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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건국하다 ( 901년 )
천복(天復)註 001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왕을 자칭하였다.註 002〔그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당(唐)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폐허가 되었다[鞠爲茂草].註 003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註 004라고 하였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여서 이런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興州)註 005 부석사(浮石寺)註 006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註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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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1
천복(天復): 당(唐) 소종(昭宗)의 연호로 901~904년 동안 사용되었다.바로가기
註) 002
천복(天復) 원년 신유(901)에 선종은 왕을 자칭하였다: 본서 권제12 신라본기제12 효공왕 5년(901)조에도 궁예가 왕을 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제1 왕력 후고구려조에 의하면 이 해에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고(鄭求福, 1992, 50~59쪽), 고구려 후기에는 고려를 국호로 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鄭求福, 1992, 60~63쪽).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닌 국호였다. 단 본서의 찬자들은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하였음을 의식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 고려를 삼국시대의 고구려(고려),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후고구려라고 한다. 9세기 말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군(북한 황해북도 평산군)〕의 호족 박직윤은 대모달(大毛達)을 칭하였다. 대모달은 고구려의 대모달(大模達)인데, 이것은 당의 위장군(衛將軍)에 비견된다[『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박지윤은 박혁거세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지역 주민들을 지배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金光洙, 139쪽; 鄭淸柱, 1988; 1995, 44~45쪽). 평산에 이웃한 재령은 고구려 3경(京) 중 하나였던 한성으로 비정된다.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이 이곳에서 시작하였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부흥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일대에는 고구려의 전통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웠던 것은 영역 내의 고구려 계통의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한 해 전인 900년에 후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궁예의 선택은 고구려가 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李基白, 1976; 1978, 23쪽 : 조인성, 2006; 2007, 182쪽). 한편 참위가(讖緯家)에서는 신유(辛酉) 해를 혁명의 해로 생각하기 때문에 참위 사상의 신봉자였던 궁예가 이해를 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1977; 2012, 783쪽의 주 4)].
〈참고문헌〉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2012, 『國譯 三國史記』(斗溪李丙燾全集 11), 한국학술정보
李基白, 1976, 「『三國史記』論」, 『文學과 知性』1976년 겨울호; 1978, 『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金光洙, 1977, 「高麗建國期의 浿西豪族과 對女眞關係」, 『史叢』 21・22
鄭淸柱, 1988, 「新羅末 高麗初 豪族의 形成과 變化에 대한 一考察-平山朴氏의 一家門의 實例檢討-」, 『歷史學報』 118; 1995, 『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 一潮閣
鄭求福, 1992,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湖西史學』 19·20
조인성, 2006, 「弓裔의 後高句麗 건국과 관련한 두 문제」, 『新羅文化』 27; 2007,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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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폐허가 되었다[鞠爲茂草]: 쇠퇴하여 황무지가 된 풍경을 묘사하는 말인데, 잡초가 길을 막았다는 뜻이라고도 한다(『詩經』小雅 小旻之什 小弁 및 『晉書』권105 載記제5 石勒).바로가기
註) 004
지난날 신라가 … 원수를 갚겠다: 이 부분은 아마도 즉위 교서 같은 데에 실려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궁예가 당에 복수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당을 언급한 것은 당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붕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국왕은 당의 책봉을 받아 권위를 유지하였는데, 당이 쇠퇴하면서 그 권위는 전만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조인성, 2021, 「후삼국사의 몇 가지 문제」, 『新羅史學報』 51, 4~7쪽).바로가기
註) 005
흥주(興州): 신라의 급산군(岌山郡)을 고려 초에 흥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흥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이다.바로가기
註) 006
부석사(浮石寺):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있다.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하였다.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설법하였는데, 이후 신라 화엄종의 종찰(宗刹)이 되었다[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6년 2월;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의상전교(義相傳敎)].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부석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석사의 벽에 신라 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은 부석사와 왕실이 관련이 깊었음을 의미할 것인데, 그것이 어느 왕의 초상화였는지는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7
아마도 태어났을 때 … 아직도 남아 있다: 본 열전 찬자는 궁예가 태어나면서 버림받은 원한 때문에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던 것이라고 풀이하고, 그 방증으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친 사실을 들었다.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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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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