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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에서 활약하였다고 알려졌다. 「흑치상지 묘지명」은 아들인 흑치준(黑齒俊)의 묘지명과 함께 1929년 10월에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의 북망산(北邙山)에서 발견되었다. 묘지명의 출토경위에 대해서는 최초 소장자인 이근원(李根源)이 「곡석당지목(曲石唐志目)」이라는 해제에서 밝히고 있는데, 1929년에 발견되어 2년 뒤인 1931년에 이근원이 구입하고 소장하였다고 되어 있다(李希沁, 1986, 96∼105쪽). 묘지명은 쑤저우시(蘇州市) 문물보관위원회를 거쳐 현재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다만 함께 발견된 「흑치준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원에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행방도 알 수 없다(오택현, 2015, 397쪽).
이 묘지명은 1986년에 발표된 이희필(李希泌)의 책에 의해 한국에 알려졌는데, 그에 따르면 묘지명은 1행 41자씩 전체 41행으로 되어 있어 총 1604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묘지의 내용으로 보아, 흑치상지와 함께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를 흠모하였었던 인물이 찬자가 아닐까 추정된다. 묘지명은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주(周)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던 시기(690∼705)에 작성되어, 측천무후자가 기록되어 있다.
두 묘지명 이외에도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에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위의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은 흑치상지의 활동상에 대해서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묘지명에는 흑치상지가 백제 멸망 후에 부흥운동에서 활약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문헌과 묘지명을 동시에 비교·검토해야 흑치상지의 생애를 정확히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묘지명 등의 내용을 종합하면, 흑치상지의 가문은 왕족인 부여씨(扶餘氏)의 지파라고 한다. 그의 증조부는 달솔(達率)인 흑치문대(黑齒文大), 조부는 달솔·군장(郡將)인 흑치덕현(黑齒德顯) 또는 흑치가해(黑齒加亥), 조부는 달솔·주부재(綢部宰)인 흑치사차(黑齒沙次) 또는 흑치사자(黑齒沙子)이다. 그의 아들은 당(唐)에서 태어나 우금오위(右金吾衛) 익부(翊府) 중랑장(中郞將: 정4품하)·상주국(上柱國: 정2품)을 지낸 흑치준이다.
흑치상지는 630년에 태어나서 660년까지 백제에서 달솔·풍달군장(風達郡將)을 지냈고, 멸망 이후 663년까지 부흥운동에서 활약하였다. 부흥운동이 진압된 이후 그는 당에 항복하여 664년부터 665년까지는 절충도위(折衝都尉: 정4품상∼정5품하)에 임명되어 웅진성(熊津城)에 돌아와 유민을 안무(按撫)하였고, 677년 경까지 대방주장사(帶方州長史: 종5품상∼정6품상)·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 정4품상)·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 종4품하∼종5품하)·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 종3품)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상주국·부양군개국공(浮陽郡開國公: 정2품)에 봉해졌다. 그는 678년부터 돌궐(突厥)·토번(吐蕃) 등과의 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하여 당의 대표적인 번장(蕃將) 중 1명이 되었다. 많은 공적의 결과로 그는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정3품)·연국공(燕國公: 종1품)에 임명되고 사후에는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정3품)에 추증되었다. 다만 689년에 혹리(酷吏)의 모함을 받고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가, 698년에 신원(伸寃)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관직이 추증되고 699년에 묘지명의 제작과 이장(移葬)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흑치상지는 최종 관직이 정3품이었기 때문에, 묘지명 제작에 당 조정이 개입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묘지명에 서술에 제약이 있어 부흥운동에서의 활약 등이 생략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백제보다는 당에서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어 있다. 두 묘지명에서 흑치상지의 증조부부터 본인까지 백제에서 대대로 달솔을 지냈다고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백제에서 흑치씨 가문의 위상은 좌평(佐平)에는 오르지 못해도 대대로 달솔을 역임할 수 있는 차상위의 귀족 가문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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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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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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