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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 食飮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 殷正月校勘 008祭天, 范書, 作臘月. 何焯曰, 用殷正月, 衣尙白, 猶箕子遺敎也.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註 041 沈欽韓曰, 天中記, 謝承書云, 東夷三韓俗, 以臘日家家祭祀, 俗云臘鼓, 鳴春草生也. 㓝楚歲時記, 十二月八日, 爲臘日.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 袴校勘 009, 官本, 袴作褲. 履革鞜. 出國則尙繒繡錦 罽校勘 010, 宋本, 罽作𦋹. 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 官本, 狖, 作狖. 解見後. 以金銀飾 帽校勘 011 註 042. 宋本, 冒, 作帽. 譯人傳辭, 皆跪, 手據地竊語.
校勘) 008
『後漢書』에는 ‘臘月’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校勘) 009
「殿本」에는 ‘褲’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校勘) 010
「宋本」에는 ‘’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校勘) 011
「汲古閣本」· 「殿本」에는 ‘冒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註) 041
高句麗의 東盟, 東濊의 舞天과 같은 秋收感謝祭로 夫餘語의 漢字표기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 맞이궂(迎神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북(鼓)을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신비력을 지녔다고 믿어 왔던 濊貊系사회의 풍속으로 미루어 보아, 夫餘의 迎鼓는 이를 반영한 宗敎的 祭儀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迎鼓는 殷正月에 행해졌다고 하는데, 夫餘가 殷曆을 채용하였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殷曆이 丑月을 歲首로 하였으므로 12月에 祭天行事를 한 것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夫餘가 高句麗나 東濊와는 달리 추수감사제를 12月에 행한 것은 아마도 수렵사회의 전통을 이어온 때문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金宅圭, 「迎鼓考-民俗文學硏究試圖의 一端-」『國語國文學硏究』2, 1958.
梁在淵, 「魏志東夷傳에 나타난 祭天意識과 歌舞」『魏志東夷傳의 諸問題』1979.
李亨求, 「文獻資料上으로 본 우리나라의 甲骨文化」『道原柳承國博士華甲紀念論文集: 東方思想論攷』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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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2
『魏書』高句麗傳에서는‘黃金出自夫餘 珂則涉羅所産’ 이라 하여 夫餘가 金의 産地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모자를 金·銀으로 장식했다는 것으로 보아 夫餘의 金·銀細工業이 매우 발전된 수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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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
  • 사회>의례>제사>천지신
  • 사회>사회조직>신분>복식(옷·관모·혁대·장식구·신발·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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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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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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