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를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찾았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영묘사(靈妙寺)390390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남천(南川)의 끝부분에 있었던 사찰로 635년(선덕왕 4)에 세워졌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양지(良志) 스님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져 있던 장육삼존불을 비롯하여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모두 양지의 것으로 전한다. 그 뒤 764년(경덕왕 23)에 장육삼존불을 개금하였고, 1460년(세조 6)에 봉덕사의 신종(神鐘)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이 절터에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밖에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간혹 발견된다.닫기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미륵선화다”고 하였다. 이에 다가가서 묻기를, “낭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서 왕에게 뵈었더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의 자제들에 대한 화목과 예의와 풍교(風敎)는 보통과는 달랐다. [그의] 풍류가 세상에 빛난 지 거의 7년이 되더니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진자는 슬퍼하고 [그를] 생각함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비로운 은택에 흠뻑 젖었고, [그의] 맑은 교화를 친히 접했으므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서 정성으로 도를 닦아 만년에는 [그] 또한 세상 마친 곳을 알 수 없다.
설명하는 이가 말하기를, “미(未)는 미(彌)와 음이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글자]모양이 서로 비슷하므로 그 근사함에 가탁하여 수수께끼처럼 한 것이다. 대성(大聖)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아마 이 땅에 인연이 있었으므로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고 하고 남에게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의 유풍이다. 길 옆에 섰던 나무를 지금도 견랑(見郞)이라고 이름하고, 또 항간의 말로는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註 390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남천(南川)의 끝부분에 있었던 사찰로 635년(선덕왕 4)에 세워졌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양지(良志) 스님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져 있던 장육삼존불을 비롯하여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모두 양지의 것으로 전한다. 그 뒤 764년(경덕왕 23)에 장육삼존불을 개금하였고, 1460년(세조 6)에 봉덕사의 신종(神鐘)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이 절터에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밖에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며,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간혹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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