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문
갑진년(甲辰年)註 001 1월 15일에 훼부(喙部)註 002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註 003 사훼부(沙喙部)註 004 사부지(徙夫智) 갈문왕(葛文王),註 005 본파부(本波部)註 006 ▨부지(▨夫智) 오간지(五干支),註 007 잠훼부(岑喙部) 흔지(昕智) 간지(干支),註 008 사훼부 이점지(而粘智) 태아간지(太阿干支)註 009, 길선지(吉先智) 아간지(阿干支)註 010, 일독부지(一毒夫智) 일길간지(一吉干支)註 011, 훼(喙) 물력지(勿力智) 일길간지, 신육지(愼肉智) 거벌간지(居伐干支)註 012, 일부지(一夫智) 태내마(太奈麻)註 013, 일이지(一尒智) 태내마, 모심지(牟心智) 내마(奈麻)註 014, 사훼부 십사지(十斯智) 내마, 실이지(悉尒智) 내마 등이 교(敎)한 바의 일이다.
별도의 교(敎)에서 명령하시기를,註 015 거벌모라(居伐牟羅)註 016와 남미지(男弥只)註 017는 본래 노인(奴人)註 018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지만, 전시(前時)에 왕(王)註 019이 법을 크게 교(敎)하여註 020 주었다. 그러나〉 도로註 021가 좁고 막혀서 이야은성(尒耶恩城)이 실화(失火)로 성을 태워 우리 대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이 한 자들은 모두 맹세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국토를 지키고 왕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이에 대노촌(大奴村)註 022은 오(五)註 023를 부담케 하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노인법(奴人法)註 024에 따라 조처하라.
신라의 6부는 얼룩소를 죽여註 025 몸을 정갈하게 씻고 아뢴다. 일을 처리한 대인은 훼부의 내사지(內沙智) 내마, 사훼부의 일등지(一登智) 내마, 남차(男次) 사족지(邪足智),註 026 훼부의 비수루(比須婁) 사족지, 거벌모라도사(居伐牟羅道使)註 027인 본세(本洗) 소사제지(小舍帝智),註 028 실지도사(悉支道使)인 오루차(烏婁次) 소사제지, 거벌모라의 니모리(尼牟利) 일벌(一伐), 이의지(尒宜智) 파단(波旦), 탄지사리(䋎只斯利) 일금지(一金智)註 029, 아대혜촌사인(阿大兮村使人)註 030 나이리(奈尒利), 장(杖) 60, 갈시조촌사인(葛尸條村使人) 나이리(奈尒利) 거▨척(居▨尺), 남미지촌사인(男弥只村使人) 익▨(翼▨), 장(杖) 100, 어즉근리(於卽斤利), 장(杖) 100, 실지군주(悉支軍主)인 훼부의 이부지(尒夫智) 내마.
사인은 3가지 유형이 있다. 1유형: 왕경인의 명령을 전달하는 지방민, 2유형: 지방민으로 촌의 유력자, 3유형 왕경인 출신의 임무수행자이다. 지방민인 1, 2유형은 자신의 출신지에 거주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당시 촌제(村制)를 실시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방민을 자신의 출신지에 묶어두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본 비문에 나오는 사인은 제2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당시 도사가 파견되지 않는 촌에서 도사의 명령을 받고 수취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중앙의 명령을 자신의 출신지인 지방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국가권력이 자신이 거주하는 촌까지 전달하는 매개 역할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註 031 글을 짓고 쓴 사람註 032은 모진사리공(牟珍斯利公)註 033 길지지(吉之智),註 034 사훼부의 약문(若文) 길지지이고, 글을 새긴 사람註 035은 훼부의 술도(述刀) 소오제지, 사훼부의 모리지(牟利智) 소오제지이며, 비석을 세운 사람은 훼부의 박사(博士),註 036 이에 교(敎)한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註 037 하늘에 죄를 얻을 것이다.
註)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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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은 3가지 유형이 있다. 1유형: 왕경인의 명령을 전달하는 지방민, 2유형: 지방민으로 촌의 유력자, 3유형 왕경인 출신의 임무수행자이다. 지방민인 1, 2유형은 자신의 출신지에 거주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당시 촌제(村制)를 실시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방민을 자신의 출신지에 묶어두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본 비문에 나오는 사인은 제2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당시 도사가 파견되지 않는 촌에서 도사의 명령을 받고 수취를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중앙의 명령을 자신의 출신지인 지방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국가권력이 자신이 거주하는 촌까지 전달하는 매개 역할도 했다고 생각한다.
註) 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