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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1) 발견경위 및 이름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2009년 5월 11일 도로 개설공사 중 한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자가 이를 집에서 사용하기 위해 옮기고 세척하던 중 새겨진 글자가 있음을 발견하고 5월 13일에 포항시에 신고하였으며, 14일 포항시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발견문화재로 신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처음에는 발견 위치가 학성리(鶴城里)로 알려졌기 때문에, 보도자료 등에서 ‘포항 학성리비’로 불렀으나, 측량에 의해 출토지점의 행정구역이 중성리로 밝혀지면서 정식 이름이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되었다. 이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석비(石碑)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로 인정받아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4월 22일에 국보 제318호에 지정되었다.

(2) 발견위치와 건립지
이 비가 처음부터 이곳에 건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의 발견 직후 주변 지역을 조사하였지만, 이 비와 관련된 유물·유적이나 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원래 건립지와 발견지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동남쪽 약 700m 지점에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96호)이 있고, 인접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오래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발견되는 등, 포항시 북구 일대가 일찍부터 신라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포항시 북구 일대는 신라 왕경 경주에서 동해안 방면으로 나아가는 통로상에 있어, 신라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신라에 복속된 지역 중 하나이다. 신라가 동해안 방면을 따라 북으로 확장해가는 전초기지이자 신라의 북쪽을 지키는 수비의 요지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이러한 역사적 환경과 연관하여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발견된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3) 외형과 글자
이 비는 그간 발견되었던 6세기 초 신라 석비들과 같이 다듬지 않은 자연 형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대체로 상부가 약간 넓고 하부가 좁은 형태인데,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 옆면은 대체로 직선으로 내려오나 오른쪽 옆면은 곡선을 그리며 아래쪽 2/3지점이 오목하게 되어 있다. 앞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 약간 다듬은 흔적이 있다. 아래쪽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빈 공간이 있는데 아마 받침돌에 끼우는 부분일 것이다. 현재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일어난 풍화작용과 일부 인위적인 훼손 흔적이 확인된다. 특히 왼쪽 상부와 오른쪽 옆면의 훼손이 심하다.
글자는 앞면에만 있는데 12행에 걸쳐 쓰였으며, 한 행마다 적게는 6글자 많게는 21자 정도가 있다. 훼손으로 일부 글자가 확인되지 않지만 총 203자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글자는 잘 남아있다. 비의 형태에 따라 글자를 새기면서 높이가 일정하지 않는 윗면에 맞추어 각 행 첫 글자의 높이가 제각각이며, 각 행의 전체적인 모양이 오른쪽 옆면의 형태를 따라 아래로 내려올수록 좌로 휘어진다. 서체는 광개토왕비나 초기 신라 석비들에서 확인되는 예서(隷書)체이지만, 6세기 중반 정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해서(楷書)의 흔적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글자의 크기는 가장 작은 것이 2×2㎝, 가장 큰 것이 3×5㎝ 정도이다.

(4) 건립시기
비문의 맨 처음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나와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 비문에 나오는 신라 사회의 모습이 503(지증왕 4)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 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 분명하므로, 신사가 가리키는 해는 501년(지증왕 2), 441년(눌지마립간 25)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이 501년 건립설을 지지하고 있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나타난 모습과 불과 2년 사이의 변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격차가 있어 여전히 일부에서 441년 건립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한편 신사(辛巳)라는 간지 아래는 인명으로 보이는데, 훼손으로 일부 글자가 제대로 판독되지 않는다. 다만 남은 글자의 형태를 볼 때 ‘지절로(只折盧)’로 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지절로’가 맞다면 이는 지증왕의 이름이므로 이 비의 건립연대는 지증왕 재위시인 501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첫 글자는 훼손으로 글자의 절반이 없어 확정하기 힘들며, 남은 글자 형태를 볼 때 ‘중(中)’일 가능성도 많아서, 이 이름을 가지고 건립시기를 확정하기는 힘들다.

(5) 비문내용과 쟁점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글자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판독상에 큰 어려움이나 이견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비문의 구조가 명확하지 않고, 명사와 동사, 주어와 서술어의 구분이 쉽지 않아 해석과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전체적인 내용은 이 석비보다 앞서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나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대체로 유사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 지역에 벌어진 어떠한 분쟁에서 왕을 포함한 신라 6부의 핵심지배층들이 함께 의논하여 처리를 결정, 곧 판결을 내리고 그것을 이 지역에 ‘교(敎)’ 즉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이 석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분쟁의 내용, 당사자들, 최종 판결 등이 무엇인지도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았고, 비문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들의 성격과 역할은 물론 숫자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더하여 어떤 경우에는 인명인지 지명 혹은 부명인지에 대해서도 의견들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 비문의 구조와 해석 및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기는 힘들며, 그동안 논쟁이 되었던 몇몇 주제에 대해 정리만 하겠다. 우선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명표기에 나오는 관등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나오는 관등들과 유사하지만, 그간 외위(外位)로 알려졌던 일벌(壹伐)이 신라 중앙 지배세력인 6부인이 소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경위의 성립과정과 시기 및 외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신라 관등제에 대한 고찰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아울러 지방 촌에 두어졌던 간지(干支)와 일금지(壹金知) 위호도 확인되었는데, 특히 일금지가 지방 촌의 수장 휘하의 지위였던 것이 분명히 확인되면서 외위의 성립과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연구들이 행해졌다.
다음으로 신라 6부의 이름과 표기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비문에 분쟁의 당사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모단벌(牟旦伐)에 대해, 여러 연구자들은 이를 모단벌훼(牟旦伐喙)라 보고 6부 중 하나인 모량부(牟梁部)[잠훼부(岑喙部)]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모단벌을 인명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모단벌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는 분쟁의 당사자를 개인으로 보느냐 혹은 부라는 공동체로 보느냐라는 견해 차이와도 연결된다. 그럼에도 6부의 이름 및 표기법에 대한 문제, 6부의 성립시기와 성격, 6부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 6부라는 정치체들의 사회발전단계 등과 관련한 단서들을 제공함으로써, 5~6세기 초 신라의 국가체제와 사회구조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제공하고 있어 향후가 더욱 주목된다.
또한 이 비가 세워진 지역의 촌들과 그곳의 수장들로 보이는 간지(干支), 일금지(壹金知) 등의 위호를 소유한 인물들의 명단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분쟁 지역에서 판결의 실무를 담당하거나 혹은 판결에 따라 처분이 내려진 대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지방세력이 몇 개인지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 명단은 당시 신라의 지방지배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오랜 논란 거리였던 신라 중고기 촌(村)의 실체와 성격에 논쟁, 자연촌설과 행정촌설의 대립이 다시금 점화되고 있다.
분쟁의 대상 혹은 당사자로 여겨지는 일부지궁(日夫智宮)과 두지사간지궁(豆智沙干支宮)의 성격과 실체 역시 주요한 쟁점이다. 궁(宮)이 재화인지 혹은 왕족 등 유력자의 집으로 그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지 등의 견해들이 있는데, 궁을 재화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뒤에 나오는 ‘작민(作民)’과 연관지어 주로 농장 혹은 그것을 관리하는 기구 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유력자 자신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분쟁의 당사자로 보는데 이 경우 분쟁의 대상은 비문에서 찾을 수 없다.
판결의 결과와 분쟁의 승자 등에 관한 문제와도 연관하여 논쟁들이 있었다. 이는 이 비문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9행 6번째 글자에서 10행 10번째 글자까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마지막의 ‘모단벌훼작민사간지(牟旦伐喙作民沙干支)’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이 석비에 글을 쓰고 세운 실무진의 명단이 기재되었다. 다만 마지막 글자의 판독과 의미 파악이 분명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6) 의의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석비로, 왕을 포함한 신라 6부가 이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에 대한 처리를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세운 것이다. 그 비문을 통해 당시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이후 가까운 시기에 세워진 비슷한 성격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 및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의 비교를 통해 변화상을 추적함으로써 신라의 국가체제와 경제·사회의 발전양상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당시 신라의 문자 생활과 관련한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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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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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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