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삼년성과 굴산성을 고쳐 쌓다
(
486년
01월
)
8년(486) 봄 정월에 이찬(伊湌) 실죽(實竹)註 001을 장군(將軍)에 임명하였다. 일선계(一善界)註 002의 장정[丁夫] 3,000명을 징발해서 삼년성(三年城)註 003과 굴산성(屈山城)註 004 두 성을 고쳐 쌓았다.
굴산성(屈山城):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혹은 청성면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조에 기산현(耆山縣)은 본래 굴현(屈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의 청산현(靑山縣)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청산현이 본래 굴산현이라고 하였다. 굴산성은 바로 굴산현, 즉 기산현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굴산성이 군현제의 도입에 따라 굴산현으로 편제되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청산현(靑山縣) 성곽조에는 기성산성(己城山城)이 고을 서쪽 8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91척,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고 되어 있다. 또 고적조에는 저점고성(猪岾古城)이 고을 서쪽 9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5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되어 있다. 각각은 현재의 이성산성(已城山城)과 저점산성에 비정된다. 이성산성에 대해서는 2015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5세기에 축조된 신라 토성으로 밝혀졌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15, 『옥천 이성산성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따라서 굴산성을 이성산성에 비정할 수 있지만, 삼년산성과 입지와 양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저점산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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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註) 004
굴산성(屈山城):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혹은 청성면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조에 기산현(耆山縣)은 본래 굴현(屈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의 청산현(靑山縣)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청산현이 본래 굴산현이라고 하였다. 굴산성은 바로 굴산현, 즉 기산현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굴산성이 군현제의 도입에 따라 굴산현으로 편제되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청산현(靑山縣) 성곽조에는 기성산성(己城山城)이 고을 서쪽 8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91척,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고 되어 있다. 또 고적조에는 저점고성(猪岾古城)이 고을 서쪽 9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5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되어 있다. 각각은 현재의 이성산성(已城山城)과 저점산성에 비정된다. 이성산성에 대해서는 2015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5세기에 축조된 신라 토성으로 밝혀졌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15, 『옥천 이성산성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따라서 굴산성을 이성산성에 비정할 수 있지만, 삼년산성과 입지와 양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저점산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주제분류
- 정치>군사>군사시설>성
- 정치>행정>관직>군사관직
- 경제>경제정책>조세·공역>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