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일제 말기의 사회주의운동
해방 직전 시기에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 이 문제는 해방이후 정치사의 전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연구자들의 주목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전시 파쇼통치체제하에서 국내에서는 그 어떠한 운동의 공공연한 존립도 불가능했다. 전쟁동원체제에 입각하여 전 민족을 옭아놓은 그러한 군사적 계엄상황 아래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포함한 모든 반일운동은 지하에서 소규모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 말기의 사회주의 운동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연구자료는 매우 적다. 사회주의운동 전개의 일부 양상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보도되던 1920·30년대와는 달리 일제 말기에는 그나마 불가능했다. 일본 관헌 측의 정보자료도 이 시기에 관한 것은 그다지 많이 공개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성과는 오랫동안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이 시기는 사회주의 운동의 공백기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시기 사상범 검거 누계통계를 분석하여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추세를 검토한 연구성과들이 나왔다. 이에 따르면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또한 1920~30년대의 민족해방운동이 반합법적이며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특색을 가진 반면에, 1940년대 전반기의 그것은 비합법적이며 지하화되어 있었고, 비조직적이며 소규모의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해방 직전 시기 사회주의운동의 이러한 특징은 전시체제하 일제의 동원체제와 파쇼적 계엄통치라는 객관적 상황에서 연유한 것이었다.註 051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서중석그룹), 스딸린단(이영·정백그룹),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 중에서 경성콤그룹은 해방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핵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1940년 3월 감옥에서 출옥한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註 052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註 053 건국동맹은 여운형의 지도하에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비밀 단체였으며, 중국 연안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동맹과도 일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다음 몇 가지 공통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첫째 반일 민족통일전선 전술을 더욱 폭넓게 취하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고 있던 상층통일전선 전술이 태평양전쟁 막바지 단계에서는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그것은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단체결성에 민족주의 상층 인사들과 함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둘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해 반전투쟁을 선전선동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군수산업부문의 무력화를 위해 해당부문 노동자의 조직화에 노력했으며, 그에 기초하여 파업이나 태업투쟁을 전개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징병, 징용, 공출 등과 같은 일제의 전시 총동원정책을 파탄시키는 것을 하나의 운동과제로 설정했다.
셋째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 전술을 채택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임박해 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인식과 연관된 것이었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르면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적절한 시기에 반일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다각적인 군사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註 054
일제말 전시파쇼체제하에서 정세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독립을 예견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했던 사회집단은 청년, 학생층이었다. 청년, 학생층은 당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일정한 연계하에 통일전선 정책, 반전투쟁, 결정적 시기의 무장투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준비활동에 나서고 있었다고 한다.註 055
註) 051
註) 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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