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부장 조병옥, 대구소요사태 경위 발표
경무부장 조병옥, 대구소요사태 경위 발표
1만여 군중과 경찰이 충돌되어 경찰서를 점거한 소동이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 1대 각지에 발생되었다. 9월 25일이후 대구에서는 40여 공장에서 파업을 단행하여 생산 각 부문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바 1일 밤중에서 2일 아침에 걸치어 파업중에 있던 노동자들과 전문중등학교 학생 및 일부 시민들이 합류된 만여명의 군중이 대구경찰서를 습격 포위하여 장시간 경찰대와 대치 격투를 한 후 드디어 2일 상오 10시에는 경찰서를 점령하고 말았다.
이로써 경찰측은 사망이 20명 부상 50명 행방불명이 30명이나 된다. 사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근 각 군에도 이에 유사한 일이 발생되어 당지 미군행정관은 계엄령을 실시하고 사태를 수습하여 경찰서만은 다시 찾아 3일부터 집무를 하고 있는데 다른 곳은 아직 폭도에 점거된 채 있어 3일 충남북도의 경찰부에서는 7백여명의 경관을 응원 파송하고 한편 韓鍾健보안국장 외 모건중위가 비행기로 현장 조사 수습차로 떠났다. 이처럼 큰 사건으로 그 진상을 중앙에서 잘 모르게 된 것은 통신관계의 지장 등인데 3일 趙경무부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였다.
“대구에서는 9월 30일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의 시위행렬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를 곧 제지하였었다.
10월 1일 파업 중에 있던 40여 공장 노동자들이 허가 받고 집회를 하였었는데 회를 끝마친 후 노동자들은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하여 만여명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개시하자 경찰은 군중과 대치하게 되어 1일은 철야하고 2일 상오 10시반을 중심하여 경찰서를 포위 한동안은 점거당한 일이 있었고 이와 아울러 인근의 다른 경찰서 지서도 무기를 강탈당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당하게 되었다. 이에 경북군정관은 계엄령을 내리어 사태수습을 한 결과 대구부내에 한하여서는 미군의 응원으로 경찰활동이 완전히 복구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른 경찰서관내의 상태는 2일 하오 11시 현재로 복구 못한 상태에 있다. 현지의 소식으로는 민중의 사상은 아직 모르고 경찰은 사망자 20명 중경상자 50명 행방불명 30명이다. 이 긴급사태에있어 3일 충남서 4백명 충북에서도 3백명이 파송되었고 韓 공안국장과 미군장교 등 4명이 비행기로 떠나서 사태수습총사령부를 두고 사태수습과 경비에 만전을 다 하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6년 10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