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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모도에서 신라 정세를 듣다
[9월] 6일
오전 6시경註 653에 무주의 남쪽 땅인 황모도(黃茅嶋)註 654의 니포(泥浦)에 도착해 배를 정박하였다. 이 섬을 또는 구초도(丘草嶋)라고도 부른다. 너댓 사람이 산 위에 있기에 사람을 보내어 잡으려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도망가 숨어버렸으므로 잡으려 해도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신라국의 제 3재상(宰相)이 말을 방목하는 곳이다. 고이도로부터 구초도에 이르기까지는 산들이 있는 섬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동남쪽으로 멀리 탐라도(耽羅嶋)註 655가 보인다. 이 구초도는 신라 육지로부터 바람이 좋은 날이면 배로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잠시 뒤에 섬지기 한 사람과 무주태수 집에서 매를 키우는 사람註 656 2명이 배 위로 올라와서 이야기하기를 “나라는 편안하고 태평합니다. 지금 당나라의 칙사가 와 있는데, 높고 낮은註 657 사람 500여 명이며 경성註 658에 있습니다. 4월 중에 일본국 대마도(對馬島)의 백성 6명이 낚시를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는데, 무주의 관리가 잡아 데리고 갔습니다. 일찍이 왕에게 아뢰었으나 지금까지 칙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무주에 감금되어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습니다.”라 하였다. 6일과 7일에는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이 없었다.
註) 653
원문에 묘시(卯時)라고 하였다. 오전 6시 전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2쪽).바로가기
註) 654
여러 본에는 황모도(黃茅島)라고 썼다.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며, 탐라도(제주)의 서북쪽에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거차군도(居次群島) 중의 한 섬이라고도 생각된다. 또한 황제도(黃苐島)는 구초도(丘草嶋)라고도 했다고 보이는데, 구초(丘草)라는 것은 곧 자초(茊草)로, 자는 “玆”와 같은 뜻이므로 즉 수풀이 우거진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동정전(東征傳)≫에는 오자초(烏茊草)라는 말도 있다. 구초도의 이름이 연유한 것이 어디인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일찍이 비슷한 음에 의거해 이것을 갈초도(葛草島)라고 본 견해가 있다(≪조선역사지리≫ 권1) 갈초는 또한 지좌(只佐) 또는 기좌(箕佐)라고도 쓰며, 현재의 거차 군도의 최동단에 위치하는 조도(鳥島)에 비정된다. 이는 방위상에서도 특별한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2쪽).바로가기
註) 655
≪후한서≫ 및 ≪삼국지≫ 동이전에는 주호국(州胡國)이라고 보인다. 신라·백제 등의 통치 하에서는 탐라라고 하였고, 또한 둔라(屯羅), 담모라(聃牟羅), 담라(儋羅), 동음(冬音), 탐진(耽津) 등이라고도 쓴다. 제주도라고 개칭된 것은 1291년(고려 충렬왕 21)이다(高橋亨, 「濟州道名考」, ≪朝鮮學報≫ 9)(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3쪽).바로가기
註) 656
초본 및 지본에는 “投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본에는 “捉”자를 자주 “投”자로 썼으므로, “捉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방전본은 이를 “放鷹”의 잘못이라고 주를 달았고, 라이샤워는 “falconer"라고 번역하였다. 아마도 응수(鷹狩)는 예부터 북방 민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행해져, 당대에는 조정에서 수렵용으로 조(鵰), 골(鶻), 요(鷂), 응(鷹) 등을 전문적으로 사육하였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응수가 성행하였는데, 그 이유로서 특히 몽고의 영향을 들 수 있다(內藤雋輔, 「高麗時代の鷹坊について」, ≪朝鮮史硏究≫) 그러나 응수의 습속은 고려 이전에도 있었으니, 특히 한국은 응수에 적당한 좋은 매를 길러냈으며, 이것이 신라의 조공품이 되었다는 것은 당대의 문헌에도 보이고, 경종 때 신라에 사신으로 갔던 환관이 응요(鷹鷂)를 사사로이 하여 견책을 당했다는 것(≪책부원귀≫ 권699), 예종의 아들 신왕(申王)이 고구려산 매를 협운아(挾雲兒)라고 이름하여 수렵 때에는 반드시 사용했다는 것 등이 알려져 있다(≪당어림(唐語林)≫ 권5)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착응인(捉鷹人)이라는 것은 매를 손에 잡았다는 이른바 응장(鷹匠)의 류일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4쪽).바로가기
註) 657
원문에는 “上下”라고 하였다. 구어로, 지위, 정도, 대략의 의미이다. 라이샤워가 “in all”이라고 해석한 것은 매우 적당하지 않다(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402쪽)(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4쪽).바로가기
註) 658
신라의 수도 경주. 오봉 원년(57) 박혁거세가 처음 신라왕으로서 이곳에 도읍했다고 전하며, 이래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935) 수도로 영화를 누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14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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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외교>숙위>파견·귀국
  • 자연>바다>섬
  • 정치>외교>인적교류>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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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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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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