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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藝死, 其國私謚武王. 子欽茂立, 改年大興,
○ 武藝死, 其國私謚武王. 子欽茂立, 改年大興, 有詔嗣王及所領, 欽茂因是赦境內. 天寶末, 欽茂徙上京,註 066 直舊國註 067三百里忽汗河之東. 訖帝世, 朝獻者二十九.
註) 066
渤海王國의 上京龍泉府를 말한다. 처음 第3代 大欽茂는 唐 天寶(742~755) 末에 中京顯德府에서 이곳으로 遷都하였다가, 唐 貞元 年間(785~794)에 東南方인 東京龍原府로 遷都하였다. 그 후 第5代 成王 華璵에 이르러 다시 上京으로 되돌아와 渤海王國의 亡國時까지 政治·經濟·軍事·文化의 中心地였다. 지금의 中國 黑龍江省 寧安縣 東京城의 西南側에 그 遺蹟이 있다.
처음 渤海王國의 上京을 寧安縣城인 寧古塔 부근으로 比定한 것은 丁若鏞(『我邦疆域考』 「渤海考」)·韓鎭書(『續海東繹史』 「渤海」)였으나, 그 후 日本學者들도 모두 이를 追從하였다. 즉 松井等( 「渤海國の疆域」p.413)·津田左右吉( 「渤海考」pp.120~121)등이 그 예이다.
특히 1931년에 日本이 일으킨 이른바 滿洲事變 이후부터 日本의 渤海史硏究가 그들의 大陸侵入의 필요상 활기를 띄게 되자, 1933年에서 1934年에 걸쳐 原田淑人을 首班으로 하는 東亞考古學會의 上京遺蹟에 대한 調査가 이루어졌으며, 그 成果가 1939年에 發表된 『東京城』이라는 報告書이다. 이 報告書로서 1,200年間이나 地下에 묻혔던 上京의 都城規模·宮殿·寺院의 遺址가 밝혀져 渤海史硏究에 新紀元을 열게 되었다.
上京龍泉府에 대한 考古學面에서의 硏究는 中國에서도 지속되어 陳顯昌의 「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같은 것이 發表된 바 있다.
≪參考文獻≫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陳顯昌, 「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文物』1980年 9期.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第 5 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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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7
上京龍泉府에서 3百里 떨어진 ‘舊國’은 곧 大祚榮이 최초로 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곳이 되기에 渤海史硏究에서는 매우 중요시되어 왔다.
‘舊國’에 대하여 丁若鏞은 이를 渤海王國이 上京龍泉府로 천도하기 전 일시 首都였던 中京顯德府로 推斷하여, 上京인 寧古塔에서 3百里南인 지점을 찾아 이를 鏡泊湖南 200里인 額敦山城으로 比定한 바 있다(『我邦疆域考』 「渤海考」).
한편 韓鎭書도 中京顯德府가 곧 ‘舊國’인 것으로 斷定하였으나, 『新唐書』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道里記』에 의하면
…… 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이라 하여 中京顯德府에서 上京龍泉府는 正北으로 600里 되는 곳으로 되어 있어 『新唐書』渤海傳에서 上京과 ‘舊國’ 間의 거리가 300里였다고 한 점과는 맞지 않게 되자, 이에 그는 ‘ …… 然則顯德府 上京西南三百里 但地志所敍道里 較本傳多三百里 未知孰是 蓋不出虎爾河之西南 烏喇城之東南也’라고 그 확실한 地點의 비정에 막연히 虎爾河의 西南이며, 烏喇城 (吉林城)의 東南인 어느 地點일 것이라고만 한 바 있다(『續海東續史』 「渤海」).
이와 같이 上京龍泉府에 遷都하기 전의 首都인 이른바 ‘舊國’을 中京顯德府와 同一地點으로 추정하기에는 『新唐書』渤海傳에는 上京龍泉府와 ‘舊國’과의 거리가 300里 밖에 되지 않은 데 비하여, 賈耽의 『道里記』에는 上京龍泉府와 中京顯德府와의 거리가 600里로 明記되어 있어 거리가 맞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松井等은 ‘舊國’이 곧 中京顯德府와 同一 地點이라고 하면서도 이와 같은 거리상의 현격한 차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中京顯德府의 位置를 賈耽의『道里記』에 맞추어 輝發河 下流와 松花江의 合流點에서 西南으로 약 70里되는 今日의 那丹佛勒城에 比定한 바 있다( 「渤海國の疆域」pp.409~411).
松井等의 이와 같은 學說이 나온 데 이어 津田左右吉도 『新唐書』渤海傳의 ‘舊國’이 곧 中京顯德府와 同一地點이라고 斷定한 點은 丁若鏞·松井等과 다를 바 없으나, 그 位置를 敦化縣 부근으로 比定한 바 있다( 「渤海考」pp.120~123).
특히 津田左右吉은 그 추정과정에서 ‘ …… 까닭에 『道里記』가 그 距離를 600里로 하였던 것은 計數가 너무 많은 失을 犯한 것을 疑心할 바 없다’고 하여 賈耽의 『道里記』의 記事를 거의 무시하고 있어 이 問題를 해결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渤海王國의 이른바 ‘舊國’과 中京顯德府를 처음으로 구분하여 비정한 것은 中國의 金毓黻 이었다.
그는 大祚榮이 처음 建國의 터전을 이룩한 東牟山이 곧 ‘舊國’인데, 이것은 敦化縣城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敖東山城이며(『渤海國志長編』p.3), 賈耽의 『道里記』에서 ‘顯州天寶中王所都’라고 한 唐 玄宗 天寶 年間(A.D.742~755)일시 渤海王國의 首都였던 顯州(中京顯德府)를 樺甸縣 蘇密城에 比定한 바 있다(앞의 책, pp.6~7).
그가 中京顯德府를 樺甸縣 蘇密城으로 比定하게 된 것은 賈耽의 『道里記』에서 中京顯德府에서 上京龍泉府까지의 거리를 600里라고 한 것을 살려서 輝發河 下流의 北岸에서 그 규모가 首都로서 손색이 없고 교통의 편리를 염두에 두고서 한 비정이었다.
金毓黻의 中京蘇密城說은 그 후 渤海遺址發掘의 진전에 따라 부인되었으나, ‘舊國’이 곧 敖東山城이었다는 學說은 中國學者들이 이룩한 敦化 부근의 發掘成果로써 입증되어져 이제 定說化된 느낌이 있다(王承禮, 「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蹟調査記」pp.298~301).
≪參考文獻≫
『新唐書』卷43下 「地理志」所引 『道里記』
丁若鏞, 『我邦疆域考』卷5 「渤海考」
韓鎭書, 『續海東繹史』卷9 「渤海」
金毓黻, 『渤海國志長編』卷14 「地理考」; 卷17 「地理考」
王承禮, 「吉林敦化牧丹江上流渤海遺蹟調査記」『考古』 1962年 11期.
松井等, 「渤海國の疆域」『滿洲歷史地理』 1卷, 1913.
津田左右吉, 「渤海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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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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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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