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閽人)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문지기는 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은 밭으로 가서 가져간 술과 떡을 대접하였다.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니 함께 돌아가려고 했으나 익선은 굳이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105105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 지방 일대를 가리킨다.닫기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모를 아름답게 보고, 익선의 어리석은 고집과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珍節) 사지(舍知)106106 신라 17관등 중 제 13위에 해당하는 관등이다.닫기의 말안장을 주니 그때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107107 화랑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이를 두고 국왕 아래 花主가 있어 화랑들을 관장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종욱, 「신라 화랑도의 편성과 조직·변천」,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0, 1989).닫기가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기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그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였으므로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칙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서 벼슬하는 자는 모두 쫒아내어 다시는 관서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복(黑衣)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도 종고(鐘鼓)를 단 큰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왕은) 사(史)에게 명하여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108108 당(唐)의 제도에서는 1리(一里)의 사무를 관할하는 호(戶)를 두고 평정호(枰定戶)라고 하였다.닫기으로 삼고 그를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109109 신라의 왕족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5세에 입당하여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고, 측천무후의 존경과 귀의를 받았다. 신라의 신문왕이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당에서 죽었다.닫기해동(海東)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110110 이 기록을 두고 원측이 아닌 그의 제자 도증(道證)의 일로 추정하기도 한다(박종홍, 「원측의 유식철학」, ≪한국사상사-고대편≫, 법문사, 1966, 58쪽).닫기

註 105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 지방 일대를 가리킨다.
註 106
신라 17관등 중 제 13위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註 107
화랑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이를 두고 국왕 아래 花主가 있어 화랑들을 관장했다고 보기도 한다(이종욱, 「신라 화랑도의 편성과 조직·변천」,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0, 1989).
註 108
당(唐)의 제도에서는 1리(一里)의 사무를 관할하는 호(戶)를 두고 평정호(枰定戶)라고 하였다.
註 109
신라의 왕족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5세에 입당하여 유식학(唯識學)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고, 측천무후의 존경과 귀의를 받았다. 신라의 신문왕이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당에서 죽었다.
註 110
이 기록을 두고 원측이 아닌 그의 제자 도증(道證)의 일로 추정하기도 한다(박종홍, 「원측의 유식철학」, ≪한국사상사-고대편≫, 법문사, 1966,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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