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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나. 완안부의 흥기와 윤관의 북정
 문종 27년(1073)을 고비로 고려와 여진의 평화적인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고려을 북방에 평온상태가 유지되었으나, 숙종 말기에 이르러 북쪽 국경지대는 다시 소란하게 되었다. 이는 여진의 신흥세력인 완안부의 등장과 그들의 남하로 인한 것이었다.
 북만주의 松花江 지류인 아르치카(阿勒楚喀)강 유역에서 일어나 동남쪽으로 세력을 성장시켜 나간 완안부의 시조는 고려인 혹은 신라인으로 전해지고 있다.註666 완안부가 여진족 가운데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추장 烏古迺(景祖;우구나이) 때부터지만 고려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기는 그의 아들인 盈歌(穆宗) 때부터이다.註667 영가는 완안부의 기초를 확립시킨 오고내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되자 주변의 여진부족들을 통일하고 지금의 간도지방의 布爾哈圖河·海蘭河 방면의 지역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시 남하하여 曷懶甸〔가란전〕지역까지 세력이 미치게 되었다.
 가란전세력은 두만강유역으로부터 고려장성의 동북지역 부근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듯한데 이 때 동남하하려는 완안부의 세력과 이를 방어하려는 고려가 가란전을 둘러싸고 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와 완안부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것은 영가의 조카인 오아속이 石適歡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입하게 한 숙종 9년(1104) 정월부터였다.
 가란전지역의 여진인들은 본래 고려에 내부하여 고려조정의 지시를 받고 있었는데 완안부가 강성해지면서 가란전지역으로 세력을 뻗쳐오자 그들 중에 점차 완안부와 내통하여 내부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그것을 알고 사람을 시켜 완안부와 내통하는 여진족을 막으려 하였는데, 숙종 8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간 영가의 족제인 斜葛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영가를 움직여 석적환을 보내어 가란전의 여진인들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영가가 죽자 중지되었다.註668 그러다가 오아속이 그 뒤를 이어 세력을 잡자 곧 사알이 하고자 했던대로 실천에 옮겨 석적환에게 군사를 주어 가란전지방의 여진인들 중 고려에 복속했던 7개 촌락, 즉「叛亡7城」을 치게 하니 마침내 완안부 여진이 定平의 장성 부근까지 출몰하게 되었다. 이렇듯 완안부여진이 기습적으로 고려의 기미주 점거를 기도함으로써 고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약 3년간에 걸쳐 전란을 겪어야 했다.
 고려는 이러한 완안부의 가란전침략에 대한 대응책으로 석적환의 침입이 있기에 앞서서, 먼저 가란전 여진 가운데 고려를 배반하고 완안부로 쏠린 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의할 일이 있다는 구실로 고려로 불러들였다. 그 결과 斜勒, 冶刺保 등 가란전의 관속을 강제로 억류함으로써 五水유역에 살던 여진인들이 다시 고려에 복속하게 되었다.註669
 숙종 9년(1104) 정월에 석적환의 군대가 가란전 일대를 횝쓸며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촌락을 완전히 점령하고 정평의 장성 부근까지 출몰하자 고려는 門下侍郎平章事 林幹으로 하여금 判東北面行營兵馬使를 삼고 直門下省 李瑋로 西北面行營兵馬使를 삼아 나아가 대비케 하였다. 그러나 임간 등은 공을 세우기를 서둘러 미처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를 동원하여 같은 해 2월 8일 성을 나가 석적환의 군사를 쳤으나 도리어 패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숙종은 다시 樞密院使 尹瓘으로 東北面行營兵馬都統을 삼아 출동시켰으나 대패를 당하고 겨우 화약을 맺고 돌아왔다. 임간과 윤관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정평·장성 외의 여진촌락은 모두 완안부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숙종이 두 번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대책을 묻자 윤관은 왕에게 “적의 騎兵을 우리의 步兵으로 막을 수 없었다”는 패전의 원인을 아뢰고 병마의 양성과 훈련, 특히 기병의 양성과 군량의 비축을 건의했다.註670 숙종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12월에 정규군 외에 別武班을 편성함으로써 임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 별무반은 神騎(기병)·神步(보병)와 降魔軍(승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양반·승려·이서·상인·노예 등 여러 신분층이 포함된 그야말로 거국적인 특별군대였던 것이다.註671
 그러나 숙종은 여진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듬해 10월에 죽고 예종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부왕의 유지에 따라 여진정벌군을 일으켰다. 때마침 변방으로부터 여진의 침략의 보고가 들어오자 예종은 2년(1107) 10월에 윤관을 원수로, 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17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가 동여진을 치게 하였다. 고려군은 같은 해 12원 중순에 정평에 이르러서는 그곳부터 수륙양면으로 여진의 주지인 함흥평야 이북지역으로 진격해 나갔다. 이 기습작전에서 고려군은 연전연승하여 135개의 촌락을 무너뜨리고, 5,000명에 가까운 적군을 죽이고, 포로만도 5,000이 넘는 대승을 거두었다.
 윤관은 승리를 보고하는 한편으로 여러 장수를 분견하여 정벌한 땅의 한계 를 획정하니, 동은 火串嶺에 이르고, 북은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윤관은 이 때 점령한 지역의 여러 험준한 곳에 咸州를 비롯하여 英州·雄州·吉州·福州·公嶮鎭·通泰鎭·崇寧鎭·眞陽鎭 등 9개의 성지를 축설한 다음 남방의 민호를 신축한 9성에 옮기어 살게 하였다.註672 특히 길주성내에는 護國仁王寺와 鎭國普濟寺의 두 개의 사찰까지 건립한 후 다음해 4월에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이 때 신축한 고려의 동북면 9성에 대해서는 역사상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말선초의 관찬사료에서는 두만강 북쪽 700여 리 지점에서 두만강유역 일대까지로 본 반면에,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과 근세 일본학자들은 길주 이남에서 함흥평야 일대까지로 국한하여 보고 있다.註673
 그런데 이와는 달리 고려의 기미주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지역에서 한층 북상하여 두만강 이북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고려의 기미주가 설치되었던 지역에 살고 있는 30徒(30姓)여진 가운데 두만강 하류에서 綏芬河 일대까지의 연해주에서 어로생활을 하던 骨看兀狄哈(Korgan Udike)의 거주지에 바로 공험진이 설치되었으며 함흥에서 두만강유역까지의 해안평야를 따라 함주와 영주·복주·웅주·길주 등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註674
 그리고 고려군이 북정한 뒤에 파견한 함주 大都督府使와 영주·복주·웅주·길주와 공험진의 방어사는 주현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이었던 점으로 보아 공험진 역시 일종의 영토를 소유한 행정구획으로 간주되는데, 공험진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와 訓春江·沿海州를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수북하에서 남으로는 두만강 내외까지, 동으로는 동해에서 서로는 목단강 중상류(蘇下江)까지의 광범위한 골간우디케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東國地圖≫의 모사본에 나타나는 공험진은 처음 공험진 권내에 설치되었던 여러 개의 산성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고 목단강 상류 寧古塔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였다. 따라서 여진과 경계를 획정하기 위해 세운 先春嶺碑는 수분하 상류 老松嶺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註675
 한편 고려에서는 북정 뒤에 9성지역에 무려 6만 9천여 호의 徙民을 실시하였다. 이렇듯 대대적 인원을 사민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내적인 힘의 팽창을 뜻할 뿐만 아니라 국내 농토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에서 변방 여진지역의 농토를 점유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이민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던 지역은 함주에서 영주·복주·웅주·길주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공험진지역에는 불과 5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험진지역이 농업에 부적당한 데다가 수로를 통한 사민에도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여 구축한 고려의 9성개척은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여진의 끈질긴 저항 때문이었다. 토착여진은완안부세력을 끌어들여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이에 고려에서는 농업이민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9성의 환부였다.註676
 가란전의 회복을 목표로 한 완안부의 조직적인 반격전은 윤관의 개선 전후로부터 전개되었다. 그들의 공격이 가장 맹렬하였던 지역은 웅주와 길주성이었으며, 윤관도 재차 왕명을 받들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1년여나 경과하도록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이었다. 마침내 예종 4년 (1109) 5월에 이르러서는 길주와 공험의 두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고 이를 구원하러 갔던 오연총도 중도에서 여진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는 등 전세는 점차로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오아속은 반격전을 전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9성환부를 애걸해 왔으며, 길주와 공험성을 함락시키고도 9성환부를 조건으로 하는 화친을 계속 요구하여 왔다. 고려 역시 전세의 악화 외에도 수년간의 전쟁준비와 그 수행으로 인해 막대한 물자와 인명피해가 끊이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의 장기전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화친 쪽으로 국론이 기울어졌다. 마침내 예종 4년 7월에 9성의 환부를 결정하고 주둔했던 군사와 백성들을 철수시켰다.
 이 전쟁의 결말은 고려가 새로 개척한 땅에 축조한 9성의 환부와 여진의 고려경역에의 불침이라는 선에서 강화가 이루어졌지만, 고려는 모든 기미주를 잃게 되었고, 국가적 위신을 실추시킴으로써 건국 이래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고구려 고토회복이란 과업수행을 통한 북진정책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반면 완안부여진은 광역의 가란전지역을 확보하게 되었음은 물론 전 여진족을 단합시켜 고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여진은 지속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여진의 완안부는 지금까지 대국으로 섬겨오던 요에 대한 정벌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崔圭成>
註) 666
금의 시조에 대하여≪金史≫에서는 函普가 고려에서 왔다고 했고(≪金史)≫권 1, 本紀 1, 世紀),≪松漠記聞≫에서는 시조를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다.바로가기
註) 667
≪金史≫권 1, 本紀 1, 世紀 참조.바로가기
註) 668
≪金史≫권 135, 列傳 73, 外國 下, 高麗傳 참조.바로가기
註) 669
위와 같음.바로가기
註) 670
≪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바로가기
註) 671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바로가기
註) 672
≪東文選≫권 44, 表箋, 伐女眞取其地築設城池實入丁戶訖獻功表.바로가기
註) 673
이 중에서도 池內宏이 9성의 위치를 咸興平野에 한정하여 비정한 이래로 오늘까지 그의 설이 비교적 널리 인식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 고려의 국력이 千里長城 이북을 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함흥평양 일대의 古城址를 실제로 답사하여 9성을 그곳에 일일이 비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말선초의 근본사료에 대해 과학적이고 철저한 고증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특히 두만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공험진을 조선인이 조작한 僞公嶮鎭이라고 일축하고, 공험진 주위를 흐르던 蘇下江을 ‘空想의 江’이라고까지 단정하였으며 公嶮鎭의 先春嶺碑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견해의 글로는 다음의 연구가 있다.
池內宏,<完顔氏の曷懶甸經略と尹瓘の九城の役>(≪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9, 1923;≪滿經史硏究≫中世篇 2, 吉川弘文館, 1937).
津田左右吉,<尹瓘征略地域考>(≪朝鮮歷史地理≫2, 1913;≪津田左右吉全集≫11, 岩波書店, 1964).
稻葉岩吉,<高麗尹瓘九城考-特に英雄二州の遺址に就て(上·下)->(≪史林≫16-1·2, 1913).바로가기
註) 674
金九鎭, 앞의 글, 112∼113쪽.바로가기
註) 675
金九鎭, 위의 글. 112∼115쪽.바로가기
註) 676
따라서 이 9성환부는 토착여진에게 농경지를 되돌려 준 것에 불과하며, 결코 완안부에 9성의 영토권을 반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험진의 반환문제에 대하여는 공험진에 있던 骨看兀狄哈族은 농경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농업이주단을 철수할 필요가 없었으며, 따라서 공험진은 환부된 9성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본 견해가 있다(金九鎭, 위의 글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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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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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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