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 668년 10월22일(음) )

〔8년(668)〕 겨울 10월 22일에 유신(庾信)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001001 태대각간(太大角干): 17관등 중 최상위인 각간(이벌찬)이나 그보다 높은 대각간보다도 높은 비상위(非常位) 관등으로서, 확인 가능한 가장 높은 관등이다.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실제로 수여되었다. 문무왕 8년(668) 10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수여한 것이 첫 사례이다. 본서에서 태대각간을 칭한 인물은 김유신과 김인문 둘 뿐이며, 김인문은 사후 추증된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백률사조)는 천수(天授) 4년(693, 효소왕 2) 부례랑(夫禮郞)을 대각간으로 봉하고 그의 아버지 대현(大玄) 아찬(阿湌)을 태대각간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하지만 설화적인 성격이 짙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朴秀淨, 2016, 「『三國史記』 職官志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8쪽).닫기의 관등을, 인문(仁問)에게 대각간(大角干)을 내려주었고, 그밖에 이찬과 장군(將軍) 등은 모두 각간(角干)으로 삼았으며, 소판(蘇判) 이하는 모두 한 등급의 관등을 더해주었다. 대당소감(大幢少監)002002 대당소감(大幢少監): 대당소감은 6정군단 가운데 왕경에 주둔한 대당의 군관(軍官)이다. 소감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되었으며, 대당에 15명이 배속되었다. 관등이 대사(大舍) 이하인 자를 임용하였다. 소감은 평상시에는 편제상으로만 두어져 있다가 전시출동에 즈음하여 임명·배속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203쪽).닫기 본득(本得)003003 본득(本得): 본득은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 고구려 정벌 후의 논공(論功)에서 대당소감으로서 사천(虵川)에서의 전공이 1등이라는 이유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은 사천(虵川)004004 사천(虵川): 현재의 평양시 동쪽의 합장강(合掌江)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井上秀雄, 188쪽; 노태돈, 165쪽). 사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8년(668) 7월 16일조 참조.
〈참고문헌〉
井上秀雄 譯註, 1980, 『三國史記 1』, 平凡社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닫기
에서의 전공(戰功)이 첫째였고,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005005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한산정(漢山停)에 설치된 군관(軍官)이다. 본래 한산정소감이었으나 후대에 한산주소감으로 개서한 것으로 보인다. 소감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되었으며, 한산정에 15명이 배속되었다. 관등이 대사(大舍) 이하인 자를 임용하였다. 소감은 평상시에는 편제상으로만 두어져 있다가 전시출동에 즈음하여 임명·배속하였다고 보기도 한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203쪽).닫기 박경한(朴京漢)006006 박경한(朴京漢):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 고구려 정벌 후의 논공(論功)에서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으로서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았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닫기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軍主)007007 군주(軍主): 고구려의 군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휘한 사령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닫기 술탈(述脫)008008 술탈(述脫): 고구려의 군주(軍主)로서 평양성 전투에서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박경한(朴京漢)에게 살해당한 사실 외에 더 이상은 행적은 알 수 없다. 박경한이 큰 포상을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해당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닫기을 죽인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黒嶽令)009009 흑악령(黒嶽令): 흑악현(黑嶽縣)의 현령(縣令)으로 추정되는데, 흑악현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19쪽).닫기 선극(宣極)010010 선극(宣極): 선극은 흑악령(黒嶽令)으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성 대문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은 평양성 대문(大門)에서의 전공이 첫째였으니,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 1,000석을 하사하였다. 서당당주(誓幢幢主)011011 서당당주(誓幢幢主): 서당(誓幢)이란 군단을 지휘한 사령관을 이른다. 임시로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서당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총관(摠管)을 임명하지만, 평소에는 당주가 서당을 지휘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서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닫기 김둔산(金遁山)012012 김둔산(金遁山): 서당당주(誓幢幢主)로서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첫 번째였다고 한다.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사찬의 관등과 조(租) 700석을 받았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은 평양 군영에서 전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고 조(租) 700석을 하사하였다. 군사(軍師)013013 군사(軍師): 신라 군제(軍制)의 하나인 군사당(軍師幢)의 무관직(武官職)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11월 22일조 참조.닫기인 남한산(南漢山)014014 남한산(南漢山): 남한산은 한강 이남의 서울특별시,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 일원을 망라한 남한산군(南漢山郡)을 가리킨다.닫기의 북거(北渠)015015 북거(北渠): 북거는 군사(軍師)의 직을 가지고 있고, 외위(外位)를 수여받은 것으로 보아 남한산군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평양성 북문에서 큰 공을 세워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술간(述干)의 외위(外位)와 벼 1,000석을 받았다.닫기는 평양성 북문(北門)에서 전공이 첫째였으니 술간(述干)016016 술간(述干): 지방인에게 부여되던 외위 11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관등이다. 경위로 일원화할 당시에 사찬에 상응하였다. 문무왕 14년(674) 외위를 경위로 대체하면서 소멸되었다.닫기의 관등을 주고 벼[粟] 1,000석을 하사하였다. 군사(軍師)인 부양(斧壤)017017 부양(斧壤):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漢州)조에 부평군(富平郡) 광평현(廣平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시대의 평강현(平康縣)이라고 전한다. 부양은 강원도 평강군 평강면(현재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으로 비정된다.닫기의 구기(仇杞)018018 구기(仇杞): 구기는 군사(軍師)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 남교에서 공을 세워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사찬의 관등과 조(租) 7백 석을 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는 평양 남교(南橋)에서 전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의 관등을 주고 벼[粟] 700석을 하사하였다. 가군사(假軍師)019019 가군사(假軍師): 여기에만 보이는 관직명으로서, 명칭을 통해 임시직 군사(軍師)로서 지방인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닫기인 비열홀(比列忽)020020 비열홀(比列忽): 비열홀은 함경상남도 안변(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에 해당한다.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홀주라고 불렀다.닫기의 세활(世活)021021 세활(世活): 가군사(假軍師)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소성(平壤少城) 전투에서의 공이 1등이었다. 이에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고간(髙干)의 외위 관등과 벼 500석을 받았다.닫기은 평양소성(平壤少城)022022 평양소성(平壤少城): 평양성에 딸린 작은 성을 가리킨다고 추정되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닫기에서 전공이 첫째이니 고간(髙干)023023 고간(高干): 지방인에게 주어진 외위 11등급 중 세 번째로 높다. 경위로 일원화하는 과정에서는 17등 경위 중 아홉 번째인 급벌찬에 상응되었다. 문무왕 14년(674) 외위를 경위로 대체하면서 소멸되었다.닫기의 관등을 주고 벼 500석을 하사하였다.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김상경(金相京)024024 김상경(金相京): 김상경은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전하여 사천 전투에서 전사였고,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받고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은 사천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租) 1,000석을 하사하였다. 아술(牙述)025025 아술(牙述): 신라 웅주(熊州) 탕정군(湯井郡)에 소속된 음봉현(陰峯縣)의 백제 때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으로 비정된다.닫기의 사찬 구율(求律)026026 구율(求律): 아술(牙述) 소속의 지방인이지만 사찬의 경위를 가지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마도 이전의 전공으로 경위를 수여받은 듯하다. 고구려 정벌 중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서 큰 공을 세웠지만 군령(軍令) 없이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다는 이유로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분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닫기은 사천의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나아가 물을 건너 나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軍令)이 없이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첫째였지만 〔공훈이〕 기재되지 않았다. 〔구율이〕 분하고 한스러워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곁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못하였다.

註 001
태대각간(太大角干): 17관등 중 최상위인 각간(이벌찬)이나 그보다 높은 대각간보다도 높은 비상위(非常位) 관등으로서, 확인 가능한 가장 높은 관등이다.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실제로 수여되었다. 문무왕 8년(668) 10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수여한 것이 첫 사례이다. 본서에서 태대각간을 칭한 인물은 김유신과 김인문 둘 뿐이며, 김인문은 사후 추증된 것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백률사조)는 천수(天授) 4년(693, 효소왕 2) 부례랑(夫禮郞)을 대각간으로 봉하고 그의 아버지 대현(大玄) 아찬(阿湌)을 태대각간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하지만 설화적인 성격이 짙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朴秀淨, 2016, 「『三國史記』 職官志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8쪽).
註 002
대당소감(大幢少監): 대당소감은 6정군단 가운데 왕경에 주둔한 대당의 군관(軍官)이다. 소감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되었으며, 대당에 15명이 배속되었다. 관등이 대사(大舍) 이하인 자를 임용하였다. 소감은 평상시에는 편제상으로만 두어져 있다가 전시출동에 즈음하여 임명·배속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203쪽).
註 003
본득(本得): 본득은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 고구려 정벌 후의 논공(論功)에서 대당소감으로서 사천(虵川)에서의 전공이 1등이라는 이유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04
사천(虵川): 현재의 평양시 동쪽의 합장강(合掌江)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井上秀雄, 188쪽; 노태돈, 165쪽). 사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8년(668) 7월 16일조 참조.
〈참고문헌〉
井上秀雄 譯註, 1980, 『三國史記 1』, 平凡社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註 005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한산정(漢山停)에 설치된 군관(軍官)이다. 본래 한산정소감이었으나 후대에 한산주소감으로 개서한 것으로 보인다. 소감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되었으며, 한산정에 15명이 배속되었다. 관등이 대사(大舍) 이하인 자를 임용하였다. 소감은 평상시에는 편제상으로만 두어져 있다가 전시출동에 즈음하여 임명·배속하였다고 보기도 한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203쪽).
註 006
박경한(朴京漢):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 고구려 정벌 후의 논공(論功)에서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으로서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인 공으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았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7
군주(軍主): 고구려의 군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휘한 사령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註 008
술탈(述脫): 고구려의 군주(軍主)로서 평양성 전투에서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 박경한(朴京漢)에게 살해당한 사실 외에 더 이상은 행적은 알 수 없다. 박경한이 큰 포상을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해당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註 009
흑악령(黒嶽令): 흑악현(黑嶽縣)의 현령(縣令)으로 추정되는데, 흑악현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19쪽).
註 010
선극(宣極): 선극은 흑악령(黒嶽令)으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성 대문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일길찬의 관등과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11
서당당주(誓幢幢主): 서당(誓幢)이란 군단을 지휘한 사령관을 이른다. 임시로 행군군단을 편성할 때에 서당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총관(摠管)을 임명하지만, 평소에는 당주가 서당을 지휘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서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조 참조.
註 012
김둔산(金遁山): 서당당주(誓幢幢主)로서 평양 군영에서의 전공이 첫 번째였다고 한다.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사찬의 관등과 조(租) 700석을 받았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13
군사(軍師): 신라 군제(軍制)의 하나인 군사당(軍師幢)의 무관직(武官職)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11월 22일조 참조.
註 014
남한산(南漢山): 남한산은 한강 이남의 서울특별시,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 일원을 망라한 남한산군(南漢山郡)을 가리킨다.
註 015
북거(北渠): 북거는 군사(軍師)의 직을 가지고 있고, 외위(外位)를 수여받은 것으로 보아 남한산군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평양성 북문에서 큰 공을 세워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술간(述干)의 외위(外位)와 벼 1,000석을 받았다.
註 016
술간(述干): 지방인에게 부여되던 외위 11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관등이다. 경위로 일원화할 당시에 사찬에 상응하였다. 문무왕 14년(674) 외위를 경위로 대체하면서 소멸되었다.
註 017
부양(斧壤):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漢州)조에 부평군(富平郡) 광평현(廣平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斧壤縣)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시대의 평강현(平康縣)이라고 전한다. 부양은 강원도 평강군 평강면(현재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으로 비정된다.
註 018
구기(仇杞): 구기는 군사(軍師)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 남교에서 공을 세워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사찬의 관등과 조(租) 7백 석을 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19
가군사(假軍師): 여기에만 보이는 관직명으로서, 명칭을 통해 임시직 군사(軍師)로서 지방인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註 020
비열홀(比列忽): 비열홀은 함경상남도 안변(현재 북한의 강원도 안변)에 해당한다.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홀주라고 불렀다.
註 021
세활(世活): 가군사(假軍師)로서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평양소성(平壤少城) 전투에서의 공이 1등이었다. 이에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고간(髙干)의 외위 관등과 벼 500석을 받았다.
註 022
평양소성(平壤少城): 평양성에 딸린 작은 성을 가리킨다고 추정되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
註 023
고간(高干): 지방인에게 주어진 외위 11등급 중 세 번째로 높다. 경위로 일원화하는 과정에서는 17등 경위 중 아홉 번째인 급벌찬에 상응되었다. 문무왕 14년(674) 외위를 경위로 대체하면서 소멸되었다.
註 024
김상경(金相京): 김상경은 한산주소감(漢山州少監)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전하여 사천 전투에서 전사였고,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받고 조(租) 1,000석을 하사받은 인물이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25
아술(牙述): 신라 웅주(熊州) 탕정군(湯井郡)에 소속된 음봉현(陰峯縣)의 백제 때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으로 비정된다.
註 026
구율(求律): 아술(牙述) 소속의 지방인이지만 사찬의 경위를 가지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마도 이전의 전공으로 경위를 수여받은 듯하다. 고구려 정벌 중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서 큰 공을 세웠지만 군령(軍令) 없이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다는 이유로 문무왕 8년(668) 10월 22일의 논공에서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분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주제분류
정치>군사>군사조직>보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