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명 광개토왕릉비 (廣開土王陵碑)
소재지/출토지 中國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九華里 大碑街
연대 長壽王 三年(四一四)
크기 高6.39m、幅1~2m
서체 및 재질 隷書
주제분류 고구려|문화> 문화재> 금석문> 碑文
역주자 이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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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001001 추모왕(鄒牟王)「모두루묘지」에는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성(姓)이 고(高)이고 휘(諱)가 주몽(朱蒙)이며, 시호(諡號)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분주(分註)에서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 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추모(鄒牟)라고 하고, 이칭으로 주몽이라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 또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추몽(鄒蒙)이라는 이칭을 전한다(http://db.history.go.kr/id/sy_001_0010_0010). 『위서』 고구려전을 비롯한 중국정사에서는 주몽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670) 7월의 안승의 국왕 책봉 책문에서는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이라고 하였고(http://db.history.go.kr/id/sg_006_0020_1030),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7년(668) 10월에서는 중모왕(仲牟王)이라고 하였으며(http://db.history.go.kr/id/jm_001_0240_0560), 『속일본기』 권40 환무천황 연력 8년(789) 12월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jm_002_0410_0050). 그리고 『신찬성씨록』 권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에서는 추모라고 하였다. 이처럼 추모는 휘로서 주몽·중해·추몽·중모·도모 등의 이칭이 전해지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同音異表記]으로 이해된다.닫기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추모왕은] 북부여(北夫餘)002002 북부여(北夫餘)본문의 북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를 가리킨다. 이와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보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비교된다. 이들 사서에서는 추모왕이 북부여왕 해모수의 아들이었고, 동부여에서 출생·성장하였다고 하였다. 추모왕의 출생·성장 지역이 각기 북부여와 동부여로 달리 나오는 것이다.닫기에서 태어났는데,003003 태어났는데(出自)“~에서 나오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혹은 “출신”(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닫기 천제의 아들004004 천제의 아들「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왕의 부친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였다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닫기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005005 하백(河伯)하백은 강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및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의 주석 등에 그 이름이 확인된다.닫기의 따님이었다.006006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논형(論衡)』에 보이는 부여의 건국신화(동명신화)에서는 동명의 모친이 시비(侍婢)였다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ko_016_0020_0010).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변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의 시조모는 지모신(地母神) 내지 그와 같은 농업신으로 주목되었다(김철준, 1975,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지식산업사 ;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37쪽).닫기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탄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007007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탄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고구려 시조의 탄생과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설화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비」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국내 사료와 『위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차이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천제(天帝) 혹은 일월(日月)과 같이 하늘의 신적 존재와 연결된 부친과 물의 신인 하백(河伯)과 연결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는 『논형(論衡)』 및 『위략(魏略)』 등에서 전하는 부여의 시조 전승인 ‘동명신화(東明神話)’와 유사한 형태이다. 또 『삼국사기』에서 주몽의 왕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칭한 점도 부여의 동명신화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하였다고 본다. 고구려가 동명설화를 차용한 배경은 장수왕대까지 복속한 부여계 주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지배의 정통을 표방하기 위해서거나(白鳥庫吉, 1936,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 ; 1970, 『白鳥庫吉全集5』, 岩波書店, 370~391쪽) 경쟁국이었던 부여씨 백제 왕실에 대한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51쪽), 혹은 부여를 대신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정치적 표방을 위해서였다는 설(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85쪽) 등이 제시되었다.닫기 … 수레를 출발시켰다. [추모왕이]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008008 엄리대수(奄利大水)『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엄사수(淹㴲水)’(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엄체(淹滯)”, 『삼국유사』에서는 “엄수(淹水)”라고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y_001_0020_0150_0050) 나아가 『삼국사기』에서는 엄사수에 대해 ‘엄표수(淹淲水)’라는 명칭을 별도로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g_037_0030_0120). 또 중국 사서에서 최초로 고구려의 시조 설화를 전하는 『위서』에서는 강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 반면,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http://db.history.go.kr/id/jo_008_0010_0020_0020)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http://db.history.go.kr/id/jo_012_0010_0020_0010) 에서 ‘엄체수(淹滯水)’,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 ‘엄수(淹水)’(http://db.history.go.kr/id/jo_013_0010_0020_0010)라고 그 이름을 전한다. 이들은 모두 ‘엄(淹)’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강에 대한 다른 표기로 파악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이병도, 1996, 『삼국사기』上, 을유문화사, 329쪽), 혼하(渾河)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요하(遼河)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닫기를 경유하였다. [추모]왕이 나룻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009009 황천(皇天)천제(天帝)를 가리키며 천(天) 또는 천신(天神)의 존칭이다(『書經』 大禹謨. “皇天眷命, 奄有四海, 爲天下君”). 「모두루묘지」에서는 “일월의 아들(日月之子)”이었다고 하였다.닫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입니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소서.”010010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소서(連葭浮龜)『구삼국사』 「동명왕본기」의 “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今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 참조. 추모왕이 말한 대상은 “황천후토(皇天后土)”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天地”로 나온다. 『삼국사기』와 『구삼국사』에서 “어별부출(魚鼈浮出)”이라고 하였다.닫기라고 하였다. [추모왕의]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였다. 그러한 다음에 [엄리대수를] 건널 수 있었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011011 홀본(忽本)「광개토왕비」에서는 추모왕이 도읍한 땅을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이라고 전한다. 이외에도 추모왕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지역의 이름과 성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상이하거나 지명이 생략되기도 한다. 각종 사료에서 나타나는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료도착한 지역성을 축조한 지역비고
「廣開土王陵碑」沸流谷 忽本忽本 서쪽 산.
『魏書』 高句麗傳紇升骨城불명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卒本川 혹은 卒本扶餘(주석)沸流水 가 東明王 4년에 처음 宮室 축조
『三國史記』 百濟本紀卒本扶餘불명.
『三國史記』 地理志卒本불명(紇升骨城)‘古記’의 기록 인용
『三國遺事』 紀異卒本州沸流水 가고구려와 卒本扶餘를 동일시.
「東明王篇」不明鶻嶺.

위의 기록들 중 ‘흘승골성’에 대해서는 흘승이 본래는 ‘승흘(升紇)’이었으나 이것이 전도되어 중국 측 사료에서 ‘흘승골성’이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곧 ‘승흘골(升紇骨)’ 이란 ‘솔골’ 혹은 ‘수릿골’이 되며, 이는 졸홀(卒忽), 곧 졸본(卒本)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홀승골은 「광개토왕비」의 홀본 및 『삼국사기』등에서 나타나는 졸본과 동일한 명칭으로, ‘졸본(卒本)의 성’으로 보거나(이병도, 1959, 『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228~229쪽) ‘흘승골성’이 ‘흘본골성(紇本骨城)’을 잘못 쓴 것이며, ‘골(骨)’은 고구려의 말로 성을 의미하는 ‘구루(溝漊)’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25쪽) 홀본(졸존)의 위치는 중국 요령성 환인설이 19세기 말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제시한 이후 지금까지 통설로 수용되고 있다(那珂通世, 1894, 「朝鮮古史考=第四章 高句麗考」, 『史學雜誌』5-9, 42쪽).
닫기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012012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비문에서는 추모왕이 홀본에 도착하여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고구려 건국 세력 남하 이전에 이미 성이 존재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耿鐵華, 2004, 「高句麗紇升骨城新考」, 『北方民族』2001-2) 그러나 『위서』를 제외한다면 비문 외에도 대부분의 사료가 주몽이 이 지역에 도착한 후 성을 축조하였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서 해발 820m인 오녀산 정상에 세워진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다.닫기 [추모왕이]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천제가] 황룡을 보내니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갔다.013013 용의 머리를 디디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갔다『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재위 19년째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140).닫기
유명(遺命)을 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014014 유류왕(儒留王)고구려의 제 2대 국왕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이름을 유리(類利) 또는 유류(孺留)라고 전하며, 왕호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이었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30_0010).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루리(累利)라는 표기도 별도로 전하고 있다. 또 『위서』에서는 주몽의 아들을 여달(閭達), 손자가 여율(如栗)이라고 하였으며(http://db.history.go.kr/id/jo_009_0010_0010_0040) 『북사』에서는 이들 둘을 모두 주몽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jo_012_0010_0010_0040).닫기이 도(道)로써 치세를 진흥시켰고, 대주류왕(大朱留王)015015 대주류왕(大朱留王)고구려의 제 3대 국왕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이름을 무휼(無恤)이라고 하며, 유리왕의 아들이다. 왕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고 전하는데, 별도로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는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칭호를 부기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g_014_0020_0010). 곧 ‘대주류왕’은 『삼국사기』의 ‘대해주류왕’과 서로 같은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에 따르면 소수림왕에게는 별도로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8_0030_0010). 곧 양자가 ‘朱留’라는 칭호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를 보아 ‘주류’란 소수림의 ‘수림(獸林)’과 통하며, 곧 ‘대주류’란 ‘대수림(大獸林)’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上, 龍漢書舍, 63쪽). 또 ‘주류’란 신성하다는 의미의 ‘수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거나,(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주류는 단지 왕의 이름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28) 또 소수림왕이 ‘대(해)주류왕’에 대비되어 ‘소해주류왕’이라고 칭해진 데에서 서로 연관성을 찾아, 소수림왕대에 대무신왕이 특히 부각되었던 현상의 반영이라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9~51쪽).닫기이 왕업(王業)을 계승하였다.
17세손016016 17세손(世孫)이에 대해서는 크게 1) ‘세손’을 왕대수로 보는 설과 2) 혈연적 세대수로 보는 설이 있다.닫기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017017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경주의 호우총(壺杅塚)에서 출토된 제기에서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모두루묘지」에서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개토왕(開土王)’이라고 하였다. ‘국강상(國罡上)’은 광개토왕의 장지(葬地)를 뜻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를 넓혔다는 뜻으로서 왕의 치적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평안(平安)’ 또한 ‘광개토경’처럼 광개토왕의 훈적을 말하는 것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 업적이나(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치세시대(治世時代)’를 표현(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00~102쪽)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위의 「모두루묘지」 등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점과, 『양서』 고려전에서 광개토왕의 이름이 ‘안(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평안’을 광개토왕의 이름[諱]으로 본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50~251쪽 ;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28, 32쪽).닫기이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왕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하였다. [영락태왕의] 은택이 황천[의 뜻]에 흡족하였고, 위엄과 무력이 사해(四海)에 진동하였다. …를 쓸어 없앴고, 백성은 그 생업에 평안하였다. 나라가 부유하였고 백성이 은성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히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니, [영락태왕은] 39세에 돌아가셨다.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운구를] 옮겼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새기어 후세에 보인다. 그 말씀[詞]은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 을미(395)에018018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삼국사기』에서는 을미년을 광개토왕 4년(394)이라 하고 있다.닫기 왕은 패려(稗麗)019019 패려(稗麗)나려(裸麗)로 읽고 유연으로 보기도 한다(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2007, 『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27쪽). 그러나 대체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8년조(http://db.history.go.kr/id/sg_018_0030_0120) 및 광개토왕 원년 9월조(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30) 등에 보이는 거란으로 본다. 『진서』 동이전의 비리(裨離)( (천관우,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일조각, 521쪽), 『위서』 거란전의 필결부(匹潔部)(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54~155쪽; 武田幸男, 1979,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 『東洋文化硏究所紀要』 78, 104~109쪽), 『요사(遼史)』와 『발해국지(渤海國志)』의 비리군(碑離郡)(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30쪽), 거란의 비칭으로 보기도 한다(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 순수」,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422~423쪽).닫기가 [▨▨]인에 … 아니하므로,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였다. [왕의 군대가] 부산(富山)020020 부산(富山)『삼국지』 동이전(http://db.history.go.kr/id/jo_004_0010_0030_0100)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http://db.history.go.kr/id/sg_016_0020_0060)에 보이는 ‘부산적(富山賊)’과 관련 있어 보인다. 대릉하 상류의 구하(狗河)(이재성, 2002, 「4~5세기 고구려와 거란」, 『고구려연구』 14, 30~34쪽), 무순(撫順)의 북방(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101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닫기·부산(▼山)021021 부산(▼山)앞의 부산(富山)과 병기된 점에서 상호 관련된 장소로 추측된다. 부산(富山)을 무순(撫順)으로 보는 설에서는 그 북쪽 흥안령(興安嶺) 산맥 남단으로 추정하였다(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101쪽).닫기을 지나 염수(鹽水)022022 염수(鹽水)압록강 또는 혼강(那珂通世, 1915, 「高句麗古碑考」, 『史學雜誌』 47, 10쪽), 태자하(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23쪽), 액길탁니(額吉桌你) 염호(鹽湖) 일대인 광제호(廣濟湖)(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98~102쪽), 요하 상류(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시라무렌의 본류(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 순수」,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424쪽) 등으로 추정된다.닫기에 이르렀다. 그 3개 부락 6~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떼의 수가 매우 많았다.023023 [노획한] 소·말·양떼의 수가 매우 많았다『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30)와 같은 사건으로 추측된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우마군양’을 통해 패려는 초원에 있는 유목종족의 주거지였다고 추정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59~62쪽).닫기 이에 [왕이] 어가를 돌렸다. 양평도(襄平道)024024 양평도(襄平道)양평(襄平)은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요양(遼陽)으로, 진(秦)과 한대(漢代) 요동군의 치소였다. 양평도(襄平道)는 양평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로 파악된다. 요동성으로 가는 길로 추측하거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쪽), 양평의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요동반도를 따라 있던 길(盧泰敦, 1992, 24쪽), 양평을 중심으로 뻗은 교통로(여호규, 1995,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한국사연구』 91, 37쪽; 李成制, 2012, 「4세기 말 高句麗와 後燕의 관계 -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68, 56쪽), 고구려-졸본-양평으로 이어지는 국도(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5, 91쪽)로 보는 등 다양하다.닫기를 지나 동쪽으로 후성(候城)025025 후성(候城)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심양(瀋陽)으로 추정하거나(稻葉岩吉, 1913, 「漢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 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14~115쪽;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쪽), 양평과 가까운 지점으로 보는 견해(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5, 90쪽)가 있다.닫기·역성(力城)026026 역성(力城)『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 평주(平州)조에 요동국의 속현(http://db.history.go.kr/id/ko_023_0330_0270)으로 확인된다. 양평의 동남쪽 일대로 추정하거나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본계(本溪)로 보고(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 2, 黑龍江人民出版社, 141쪽; 李成制, 2012, 「4세기 말 高句麗와 後燕의 관계 -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68, 58~59쪽), 후성(候城)-역성(力城)-북풍(北豊)을 거쳐 국내성으로 귀환하는 루트를 상정하기도 한다(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 91쪽).닫기·북풍(北豊)027027 북풍(北豊)『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정시(正始) 원년(元年)조(http://db.history.go.kr/id/ko_022_0040_0040)를 통해 문현과 이웃한 요동 서부(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213쪽, 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요동반도 서부 해안가로 보거나(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33쪽), 요령성(遼寧省) 수암(岫巖)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2013,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영역」, 『고구려발해연구』 4, 89쪽).닫기·오비해(五備海)028028 오비해(五備海)이를 ‘요동반도 연해지방에 있는 5개의 비(備), 곧 성(城)으로 해석하거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213쪽), ‘왕비렵(王備獵)’으로 보고 ‘왕이 사냥을 준비하였다’는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4~225쪽).닫기에 와서 영토와 경계를 둘러 살피고, 전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기 때문에 조공하였는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029029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신민(臣民)으로 삼았다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 391년)’기사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한・중・일 학계에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제기되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도 신묘년조를 포함한 비문 전체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구자들마다 이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양하지만 “來渡海破”에 해당하는 구절의 주체에 대한 해석과 글자의 판독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①19세기 말에서 1950년대까지의 일본 학계에서의 논의, ②1950~60년대 남북한 학계의 논의, ③1970년대 비문조작설 논의, ④1980년대 이후 각국의 논의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와 나카 미치요(那可通世)의 해석이 대표적이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어서 조공을 해 왔는데, 왜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혹은 가라),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横井忠直, 1884, 『高麗古碑考』, 早稲田大学図書館本 ; 那可通世, 1893, 「高句麗古碑考」, 『史學雜誌』4編 9号, 930~934쪽). 이 기사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보았다. 요코이 등의 해석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검토되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末松保和, 1959, 「高句麗好太王碑文」, 『歷史敎育』74).
② 알본 역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되었다. 정인보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鄭寅普, 1955, 「廣開土境好太王陵碑文釋略」, 『白樂濬博士記念國學論叢』, 思想界社) 정인보는 “來渡海破”의 주체를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후 북한과 국내 학계에서도 이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백제가 왜와 연계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본 박시형의 해석(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바다를 건넌’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한(김석형, 1966,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295~298쪽) 연구가 있다.
③ 이진희에 의해 비문변조설이 1970년대에 처음 제기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구설의 기초가 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填本)은 이를 제공하였던 사코우 카게아키(酒匂景信) 중위가 내용을 조작한 것이며, 일본 참모본부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의 “來渡海破”에 석회칠을 하여 그 내용을 개조하였다고 한다.(李進熙, 1972,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이 주장은 발표된 직후부터 격렬한 논쟁과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학계 내에서 탁본의 편년을 재검토하는 등 비문의 신빙성을 기초부터 다시 검토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즈타니본(水谷本)’을 원석탁본으로 재확인 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설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비문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비문 연구에 일본 군부가 개입되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佐伯有淸, 1972,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再檢討のための序章-參謀本部と朝鮮硏究」, 『日本歷史』287). 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등의 일인 학자에 의해 기존 일본 학계의 지나친 이데올로기 개입 등의 경향에 대해 반성을 촉구했던 데에서도 의의가 있다(旗田巍, 1974, 「廣開土王陵碑文の諸問題」, 『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④ 1980년대부터 한중일 학계에서 다수로 나타나는 경향은 신묘년조의 “來渡海破”의 주체를 일본으로 파악하지만, 백제나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과장된 서술로 보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설정한 것은 고구려의 전쟁 명분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李成市, 1984, 「表象としての廣開土王碑文」, 『思想』 842 ; 연민수, 1995,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대외관계」, 『삼한의 사회와 문화』, 신서원, 237쪽 ;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다만 비문의 내용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자의로 허구성을 상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권오엽, 2011, 『광개토왕비의 신화』, 인문사, 103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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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6년 병신(396)에 왕이 몸소 …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030030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영락 6년 기사는 ‘신묘년조’에 이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는 내용이다. 영락 6년 고구려군의 공격범위는 대체로 예성강과 임진강·한강 유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379~382쪽 ; 노중국, 1986,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 『변태섭박사화갑기념논총』, 147쪽). 반면 그 범위를 예성강~임진강 유역으로 한정짓거나(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 고구려연구회, 728~736쪽), 남한강 상류까지 확대시켜 보기도 한다(이도학, 1988,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孫寶基博士停年紀念論叢刊行委員會, 377쪽).닫기 [우리] 군사가 … 하여 영팔성(寧八城)·구모로성(臼模盧城)·각모로성(各模盧城)·간호리성(幹弖利城)·▨▨성·각미성(閣彌城)031031 각미성(閣彌城)『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10월의 관미성(關彌城)(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40)과 동일한 지역으로 비정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71쪽). 『삼국사기』에서는 이 성을 백제 북쪽의 중진(重鎭)으로 표현하면서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위치는 경기도 강화군의 교동도(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379쪽), 황해도 개성 인근(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71쪽), 파주군 오두산성(烏頭山城)(윤일녕, 1990, 「關彌城位置考」, 『北岳史論』 2), 강화도 북부 해안 일대(윤명철, 2002, 「廣開土太王의 軍事作戰에 대하여」, 『고구려연구회학술총서』 3, 148쪽)로 보기도 한다.닫기·모로성(牟盧城)·미사성(彌沙城)·▨사조성(▨舍蔦城)·아단성(阿旦城)032032 아단성(阿旦城)『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책계왕조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40)와 개로왕조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25_0070_0060)에 등장하는 아차성(阿且城)과 동일한 성으로 본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6쪽).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경기도 구리의 아차산성에 해당한다. 한편 충북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2006,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연구』, 서경문화사),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으로 보는 견해(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 고구려연구회, 730쪽 ; 손영종, 2010,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하여』, 사회과학출판사, 74쪽)도 있다.닫기·고리성(古利城)033033 고리성(古利城)고리성(古利城)은 그 음운상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http://db.history.go.kr/id/sg_035_0020_0130)으로 비정하기도 하며(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381쪽)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한다.닫기·▨리성(▨利城)·잡진성(雜珍城)·오리성(奧利城)·구모성(句牟城)·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막▨▨▨▨성(莫▨▨▨▨城)·▨이야라성(▨而耶羅城)·전성(瑑城)·어리성(於利城)·농매성(農賣城)·두노성(豆奴城)·비▨▨리성(沸▨▨利城)·미추성(彌鄒城)034034 미추성(彌鄒城)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 일대에 비정된다.닫기·야리성(也利城)035035 야리성(也利城)『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장천성현(長淺城縣)(http://db.history.go.kr/id/sg_037_0020_0050)의 다른 이름인 지명으로 나오는 야야(耶耶) 혹은 야아(夜牙)와 같은 곳으로 보기도 한다(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78쪽). 장천성현은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이다.닫기·태산한성(太山韓城)·소가성(掃加城)·돈발성(敦拔城)·▨▨성(▨▨城)·▨루매성(▨婁賣城)·산나성(散那城)·나단성(那旦城)·세성(細城)·모루성(牟婁城)·우루성(亐婁城)·소회성(蘇灰城)·연루성(燕婁城)·석지리성(析支利城)·암문▨성(巖門▨城)·미성(味城)·▨▨▨▨▨▨▨리성(▨▨▨▨▨▨▨利城)·취추성(就鄒城)·▨발성(▨拔城)·고모루성(古牟婁城)036036 고모루성(古牟婁城)「충주고구려비」에서도 같은 지명이 보인다. 남한강 상류 일대로 보거나(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377쪽), 북한강 상류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서영일, 2006, 「고구려의 백제공격로고찰」, 『사학지』 38, 54~56쪽).닫기·윤노성(閏奴城)·관노성(貫奴城)·삼양성(彡穰城)·▨▨성(▨▨城)·유▨노성(儒▨盧城)·구천성(仇天城)·▨▨▨성(▨▨▨城)을 공취(攻取)하고, 그 국성(國城)을 …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도성에서] 나와 싸웠다. 왕이 위엄을 갖추고 크게 화를 내 아리수(阿利水)037037 아리수(阿利水)일반적으로 지금의 한강에 비정된다.닫기를 건너 군대를 보내 [도]성을 압박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 중심을 공격하고, … 나누어 성을 포위하니, [백]잔의 군주는 곤란하고 급박해졌다. 남녀 생구(生口) 1천 명·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무릎 꿇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히 [왕의] 노객(奴客)038038 노객(奴客)능비와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모두루묘지명」에서 상위 신분인 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추어 노객이라고 하였다. 능비의 노객은 군주에 대하여 신하를 낮추어 칭한 표현으로 해석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닫기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의 군주가] 이전에 미혹에 빠져 [저지른] 허물을 은혜로이 용서하고, 그 후 순종해 온 정성을 받아들였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大臣) 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도성으로 귀환하셨다.
[영락] 8년 무술(398)에 [왕이] 교(敎)를 내려 소규모 부대를 보내 숙신(肅慎)039039 숙신(肅慎)영락 8년의 정벌 대상은 “숙(肅)”에 해당하는 글자의 판독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먼저 이를 “▼”으로 판독하고, 이 글자를 “식(息)”과 동일한 글자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정복 대상을 “식신(息愼)”, 곧 숙신으로 비정한다. 이는 현재 대부분의 연구가 따르는 관점이다. 반면 이 글자를 “백신(帛愼)”으로 판독하여 이를 백제의 일부 영역이자 濊의 거주지인 경기도 북부 혹은 강원도 일대로 보는 경우도 있다(津田左右吉, 1913, 「好太王征服地域考」, 『滿鮮歷史地理硏究1-朝鮮歷史地理』 ; 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닫기의 땅과 계곡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에 곧 막▨라성(莫▨羅城)·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로부터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하고 [나라의 일을] 상의하였다.
[영락] 9년 기해(399)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040040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아신왕(阿莘王) 6년 5월(http://db.history.go.kr/id/sg_025_0030_0110)에 백제가 왜와 결호(結好)하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應神) 16년 8월조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에 백제가 일본으로 왕자(王子) 직지(直支)를 보낼 때 ‘脩先王之好’라는 표현이 보인다(http://db.history.go.kr/id/jm_001_0060_0040).닫기 왕이 순행하여 평양으로 내려갔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합니다.041041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합니다비문의 내용상 신라의 급박한 상황을 고구려에 전달하는 내용으로써, 고구려왕의 民으로서 신라인 스스로를 노객(奴客)이라고 해석하는 설이 다수이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7쪽; 이용현, 2013, 「광개토왕비문의 고구려와 가야」,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265~270쪽).닫기 왕께 귀의하니 구원해주시길 청합니다.”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워 그(신라왕)의 충성을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사신을 보내 돌아가게 하고, …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영락] 10년 경자(400)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가서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왜[의 군사]가 가득하였다.042042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의 군사]가 가득하였다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이 이르는 중간 지대에 왜가 가득 차 있었다는 해석과(菅政友, 1891, 「高麗好太王碑銘考」, 『史學雜誌』 24(2-11), 49쪽; 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8쪽; 金哲埈·崔柄憲, 1986, 82쪽; 高寬敏, 1990, 163쪽) 고구려군이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렀고 신라성에 왜가 가득 차 있었다고 보는 해석(末松保和, 1963, 『日本上代史管見』, 光國家書店, 74쪽 ; 李亨求·朴魯姬, 1986, 『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 同和出版公社, 88쪽; 鈴木靖民, 1988, 「好太王碑の倭の記事と倭の實體」,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55쪽;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97쪽)이 있다.닫기 [고구려의]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043043 임나가라(任那加羅)『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전(强首傳)의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http://db.history.go.kr/id/sg_046_0020_0130),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에 임나왕족(任那王族)(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290_0020) 등의 기록에서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위치는 김해설(金海說)(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66쪽 ; 延敏洙, 1995,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對外關係」, 『三韓의 社會와 文化』, 신서원, 243쪽)과 고령설(高靈說)(鮎貝房之進. 1937, 「日本書紀朝鮮地名攷」, 『雜攷』 7 上卷, 52쪽 ; 丁仲煥, 1962, 『加羅史草』, 釜山大學校韓日文化硏究所, 145쪽 ;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27쪽)이 있다. 한편 임나가라는 임나(=창원)와 가라(=김해)의 합칭이고,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전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泰植, 1994,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戍兵’」, 『韓國古代史論叢』 6,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55쪽).닫기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자 성이 곧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044044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초기의 연구에서는 임나일본부설과 연결하여 그 실체를 왜(倭)로 보았다(那珂通世, 1958, 『外交繹史』, 岩波書店, 493쪽; 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增訂三版), 吉川弘文館, 74쪽). 이후 백제의 개입(延敏洙, 1987, 「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倭關係 記事의 檢討」, 『東國史學』 21, 23쪽;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27쪽; 金鉉球, 1993, 『任那日本府硏究 -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 一潮閣, 99쪽), 혹은 고구려의 원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關係』, 塙書房, 202쪽). 안라인수병의 ‘안(安)’을 ‘안치하다’라는 서술어로 보기도 한다(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9쪽). 여기에 대해서는 비문의 서법상 맞지 않는다는 지적(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20쪽)과 나인(羅人)을 ‘순라병(巡邏兵)’ ‘유병(遊兵)’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高寬敏, 1990, 「永樂十年, 高句麗廣開土王の新羅救援戰に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7 161~162쪽). 한편 고고학적 친연성 등을 근거로 안라인수병을 고유명사로 볼 것을 주창하기도 하였다(李永植, 2006, 「가야와 고구려의 교류사 연구」, 『韓國史學報』 25, 61~63쪽). 최근에는 고구려가 신라인 수비병을 배치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재조명되고 있다(신가영, 2017, 「광개토왕비문의 ‘安羅人戍兵’에 대한 재해석」, 『東方學志』 178, 21쪽; 위가야, 2019, 「6세기 前半 安羅國 주도의 加耶諸國 관계 이해를 위한 기초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94, 211쪽).닫기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가 … 크게 무너졌다. 69개의 성을 모두 지키고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 滿▨▨▨▨其▨▨▨▨▨▨▨言▨▨▨▨▨▨▨▨▨▨▨▨▨▨▨興▨▨▨▨▨▨▨▨▨▨辭▨▨▨▨▨▨▨▨▨▨▨▨▨潰▨▨迫▨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045045 滿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해당 부분은 대다수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왜와 백제의 연합에 의한 전쟁 관련 내용으로 보기도 한다(千寬宇,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545~546쪽, 延敏洙, 1987, 「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倭關係 記事의 檢討」, 『東國史學』 21, 29쪽).닫기 예전에는 신라 매금(寐錦)은 몸소 [고구려에] 와서 [나랏]일을 논의하는 적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 매금(寐錦)을 … 복구(僕句) … 조공하였다.
[영락] 14년 갑진(404)에 왜(倭)가 [법도를] 따르지 않고 대방(帶方)046046 대방(帶方)낙랑군(樂浪郡)의 25현(縣) 중 하나로 나타나며(http://db.history.go.kr/id/ko_020_0220_0010) 3세기 초반 공손강(公孫康)이 이 이름을 가진 군(郡)을 설치하였다. 황해도 남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닫기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047047 ▨▨▨▨왕건군(王健群)은 이 네 글자를 ‘和通殘兵’으로 판독하여, 왜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작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판독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8쪽).닫기… 석성(石城) … 배가 연이어 … 하였다.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048048 [왕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고왕건군(王健群)과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에 따르면 ‘王躬率’로 판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앞의 문장은 왜가 대방계(帶方界)를 침입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닫기 … 평양(平穰)에서부터 … 군대가 예봉이 서로 조우하였다. 왕당(王幢)049049 당(幢)군대를 의미한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8쪽).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이 보인다.닫기이 요해처를 끊고 소탕하니, 왜구가 무너져 패배하여 참살한 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영락] 17년 정미(407)에 [왕이] 교(敎)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어 … 군대와 … 합전하고 참살해 모두 소탕하였고,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물자와 병기는 수를 셀 수 없었다.050050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물자와 병기는 수를 셀 수 없었다이때 정벌하여 물자를 노획한 교전 상대국에 대해 왜병설(今西龍, 1915,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469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2007, 『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28쪽), 가야제국설(加耶諸國說)(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乙酉文化社, 384쪽), 백제설(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2쪽; 李基東,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백제연구』 17, 50쪽; 徐榮洙,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歷史學報』 119, 116~118쪽), 후연설(後燕說)(水谷悌二郞, 1977, 『好太王碑文考』, 開明書院, 93~94쪽; 千寬宇,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546~553쪽; 林起煥, 199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民’의 성격」, 『고구려연구』 2, 774쪽 ; 孔錫龜, 2012, 「廣開土王의 遼西地方 進出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7, 149~151쪽) 등이 제기되었다.닫기 [왕의 군대가] 돌아오면서 사구성(沙溝城)051051 사구성(沙溝城)『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전지왕(腆支王) 13년 7월조(http://db.history.go.kr/id/sg_025_0040_0120)에서의 사구성(沙口城)과 동일한 지명으로 추측된다(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령역」, 『력사과학』 1986-2, 26쪽;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2쪽; 李基東,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백제연구』 17, 50쪽). 한편 ‘사구성(沙溝城)=사구성(沙口城)’이라는 음상사(音相似)를 통한 유추 방식을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孔錫龜, 2012, 「廣開土王의 遼西地方 進出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7, 147~149쪽).닫기·누성(婁城)·▨주성(▨住城)·▨▨▨▨▨▨나(那)▨성(城)을 격파하였다.
[영락] 20년 경술(410)에 동부여(東扶餘)052052 동부여(東扶餘)「광개토왕릉비」에서 별도로 나타나는 동부여에 대해서는 그 위치에서부터 존속 시기, 그리고 길림 일대의 부여와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먼저 그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송화강일대설과 동해안설로 나누어진다. 송화강일대설은 동부여를 송화강 유역에 존재한 북부여의 분파로 보는 설로, 『논형(論衡)』과 『위략(魏略)』 등에서 보이는 색리국(고리국)을 북부여로, 길림 일대의 부여를 동부여로 보거나(송호정, 1997, 199쪽) 송화강 이남에 별개의 부여가 존재했다고 보는 설(이도학, 2005, 「高句麗와 夫餘의 出源에 관한 認識의 變遷」, 『고구려발해연구』21), 4세기 전연의 침입으로 일시적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설(李健才, 1982, 「扶餘的疆域和王城」, 『社會科學戰線』1982-4) 등이 있다. 반면 동해안설은 현재 국내 학계와 일본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설로 혼춘(琿春)설(노태돈, 1989, 「夫餘國의 展開에 關한 再認識 試論」, 『국사관논총』4) 용정(龍井)-연길(延吉) 일대설(김현숙, 2005, 「보론 1절 : 동부여에 대한 지배 방식」,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431쪽), 화룡(和龍)설(박경철, 1989, 「高句麗軍事戰略考察을 위한 一試論」, 『사학연구』40), 돈화(敦化)설(임기환, 2012, 「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 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8),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위말갈(僞靺鞨)’인 동해안 지역의 예족설(공석구, 1998,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267~268쪽), 연길(延吉)-돈화(敦化) 일대설(이승호, 2018,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東扶餘에 대한 재검토」, 『소장학자들이 본 고구려사』, 혜안) 등이 제시되었다. 이들 연구에서는 『진서(晉書)』에서 285년 모용씨 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국왕이 피살되고,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였다는 기록(http://db.history.go.kr/id/jo_005_0010_0010_0020)을 근거로 이 시기에 동부여가 설립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다수설을 차지하지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에 나타나는 것처럼 동부여가 고구려 건국 무렵부터 존재하며 서로 상쟁하였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닫기는 옛날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아,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군대가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여성과 온 나라가 놀라 …. 왕의 은혜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군대를 돌렸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고구려로] 온 자는 미구루(味仇婁)053053 미구루(味仇婁)미구루(味仇婁)는 북옥저에 위치한 ‘매구루’와 같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89, 「夫餘國의 展開에 關한 再認識 試論」, 『국사관논총』4).닫기압로(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격하여 깨트린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
수묘인(守墓人)054054 수묘인(守墓人)수묘인은 묘지 주변에 거주하며 무덤을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서 사역되기도 하였던 이들을 말한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에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로, 신대왕(新大王) 15년에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죽자 왕이 그의 묘에 수묘(守墓)를 위해 20가를 두었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sg_016_0020_0110).닫기의 연호(烟戶)[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賣句余) 민(民)은 국연(國烟)055055 국연(國烟)과 간연(看烟)비문 내에서는 수묘인의 출신과 더불어 이들을 국연과 간연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그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비율이 1 : 10이 된다. 그래서 국연 1호당 간연 10호가 1조가 되어 수묘역을 하였을 것으로 본 설이 제시된 이래(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6쪽) 그 정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국연은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수공업에 종사하고 간연은 농업을 담당하던 것으로 보거나(耿鐵華, 老田裕美 譯 1985, 「高句麗好太王碑及び高句麗王朝と好太王について」, 『市民の古代』 7), 국연과 간연은 본래 사민되기 전의 거주지에서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있었던 집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 65, 21쪽). 또 국연의 ‘국(國)’이라는 글자에 주목하여 국강상(國岡上)의 수묘역을 담당하는 연호, 간연이란 간(看)이 ‘지켜보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왕릉의 간수 역할이었다는 의견도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38~39쪽). 또 국연과 간연이 모두 실제로 수묘를 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국연이 ‘국강(國岡)의 연(烟)’이므로 국강 지역에서 실질적인 수묘역을 담당한 자들이며, 간연은 국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생산 활동을 통해 국연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기도 한다(조법종, 1995, 「광개토왕릉비문에 나타난 수묘제 연구」, 『韓國古代史硏究』 8). ‘국강상’과는 별개로 국연과 간연의 구분을 실제 수묘역에 종사하는 자들과,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예비 수묘인으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의 구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김락기, 2006, 「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 『韓國古代史硏究』 41 ; 공석구, 2011,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광개토왕의 왕릉관리」, 『고구려발해연구』 39, 62~63쪽). 그리고 국연만이 국도에 소재한 광개토왕릉을 수묘하는 실제 가호고 간연의 경우 단지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에 대한 과시의 목적으로 편제된 이들이었다는 견해(이도학, 2016, 「廣開土王陵 守墓制 論議」, 『동아시아고대학』 42)도 있다.닫기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가(東海賈)056056 동해가(東海賈)동해가(東海賈)는 지역 단위에 상인을 칭하는 ‘가(賈)’가 붙은 것에 주목하여, 이들을 이 지역의 상가(商賈) 집단이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78~81쪽) 신분이 낮은 천민 상호(商戶) 집단(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12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닫기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057057 돈성(敦城)『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신성주는 본래 구차홀로 혹은 돈성이라고 한다(新城州, 夲仇次忽 或云敦城)라고 서술된 지명(http://db.history.go.kr/id/sg_037_0030_0140)이다. 이에 따라 돈성이 신성(新城)이며, 곧 무순 일대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뒤의 수묘인 차출지로 신성이 남소성과 함께 별개의 지역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아 여기에서의 돈성은 『삼국사기』 서천왕조에 축조했던 ‘동북대진(東北大鎭)’인 신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북대진인 신성, 곧 돈성의 위치는 중국 연길로 보는 설(임기환, 2012, 「고구려의 연변지역 경영- 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8, 79~80쪽)과 함경북도 길주에 위치했다고 보는 설(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517~523쪽)이 제시되었다.닫기의 민은 4가가 모두 간연. 울성(亐城)058058 울성(亐城)사료상에서는 별도로 그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조의 ‘옥저성(沃沮城)’(http://db.history.go.kr/id/jo_004_0010_0040_0020)으로 함흥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1987,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체제」, 『경희사학』14, 63쪽).닫기의 1가는 간연, 비리성(碑利城)059059 비리성(碑利城)「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의 비리성(碑利城)(http://db.history.go.kr/id/gskh_003_0010_0130_0020)과 동일한 지역으로서, 신라의 비열홀(比列忽)이자 오늘날의 함경남도 안변에 해당한다. 연구에 따라서는 과거 낙랑군의 영동 7현중 하나인 ‘불내현(不耐縣)’의 다른 이름인 ‘불이(不而)’에 착안하여, ‘불이성(不而城)’과 같은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59, 「漢四郡과 그 變遷」, 『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161~162쪽).닫기의 2가는 국연. 평양성(平穰城)의 민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谷)의 2가는 간연. 양성(▼城)060060 양성(▼城)양성(梁城)과 같은 곳으로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고구려가 정복한 양맥(梁貊)(http://db.history.go.kr/id/sg_013_0030_0310)의 통치를 위해 세워진 성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태자하 상류의 신빈현 서남부 하협하향(下夾河鄕) 태자성촌(太子城村)에 위치한 태자성(太子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冬達, 1992, 「遼寧新濱高句麗太子城」, 『考古』1992-4, 318~324쪽).닫기의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061061 안부련(安夫連)여타 사료에서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지만, 앞의 동해가(東海賈)와 함께 상업집단을 의미했던 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77~279쪽).닫기의 22가는 간연. ▨곡(▨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062062 신성(新城)지금의 무순(撫順) 북쪽에 있는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닫기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063063 남소성(南蘇城)그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중국 지린성 산성자(山城子) 부근이나(箭內亘, 1913, 「南北朝時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흥경(興京) 부근으로 비정된다(津田左右吉, 1915, 「安東都護府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보다 구체적으로 신빈 오룡산성(五龍山城)이나(冬達, 1994, 「新濱五龍高句麗山城」, 『遼海文物學刊』1994-2, 18~24쪽) 혹은 소자하와 혼하의 합류처 동쪽의 철배산성(鐵背山城)을 남소성으로 추정하는 견해(여호규, 1995,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한국사연구』91, 8~10쪽)도 제시되었다.닫기의 1가는 국연.
신래한예(新來韓穢)064064 신래한예(新來韓穢)광개토왕의 정복활동 결과 얻은 새로운 지역의 백성을 의미한다. 한(韓)은 백제인, 예(穢)는 옛 대방 땅의 예인(濊人)으로 구분하거나(那珂通世, 1915, 『那珂通世遺書』, 故那珂通世博士功績紀念會, 498쪽), 한예를 백제·가야인으로 보는 견해(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78쪽), 황해도와 경기 북부 지역의 주민 중 차출 대상으로 보는 견해(전진국, 2014, 「「廣開土王陵碑」의 新來韓穢 - 출신지와 고구려의 인식을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48)등이 있다.닫기[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의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求底)의 한(韓)은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客賢) 한(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리성(幹▨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065065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대다수의 연구에서 백제의 수도 한성 남쪽에 거주하는 한족을 일괄 지칭한 표현으로 보고 있지만, 영락 10년조에 등장하는 남거성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那珂通世, 1893, 「高句麗古碑考」, 『史學會雜誌』 49, 500쪽)나 영락 17년조의 전쟁 대상을 가야 지역으로 보며 이들을 칭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오길환, 1988, 「「廣開土王碑文」 ‘守墓人煙戶’ 조의 재검토 - ‘新來韓穢’ 36地域을 中心으로」, 『전통문화논총』6, 242~243쪽)도 제시되었다.닫기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 구모성(句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씀하시길, “조왕(祖王)과 선왕(先王)들께서는 단지 멀고 가까운 곳의 구민(舊民)066066 구민(舊民)여기에서의 ‘구민(舊民)’이 ‘신래한예(新來韓濊)’를 제외한 나머지 고구려 영역 전체에서 차출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건국 이후 영역 확장의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견의 차이가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구민을 광개토왕대 확보한 영역 이전의 고구려인 전체(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4~225쪽)나 “구래 영역의 백성”(武田幸男, 1979,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 『東洋文化硏究所紀要』78)등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그 차출지가 보다 구체적으로 한정되며, 대체로 고구려 건국 이후 영역 확장의 과정에서 복속한 지역의 정복민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 ‘구민’은 기존의 정복지로서 새로운 정복지인 신래한예와 대비되는 존재들인 것이다(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65 ; 임기환, 1995, 『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공석구, 2011,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광개토왕의 왕릉관리」, 『高句麗渤海硏究』39). 한편 구민을 좀 더 구체적으로 특정하여 이들이 소수림왕릉, 고국양왕릉을 수묘하던 수묘인을 지칭했다고 보거나(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 守墓人烟戶條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下)』, 722쪽), 혹은 구민이 본래 고구려의 주민이었지만 왕족 유력자들의 노예로서 수묘인으로 제공된 이들이었다고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5,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文解說」, 『好太王碑探訪記』, 三秀舍, 77쪽)도 있다.닫기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청소를 하게 하셨다. 나는 구민들이 피폐해지고 고단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자를 두면, 내가 몸소 다니며 노략해 온 한(韓)과 예(穢)[사람들] 만을 데려다가 무덤의 수호·소제를 준비하게 하라”고 하였다. 말씀으로 교(敎)하신 바가 이와 같았으므로 이것을 교령(敎令)과 같이 하여 한(韓)과 예(穢)의 220가를 뽑았다. 그러나 이들이 [수묘의] 법칙을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뽑아왔다. 신·구 수묘호를 합치니, 국연이 30가이고 간연이 300가로 도합 330가이다.
조선(祖先)의 왕들 이래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들이 어긋나고 섞이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조선(祖先)의 왕들을 위해 진력하셔서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067067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이 구절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본래 선왕들의 묘지에 수묘인의 연호를 기록한 비석이 별도로 없었지만, 광개토왕의 명령으로 각 왕묘에 이를 새긴 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집안 지역의 왕릉급 고분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제외하고는 문자가 있는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해당 비석이 「광개토왕릉비」에서 전하는 ‘묘상(墓上)에 비(碑)’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연구들 중에서는 「지안고구려비」가 이 ‘묘상(墓上)에 비(碑)’ 중 하나로 이를 ‘수묘비’라 정의하기도 한다(集安市博物館, 2013, 「集安高句麗碑調査報告」, 『東北史地』 3 ; 여호규, 2013, 「신발견 〈集安高句麗碑〉의 구성과 내용 고찰」, 『韓國古代史硏究』 70 ; 조법종, 2013, 「집안 고구려비의 특성과 수묘제」, 『신발견 고구려비의 예비적 검토』, 고구려발해학회). 그러나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수묘제 정비 과정에서 세워졌지만, 수묘비보다는 매매금지령 등의 조치를 포고하기 위한 비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정호섭, 2013, 「集安 高句麗碑의 性格과 주변의 高句麗 古墳」, 『韓國古代史硏究』 70).닫기 그 연호를 새겨서 어긋나 섞이지 않게 하라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제(制)하시기를,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068068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능비에서는 당시 고구려에서 수묘인이 매매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전한다. 이를 주목하여 수묘인이 매매대상이었기 때문에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다(백남운 著 하일식 譯, 1994, 『朝鮮社會經濟史』, 이론과 실천, 218쪽). 그러나 수묘인이 ‘가(家)’를 이루며 일정한 자기경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수묘인이 군역을 면제받은 대신, 그 대가로 수묘를 역(役)의 형태로 부여받은 농민들이라고 파악한 연구(김석형, 1957, 「三國時代の良人農民」, 『古代朝鮮の基本問題』, 學生社, 95~96쪽) 이래 다수의 연구자가 수묘인을 양인이거나 혹은 양인에서 어떤 이유로 신분의 하강이 일어난 이들로 본다. 이들은 수묘인은 국연은 양인, 간연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고, 매매행위도 노예로서가 아닌 경제적인 궁핍함 등의 사정으로 인해 자신들을 파는 행위라고 보거나(손영종, 2001, 『광개토왕릉비문연구』, 중심, 106쪽) 본래 천민도 노예도 아니었지만, 수묘역을 부담하면서 賤民化 되어 이들이 일반 양인보다 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본 견해(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8쪽), 노예의 신분은 아니었으나 일정 지역에 집단 이주된 사람들이며 국역의 의무를 진 비자유민(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6쪽), 수묘역은 일반 양인이 담당할 역이 아니며 이들은 강제로 이주되었으므로 일반 양인보다는 낮은 신분(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65, 33~34쪽), 혹은 경제적인 몰락에 따라 노비화 현상이 일어나 매매의 대상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양인이었다는 주장(임기환, 1994, 「廣開土王碑의 國烟과 看烟」, 『역사와 현실』13) 등이 있다. 그리고 구민과 신래한예 사이에도 신분 격차가 있어, 구민은 대체로 양인이며 신래한예의 수묘인들은 이보다 사회경제적 위상이 낮았으며, 매매금지 조치는 기본적으로 이들을 고려하여 제정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정호섭, 2012, 「廣開土王碑의 성격과 5세기 高句麗의 守墓制 改編」, 『선사와 고대』37).닫기고 하였다.

註 001
추모왕(鄒牟王) : 「모두루묘지」에는 추모성왕(鄒牟聖王)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성(姓)이 고(高)이고 휘(諱)가 주몽(朱蒙)이며, 시호(諡號)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분주(分註)에서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 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추모(鄒牟)라고 하고, 이칭으로 주몽이라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 또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추몽(鄒蒙)이라는 이칭을 전한다(http://db.history.go.kr/id/sy_001_0010_0010). 『위서』 고구려전을 비롯한 중국정사에서는 주몽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670) 7월의 안승의 국왕 책봉 책문에서는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이라고 하였고(http://db.history.go.kr/id/sg_006_0020_1030),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7년(668) 10월에서는 중모왕(仲牟王)이라고 하였으며(http://db.history.go.kr/id/jm_001_0240_0560), 『속일본기』 권40 환무천황 연력 8년(789) 12월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jm_002_0410_0050). 그리고 『신찬성씨록』 권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에서는 추모라고 하였다. 이처럼 추모는 휘로서 주몽·중해·추몽·중모·도모 등의 이칭이 전해지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同音異表記]으로 이해된다.
註 002
북부여(北夫餘) : 본문의 북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를 가리킨다. 이와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보이는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비교된다. 이들 사서에서는 추모왕이 북부여왕 해모수의 아들이었고, 동부여에서 출생·성장하였다고 하였다. 추모왕의 출생·성장 지역이 각기 북부여와 동부여로 달리 나오는 것이다.
註 003
태어났는데(出自) : “~에서 나오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혹은 “출신”(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註 004
천제의 아들 :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에 인용된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왕의 부친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였다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
註 005
하백(河伯) : 하백은 강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으로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 및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의 주석 등에 그 이름이 확인된다.
註 006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 『논형(論衡)』에 보이는 부여의 건국신화(동명신화)에서는 동명의 모친이 시비(侍婢)였다고 하였다(http://db.history.go.kr/id/ko_016_0020_0010).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변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의 시조모는 지모신(地母神) 내지 그와 같은 농업신으로 주목되었다(김철준, 1975,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지식산업사 ;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37쪽).
註 007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탄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고구려 시조의 탄생과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설화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릉비」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국내 사료와 『위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차이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천제(天帝) 혹은 일월(日月)과 같이 하늘의 신적 존재와 연결된 부친과 물의 신인 하백(河伯)과 연결된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는 『논형(論衡)』 및 『위략(魏略)』 등에서 전하는 부여의 시조 전승인 ‘동명신화(東明神話)’와 유사한 형태이다. 또 『삼국사기』에서 주몽의 왕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칭한 점도 부여의 동명신화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하였다고 본다. 고구려가 동명설화를 차용한 배경은 장수왕대까지 복속한 부여계 주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지배의 정통을 표방하기 위해서거나(白鳥庫吉, 1936,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 ; 1970, 『白鳥庫吉全集5』, 岩波書店, 370~391쪽) 경쟁국이었던 부여씨 백제 왕실에 대한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51쪽), 혹은 부여를 대신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정치적 표방을 위해서였다는 설(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85쪽) 등이 제시되었다.
註 008
엄리대수(奄利大水)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엄사수(淹㴲水)’(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010),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에서는 “엄체(淹滯)”, 『삼국유사』에서는 “엄수(淹水)”라고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y_001_0020_0150_0050) 나아가 『삼국사기』에서는 엄사수에 대해 ‘엄표수(淹淲水)’라는 명칭을 별도로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g_037_0030_0120). 또 중국 사서에서 최초로 고구려의 시조 설화를 전하는 『위서』에서는 강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 반면, 『양서(梁書)』 권54 열전48 동이 고구려전(http://db.history.go.kr/id/jo_008_0010_0020_0020) 및 『북사』 권94 열전82 사이 상 백제전(http://db.history.go.kr/id/jo_012_0010_0020_0010) 에서 ‘엄체수(淹滯水)’,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 백제전에서 ‘엄수(淹水)’(http://db.history.go.kr/id/jo_013_0010_0020_0010)라고 그 이름을 전한다. 이들은 모두 ‘엄(淹)’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강에 대한 다른 표기로 파악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이병도, 1996, 『삼국사기』上, 을유문화사, 329쪽), 혼하(渾河) (白鳥庫吉, 1970, 「朝鮮古代地名考」, 『白鳥庫吉全集 3』, 吉川弘文館), 요하(遼河) (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註 009
황천(皇天) : 천제(天帝)를 가리키며 천(天) 또는 천신(天神)의 존칭이다(『書經』 大禹謨. “皇天眷命, 奄有四海, 爲天下君”). 「모두루묘지」에서는 “일월의 아들(日月之子)”이었다고 하였다.
註 010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소서(連葭浮龜) :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의 “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今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 참조. 추모왕이 말한 대상은 “황천후토(皇天后土)”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天地”로 나온다. 『삼국사기』와 『구삼국사』에서 “어별부출(魚鼈浮出)”이라고 하였다.
註 011
홀본(忽本) : 「광개토왕비」에서는 추모왕이 도읍한 땅을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이라고 전한다. 이외에도 추모왕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지역의 이름과 성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상이하거나 지명이 생략되기도 한다. 각종 사료에서 나타나는 지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료도착한 지역성을 축조한 지역비고
「廣開土王陵碑」沸流谷 忽本忽本 서쪽 산.
『魏書』 高句麗傳紇升骨城불명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卒本川 혹은 卒本扶餘(주석)沸流水 가 東明王 4년에 처음 宮室 축조
『三國史記』 百濟本紀卒本扶餘불명.
『三國史記』 地理志卒本불명(紇升骨城)‘古記’의 기록 인용
『三國遺事』 紀異卒本州沸流水 가고구려와 卒本扶餘를 동일시.
「東明王篇」不明鶻嶺.

위의 기록들 중 ‘흘승골성’에 대해서는 흘승이 본래는 ‘승흘(升紇)’이었으나 이것이 전도되어 중국 측 사료에서 ‘흘승골성’이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곧 ‘승흘골(升紇骨)’ 이란 ‘솔골’ 혹은 ‘수릿골’이 되며, 이는 졸홀(卒忽), 곧 졸본(卒本)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홀승골은 「광개토왕비」의 홀본 및 『삼국사기』등에서 나타나는 졸본과 동일한 명칭으로, ‘졸본(卒本)의 성’으로 보거나(이병도, 1959, 『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228~229쪽) ‘흘승골성’이 ‘흘본골성(紇本骨城)’을 잘못 쓴 것이며, ‘골(骨)’은 고구려의 말로 성을 의미하는 ‘구루(溝漊)’의 음역으로 보기도 한다.(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5, 25쪽) 홀본(졸존)의 위치는 중국 요령성 환인설이 19세기 말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제시한 이후 지금까지 통설로 수용되고 있다(那珂通世, 1894, 「朝鮮古史考=第四章 高句麗考」, 『史學雜誌』5-9, 42쪽).
註 012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비문에서는 추모왕이 홀본에 도착하여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고구려 건국 세력 남하 이전에 이미 성이 존재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耿鐵華, 2004, 「高句麗紇升骨城新考」, 『北方民族』2001-2) 그러나 『위서』를 제외한다면 비문 외에도 대부분의 사료가 주몽이 이 지역에 도착한 후 성을 축조하였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서 해발 820m인 오녀산 정상에 세워진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註 013
용의 머리를 디디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갔다 :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재위 19년째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20_0140).
註 014
유류왕(儒留王) : 고구려의 제 2대 국왕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이름을 유리(類利) 또는 유류(孺留)라고 전하며, 왕호는 유리명왕(琉璃明王)이었다(http://db.history.go.kr/id/sg_013_0030_0010).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루리(累利)라는 표기도 별도로 전하고 있다. 또 『위서』에서는 주몽의 아들을 여달(閭達), 손자가 여율(如栗)이라고 하였으며(http://db.history.go.kr/id/jo_009_0010_0010_0040) 『북사』에서는 이들 둘을 모두 주몽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jo_012_0010_0010_0040).
註 015
대주류왕(大朱留王) : 고구려의 제 3대 국왕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이름을 무휼(無恤)이라고 하며, 유리왕의 아들이다. 왕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고 전하는데, 별도로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는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칭호를 부기하고 있다(http://db.history.go.kr/id/sg_014_0020_0010). 곧 ‘대주류왕’은 『삼국사기』의 ‘대해주류왕’과 서로 같은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조에 따르면 소수림왕에게는 별도로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http://db.history.go.kr/id/sg_018_0030_0010). 곧 양자가 ‘朱留’라는 칭호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를 보아 ‘주류’란 소수림의 ‘수림(獸林)’과 통하며, 곧 ‘대주류’란 ‘대수림(大獸林)’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井上秀雄, 1979, 「高句麗大武神王觀の変遷」, 『朝鮮歷史論集』上, 龍漢書舍, 63쪽). 또 ‘주류’란 신성하다는 의미의 ‘수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거나,(이병도, 1996,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주류는 단지 왕의 이름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28) 또 소수림왕이 ‘대(해)주류왕’에 대비되어 ‘소해주류왕’이라고 칭해진 데에서 서로 연관성을 찾아, 소수림왕대에 대무신왕이 특히 부각되었던 현상의 반영이라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9~51쪽).
註 016
17세손(世孫) : 이에 대해서는 크게 1) ‘세손’을 왕대수로 보는 설과 2) 혈연적 세대수로 보는 설이 있다.
註 017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경주의 호우총(壺杅塚)에서 출토된 제기에서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모두루묘지」에서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개토왕(開土王)’이라고 하였다. ‘국강상(國罡上)’은 광개토왕의 장지(葬地)를 뜻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를 넓혔다는 뜻으로서 왕의 치적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평안(平安)’ 또한 ‘광개토경’처럼 광개토왕의 훈적을 말하는 것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한 업적이나(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치세시대(治世時代)’를 표현(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00~102쪽)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위의 「모두루묘지」 등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점과, 『양서』 고려전에서 광개토왕의 이름이 ‘안(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평안’을 광개토왕의 이름[諱]으로 본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50~251쪽 ;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28, 32쪽).
註 018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 : 『삼국사기』에서는 을미년을 광개토왕 4년(394)이라 하고 있다.
註 019
패려(稗麗) : 나려(裸麗)로 읽고 유연으로 보기도 한다(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2007, 『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27쪽). 그러나 대체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8년조(http://db.history.go.kr/id/sg_018_0030_0120) 및 광개토왕 원년 9월조(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30) 등에 보이는 거란으로 본다. 『진서』 동이전의 비리(裨離)( (천관우,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일조각, 521쪽), 『위서』 거란전의 필결부(匹潔部)(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54~155쪽; 武田幸男, 1979,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 『東洋文化硏究所紀要』 78, 104~109쪽), 『요사(遼史)』와 『발해국지(渤海國志)』의 비리군(碑離郡)(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30쪽), 거란의 비칭으로 보기도 한다(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 순수」,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422~423쪽).
註 020
부산(富山) : 『삼국지』 동이전(http://db.history.go.kr/id/jo_004_0010_0030_0100)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http://db.history.go.kr/id/sg_016_0020_0060)에 보이는 ‘부산적(富山賊)’과 관련 있어 보인다. 대릉하 상류의 구하(狗河)(이재성, 2002, 「4~5세기 고구려와 거란」, 『고구려연구』 14, 30~34쪽), 무순(撫順)의 북방(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101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註 021
부산(▼山) : 앞의 부산(富山)과 병기된 점에서 상호 관련된 장소로 추측된다. 부산(富山)을 무순(撫順)으로 보는 설에서는 그 북쪽 흥안령(興安嶺) 산맥 남단으로 추정하였다(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101쪽).
註 022
염수(鹽水) : 압록강 또는 혼강(那珂通世, 1915, 「高句麗古碑考」, 『史學雜誌』 47, 10쪽), 태자하(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23쪽), 액길탁니(額吉桌你) 염호(鹽湖) 일대인 광제호(廣濟湖)(서영수,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역사학보』 119, 98~102쪽), 요하 상류(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시라무렌의 본류(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 순수」,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424쪽) 등으로 추정된다.
註 023
[노획한] 소·말·양떼의 수가 매우 많았다 :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30)와 같은 사건으로 추측된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우마군양’을 통해 패려는 초원에 있는 유목종족의 주거지였다고 추정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59~62쪽).
註 024
양평도(襄平道) : 양평(襄平)은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요양(遼陽)으로, 진(秦)과 한대(漢代) 요동군의 치소였다. 양평도(襄平道)는 양평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로 파악된다. 요동성으로 가는 길로 추측하거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쪽), 양평의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요동반도를 따라 있던 길(盧泰敦, 1992, 24쪽), 양평을 중심으로 뻗은 교통로(여호규, 1995,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한국사연구』 91, 37쪽; 李成制, 2012, 「4세기 말 高句麗와 後燕의 관계 -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68, 56쪽), 고구려-졸본-양평으로 이어지는 국도(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5, 91쪽)로 보는 등 다양하다.
註 025
후성(候城)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심양(瀋陽)으로 추정하거나(稻葉岩吉, 1913, 「漢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 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14~115쪽;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쪽), 양평과 가까운 지점으로 보는 견해(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5, 90쪽)가 있다.
註 026
역성(力城) :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 평주(平州)조에 요동국의 속현(http://db.history.go.kr/id/ko_023_0330_0270)으로 확인된다. 양평의 동남쪽 일대로 추정하거나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본계(本溪)로 보고(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 2, 黑龍江人民出版社, 141쪽; 李成制, 2012, 「4세기 말 高句麗와 後燕의 관계 -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68, 58~59쪽), 후성(候城)-역성(力城)-북풍(北豊)을 거쳐 국내성으로 귀환하는 루트를 상정하기도 한다(서영수, 2013,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白山學報』 9, 91쪽).
註 027
북풍(北豊)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정시(正始) 원년(元年)조(http://db.history.go.kr/id/ko_022_0040_0040)를 통해 문현과 이웃한 요동 서부(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213쪽, 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4쪽), 요동반도 서부 해안가로 보거나(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33쪽), 요령성(遼寧省) 수암(岫巖)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임기환, 2013,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영역」, 『고구려발해연구』 4, 89쪽).
註 028
오비해(五備海) : 이를 ‘요동반도 연해지방에 있는 5개의 비(備), 곧 성(城)으로 해석하거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12~213쪽), ‘왕비렵(王備獵)’으로 보고 ‘왕이 사냥을 준비하였다’는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4~225쪽).
註 029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신민(臣民)으로 삼았다 : 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 391년)’기사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한・중・일 학계에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제기되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도 신묘년조를 포함한 비문 전체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구자들마다 이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양하지만 “來渡海破”에 해당하는 구절의 주체에 대한 해석과 글자의 판독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①19세기 말에서 1950년대까지의 일본 학계에서의 논의, ②1950~60년대 남북한 학계의 논의, ③1970년대 비문조작설 논의, ④1980년대 이후 각국의 논의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와 나카 미치요(那可通世)의 해석이 대표적이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이어서 조공을 해 왔는데, 왜가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혹은 가라),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横井忠直, 1884, 『高麗古碑考』, 早稲田大学図書館本 ; 那可通世, 1893, 「高句麗古碑考」, 『史學雜誌』4編 9号, 930~934쪽). 이 기사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보았다. 요코이 등의 해석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와 같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검토되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末松保和, 1959, 「高句麗好太王碑文」, 『歷史敎育』74).
② 알본 역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되었다. 정인보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鄭寅普, 1955, 「廣開土境好太王陵碑文釋略」, 『白樂濬博士記念國學論叢』, 思想界社) 정인보는 “來渡海破”의 주체를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후 북한과 국내 학계에서도 이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백제가 왜와 연계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본 박시형의 해석(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바다를 건넌’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한(김석형, 1966,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295~298쪽) 연구가 있다.
③ 이진희에 의해 비문변조설이 1970년대에 처음 제기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구설의 기초가 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填本)은 이를 제공하였던 사코우 카게아키(酒匂景信) 중위가 내용을 조작한 것이며, 일본 참모본부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의 “來渡海破”에 석회칠을 하여 그 내용을 개조하였다고 한다.(李進熙, 1972,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이 주장은 발표된 직후부터 격렬한 논쟁과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학계 내에서 탁본의 편년을 재검토하는 등 비문의 신빙성을 기초부터 다시 검토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즈타니본(水谷本)’을 원석탁본으로 재확인 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설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비문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비문 연구에 일본 군부가 개입되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佐伯有淸, 1972,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再檢討のための序章-參謀本部と朝鮮硏究」, 『日本歷史』287). 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등의 일인 학자에 의해 기존 일본 학계의 지나친 이데올로기 개입 등의 경향에 대해 반성을 촉구했던 데에서도 의의가 있다(旗田巍, 1974, 「廣開土王陵碑文の諸問題」, 『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④ 1980년대부터 한중일 학계에서 다수로 나타나는 경향은 신묘년조의 “來渡海破”의 주체를 일본으로 파악하지만, 백제나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과장된 서술로 보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설정한 것은 고구려의 전쟁 명분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李成市, 1984, 「表象としての廣開土王碑文」, 『思想』 842 ; 연민수, 1995,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대외관계」, 『삼한의 사회와 문화』, 신서원, 237쪽 ;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다만 비문의 내용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자의로 허구성을 상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권오엽, 2011, 『광개토왕비의 신화』, 인문사, 103쪽)도 있다.
註 030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영락 6년 기사는 ‘신묘년조’에 이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는 내용이다. 영락 6년 고구려군의 공격범위는 대체로 예성강과 임진강·한강 유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379~382쪽 ; 노중국, 1986,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 『변태섭박사화갑기념논총』, 147쪽). 반면 그 범위를 예성강~임진강 유역으로 한정짓거나(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 고구려연구회, 728~736쪽), 남한강 상류까지 확대시켜 보기도 한다(이도학, 1988,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孫寶基博士停年紀念論叢刊行委員會, 377쪽).
註 031
각미성(閣彌城)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10월의 관미성(關彌城)(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40)과 동일한 지역으로 비정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71쪽). 『삼국사기』에서는 이 성을 백제 북쪽의 중진(重鎭)으로 표현하면서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위치는 경기도 강화군의 교동도(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379쪽), 황해도 개성 인근(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71쪽), 파주군 오두산성(烏頭山城)(윤일녕, 1990, 「關彌城位置考」, 『北岳史論』 2), 강화도 북부 해안 일대(윤명철, 2002, 「廣開土太王의 軍事作戰에 대하여」, 『고구려연구회학술총서』 3, 148쪽)로 보기도 한다.
註 032
아단성(阿旦城)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책계왕조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18_0050_0040)와 개로왕조의 기사(http://db.history.go.kr/id/sg_025_0070_0060)에 등장하는 아차성(阿且城)과 동일한 성으로 본다(노태돈,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6쪽).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경기도 구리의 아차산성에 해당한다. 한편 충북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이도학, 2006,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연구』, 서경문화사),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으로 보는 견해(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 고구려연구회, 730쪽 ; 손영종, 2010,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하여』, 사회과학출판사, 74쪽)도 있다.
註 033
고리성(古利城) : 고리성(古利城)은 그 음운상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http://db.history.go.kr/id/sg_035_0020_0130)으로 비정하기도 하며(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381쪽)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해당한다.
註 034
미추성(彌鄒城) :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 일대에 비정된다.
註 035
야리성(也利城) :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장천성현(長淺城縣)(http://db.history.go.kr/id/sg_037_0020_0050)의 다른 이름인 지명으로 나오는 야야(耶耶) 혹은 야아(夜牙)와 같은 곳으로 보기도 한다(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78쪽). 장천성현은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이다.
註 036
고모루성(古牟婁城) : 「충주고구려비」에서도 같은 지명이 보인다. 남한강 상류 일대로 보거나(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377쪽), 북한강 상류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서영일, 2006, 「고구려의 백제공격로고찰」, 『사학지』 38, 54~56쪽).
註 037
아리수(阿利水) : 일반적으로 지금의 한강에 비정된다.
註 038
노객(奴客) : 능비와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모두루묘지명」에서 상위 신분인 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추어 노객이라고 하였다. 능비의 노객은 군주에 대하여 신하를 낮추어 칭한 표현으로 해석된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註 039
숙신(肅慎) : 영락 8년의 정벌 대상은 “숙(肅)”에 해당하는 글자의 판독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먼저 이를 “▼”으로 판독하고, 이 글자를 “식(息)”과 동일한 글자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정복 대상을 “식신(息愼)”, 곧 숙신으로 비정한다. 이는 현재 대부분의 연구가 따르는 관점이다. 반면 이 글자를 “백신(帛愼)”으로 판독하여 이를 백제의 일부 영역이자 濊의 거주지인 경기도 북부 혹은 강원도 일대로 보는 경우도 있다(津田左右吉, 1913, 「好太王征服地域考」, 『滿鮮歷史地理硏究1-朝鮮歷史地理』 ; 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
註 040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아신왕(阿莘王) 6년 5월(http://db.history.go.kr/id/sg_025_0030_0110)에 백제가 왜와 결호(結好)하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應神) 16년 8월조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에 백제가 일본으로 왕자(王子) 직지(直支)를 보낼 때 ‘脩先王之好’라는 표현이 보인다(http://db.history.go.kr/id/jm_001_0060_0040).
註 041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민(民)으로 삼고자 합니다 : 비문의 내용상 신라의 급박한 상황을 고구려에 전달하는 내용으로써, 고구려왕의 民으로서 신라인 스스로를 노객(奴客)이라고 해석하는 설이 다수이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7쪽; 이용현, 2013, 「광개토왕비문의 고구려와 가야」, 『광개토왕비의 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265~270쪽).
註 042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의 군사]가 가득하였다 : 남거성(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新羅城)이 이르는 중간 지대에 왜가 가득 차 있었다는 해석과(菅政友, 1891, 「高麗好太王碑銘考」, 『史學雜誌』 24(2-11), 49쪽; 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8쪽; 金哲埈·崔柄憲, 1986, 82쪽; 高寬敏, 1990, 163쪽) 고구려군이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렀고 신라성에 왜가 가득 차 있었다고 보는 해석(末松保和, 1963, 『日本上代史管見』, 光國家書店, 74쪽 ; 李亨求·朴魯姬, 1986, 『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 同和出版公社, 88쪽; 鈴木靖民, 1988, 「好太王碑の倭の記事と倭の實體」,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55쪽;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97쪽)이 있다.
註 043
임나가라(任那加羅) : 『삼국사기(三國史記)』 강수전(强首傳)의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http://db.history.go.kr/id/sg_046_0020_0130),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에 임나왕족(任那王族)(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290_0020) 등의 기록에서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위치는 김해설(金海說)(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66쪽 ; 延敏洙, 1995, 「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對外關係」, 『三韓의 社會와 文化』, 신서원, 243쪽)과 고령설(高靈說)(鮎貝房之進. 1937, 「日本書紀朝鮮地名攷」, 『雜攷』 7 上卷, 52쪽 ; 丁仲煥, 1962, 『加羅史草』, 釜山大學校韓日文化硏究所, 145쪽 ;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27쪽)이 있다. 한편 임나가라는 임나(=창원)와 가라(=김해)의 합칭이고,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전체를 지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金泰植, 1994, 「廣開土王陵碑文의 任那加羅와 ‘安羅人戍兵’」, 『韓國古代史論叢』 6,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55쪽).
註 044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 초기의 연구에서는 임나일본부설과 연결하여 그 실체를 왜(倭)로 보았다(那珂通世, 1958, 『外交繹史』, 岩波書店, 493쪽; 末松保和, 1961, 『任那興亡史』(增訂三版), 吉川弘文館, 74쪽). 이후 백제의 개입(延敏洙, 1987, 「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倭關係 記事의 檢討」, 『東國史學』 21, 23쪽; 千寬宇,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27쪽; 金鉉球, 1993, 『任那日本府硏究 -韓半島南部經營論批判-』, 一潮閣, 99쪽), 혹은 고구려의 원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89, 『古代の日朝關係』, 塙書房, 202쪽). 안라인수병의 ‘안(安)’을 ‘안치하다’라는 서술어로 보기도 한다(王健群, 1984, 『好太王碑の硏究』, 吉林人民出版社, 199쪽). 여기에 대해서는 비문의 서법상 맞지 않는다는 지적(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20쪽)과 나인(羅人)을 ‘순라병(巡邏兵)’ ‘유병(遊兵)’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高寬敏, 1990, 「永樂十年, 高句麗廣開土王の新羅救援戰に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7 161~162쪽). 한편 고고학적 친연성 등을 근거로 안라인수병을 고유명사로 볼 것을 주창하기도 하였다(李永植, 2006, 「가야와 고구려의 교류사 연구」, 『韓國史學報』 25, 61~63쪽). 최근에는 고구려가 신라인 수비병을 배치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재조명되고 있다(신가영, 2017, 「광개토왕비문의 ‘安羅人戍兵’에 대한 재해석」, 『東方學志』 178, 21쪽; 위가야, 2019, 「6세기 前半 安羅國 주도의 加耶諸國 관계 이해를 위한 기초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94, 211쪽).
註 045
滿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 : 해당 부분은 대다수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왜와 백제의 연합에 의한 전쟁 관련 내용으로 보기도 한다(千寬宇,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545~546쪽, 延敏洙, 1987, 「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倭關係 記事의 檢討」, 『東國史學』 21, 29쪽).
註 046
대방(帶方) : 낙랑군(樂浪郡)의 25현(縣) 중 하나로 나타나며(http://db.history.go.kr/id/ko_020_0220_0010) 3세기 초반 공손강(公孫康)이 이 이름을 가진 군(郡)을 설치하였다. 황해도 남부 지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註 047
▨▨▨▨ : 왕건군(王健群)은 이 네 글자를 ‘和通殘兵’으로 판독하여, 왜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작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판독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8쪽).
註 048
[왕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고 : 왕건군(王健群)과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에 따르면 ‘王躬率’로 판독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앞의 문장은 왜가 대방계(帶方界)를 침입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註 049
당(幢) : 군대를 의미한다(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제1권,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8쪽).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이 보인다.
註 050
노획한 갑옷이 1만여 벌이고, 군수물자와 병기는 수를 셀 수 없었다 : 이때 정벌하여 물자를 노획한 교전 상대국에 대해 왜병설(今西龍, 1915,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469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2007, 『단재신채호전집』 제1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428쪽), 가야제국설(加耶諸國說)(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乙酉文化社, 384쪽), 백제설(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2쪽; 李基東,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백제연구』 17, 50쪽; 徐榮洙,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中)」, 『歷史學報』 119, 116~118쪽), 후연설(後燕說)(水谷悌二郞, 1977, 『好太王碑文考』, 開明書院, 93~94쪽; 千寬宇, 1979, 「廣開土王陵碑再論」,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一潮閣, 546~553쪽; 林起煥, 199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民’의 성격」, 『고구려연구』 2, 774쪽 ; 孔錫龜, 2012, 「廣開土王의 遼西地方 進出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7, 149~151쪽) 등이 제기되었다.
註 051
사구성(沙溝城) :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전지왕(腆支王) 13년 7월조(http://db.history.go.kr/id/sg_025_0040_0120)에서의 사구성(沙口城)과 동일한 지명으로 추측된다(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령역」, 『력사과학』 1986-2, 26쪽;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22쪽; 李基東,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백제연구』 17, 50쪽). 한편 ‘사구성(沙溝城)=사구성(沙口城)’이라는 음상사(音相似)를 통한 유추 방식을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孔錫龜, 2012, 「廣開土王의 遼西地方 進出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67, 147~149쪽).
註 052
동부여(東扶餘) : 「광개토왕릉비」에서 별도로 나타나는 동부여에 대해서는 그 위치에서부터 존속 시기, 그리고 길림 일대의 부여와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먼저 그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송화강일대설과 동해안설로 나누어진다. 송화강일대설은 동부여를 송화강 유역에 존재한 북부여의 분파로 보는 설로, 『논형(論衡)』과 『위략(魏略)』 등에서 보이는 색리국(고리국)을 북부여로, 길림 일대의 부여를 동부여로 보거나(송호정, 1997, 199쪽) 송화강 이남에 별개의 부여가 존재했다고 보는 설(이도학, 2005, 「高句麗와 夫餘의 出源에 관한 認識의 變遷」, 『고구려발해연구』21), 4세기 전연의 침입으로 일시적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설(李健才, 1982, 「扶餘的疆域和王城」, 『社會科學戰線』1982-4) 등이 있다. 반면 동해안설은 현재 국내 학계와 일본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설로 혼춘(琿春)설(노태돈, 1989, 「夫餘國의 展開에 關한 再認識 試論」, 『국사관논총』4) 용정(龍井)-연길(延吉) 일대설(김현숙, 2005, 「보론 1절 : 동부여에 대한 지배 방식」,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431쪽), 화룡(和龍)설(박경철, 1989, 「高句麗軍事戰略考察을 위한 一試論」, 『사학연구』40), 돈화(敦化)설(임기환, 2012, 「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 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8),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위말갈(僞靺鞨)’인 동해안 지역의 예족설(공석구, 1998,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267~268쪽), 연길(延吉)-돈화(敦化) 일대설(이승호, 2018,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東扶餘에 대한 재검토」, 『소장학자들이 본 고구려사』, 혜안) 등이 제시되었다. 이들 연구에서는 『진서(晉書)』에서 285년 모용씨 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국왕이 피살되고, 그 자제들이 옥저로 도주하였다는 기록(http://db.history.go.kr/id/jo_005_0010_0010_0020)을 근거로 이 시기에 동부여가 설립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다수설을 차지하지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에 나타나는 것처럼 동부여가 고구려 건국 무렵부터 존재하며 서로 상쟁하였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註 053
미구루(味仇婁) : 미구루(味仇婁)는 북옥저에 위치한 ‘매구루’와 같은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노태돈, 1989, 「夫餘國의 展開에 關한 再認識 試論」, 『국사관논총』4).
註 054
수묘인(守墓人) : 수묘인은 묘지 주변에 거주하며 무덤을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서 사역되기도 하였던 이들을 말한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에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로, 신대왕(新大王) 15년에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죽자 왕이 그의 묘에 수묘(守墓)를 위해 20가를 두었다고 한다(http://db.history.go.kr/id/sg_016_0020_0110).
註 055
국연(國烟)과 간연(看烟) : 비문 내에서는 수묘인의 출신과 더불어 이들을 국연과 간연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그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 비율이 1 : 10이 된다. 그래서 국연 1호당 간연 10호가 1조가 되어 수묘역을 하였을 것으로 본 설이 제시된 이래(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6쪽) 그 정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국연은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으로 수공업에 종사하고 간연은 농업을 담당하던 것으로 보거나(耿鐵華, 老田裕美 譯 1985, 「高句麗好太王碑及び高句麗王朝と好太王について」, 『市民の古代』 7), 국연과 간연은 본래 사민되기 전의 거주지에서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있었던 집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 65, 21쪽). 또 국연의 ‘국(國)’이라는 글자에 주목하여 국강상(國岡上)의 수묘역을 담당하는 연호, 간연이란 간(看)이 ‘지켜보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왕릉의 간수 역할이었다는 의견도 있다(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38~39쪽). 또 국연과 간연이 모두 실제로 수묘를 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국연이 ‘국강(國岡)의 연(烟)’이므로 국강 지역에서 실질적인 수묘역을 담당한 자들이며, 간연은 국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생산 활동을 통해 국연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기도 한다(조법종, 1995, 「광개토왕릉비문에 나타난 수묘제 연구」, 『韓國古代史硏究』 8). ‘국강상’과는 별개로 국연과 간연의 구분을 실제 수묘역에 종사하는 자들과,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예비 수묘인으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의 구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김락기, 2006, 「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 『韓國古代史硏究』 41 ; 공석구, 2011,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광개토왕의 왕릉관리」, 『고구려발해연구』 39, 62~63쪽). 그리고 국연만이 국도에 소재한 광개토왕릉을 수묘하는 실제 가호고 간연의 경우 단지 광개토왕의 정복 사업에 대한 과시의 목적으로 편제된 이들이었다는 견해(이도학, 2016, 「廣開土王陵 守墓制 論議」, 『동아시아고대학』 42)도 있다.
註 056
동해가(東海賈) : 동해가(東海賈)는 지역 단위에 상인을 칭하는 ‘가(賈)’가 붙은 것에 주목하여, 이들을 이 지역의 상가(商賈) 집단이나(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78~81쪽) 신분이 낮은 천민 상호(商戶) 집단(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12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註 057
돈성(敦城) :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신성주는 본래 구차홀로 혹은 돈성이라고 한다(新城州, 夲仇次忽 或云敦城)라고 서술된 지명(http://db.history.go.kr/id/sg_037_0030_0140)이다. 이에 따라 돈성이 신성(新城)이며, 곧 무순 일대로 비정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뒤의 수묘인 차출지로 신성이 남소성과 함께 별개의 지역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아 여기에서의 돈성은 『삼국사기』 서천왕조에 축조했던 ‘동북대진(東北大鎭)’인 신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북대진인 신성, 곧 돈성의 위치는 중국 연길로 보는 설(임기환, 2012, 「고구려의 연변지역 경영- 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8, 79~80쪽)과 함경북도 길주에 위치했다고 보는 설(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517~523쪽)이 제시되었다.
註 058
울성(亐城) : 사료상에서는 별도로 그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를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조의 ‘옥저성(沃沮城)’(http://db.history.go.kr/id/jo_004_0010_0040_0020)으로 함흥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1987,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체제」, 『경희사학』14, 63쪽).
註 059
비리성(碑利城) :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의 비리성(碑利城)(http://db.history.go.kr/id/gskh_003_0010_0130_0020)과 동일한 지역으로서, 신라의 비열홀(比列忽)이자 오늘날의 함경남도 안변에 해당한다. 연구에 따라서는 과거 낙랑군의 영동 7현중 하나인 ‘불내현(不耐縣)’의 다른 이름인 ‘불이(不而)’에 착안하여, ‘불이성(不而城)’과 같은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59, 「漢四郡과 그 變遷」, 『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161~162쪽).
註 060
양성(▼城) : 양성(梁城)과 같은 곳으로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고구려가 정복한 양맥(梁貊)(http://db.history.go.kr/id/sg_013_0030_0310)의 통치를 위해 세워진 성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태자하 상류의 신빈현 서남부 하협하향(下夾河鄕) 태자성촌(太子城村)에 위치한 태자성(太子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冬達, 1992, 「遼寧新濱高句麗太子城」, 『考古』1992-4, 318~324쪽).
註 061
안부련(安夫連) : 여타 사료에서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지만, 앞의 동해가(東海賈)와 함께 상업집단을 의미했던 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77~279쪽).
註 062
신성(新城) : 지금의 무순(撫順) 북쪽에 있는 고이산성(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
註 063
남소성(南蘇城) : 그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중국 지린성 산성자(山城子) 부근이나(箭內亘, 1913, 「南北朝時代の滿洲」, 『滿洲歷史地理』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흥경(興京) 부근으로 비정된다(津田左右吉, 1915, 「安東都護府考」,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보다 구체적으로 신빈 오룡산성(五龍山城)이나(冬達, 1994, 「新濱五龍高句麗山城」, 『遼海文物學刊』1994-2, 18~24쪽) 혹은 소자하와 혼하의 합류처 동쪽의 철배산성(鐵背山城)을 남소성으로 추정하는 견해(여호규, 1995,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 『한국사연구』91, 8~10쪽)도 제시되었다.
註 064
신래한예(新來韓穢) :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결과 얻은 새로운 지역의 백성을 의미한다. 한(韓)은 백제인, 예(穢)는 옛 대방 땅의 예인(濊人)으로 구분하거나(那珂通世, 1915, 『那珂通世遺書』, 故那珂通世博士功績紀念會, 498쪽), 한예를 백제·가야인으로 보는 견해(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78쪽), 황해도와 경기 북부 지역의 주민 중 차출 대상으로 보는 견해(전진국, 2014, 「「廣開土王陵碑」의 新來韓穢 - 출신지와 고구려의 인식을 중심으로」, 『고구려발해연구』48)등이 있다.
註 065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 : 대다수의 연구에서 백제의 수도 한성 남쪽에 거주하는 한족을 일괄 지칭한 표현으로 보고 있지만, 영락 10년조에 등장하는 남거성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那珂通世, 1893, 「高句麗古碑考」, 『史學會雜誌』 49, 500쪽)나 영락 17년조의 전쟁 대상을 가야 지역으로 보며 이들을 칭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오길환, 1988, 「「廣開土王碑文」 ‘守墓人煙戶’ 조의 재검토 - ‘新來韓穢’ 36地域을 中心으로」, 『전통문화논총』6, 242~243쪽)도 제시되었다.
註 066
구민(舊民) : 여기에서의 ‘구민(舊民)’이 ‘신래한예(新來韓濊)’를 제외한 나머지 고구려 영역 전체에서 차출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건국 이후 영역 확장의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견의 차이가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구민을 광개토왕대 확보한 영역 이전의 고구려인 전체(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4~225쪽)나 “구래 영역의 백성”(武田幸男, 1979,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 『東洋文化硏究所紀要』78)등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그 차출지가 보다 구체적으로 한정되며, 대체로 고구려 건국 이후 영역 확장의 과정에서 복속한 지역의 정복민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 ‘구민’은 기존의 정복지로서 새로운 정복지인 신래한예와 대비되는 존재들인 것이다(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65 ; 임기환, 1995, 『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공석구, 2011,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광개토왕의 왕릉관리」, 『高句麗渤海硏究』39). 한편 구민을 좀 더 구체적으로 특정하여 이들이 소수림왕릉, 고국양왕릉을 수묘하던 수묘인을 지칭했다고 보거나(이인철, 1996, 「廣開土好太王碑 守墓人烟戶條를 통해 본 高句麗의 南方經營」, 『廣開土好太王碑 硏究, 100年(下)』, 722쪽), 혹은 구민이 본래 고구려의 주민이었지만 왕족 유력자들의 노예로서 수묘인으로 제공된 이들이었다고 보는 견해(井上秀雄, 1975,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文解說」, 『好太王碑探訪記』, 三秀舍, 77쪽)도 있다.
註 067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 이 구절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본래 선왕들의 묘지에 수묘인의 연호를 기록한 비석이 별도로 없었지만, 광개토왕의 명령으로 각 왕묘에 이를 새긴 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집안 지역의 왕릉급 고분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제외하고는 문자가 있는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해당 비석이 「광개토왕릉비」에서 전하는 ‘묘상(墓上)에 비(碑)’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연구들 중에서는 「지안고구려비」가 이 ‘묘상(墓上)에 비(碑)’ 중 하나로 이를 ‘수묘비’라 정의하기도 한다(集安市博物館, 2013, 「集安高句麗碑調査報告」, 『東北史地』 3 ; 여호규, 2013, 「신발견 〈集安高句麗碑〉의 구성과 내용 고찰」, 『韓國古代史硏究』 70 ; 조법종, 2013, 「집안 고구려비의 특성과 수묘제」, 『신발견 고구려비의 예비적 검토』, 고구려발해학회). 그러나 이 비석은 광개토왕의 수묘제 정비 과정에서 세워졌지만, 수묘비보다는 매매금지령 등의 조치를 포고하기 위한 비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정호섭, 2013, 「集安 高句麗碑의 性格과 주변의 高句麗 古墳」, 『韓國古代史硏究』 70).
註 068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 : 능비에서는 당시 고구려에서 수묘인이 매매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전한다. 이를 주목하여 수묘인이 매매대상이었기 때문에 전쟁 포로로 노비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었다(백남운 著 하일식 譯, 1994, 『朝鮮社會經濟史』, 이론과 실천, 218쪽). 그러나 수묘인이 ‘가(家)’를 이루며 일정한 자기경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수묘인이 군역을 면제받은 대신, 그 대가로 수묘를 역(役)의 형태로 부여받은 농민들이라고 파악한 연구(김석형, 1957, 「三國時代の良人農民」, 『古代朝鮮の基本問題』, 學生社, 95~96쪽) 이래 다수의 연구자가 수묘인을 양인이거나 혹은 양인에서 어떤 이유로 신분의 하강이 일어난 이들로 본다. 이들은 수묘인은 국연은 양인, 간연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고, 매매행위도 노예로서가 아닌 경제적인 궁핍함 등의 사정으로 인해 자신들을 파는 행위라고 보거나(손영종, 2001, 『광개토왕릉비문연구』, 중심, 106쪽) 본래 천민도 노예도 아니었지만, 수묘역을 부담하면서 賤民化 되어 이들이 일반 양인보다 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본 견해(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28쪽), 노예의 신분은 아니었으나 일정 지역에 집단 이주된 사람들이며 국역의 의무를 진 비자유민(박시형, 1966,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226쪽), 수묘역은 일반 양인이 담당할 역이 아니며 이들은 강제로 이주되었으므로 일반 양인보다는 낮은 신분(김현숙,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韓國史硏究』65, 33~34쪽), 혹은 경제적인 몰락에 따라 노비화 현상이 일어나 매매의 대상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양인이었다는 주장(임기환, 1994, 「廣開土王碑의 國烟과 看烟」, 『역사와 현실』13) 등이 있다. 그리고 구민과 신래한예 사이에도 신분 격차가 있어, 구민은 대체로 양인이며 신래한예의 수묘인들은 이보다 사회경제적 위상이 낮았으며, 매매금지 조치는 기본적으로 이들을 고려하여 제정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정호섭, 2012, 「廣開土王碑의 성격과 5세기 高句麗의 守墓制 改編」, 『선사와 고대』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