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항일
동변도는 원奉天省註 017 동부의 행정구이다. 그 속에는 東溝·鳳城·岫岩·寬甸·莊河岫桓仁·本溪·撫順·新賓·淸原(지금 요녕성에 속함)과 通化·柳河·海龍·安圖·輝南·臨江·長白·輯安·撫松·東豊(지금 길림성에 속함)등 20여 개 縣이 있었다. 道尹公署는 安東에 설치되어 행정을 책임졌고 또 東邊鎭守使署는 山城鎭에 설치되어 지방군사를 책임졌다. 이 지구는 변경선이 포함되어 있고 동쪽은 조선과 강 하나(一江)의 거리이며 장백산과 그의 분맥이 남에서 북으로 흩어져 있다. 그곳은 산이 높고 수림이 깊으며 광산도 풍부하며 漢族·滿族·조선족 등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 9·18 사변 이후 南滿中韓部隊의 연합항일은 바로 이 곳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1. 民衆自衛團-동변도지구의 첫번째 中韓연합항일武裝
1) 배 경
9·18 사변 이후 민중자위단은 新賓(興京)縣 旺淸門에서 성립되었다. 이 항일무장의 형성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원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첫째, 왕청문 일대는 한인교포가 집거하고 있었는데, 이 구역의 20여 개 자연촌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거주한 거민 총인수가 20,000인이었는데 그 속에 조선족이 10,000여 인 있었다. 약 절반을 차지했다.
둘째, 왕청문 일대는 한인교포 독립 운동단체 ‘國民府’·‘朝鮮革命黨’과 ‘朝鮮革命軍’ 總部 기관의 소재지이며 南滿한인교포 독립운동 영도자의 소재지이며 또한 중요한 근거지였다. 1929년 5월 28일, 원래 있던 한인조직 ‘正義府’·‘參議府’·‘新民府’가 ‘國民府’로 연합되어, 玄益哲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직을 담임하였고, 동시에 성립된 ‘朝鮮革命黨’은 李孝源이 主席을 담임하였고 ‘朝鮮革命軍’ 司令部가 성립되어 李雄이 사령관을 담임하였다. 상술된 黨·政·軍 세 총부는 모두 왕청문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후에 세 총부의 영도자가 비록 감옥에 붙잡혀 들어가는 등 원인에 변동이 있었지만 왕청문이 영도기관 소재지로서의 위치는 변동이 없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부에 속하는 7개 중대의 분포정황은 아래와 같다.
제1중대 : 신빈현 왕청문에 있는 韓人 李能作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隊長 張都白 외 전사가 20명 있었다. 세력범위는 왕청문 부근이었다.
제2중대 : 본계·무순 두 현 변경지구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金文 외 전사가 20명, 세력범위는 본계·무순 변경이었다.
제3중대 : 輯安(지금의 길림성 集安)현의 五沙溝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梁建化 외 전사 20명, 집안현 경내를 활동범위로 하였다.
제4중대 : 通化縣快大帽子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權太枝 외 전사가 20명, 통화현 경내를 활동범위로 하였다.
제5중대 : 신빈현 永陵街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梁瑞奉 외 전사가 20명, 신빈현 영릉가 부근을 세력범위로 하였다.
제6중대 : 환인현 南北甸子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劉光訖 외 전사가 약 20명, 환인현을 세력범위로 하였다.
제7중대 : 신빈현 新賓堡南街 永新商會를 근거지로 하고 대장 黃局淸 외 전사가 약 15명, 新賓堡를 세력범위로 하였다.
상술된 각 중대에 구비된 무기 정황은 모두 보총 60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약 50알, 권총이 백 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약 80알, 기타 작은권총이 150자루, 매자루에 총알이 10알 등이다. 그 밖에 변복대가 4개조 있었는데 작탄이 20개 이상 구비되었다. 상술된 7개의 중대에서 3개가 신빈현 경내에서 활동하였고 나머지 4개 중대도 신빈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상술된 정황에 의하여 遼寧省交涉署의 公文에는 “遼寧省 내의 鮮匪는 본래 新賓縣 旺淸門에 根據를 두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註 018
셋째, 왕청문지구 애국 官紳의 韓僑 독립운동에 대한 支持를 들 수 있다.
본세기 20년대 초기부터 동맹회회원, 신해혁명 志士, 신빈현 왕청문구구장, 신빈현 參議員, 王彤軒(號 紫宸)이 당지의 한인교포 반일활동에 매우 큰 지지와 동정을 주었다. 그래서 奉天 張軍閥이 내린 〈取締韓人辦法綱要〉 등 법령·규정이 장기적으로 효과 좋게 관철되지 못하였고 한교 독립단체와 영도자들의 활동은 일정하게 보호를 받았다. 王彤軒은 또 新賓縣현장, 경찰국장 등 지방 관신들에게 한교 독립운동과 중국과의 利害관계를 선전하였다. 그는 한인의 반일 활동은 근본적으로 놓고 말하면 중국의 이익과 일치되는 것이며 지방정권의 안전에 위험을 주지 않는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의 영향아래 신빈현의 많은 官紳들은 한교 반일활동을 取締하는 일에 관하여 본척만척 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밖에 한국독립 운동 영도자들과 친밀한 벗으로 된 사람이 오히려 많았다.
2) 興京事件과 연합항일방침의 확정
9·18 사변 이후 東邊鎭守使 于芷山은 겉으로 항일을 찬성하는 척 하였다. 그래서 한 때는 각 현의 군인·경찰 및 민중단체는 무장항일에 그 자를 믿고 그 자가 거느린 省防軍의 몇개 사단을 기초로 동변도 항일부대를 건립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는 기간에 于芷山은 일본의 通化 주재 영사 興津良郞과의 句結을 다그치고 있었다. 이어서 또 이 영사의 9월 29일 회의 요구에 의하여 10월 13일에 동변 각현의 한교단체 국민부의 骨幹分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달 15일 ‘東邊鎭守使署’를 ‘東邊保安總司令部’로 고치고 동변보안총사령으로 자청하면서 공연적으로 일본놈의 개다리질을 하였다. 이어서 興津良郎이 사람을 파견하여 于芷山을 만나보고 빠른 속도로 왕청문 일대의 鮮匪를 소멸하라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혁명당, 국민부총부는 항일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각지에서 공작하는 간부를 왕청문에 돌아와 회의를 열기로 통지하며 항일계획의 制訂문제를 상의하기로 하였다. 1932년 1월 5일註 019 국민부 40여 명의 간부가 신빈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조선혁명군 제4중대장이 적들에게 吿密하여 수십명 일본 군경이 갑자기 회의장을 포위하고 조선혁명당 현임주석 李孝源, 조직부장 張世用, 군사부장 金輔安 등 31명의 중요간부들을 체포하였다. 정치부장 梁荷山, 국민부 中執위원, 조선혁명군 제5중대 대장 梁瑞奉 등 소수의 骨幹이 도망해 나왔다. 이것이 바로 한때를 놀래운 ‘興京事件’이다.
이 타격에 인하여 조선혁명당, 국민부는 기본상으로 해체될 상태로 되었다. 동년 2월초 梁荷山, 梁瑞奉은 깃발을 다시 세워 왕청문 夾河北村에서 회의를 열어 또 다시 3개 총부를 세웠다. 高爾虛가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 梁荷山이 국민부 中央집행위원회 위원장, 梁瑞奉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었다. 梁瑞奉은 임명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다수의 幹部가 체포되어 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모든 동지들은 항일의지를 결정하여야 하며 “투항할 생각을 갖지 말고 初志를 관철하라”라고 하였다. 그는 또 전체 혁명당과 혁명전사들에게 경내의 韓民을 “신뢰와 보호로서 대하라”註 020고 말하였다. 회의는 또 조선혁명군 대오를 확대하기 위하여 신빈, 환인, 통화, 유하 등 현에서 한인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그리고 총사령부를 왕청문에 설치하며 金學奎를 參謀長으로 임명하고 전군을 5개 師(때로는 路라고도 불렀다)로 고치고 朴大浩, 韓劍秋, 趙化善, 崔允龜, 鄭光培 등 5사람을 1∼5사의 師長으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새로 모집한 전사를 각사에 보충시켜 대오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번 회의는 조선혁명군이 적극 주동적으로 중국군대와의 연합항일을 결정하였고, 전문인원을 파견하여 중국항일군대와의 연락을 책임지웠다.註 021
3) 민중자위단의 성립
9·18 사변 이후 중국 애국지사 王彤軒은 旺淸門에서 ‘農民自衛團’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군사훈련 인재가 결핍했기에 王彤軒은 친히 조선혁명당총부에 가서 한국 친구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梁荷山, 梁瑞奉 등은 자신들 역시 총탄과 군사인재가 결핍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국 친구의 애타는 마음을 돌보기 위하여 힘닿는 敎官을 파견하여 ‘농민자위단’을 훈련시켰고 크고 작은 총 20여 자루와 탄약을 선물해 주었다. 이 두갈래 무장은 왕청문에서 연합군을 조합하여 ‘민중자위단’을 건립 하였다. 민중자위단의 성립 정황은 당시 신문에 이렇게 기재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민중자위단은 아직 통일의 지휘기구가 성립되지 못하였다. 각부의 지휘권은 역시 원래의 군사두령손에 있었으며, 전투 중에서 서로의 배합을 위하였었다.
4) 四舖炕誓師-첫 전투의 승리
민중자위단이 성립된 후 대오를 계속 확대하기 위하여 또 항일실력을 가강하기 위하여 梁瑞奉은 王彤軒에게 柳河縣 四舖炕에 있는 ‘大刀會’ 두령 梁希夫를 방문하여 연합항일을 동원하게 하였다. 梁希夫(원명 梁錫福)는 산동성 曹縣사람이었다.註 023 일찍부터 민간단체 聖公會(大刀會의 한개 派이다)에 가입하여 실패후 통화 臨江일대에 유랑하며 생애를 유지하였다. 1928년 통화지구(大刀會)에 反帝·反軍閥 폭동이 폭발되자 梁希夫는 참가하였고 法師(군사 두령)로 추천되었다. 실패후 柳河四舖炕에 避居하였지만 역시 숨어서 농민들에게 무예를 傳授하였다. 1931년 12월, 梁瑞奉이 四舖炕에 가서 梁希夫를 뵙고 그를 조선혁명군전사에게 무예를 전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梁希夫도 제자를 모집하여 항일을 준비하였기에 시간을 내지 못하여 요청대로 왕청문에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연합항일의 마음은 통하여 내일의 공동의 큰사업이 약속되었다. 그후 梁瑞奉·王彤軒 등이 또 다시 四舖炕에 왔기에 梁希夫는 매우 기뻐하였다. 당시의 梁希夫는 이미 武術隊 500餘 名을 聚集하여 비밀리 訓練에 종사하였다. 이어서 3개의 항일역량이 연합하여 공동히 일본놈에 저항하는 것으로 상의되었다.
四舖炕회의 이후 梁瑞奉·王彤軒은 왕청문으로 돌아갔다. 王彤軒은 또 조선혁명군 참모장 金학규와 같이 항일지사를 연락하기 위하여 당시 동변보안사령부 제1단 제2영 營長 李春潤을 만나려 新賓縣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두쪽은 “서로 만나 의기 투합되더니, 마침내는 同志가 되었다.” 李春潤은 “東邊 各縣軍警은 서로 비밀리 연락하다가 일단 시기가 성숙하면 곧 의병을 일으켜 抗日하고 그때 당신들의 참가를 환영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또 王彤軒 등에게 확실한 소식에 의하면 일본군과 僞군이 가까운 몇일에 왕청문으로 진공하니 민중자위단 쪽에 일찍 준비하기 바란다고 알려주었다. 王·金 두 사람은 왕청문에 돌아가 梁荷山, 梁瑞奉에게 보고한 후 즉시로 민중자위단은 속히 四舖炕으로 이동하며 梁希夫의 ‘大刀會’와 회합하여 日僞군의 움직임에 행동을 취하자고 상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못해 일군은 과연 신빈·통화·환인·유화 4개현의 경찰대에게 왕청문을 “進剿”하라고 명령하였다. 형세는 이미 뚜렷이 알려졌었기에 민중자위단은 항일의 깃발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3월 6일 민중자위단은 梁希夫의 ‛大刀隊’와 2,200여 명이 四舖炕에서 항일을 선서하고 ‘遼寧民衆自衛團’으로 이름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王彤軒을 사령, 梁瑞奉·梁希夫를 부사령으로 추천하고 통일지휘기구를 건립하고 원래의 농민자위단, 조선혁명군, 大刀隊는 여전히 제 각각의 영도관계를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리고 또 요녕 민중자위단은 신빈으로 다시 쳐들어 갈려고 선서하였다.
3월 11일 요녕민중자위단 주력이 陡嶺에서 신빈현의 위경찰부대와 마주쳤다. 연합군은 위경찰부대를 격퇴하고 승기를 돋궈 永陵街로 전진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총 73자루를 획득하였다. 僞新賓政府는 奉天省당국에 급히 전보하여 지원을 요구하였다. 당국은 僞軍 董國華·邵本良 等部의 3,000여 명을 구원하려고 보냈다. 3월 21일 이 구원 부대가 昌圖伙洛에 도착했을 때 연합군의 伏擊에 맞았다. 傷亡이 매우 엄중하였다.註 025 이번 전투에서 통계를 내니 日人 小原 1人, 僞軍連長 1名, 排長 1名, 士兵 20餘 名, 我軍 參謀長 王家訓 및 軍士 梁福陣이 사망하였다.註 026 요녕민중자위단은 첫 싸움에 큰 승리를 쟁취하고 王彤軒은 즉시 桓仁현에 요녕 민중자위군 성립대회에 참석하려 가고, 梁瑞奉·梁希夫는 부대를 왕청문에 끌고가 休整하였다.
2. 중한 항일부대의 요녕 민중자위군 가입
1) 요녕민중자위군의 성립
于芷山과 그의 부하 제1단 단장 姜全我가 공연히 일본놈의 개다리로 된 후, 애국심 있는 제1단 부단장 唐聚五가 변복하여 北平(현재 북경)에 살며시 들어가 張學良 장군에게 동변도의 군사형세를 보고하고, 于·姜 두 반역자와의 관계를 끊는 결심을 내리고 북평에 남아 張장군에게 効力하겠다고 하였다. 장학량은 唐氏를 위안하고 칭찬하였으나 북평에 남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를 원지방에 돌아가 각 현의 군경이 반역자와 관계를 끊고 공동으로 항일할 것을 연락하며 기회봐서 동변도를 귀복하게 하였다. 장학량은 또 唐聚五를 省防 제1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원래의 단장 姜全我의 위치를 대신하게 하였다. 唐은 제1단 제1영 주착한 환인현에 돌아간 후 즉시로 단장직무에 나서서 선서하고 동변도 각현 현장, 공안국 국장과 연락하여 항일을 준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東北民衆救國會 위원 黃宇宙는 그 회의 파견을 받고 또 장학량의 친필 ‘手諭’와 그 회의 위임장(委任狀)을 가지고 동변도로 왔다. 黃과 唐이 만난 후 장학량의 신임에 어긋나지 않고 하루속히 항일할 결심을 표시하였다. 黃이 돌아간 후 동북민중구국회는 또 선후로 20여 명의 군정간부를 보내어 唐聚五의 항일준비를 도와 주었다. 1932년 2월 동북민중구국회 상무위원이자 이름있는 애국교육가 車向忱이 다시 환인에 와서 唐과 항일에 관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을 상론하였다. 준비공작은 이미 성숙되었다. 그래서 唐聚五는 각파 대표에게 전보를 보내어 3월 21일에 환인에서 회의를 열기로 통지하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왕청문에 있는 王彤軒·梁瑞奉 등이 요녕민중자위단 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참가하기를 환영한다고 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혁명군도 參謀長 김학규를 환인현에 파견하여 唐聚五와 회견시켰으며 分工合作의 원칙아래 민족·국적 등을 가르지 않고 공동으로 항일공작을 책임지자고 商定하였다.
3월 21일 환인·통화·관전·신빈·임강·집안·무송·휘남·봉성·수암 등 각현 대표 31명이 환인에 집중되었다. 王彤軒은 전투 후에 참가하러 왔다. 이 회의에서 ‘요녕민중구국회’를 성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구국회 아래 정치위원회·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王育文이 담임하고 각현 현장이 위원이며,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唐聚五가 담임하고 각현 공안국장이 위원이었다. 또 요령민중자위군을 성립하고 唐聚五가 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다. 요녕민중자위군 총사령부 아래는 19개의 路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요녕민중자위단이 11로군으로 편성되었고, 王彤軒이 사령, 梁瑞奉·梁希夫 등이 지휘를 협조하게 하였다.
4월 21일 요녕민중자위군은 桓仁縣城師範學校에서 就職 誓師식을 지냈다. 그 당시의 盛典은 참석한 자가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天晴氣朗 日麗風和 民衆皆扶老携幼 肩摩踵接 自黎明直至平旦 爭先恐後 奔走若狂 街巷皆滿 圍會場數十匝 尙蜂屯蟻聚 絡繹不絕 內有朝鮮人數百 亦來參加.
오전 10시, 예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唐聚五의 연설이 있었다. 이 군대의 항일 목적을 보고 하고 일본군의 침략죄행을 폭로시켰고, 연설 중에 격동할 때는 칼을 뽑아 오른손 손가락을 피내여 혈서 “殺敵討逆 救國愛民”을 써서 全場에 보여주었다. 唐뒤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여 연설하였는데 한인교포 대표는 아래와 같이 연설을 하였다.
회의 이후 唐聚五 등은 전국에 誓師선언 전보를 보내고 〈第1號 安民布告〉와 〈第2號 軍法布告〉를 부쳤다. 이에 의하여 梁瑞奉은 왕청문 총부에서 조선혁명군 각사 師長 회의를 열고, “현재 우리는 요녕민중자위군 성원이기에 자위군에서 내린 일체명령은 반드시 준수하고 복종하여야 하며 절대로 위반해서는 안된다. 어긋나면 군법에 의해 처리한다”라고 지적하였다.
2) 조선혁명군
조선혁명군의 일부는 李春潤부에 편입하였다. 환인誓師와 동시에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 司令 李春潤은 다음과 같이 제출하였다. “이 路는 원래의 省防軍 제1團 제3營의 수백명 관병이어서 세력이 약하니, 제11로군의 지원을 요구한다”. 그래서 李春潤·王彤軒·梁瑞奉·梁希夫 등의 협상에 의해 원 梁希夫의 ‘大刀隊’와 조선혁명군 제4사 趙化善 부대를 제6로에 편입하며 趙化善부를 조선특무부대로 고치고 원 제4사 사장 趙化善을 특무부대 대장으로, ‘大刀隊’를 무술대로 고치고 대장은 역시 王彤軒이 겸임으로 하였다.
3) 조선혁명군 각부가 요녕민중자위군 각부와 제각기 연합군으로 형성
1932년 5월 초 조선혁명군은 參謀長 金學奎를 파견하여 通化의 唐聚五 총사령을 만나게 하였다. 회견기간 두쪽은 진일보의 합작을 위하여, 또한 제각의 전문을 발휘하기 위하여 동변도 각현의 조선혁명군을 요녕민중자위군 각로에 편입하게 하였다. 이름을 朝鮮特務隊로 고치고 最前綫作戰에 배치하였다.註 028 동년 6월 초 梁瑞奉은 唐聚五의 요청에 의해 통화에 가서 요녕민중자위군 총부에 조선특무부대 사령부를 설치하고 梁瑞奉이 사령을 담임으로 상정되었다. 5월 5일에는,
라고 하였다. 이 협의에 의하여 梁瑞奉은 조선혁명군이 조선특무대로 고쳐진 사령부를 지휘하며 그 아래 8개의 특무대는 요녕 민중자위군의 8개로군에 분치되어 있는 것도 포함하였다. 그 중에 趙化善部가 이미 제6로군에 편입된 이외 文英燦部가 제5路軍, 金光玉部가 제16로군, 崔允龜(崔元龍) 部는 역시 제11로군에 남겨져 있으며 그들은 각 조선특무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혁명군 李天民·李希元·趙玉浩 등의 部는 제6로군 무술대에 가입하여 이 부대의 실력을 크게 하였다.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소재지(왕청문)에 文武淸部 警衛를 설치하였다. 부대를 다시 조절한 이후에도 조선혁명군 주력은 역시 대부분이 신빈현 내에 집중되고 있었다.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군(李春潤부), 제11로군(王彤軒부)과 같이 신빈현 내에서 전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梁瑞奉도 조선특무대 사령부를 신빈에 이사하여 李春潤·王彤軒 등과 같이 中韓 항일부대를 건립하여 같이 적들과 싸워 휘황한 성과를 창조하였다.
3. 주요한 전투성과
환인 선서후, 소식이 퍼지자 日本關東軍司令部에서는 인차 괴뢰군과 경찰에 명령을 내려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에 中朝聯合部隊는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전투는 통화, 신빈 두 곳에서 먼저 전개되었다.
1) 通化保衛戰
1932년 4월 27일, 사카이 히로지(酒井碩二)의 인솔하에서 日軍 260餘名이 輕重機槍 20餘 架를 휴대하고 迫擊炮 4門, 輜重車 40餘 輛으로 瀋海路山城에 하차하여 通化현으로 전진하였다.註 030 이번 행동은 명의상으로는 일본영사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통화를 점령할 욕심이었다. 16로 사령 孫秀岩은 16로 自衛軍 장병들을 이끌고 朝鮮革命軍 金光玉部와 함께 적을 맞받아 나갔다. 이달 29일, 손수암은 于得勝團과 김광옥부를 통화현 北過河道子 북단의 고지에 배치하고 張思江 독립 제2영을 과하도자 西山에 배치하여 吉秉坤 독립 제3영과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 이달 30일, 오전 10시에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敵兵大部隊在機槍大炮掩護下 節節逼近 我軍勇氣百倍 唯武器不良. 雙方激戰7小時 前仆後繼 肉搏數次 敵棄輜重車輛 退據山上 掘壕筑壘.
5월 1일 새벽, 적병은 수차 대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격퇴되었다. 적들은 사상자가 늘어나고 기가 꺾인데다가 포장마차마저 아군에 노획된 후 급양이 따라가지 못했고 산위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물까지 단절되어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게 되자 적들은 몇몇 농민을 붙잡아 그들더러 산아래 내려가 손수암에게 화해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 손수암은 ‘평화담판을 허락한다’고 표시하였다. 이에,
戰後, 쌍방의 협의에 따라 통화주재 일본영사관 인원 및 일본교민을 경외로 내보내고 통화보위전은 초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 新賓保衛戰
1932년 4월 하순, 봉천 괴뢰경비 사령 于芷山이 괴뢰경비군 4개단을 지휘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신빈을 진공하였다. 한 갈래는 동변괴뢰보안사령부(爲東邊保安司令部) 제3단 董國華部와 游擊大隊 邵本良部가 청원현에서 출발하였다. 다른 한 갈래는 동변괴뢰보안사령부 제2단 田德勝(子厚)부와 기병단 王殿斌部가 南雜木에서 출발하여 신빈을 협공하였다. 遼寧民衆自衛軍 방면에서는 이춘윤부의 제6로와 그 지휘를 받도록 배치한 양세봉 등 부의 조선혁명군이 연합하여 적과 맞섰다. 이에 전 동북을 들썩케 한 신빈보위전이 2개월이란 긴 시간을 걸쳐 진행되었다.
(1) 제1차 신빈보위전(1932.5.2∼1932.5.7)
① 新開嶺 매복습격 전투
신개령은 이번에 적들이 신빈을 진공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었다. 이춘윤은 사전에 武術隊, 衛隊營 제4連, 朝鮮特務隊를 이곳에다 매복시켰다. 5월 2일, 전덕승·왕전빈이 거느린 보병·기병이 매복권에 들어서자 매복해 있던 아군은 돌연적으로 진공을 들이대었다. 적군은 정예한 무기를 턱대고 기를 쓰고 저항하였다. 전투는 아침부터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적들은 버티어 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적들은 사상자가 백여 명이었고 아군 역시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보총 30자루, 박격포 한문, 중기관총 두정, 탄알 수천발을 노획하였다. 이날 밤, 자위군 각 부는 명령에 의해 九龍眼으로 철수하였다.
② 羊祭台 저격 전투
5월 3일, 왕전빈·전덕승은 병력을 나누어 永陵街를 증원하였다. 왕전빈부의 기병단이 구용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자위군의 매복 습격을 받았다. 적들은 놀라 갈팡질팡하면서 저항하는 듯 하다가 뿔뿔이 후퇴하고 말았다. 자위군은 추격하지 않고 명령에 의해 新賓老城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전덕승부가 양제대에 이르렀을 때 양세봉이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조선혁명군 1부와 자위군 6로 사령부 衛隊營의 두개 連이 갑자기 적군에 불벼락을 안겼다. 급해맞은 적군은 급기야 木奇村으로 철퇴하고 양세봉은 부대를 인솔하여 신빈노성으로 철수하였다.
③ 永陵 전투
5월 3일, 다른 한 갈래의 괴뢰군 邵本良部는 영릉을 진공하였다. 교활하고 완고한 소본량은 일본군이 뒷받침해 주는 것을 턱대고 이악스레 공격하였다. 영릉가를 지키고 있던 자위군 6로 위대영 소속 두개 연과, 방금 편성된 두개 영의 약 3,000여 명 병사들은 6로 사령 이춘윤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침착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일주야의 격전을 거친 쌍방은 모두 사상자가 있었다. 4일 저녁, 이춘윤은 부대를 인솔하여 신빈노성으로 철수하여 먼저 도착한 양세봉부와 만났다.
이상의 전투를 통해 적들의 예기를 꺾고 여유작작하게 병력을 收縮하는 목적에 도달하였다.
④ 老城激戰
신빈노성은 영룡과 신빈현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세가 험하다. 이곳은 괴뢰군이 이번에 신빈현성을 진공하는데서 반드시 쟁취해야 할 곳이다. 자위군 각 부는 신빈에 집결한 후 인차 이춘윤의 지휘하에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다그쳤다. 이춘윤은 우선 명령을 내려 조화선이 인솔하는 조선특무대로 하여금 皇寺鎭 부근에 매복하였다가 노성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뒤로 에돌아가 진공을 들이대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이춘윤, 양세봉은 각각 주력을 이끌고 영통에서 노성으로 뻗은 도로 양측의 고지에 공사를 구축하여 침범하는 적들을 저격할 준비를 하였다. 5월 6일, 우지산은 괴뢰군 3단을 지휘하여 노성을 향하여 떠났다. 적들이 황사진 부근에 이르자 조화선부는 적의 뒷면으로부터 맹열한 공격을 들이댔고 이·양 양부는 정면에서 적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일대 혼란에 빠진 적들은 부득불 철퇴하였다. 그러나 자위군의 병력이나 무기는 열세에 처해 있었으므로 적들은 잠깐 정돈을 거친후 또 다시 진공을 개시하였다. 자위군은 진지를 고수하고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다. 노성의 민중들은 음식과 음력들을 마련하여 전선에 가 중조항일장병들을 위로하는 한편 부상병들을 제때에 후방에 모셔다 치료받게 하였다. 그 정경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군민은 온종일 악전고투하다가 탄약이 떨어지게 되어 부득불 전투를 그만 두고 환인현 二戶來村으로 철수하였다. 노성, 신빈은 잠시 적들에 빼앗겼다. 이번 전역에서 적 소좌참모 劉芷藩, 上尉連長 한 사람, 중·소위 각각 한 사람을 격사하였고 적군 사상자가 근 백명이었다.註 032 자위군 역시 사상이 중하였다. 이 달 7일, 우지산이 인솔하는 괴뢰군은 신빈에 뛰어들어 상민들에 폭행을 가하고 마구 약탈하니 상민들의 고통은 이를 수가 없었다.
(2) 新賓反攻戰(5월 16일∼5월 25일)
중한 각 부대는 환인 이호래촌에 철수한 후, 한면으로는 부대를 휴식·정비하고 한면으로는 총사령 당취오에게 전보를 쳐 지원병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당씨는 신빈이 자위군의 南路관문이고 한국 항일부대의 주요한 근거지도 신빈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병력배치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위군 제7로 郭景珊부를 이호래촌으로 파견하였다. 이춘윤, 왕동헌, 양세봉, 곽경산은 硏究를 거쳐 각 부의 병력을 나누어 신빈현성을 연합공격함으로써 이 군사 요충지를 탈환하기로 결정하였다.
① 吳家堡 전투
5월 6일, 이춘윤 사령은 본 路軍 제16단과 조선특무 1소대를 인솔하여 예정 계획에 따라 신빈으로 떠났다. 부대는 吳家堡子 이북 지구에 이르러 괴뢰군 1부와 맞다들었다. 적들은 이미 구축해 놓은 진지를 턱 대고 고수하는 데다가 야포의 엄호까지 있었기에 중조부대는 수차 진공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사상자 30여 명이 나오고 連長 두분이 순국하였다. 이씨는 부대에 명령을 내려 길을 에돌아 縣城 남부로 전진하게 하였다.
② 東昌臺村 전투
5월 20일 아침, 괴뢰군 소본량부의 천여 명은 동창대촌 서쪽에 이르러 갑자기 중한항일부대의 역습을 당하였다. 원래 이호래촌 장령회의의 결정에 근거하여 조선혁명군 崔允龜 부와 무술대 1부의 500여 명은 이미 紅廟子에 갔었다. 그들은 소본량부가 동창대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인차 왕동헌의 인솔하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에 소본량괴뢰군은 호되게 얻어맞고 현성으로 물러갔다. 이번 전투에서 일본군 督戰官 오오쯔카도끼아쯔(大冢昔農)를 격사하고 괴뢰군은 30여 명 사상자를 내었다. 중한장병은 부상자가 18명 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왕동헌, 최윤구는 부대를 이끌고 白旗堡에 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梁布夫部 무술대와 모였다.
이상의 전투로 하여 자위군 주력은 시간을 얻게 되어,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1부를 인솔하여 신빈성북의 後倉村에 이르렀고 곽경산부도 이미 현성에 逼近하였으며, 자위군 35로 사령 李春光(이춘윤의 친동생)도 鳳城에서 달려와 신빈현 부근의 西雙廟子에 주둔하였다. 이로써 현성에 대한 남, 서, 북 삼면 포위의 태세를 갖추었다.
③ 縣城 포위공격
우지산은 자위군이 결심코 현성을 격파하려는데 비추어 5월 21일 기병 1단을 끌어다 신빈수비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원래 있던 보병 3개단을 합쳐 약 5,000여 명이 되었다. 이달 22일 저녁, 자위군 각 부에서는 현성포위전투를 개시하였다. 소본량부는 요해지에 의거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일주야의 격전을 거쳐 쌍방은 모두가 비교적 큰 傷亡을 입었다. 23일 저녁, 현성을 공격하는 자위군의 화력은 더욱 맹렬해졌다. 소본량부는 시체가 지저분하게 늘렸고 소씨본인도 어깨에 부상을 입고 도망치자 남은 병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24일 오후, 왕동헌이 지휘하는 무술대와 조선혁명군 1부는 城東의 新市街를 점령하였다. 미리 조선 농민으로 가장하여 성내에 잠입해 있던 조선특무대는 조화선의 지휘하에 일제히 무기를 빼들고 우지산의 주둔지를 향해 진공하였다. 于역적은 자기 부하들이 짐승들처럼 흩어진 것을 보고 급히 명령을 내려 성밖으로 철퇴한 후 山城鎭방향으로 도망쳐 버렸다. 25일, 이춘윤은 중조연합군 각 부대를 거느리고 현성으로 개선하였다. 시민들은 깃발을 내걸고 폭죽을 터뜨리면서 그들을 맞이하였고 신빈수복을 경축하였다.
중조연합부대는,
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 곽경산, 이춘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각자의 방어구역으로 되돌아갔다.
(3) 제2차 신빈보위전(6월 17일∼6월 24일)
① 老城阻擊戰
1932년 6월 17일, 일본군 히라다(平田)支隊와 괴뢰군 靖安游擊隊 1부가 南雜木역에서 내려 신빈현성으로 진공하였다. 동시에 적들은 여러 대의 비행기로 신빈성안의 民宅을 폭격하였다. 이번 폭격에 시민 40여 명이 사망하고 허다한 가게방, 개인집이 파괴되었다. 적군이 진공해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이춘윤 사령은 위대영, 무술대, 조선특무대 등 정예병을 신빈노성에 집결시켜 방어공사를 구축하게 하고 그는 소수부대를 이끌고 沿途에서 유격전으로 적들을 습격하였다. 이에 적들은 하루 저녁에도 수차 놀라고 가다간 멎곤하다보니 전진속도가 달팽이처럼 굼떴다. 이달 19일, 괴뢰군은 신빈노성에 대한 진공을 개시하였다. 자위군은 용감하게 반격을 가했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 맹렬하고 자위군 방어공사가 폭격에 파괴되었기에 부대는 사망을 감소하기 위해 撥堡溝로 철수하였다.
② 撥堡溝 매복전
적아 쌍방이 노성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춘윤은 명령을 내려 매복전에 장기가 있는 조화선으로 하여금 조선특무대를 인솔하여 발보구 부근의 도로 양측에 매복하게 하였다. 적들이 이춘윤부를 추격하여 발보구에 이르렀을 때 조화선부의 장병들은 도로 양측에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한편 이춘윤부도 되돌아서 반격을 가하였다. 난장판을 이룬 적들은 발보구를 철퇴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잠깐 숨을 돌린 후 또다시 중조항일부대에 덮쳐들었다. 쌍방은 오후 4시까지 싸웠다. 중조항일부대는 탄약소모가 너무 큰 데다 보충할 길이 없어 부득불 旺淸門으로 철수하였다. 신빈은 또다시 함락되었다. 이번 전역에서 적군의 사상자는 40여 명이었고 아군의 사상자는 10여 명이었다.
③ 현성 수복
요녕민중자위군 제6로 중조 장병들은 왕청문에 주둔한 후 정비, 보충을 거쳐 다시 신빈현성을 탈환하는 전투에 투입하였다. 6월 22일, 이춘윤은 6로군 주력을 인솔하여 신빈현성 남쪽의 王八盖山에 이르렀고 왕동헌, 양희부는 무술대를 이끌고 현성동쪽의 白旗堡村에 이르렀으며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1부를 거느리고 현성북쪽의 後倉村에 이르렀다. 4월 23일 동틀 무렵, 중조항일부대는 세 곳에서 동시에 진공을 들이대어 재빨리 성벽을 돌파하고 성내에 진입하여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었다. 점심때 쯤 하여 적들은 버티지 못하고 괴뢰군사령 우지산의 인솔하에 淸原으로 도망쳤다. 항일군은 一面坡까지 추격하여 적들과 또다시 교전하였다. 24일, 중조항일부대의 각 부는 개선하여 인민들이 길거리에 나와 환영하는 열열한 분위기 속에서 신빈현성으로 들어왔다. 제2차 신빈보위전은 승리를 거두었다.
두달에 가까운 신빈보위전에서의 중조항일부대의 연합작전은 언론계의 호평을 받았다.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하고 있다.
두 차례의 신빈보위전을 전후하여 중조연합군은 상술한 전투성과 외에도 또한 각 로 자위군에 편입된 조선특무대와 소속된 각 부 자위군과의 연합작전도 있다. 예를 들면 최윤구 부의 500명은 자위군 6로, 11로와 함께 청원지대에서 괴뢰군 600여 명과 10여 일간 격전을 벌여 적 괴뢰장병 80여 명을 살상하고 적들을 격퇴시켰다. 김광옥부 400여 명은 자위군 16 와 함께 집안, 임강지대에서 일본 괴뢰군 5,000여 명과 대결하여 30여 일간 격전을 벌인 끝에 적들을 섬멸하였다. 文英燦부는 자위군 제5로와 함께 환인 大野河 지대에서 괴뢰군 약 5,000명과 대결하여 반달동안 싸워 적들을 격퇴시켰다. 이와 같은 사실이 많다. 얼마 후, 7월 하순에 최윤구, 조화선은 2영을 인솔하여 자위군 1부와 함께 통화 快大茂子에서 적 80여 명을 격사하였다.
동년 8월 7일, 조화선 특무대 300여 명과 自衛軍 800여 명이 淸原縣 馬山衛子에서 일본군(500여 명)과 부딪쳤다. 치열한 전투를 거쳐 적들을 격퇴하였다. 적들의 死傷이 매우 엄중하였다(죽은 자 36명, 상한 자가 퍽 많았었다).註 036
3) 조선혁명군과 자위군 餘部의 연합작전
中朝聯軍이 어깨걸고 항일하여 부단히 승리하고 있을 때 자위군총사령 당취오가 통화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8월 9일 회의를 시작하여 5일 걸렸다.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로는 각 路 軍司令 및 총사령부처 이상 군사간부였는데 양세봉은 조선특무대 총대표의 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자위군의 수월에 달하는 악전고투로 하여 활동범위가 대체로 결정되고 있는 정황에 비추어 회의에서 수요에 따라 각 로군을 다시 지구별로 7개 방면군으로 편성시켰다. 이춘윤, 손수암, 王鳳閣, 部鐵梅, 張崇周, 곽경산, 劉景文 등을 각 방면 군의 총사령으로 위임하고 조선특무대는 계속 부근 각 방면군과 각 로군과 배합작전하기로 결정지었다. 원래 錦州에 설치한 요녕성정부는 당시 금주가 함락된 연고로 하여 다시 통화에 항일하는 요녕성정부를 성립하고 당취오를 代理省 政府主席으로 할 것을 국민정부 및 장학량에게 청구하였다. 회의에서 요녕민중자위군은 주요한 도시를 탈취하고 적들의 교통 운수를 파괴하고 瀋海철도를 점령하는 등 일본침략군과 괴뢰군에 대하여 재빨리 새로운 진공을 진행할 것을 결정지었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조선혁명군의 각 특무대들은 요녕민중자위군의 여러 부대와 배합하여 주동적으로 출전하여 무순, 집안, 관전, 환인 등 지역의 전투 가운데서 중요한 돌격대적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일본 관동군도 대량적으로 병력을 집거시켜 동변도에 대하여 토벌을 실시하였다. 1932년 9월부터 일본 관동군은 점차적으로 일본군 高波여단, 服部여단, 茂木여단과 같은 강대한 부대와 廖弼宸, 姜全我, 董國華 등 괴뢰군부대 그리고 비행대대, 야포대대 까지 3만 이상을 헤아리는 병력을 집거하여 동북도지구의 중조항일군에 대하여 ‘포위토벌’을 가하였다. 동년 10월 상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은 동변도에 대한 포위를 끝내고 10월 11일부터 공격을 가하였다. 적들의 행동이 비밀적이고 신속한 탓도 있지만 자위군 각 부대에서 방어를 소홀히 한 탓으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의 여러 부대들은 아주 빨리 항일유격구에 돌진해 들어왔다. 비록 자위군이 창졸하게 응전했지만 많은 진지를 잃게 되었다. 자위군 6로 중조항일지사들이 피로써 탈취한 신빈성은 10월 13일 또 적들에게 빼앗겼다. 6로 사령 이춘윤은 힘이 모자라서 鳳城으로 후퇴하였다. 15일, 일본군이 통화에 들어서자 자위군총사령 당취오는 총부의 관병을 거느리고 撫松으로 후퇴하였다. 후에 당취오는 化裝하여 北平에 잠복해 들어가 장학량에게서 述職을 하였고 나머지 각 방면군과 각 로군의 주요한 지도자 張宗周, 孫秀岩, 包景華, 林振靑, 郭景珊, 이춘윤 등은 한달좌우 견지하였지만 작전의 실책으로 하여 선후로 부대를 떠나 북평 혹은 熱河로 떠났다. 제11로사령 왕동헌은 전패한 후 포로당하고 그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오직 등철매, 왕봉각, 徐達三, 劉景文의 각 로가 아직 원래의 建制를 보존하였는데 분산하여 유격전하는 전술을 실시하여 항일 투쟁을 견지하였다.註 037
자위군이 엄중한 실패를 당한 사실과 투쟁환경이 극히 악화해진 정세는 부대 관병들의 사기에 영향을 주었다. 양세봉은 軍心을 안정시키고 계속 항일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왕청문 依木樹村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친히 회의를 주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다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관계를 천명하고 高爾虛를 계속 조선혁명당의 수령으로 받들 것을 확인하고 金東山을 國民府總領으로 임명하였다. 회의에서 조선혁명군 칭호를 회복시키고 양세봉이 계속 총사령으로, 朴大浩는 부총사령으로 결정지었다. 총사령부 밑에 3개 방면군을 설치하고 韓劍秋, 崔允龜, 張明道 등을 각 방면군 사령으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조선혁명군과 中國抗日義軍은 계속 연합하여 항일하는데 다만 연합작전의 방식상 더욱 활성할 뿐 즉 配合的 작전의 방식을 더욱 많이 취할 것을 다시 천명하였다.
依木樹회의 후 양세봉은 본부 조선혁명군에서 여러 곳으로 간부를 파견하여 자위군의 餘部와 연락을 하였다. 동년초부터 동년 8월동안 조선인민혁명군과 자위군의 여부와 연합작전한 주요한 승리는 다음과 같다.
① 4월 8일, 일본주재 東豊縣 警務指導官인 橫山貞三이 괴뢰경찰들을 거느리고 縣 경내에 있는 猴石鎭을 포위토벌하려 했는데 자위군 6路 제7旅 周保升, 19로 제3려 蘇子餘, 조선혁명군 韓劍秋부대 등 약 3,000여 명의 연합반격으로 하여 橫山부대 60여 명을 소멸하고 괴뢰경찰대의 잔여부대는 망칙하게 뿔뿔이 도망쳤다.
② 동년 5월 10일, 조선혁명군 韓劍秋부대와 周保升, 소자여부대의 일부 사람으로 모인 천여 명이 동풍현 四平街를 습격하여 일본군 소대장 木森 등 관병 10여 명을 소멸하였다.
③ 7월 8일, 자위군의 여부와 조선혁명군이 신빈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기재가 있다.
자위군 왕봉각의 소속부대 제19로 第2支隊 司令 趙金山과 混城 第3旅 旅長 蘇子餘는 韓國同志 梁瑞奉 등과 같이 新賓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그들은 하루동안 깃발을 꽂은 후 다시 퇴각하였다.註 038
④ 7월 하순, 조선혁명군 趙化善부와 自衛軍 新編 제4로 李春光부의 特務團이 연합하여 鳳城 龍王廟에 있는 일본군과 괴뢰군을 습격하여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혁명군은 또 소부대를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 조선경내의 일본군 거점과 군사설치를 습격하게 하여 항일의 영향을 확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 침략당국은 당황하였다.
4. 尾 聲
1934년 후에 들어서서 동변도의 요녕민중자위군여부와 기타 항일의용군은 이미 관내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타 지구와의 연락도 중단되고 있어 적후에서 고군작전하는 곤경에 이르렀는 바 만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는 점차 발전장대하여 陸續 통일된 東北人民革命軍과 抗日聯軍이 조성되었다. 항일무장투쟁의 시련과 중공 항일민족통일 전선정책의 감화력으로 하여 계속 항일을 견지해온 각종 형식의 抗日義勇軍 餘部는 육속 동북인민혁명군(후에 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함)을 따르게 되어 어떤 부대는 직접 동북인민혁명군의 편제에 편입(원 요녕민중자위군 제9로 包景華部의 餘部)되고 어떤 부대는 비록 편입하지 않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楊靖宇部와 配合作戰(왕봉각, 등철매 등의 部가 이러함)하였다. 이런 정황하에 조선혁명군 양세봉부도 상응하게 연합항일의 범위를 확대하여 기타 항일의용군여부와 연합작전하는 동시에 점차 양정우사령이 지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연락을 가졌다.
1934년 봄, 양세봉은 신빈현 雙砬子에서 회의를 열고 국민부의 이름을 ‛朝鮮革命軍政府’로 고쳤다. 金東山은 계속 총령에 임명하고, 金浩石은 군사위원장에 임명하고, 양세봉은 계속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임명한다고 결정지었다.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조선혁명당과 군대는 반드시 오랫동안 발을 붙일 수 있는 항일근거지를 창건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진일보 중국항일부대와의 연합을 확대하여야만이 철저히 항일할 수 있고 조국을 광복 시킬 수 있다. 회의에서 원래의 조선혁명군 3개 방면군을 3개 師로 개편시키고 원래 각 방면군 사령들이 해당 사장으로 되었다.
쌍립자회의가 있은 후 양세봉은 인차 磐石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연계를 맺고 동북인민혁명군과 연합작전할 염원을 표시하였다. 그후 인민혁명군 제1군 사령 楊靖宇가 李迎春, 王吉人을 신빈으로 파견하여 선후로 四道溝와 大荒溝에서 두차례나 양세봉 총사령을 만나 그의 연합항일에 관한 의견을 찬동한다는 양정우의 말을 전달하였다. 얼마 후에 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 師長 韓浩(조선족)가 부대를 거느리고 신빈에 와서 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이에 이런 두갈래의 항일 勁旅는 신빈에서 호상의존하고 호상 배합작전하는 기세를 이루었다. 당시 반공색채를 띠고 있는 신문과 잡지까지도 이런 연합국면에 대하여 흥분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선혁명군은 동북인민혁명군과 기타 항일의용군 여부와 연합하여 유격전 전술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을 타격하였다. 그 주요한 승리는 다음과 같다.
1934년 5월 6일, 조선혁명군 제2사와 蘇子餘부가 연합하여 통화현 영거부(英額布)촌의 괴뢰군 自衛團을 들이쳐 여러 명이나 살상시켰다.
동년 6월, 조선혁명군 제1사는 砬蓬溝에서 일본군 한개 중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중대장 등 3명을 죽였다.
동월 조선혁명군 2사 1부는 신빈 珍珠嶺에서 일본군의 군용차를 습격하여 군차 1대를 불사르고 일본군 20여 명이나 소멸하였다.
동년 7월, 조선혁명군 500여 명은 양세봉 총사령의 인솔하에 통화현 快大茂子에서 일본군 기병 150명, 보병 200명과 치열한 싸움을 거쳐 적 수십명을 소멸하고註 041 기관총 1대, 보총 50자루를 노획하고 적을 격퇴시켰다는 등등의 사실들이 있다.
동년 9월 18일, 山林隊두목 壓東洋은 조선인 친일파 앞잡이 동변도 괴뢰유격대두목 朴昌海의 시킴을 받고 ‘연합항일’의 간판을 걸고 환인현 北甸子屯 조선혁명군주재지에 들어가 기만 설교하고 양세봉을 小荒溝지구로 유인하였다. 이때 사전에 소황구지구에 매복하고 있는 박창해가 양세봉이 도착하자 마자 깜쪽 총을 쏘아 양세봉을 살해하였다.
註) 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