隊 區隊長이었다.098098 《군교사료》p.519.닫기 이외에 소련에서 파견된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포 교관 梁道夫(梁達夫)의 존재도 확인되며099099 《군교사료》p.516. 그는 모스크바 군사학원 출신의 포병전문가로, 이후 광주봉기에 포병 지휘관으로 참가하였다(현룡순·최정문·허룡구 편, 앞의 책 p.48).닫기 운남강무학교 출신으로 국민혁명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李檢雲이 조교로 재직하였다.100100 朝鮮總督府警務局, 〈軍官學校事件 ノ眞相 〉(1934.12)( 韓洪九·李在華 편,《韓國民族解放運動史資 料叢書》3, 京沅文化社, 1988) p.305.닫기
5기생 시기에는 상당수의 한인이 교관 및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는데, 學生隊 除附: 蔡元凯(少校), 學生隊 區隊長 : 崔秋海·李逸泰·安應根, 교수부 러시아어 교관 : 吳聲輪, 훈련부 기 술주임교관 : 楊林(中校), 훈련부 기술조교 : 吳明(中尉)의 재직사실이 확인된다.101101 《黃埔軍校同學錄》p.148·149·157·159.닫기 楊林은 이미 3기생 입교시기부터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3년 여 동안 황포군교에 재직한 셈이다. 그런데 隊附 蔡元凯의 교관군무 사실은 대단히 시사적인 일면이 있다.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황포군교 교관 부임은 ‘臨時政府의 명령’에 의거한 것이었다.102102 蔡元凱, 《나의 一生記》p.61.닫기 1923년 하반기 韓國勞兵會의 ‘노병’양성 계획에 따라 洛陽講武學校에서 수학한 바 있는 그가 1927년 大國民國臨時政府 陸軍駐滿參議府 군사부장직을 사임하고 臨政 지시로 황포군교 교관에 파견된 사실은 임정과 황포군교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협의체제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임정과 황포군교의 연계 가능성은 교관 파견 문제에 국한된 사실이 아닐 것이고, 앞의 陳果夫를 통한 입교 사실 및 4기생 白紅의 존재 등과 함께 입교생 중에도 임정 계통에서 파견된 인물이 상당수 포함되었을 개연성을 낳는다. 1927년 봄 황포군교에 도착한 蔡元凱는 기술주임 교관 楊林의 영접을 받고, 그의 안내로 교육장 方鼎英을 예방하였다. 이후 그는 5기생 제1학생총대 부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앞의 楊林·崔秋海 외에도 교본부 부관인 孫斗焕·金鐵男 등이 재직하였다.103103 위의 글 pp.60∼61.닫기
崔秋海란 인물은 운남강무학교 17기 졸업생인 崔庸健으로 추정된다.104104 水野直樹, 앞의 논문 p.83 註 81) 참조.닫기 李逸泰는 3기 졸업생임이 이미 판명되었다. 安應根이란 인물의 신원은 파악되지 않고, 吳聲輪은 1922년 3월 田中義一저격사건의 의열단원 吳成崙을 가리킨다. 그는 의거 후 일제 상해총영사관 경찰에 피체 수감 중 탈출하여 이 해 가을 독일로 갔다. 이후 소련을 거쳐 1926년 말 廣東으로 돌아와105105 님 웨일즈, 조우화 옮김,《아리랑》(동녘, 1984) p.128.닫기 황포군교 5기생 교관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광동에 온 吳成崙의 귀환은 소련정부의 군사고문단 파견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련정부는 황포군교 설립 준비 과정에서부터 다수의 군사고문단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짐작컨대 오성륜은 소련정부의 군사고문단 파견 방침의 일환으로 광동에 왔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그가 廣東 도착 즉시 황포군교의 러시아어 교관에 부임한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吳明은 운남강무학교 졸업생이었고,106106 《黄埔軍校同學錄》p.149.닫기 1927년 말 상해에서 결성된 中國本部韓人青年同 盟의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107107 愛國同志援護會 편, 《韓國獨立運動史》(1956) p.363.닫기 채원개의 회상에 등장하는 金鐵男과 孔周宣은 1920년대 후반 상해임정 계통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金鐵男의 신원과 활동상황은 불분명하지만 중국 福州 소재 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군 參尉로 재직 중이던 1920년 2월 하순 무렵 안창호를 방문, 독립운동자금 모금방안을 협의한 바 있다.108108 〈安昌浩日記〉1920년 2월 22일 ; 朱曜翰 편저,《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p.657.닫기 이후 그는 중국군에 복무하며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43년 그는 중국군 上校로 貴陽航空隊에 근무하고 있었다.109109 朝鮮總督府, 孫忠武 역,〈中南支에서의 朝鮮人民族運動〉(《政經硏究》1977년 4월호) p.355.닫기 또 다른 일제 자료에 의하면 당시 沙河兵營 入伍生部에는 朴孝三·姜平國·吳成崙(咸聲) . 李柳昆이 교관으로 근무하였다.110110 〈義烈團ニ關スル件〉朝保秘 第711號(1927.4.6) ; 水野直樹, 앞의 논문 pp.60∼61 재인용.닫기
또 5기생 입교시 金元鳳이 국민혁명군 少尉로 황포군교 정치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111111 위와 같음.닫기 그가 교관으로 활동한 것 같지는 않다. 대다수의 4기 졸업생이 북벌전에 동원되었음에도 김원봉이 황포군교에 잔류한 것은 의열단 활동의 재정비 모색을 위한 김원봉 자신의 의도와, 그의 역할을 평가하는 국민당정부의 정치적 배려로 판단된다. 6기생 입교시기 황포군교에 근무한 인물은 朴孝三(第2學生總隊 步科 第3中隊 第1區隊長, 上尉)·孔周宣(第2學 生總隊 砲科中隊 第1中隊長, 上尉)·蔡元凯(編輯委員會 委員, 少校)로 판명된다.112112 《黃埔軍校同學錄》p.318·320.닫기 채원개의 회고에 의하면, 6기생은 入伍生 과정을 이수하고 정식 사관교육 과정이 시작되면서 외국인 학생 600여 명을 獨立學生隊로 별도 편제하였다. 이때 蔡元凯는 독립학생대 학생대장직에 임명되었고, 朴孝三은 한인들로 구성된 제1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113113 獨立學生隊는 3개 中隊로, 1개 중대 병력은 200명이었다. 제1중대는 한국인, 제2중대는 월남인, 제3중대는 말레이지아인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蔡元凱, 앞의 글 p.62).닫기 이외에도 金山114114 님 웨일즈, 앞의 책 p.124.
이외에도 근년 연변에서 간행된 기록에 의하면, 金山은 황포군교에 근무한 외에도 中山大學에서 경제학을 연구하였다(韓俊光 주편, 앞의 책 p.222).
닫기
·姜燮武115115 김양·복찬웅·김우안, 앞의 책 pp.13∼14에 의하면, 姜燮武는 개교초기 소련고문단과 함께 파견되어 포술훈련 부관 및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닫기등이 교관으로 복무하였으며, 무한분교에는 權晙116116 《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닫기이 훈련부 교관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朴英117117 박창욱 주편, 앞의 책 p.53에 의하면, 朴英은 노령에서 공산당 조직을 통해 황포군교에 입교한 후 다시 무한분교 훈련부에 배치되었다. 아마도 박영은 정식교관이 아닌 조교로 근무하였을 것이다.닫기·李枝善118118 김승학, 앞의 책 p.345에 의하면 그는 砲科 기술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후에 월남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武漢分校 재직 가능성은 그가 1927년 초반 武漢分校 한인 교관 및 입교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留鄂韓國革命靑年會 회원이었던 사실(《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로도 뒷받침된다.닫기 등의 재직 사실이 알려진다. 황포군교 졸업생 명부에 의거한 한인교관 및 지휘관의 신원을 살펴보면〈표 2〉와 같다.
〈표 2〉 黃埔軍官學校 韓人敎官·指揮官(4∼7期) 名單
期別姓名所屬別號年齡籍貫通信處
4梁道夫러시아砲 敎官秋人24韓國本校
4楊寧技術助 敎練··
4李彬政治科大隊 區隊長·22吉林省 汪淸縣 百草寧 商埠地
5吳聲輪敎授部 러시아語 敎官·27(모스크바 東方大學出身)
5吳明訓練部技術助敎, 中尉白峰24(雲南講武學校出身)
5楊寧訓練部技術 主任 敎官, 中校·26吉林(雲南講武學校出身)
5蔡元凱學生隊隊附, 少校·28韓國中央軍事政治學校
4崔秋海學生隊區隊長·27上海 法租界 白來尼 海東公司
4安應根茂林28韓國 平安黑龍江 通河縣 松江醫院交 西北河
4李逸泰·24韓國 平北·
6朴孝三2總隊步科3中隊1區隊長,上尉海雲23韓國成鏡南道 成興郡 成興面 中荷里
6孔周宣2總隊砲科中隊部1中隊長,上尉碧波32上海 法界 白來尼蒙 馬浪路 崇一里16號 海東公司 崔友江交
6蔡元凱編輯委員會委員 少校君仙30上海 法界 麥賽爾 締夢路 24號
7方禹鏞校本部軍醫處 科員, 少校·32·
* 湖南省檔案館 校編,《黃埔軍校同學錄〉(長沙: 湖南人民出版社, 1989) 참조.

註 071
: 楊昭全 等編,《關內地域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匯編》上册(료녕민족출판사, 1987) p.145.
註 072
: 邵毓麟, 河正玉 역,〈臨政獨立闘爭과 中國의 援助〉(《政經研究》1977년 6월호) p.348.
註 073
: 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 및 박창욱 주편, 앞의 책 p.52.
註 074
: 1∼5기 입교생 중 소단위지역 출신을 살펴보면 甘肅省 6명, 遼寧省 11명, 吉林省 3명, 黑龍江省 1명, 蒙古 6명, 臺灣 2명, 싱가폴 1명, 越南 1 명이었다(《군교사료》p.93).
註 075
: 1927년 말에 작성된 일제정보자료에 근거한 황포군교 소속 또는 보조시설로 활용되던 광주 근교의 각급 군사시설에 수용 중이던 한인의 상황은, 黄埔軍校 14명, 黃埔敎導團 56명, 沙河兵營 15명, 漁珠學生軍(漁珠砲台守備) 36명, 深圳要塞 51명, 廣州東山陸軍病院 20명, 中山大學 57명계 229명이었다고 한다(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
이 가운데 沙河兵營은 入伍生部隊를 가리키고, 漁珠砲台 및 深圳要塞에 파견된 인원은 학생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水野直樹, 앞의 논문 p.54).
註 076
: 《군교사료》p.92.
註 077
: 〈各期同學概況〉(《22期同學錄》)
註 078
: 참고로 한인이 다수 입교하였던 3·4·5기생의 재학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기생 : 1924.5.5 입교 1924.11 졸업
2기생 : 1924.8.14 입교 1925.9 졸업
3기생 :1925.7.1 개학 1926.1 졸업
4기생 : 1926.3.8 개학 1926.10 졸업
5기생 : 1926.11.15 개학 1927.8 졸업
무한분교 5기생 : 1924.2.12 개학 1927.7 졸업
3·4·5기생의 ‘개학’ 시기는 學生隊의 개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개학’ 수개월 전에 이미 황포군교에 입교하여 入伍生 과정을 거쳤다. 즉 3기생은 1924년 겨울에 입교하였고, 4기생은 1926년 1월 입교하였다. 또 5기생은 1926년 3월에 입교하였다(〈各期同學槪況〉 《22 期同學錄》).
註 079
: 《군교사료》pp.539∼548 및 ‘第三期同學姓名籍貫表’〈先期同學〉pp.9∼14, 《22期同學錄》.
註 080
: 5기생 입교시 區隊長으로 황포군교에 재직 중이었던 李逸泰의 출신지역은 ‘韓國平北'으로 기재되어 있다(《黄埔軍校同學錄》p.158).
註 081
: 《군교사료》p.553∼587 및 ‘第四期同學姓名籍貫表’ 〈先期同學〉 pp.14∼25, 《22期同學錄》.
註 082
: 《黃埔軍校同學錄》p.167·175·181·184·187.
註 083
: 위의 책 p.281·282·285·324·325·329·339.
註 084
: 楊昭全 等編, 앞의 책 p.159.
그런데 6기생 金昌滿이 위의 9명 중 한 사람일 가능성도 있고, 또 후일 朝鮮獨立同盟의 간부를 거쳐 북한정권에서 副首相 등을 역임하다가 1966년 숙청당한 김창만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註 085
: 《군교사료》pp.417∼418.
註 086
: 현룡순·리정문·허룡구 편,《조선족백년사화》2(료녕인민출판사, 1985) pp.32∼33.
註 087
: 《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
註 088
: 金德亨 편저, 《韓國의 名家》(일지사, 1976) p. 177 및《공훈록》5, p.952.
註 089
: 陳公木이 “1926년 4월 황포본교에 입교하여 1927년 무한분교로 이전한 뒤 이해 6월 무한분교 정치과를 졸업하였다"는 기록은 그가 5기생임을 뒷받침한다(梶村秀樹·姜德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六,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8).
註 090
: 範繼文, 〈記武漢分校〉(《第1次國共合作時期的黄捕軍校》) p.387 및 水野直樹, 앞의 논문 p.82 주 64) 참조.
註 091
: 경무국보안과, 앞의 책 p.14.
註 092
: 이외에 莊海平이란 인물이 무한분교를 졸업하고 張發奎 부대에 일시 복무하였다고 하는데 (《공훈록》5, p.769), 그는 광주봉기에 참여한 무한분교 교도단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註 093
: 金弘壹,《大陸의 憤怒: 老兵의 回想記》(文潮社, 1972) pp.218∼219에 의하면 1926년말 廣東省 汕頭 주둔 東路軍總司令部의 견습관으로 근무 중이던 ‘崔君’·‘韓君’은 潮州分校 출신이었다고 한다.
註 094
: 산견되는 단편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재만 한인사회 출신인 申春·曺基錫 등이 1927년, 황포군교를 졸업하였다(金東和·金哲洙·李昌役·吳基松 편저, 《연변당사사건과 인물》, 연변인민출판사, 1988, p.457·468). 5기생에 해당되는 이들 중 申春은 최용건이 인솔한 黄埔軍校特務營 第2連의 일원으로 광주봉기에 참여한 뒤 東滿으로 가서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하였다고 한다(韓俊光 주편,《中國朝鮮族人物傅》, 연변인민출판사, 1990, p.31). 또〈東亞日報〉1928년 5월 19일자 보도에 의하면 “廣東士官學校를 졸업한 鄭遠이 풍옥상군과 연락, 봉천 방면에서 모종의 활동을 계획하던 중 경북경찰부 형사대에 의해 만주에서 체포되었다”한다. 또 李京守·朱烈·崔鼎武·배순명·윤호·김준·박근만·박근수 등의 인물이 3·4기생으로 黃埔本校와 武漢分校에 입학하였다고 하는데(김양·복찬웅·김우안, 《광주봉기와 조선용사들》, 목단강 :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8, p.16), 이들은 정규 사관교육 과정이 아닌 단기간의 예비교육 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보인다.
註 095
: 7기생 이후 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를 졸업한 한인 명단을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陸軍軍官學校第二十二期二總隊同學錄》에 등재된 각 期別 졸업생 명단을 기본으로 한 다음의 명단에는 입교시 변성명을 사용한 인물들이 다수 누락되었을 한계성이 있는 불충분한 조사임을 전제한다.
期別입교생 명단
7李石
8李根浩·羅月煥
9·
10王仲良(羅泰變)·高一鳴(高時福)·王衡(安椿生)·王信虎·趙東潤·盧泰俊(李無雄)·金東洙·韓大元·金高斗·王子仁·李義興·金東一·陳東明·申啓瑞·雷雲·陳國東(金裕哲)
11張炳勳·趙烈光·李志剛(李相勳)·陳樂三·曹晃(王楫五·于暻伊)·崔英賓·劉章煥·王守義·劉敏·崔陽成·金炳華·李鐵重·李雲山(張致文·李雲煥)·關健(黃載衍)·葉鴻德·康志山(蔣載福)·李靑山(金貞彩)·吳柱國(白贊基)·李國華(韓道源)·李鐵夫(金世雄)·金海石(朴珍守·朴景一)·徐洪·歐陽軍(朴基成)·李炫瑾
12盧福善·金用楙·陳敬誠(申松植)·金泰三·金鐵
13·
14·
15兪海濬
16李奎鶴·金應三(韓道明)
17朴英俊
18宋冕秀·王永秀(閔泳秀)
19李允章
20金重鎭·姜弘模·李建國·張哲夫
21趙東麟
22金英勳·朴胃澤·金現奎·朴天馬·李時燁·金重達·金明奎·安昌道·吳明弼·鄭基燁·張海德·朴允鎬·權必鉉·張定根·金正仁·安秀成·金是九·金致三·李成滿·朴成男·許志秀·徐三喆·李鶴瑞·金炳哲·金光進·文時旭(林勇彪)·李元坤·金露·金銀錫·康一永·李學律·趙東熙·白賢一·李時奉·金大衛·金炳善·文昌德·朴在俊·羅泰奎·韓昌變·崔龍山·金龍浩·文昌興·金恩嶺·金白雲·金一鍵·裵豪元·吳貴星·文仁俊·李元敬·楊致昊
참고자료 :《陸軍軍官學校第二十二期二總隊同學錄》,《공훈록》6,《韓國獨立史》下, 《思想情勢視察報吿集》 2·3,《韓國獨立運動證言資料集》등.
註 096
: 《군교사료》p.513. 당시 中國國民華命軍의 계급체계는, 將星級이 上將·中將·少將, 領官級이 上校·中校··少校, 尉官級이 上尉·中尉·少尉·准尉였다.
註 097
: 《군교사료》p.516.
註 098
: 《군교사료》p.519.
註 099
: 《군교사료》p.516. 그는 모스크바 군사학원 출신의 포병전문가로, 이후 광주봉기에 포병 지휘관으로 참가하였다(현룡순·최정문·허룡구 편, 앞의 책 p.48).
註 100
: 朝鮮總督府警務局, 〈軍官學校事件 ノ眞相 〉(1934.12)( 韓洪九·李在華 편,《韓國民族解放運動史資 料叢書》3, 京沅文化社, 1988) p.305.
註 101
: 《黃埔軍校同學錄》p.148·149·157·159.
註 102
: 蔡元凱, 《나의 一生記》p.61.
註 103
: 위의 글 pp.60∼61.
註 104
: 水野直樹, 앞의 논문 p.83 註 81) 참조.
註 105
: 님 웨일즈, 조우화 옮김,《아리랑》(동녘, 1984) p.128.
註 106
: 《黄埔軍校同學錄》p.149.
註 107
: 愛國同志援護會 편, 《韓國獨立運動史》(1956) p.363.
註 108
: 〈安昌浩日記〉1920년 2월 22일 ; 朱曜翰 편저,《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p.657.
註 109
: 朝鮮總督府, 孫忠武 역,〈中南支에서의 朝鮮人民族運動〉(《政經硏究》1977년 4월호) p.355.
註 110
: 〈義烈團ニ關スル件〉朝保秘 第711號(1927.4.6) ; 水野直樹, 앞의 논문 pp.60∼61 재인용.
註 111
: 위와 같음.
註 112
: 《黃埔軍校同學錄》p.318·320.
註 113
: 獨立學生隊는 3개 中隊로, 1개 중대 병력은 200명이었다. 제1중대는 한국인, 제2중대는 월남인, 제3중대는 말레이지아인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蔡元凱, 앞의 글 p.62).
註 114
: 님 웨일즈, 앞의 책 p.124.
이외에도 근년 연변에서 간행된 기록에 의하면, 金山은 황포군교에 근무한 외에도 中山大學에서 경제학을 연구하였다(韓俊光 주편, 앞의 책 p.222).
註 115
: 김양·복찬웅·김우안, 앞의 책 pp.13∼14에 의하면, 姜燮武는 개교초기 소련고문단과 함께 파견되어 포술훈련 부관 및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註 116
: 《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
註 117
: 박창욱 주편, 앞의 책 p.53에 의하면, 朴英은 노령에서 공산당 조직을 통해 황포군교에 입교한 후 다시 무한분교 훈련부에 배치되었다. 아마도 박영은 정식교관이 아닌 조교로 근무하였을 것이다.
註 118
: 김승학, 앞의 책 p.345에 의하면 그는 砲科 기술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후에 월남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武漢分校 재직 가능성은 그가 1927년 초반 武漢分校 한인 교관 및 입교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留鄂韓國革命靑年會 회원이었던 사실(《資料韓國獨立運動》2, p.297)로도 뒷받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