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이 즉위하여 감은사를 세우다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註 081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註 082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聖考)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註 083를 세웠다.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註 084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註 085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했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註 086라고 하였다.
경주시 북면 용당리에 있던 사찰로 1959년 국립박물관의 발굴로 금당·강당·회랑의 터가 조사되었다.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사원의 모범이 되었다(김재원·윤무병, ≪감은사지발굴보고서≫, 을유문화사, 1961| 조유전, 「감은사지 조사개요」, ≪고문화≫ 19, 1981)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신종원, 「문무왕과 대왕암-고려시대의 민속신앙과 관련하여」,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한국중세사학회, 2001).
사적 제159호로 경주시 감포읍 대분리에 위치해 있다. 1970년 발굴조사에서 건물지를 확인하고 복원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감은사 동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註) 083
경주시 북면 용당리에 있던 사찰로 1959년 국립박물관의 발굴로 금당·강당·회랑의 터가 조사되었다.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사원의 모범이 되었다(김재원·윤무병, ≪감은사지발굴보고서≫, 을유문화사, 1961| 조유전, 「감은사지 조사개요」, ≪고문화≫ 19, 1981)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신종원, 「문무왕과 대왕암-고려시대의 민속신앙과 관련하여」, ≪한국중세사회의 제문제≫, 한국중세사학회, 2001).
註) 084
註) 086
사적 제159호로 경주시 감포읍 대분리에 위치해 있다. 1970년 발굴조사에서 건물지를 확인하고 복원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감은사 동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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