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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문
[전면]
[01]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註 001인 국학소경(國學少卿)註 002 김(金)▨▨가 임금의 교(敎)를 받들어 찬술하다.
[02] … 하늘과 짝하여 만물과 통하며, 땅을 나눠 주고 그 나라를 경영함에 덕을 쌓아 … 당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靈命을 …
[03] … 경진씨(鯨津氏)註 003를 파견하여 삼산(三山)註 004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와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黃龍)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04] … 그 능한 바에 최선을 다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진다. 〈그래서〉 땅은 팔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註 005 그 훈공은 삼한에 뛰어나, 그 넓고 높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05]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火官)註 006의 후예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투후(秺侯)註 007의 후손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06] … 15대조 성한왕(星漢王)註 008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혼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고 다스리며, 옥란(玉欄)을 대하였다.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과 같고, 마치 석뉴(石紐)註 009를 보고 금수레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07] … 대왕註 010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모가 뛰어났고, 도량은 바다와 하천과 같았으며 위엄은 우레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없어지니, 만 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08] … 간▨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 성▨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09] … ▨▨사회(▨▨舍誨)는 이에 성철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때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자는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 … ▨봉을 ▨하여 ▨간하고, 5백 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머무르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추는 것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에 부합하고 성정이 흥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 … 바탕을 돕고, 정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주나라는 교재(橋梓)註 011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註 012가 사▨(社▨)의 ▨에 응하여 …
[13] … 임금이 돌아가시고註 013 풍악은 멎었다. 재진(在辰) 이후에 …
[14] … 순 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 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 … 빛나고, 구열(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 … 천사도 감통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 …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註 014 자주 이쪽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을 …
[19]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註 015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 … 적의 수도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註 016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註 017 그 신하들도 …
[21] … 3년이었다. 용삭 원년(661년, 문무왕 즉위)에 이르러 …
[22]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을 ▨함을 …
[23] … 조정과 백성이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 … 진백(秦伯)의 터전을 다시 일으켰다. …
[25] …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註 018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 … 군대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후면]
[01] … 환산(丸山)에 공적을 기록한 장수가 있어 …
[02] … 곧바로註 019 9주를 바르게 다스려 바로 잡고, 동서로 정벌하여 …
[03] … 궁 침실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04] …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05] … 화장을 하라 하니, 그 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06] … 천황대제(天皇大帝)註 020께서 …
[07] … 왕의 예절에 맞았다. 군왕은 도량이 …
[08]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팔정(八政)註 021의 ▨과 같았다. …
[09]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의 현명한 왕이시요, 실로 천(千) …
[10]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 … 못을 여니 호량(濠梁)註 022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드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곰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雞) …
[14] … 단청은 기린각(麒麟閣)註 023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註 024에서 닳고 헤어졌다.
[15]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三山)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 … 진실로 용맹하시고 진실로 큰 덕이 있으시고, 재능이 많으셨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註 025
[18]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三軍)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穢)까지 찾아와 군역(軍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 … 풍교(風敎)를 흠모하여, 단증(丹甑)註 026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註 027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註 028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는 화장을 하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 … 25일註 029에 비석을 세우다.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註 030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註) 001
급찬(及飱) :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9관등이며, 급별찬(級伐飡), 급간(級干), 급복간(及伏干) 등으로 표기하였다.바로가기
註) 002
국학소경(國學少卿) : 국학에는 장관급인 경(卿) 1인을 두었는데, 이 ‘소경’은 그 아래에 있었던 관직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003
경진씨(鯨津氏) : ‘경진(鯨津)’은 '고래나루', 즉 바다에 임한 큰 나루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경진씨’는 의미를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4
삼산(三山) : 중국 전설 상의 삼신상, 즉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보이는 대사(大祀)의 대상이 되는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 등 삼산(三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註) 005
팔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 원문 ‘八夤’은 팔방(八方)의 끝을 의미한다.바로가기
註) 006
화관(火官) : 화정(火正) 또는 축융(祝融)이라고도 하며, 대화성(大火星)에 제사를 지내고 불을 담당하는 관리이다.바로가기
註) 007
투후(秺侯) : 중국 한나라의 무제에게 총애를 받았던 김일제(金日磾, B.C. 134~86)를 말한다.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지만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토벌할 때에 포로가 되어 귀순하였다. 그 뒤에 한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무제를 구한 공으로 투후에 봉해졌다. 그는 무제로부터 부왕인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에 따라 김씨(金氏)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08
성한왕(星漢王) : 신라의 시조로 등장하는 인물로 김알지(金閼智), 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으로 보는 견해,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등 견해가 다양하다. 그 해석에 따라 신라 왕실의 근원과 계통이 달라진다.바로가기
註) 009
석뉴(石紐) : 중국 쓰촨성[四川省] 원촨현[汶川县] 서북쪽에 있는 하나라를 세운 우왕(禹王)의 탄생지이다. 여기서는 임금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註) 010
대왕 : 문무왕을 지칭하는 듯하며, 태종무열왕으로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註) 011
교재(橋梓) : 부자지간을 의미한다.바로가기
註) 012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시호이며, 674년~749년까지 사용하였다.바로가기
註) 013
임금이 돌아가시고 : 원문 “宮車晏駕”는 일반적으로 천자가 돌아가신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당 태종이 승하한 것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14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 백제 의자왕이 처음에 신라의 국경을 자주 침략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바로가기
註) 015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 원문은 “列陣黃山 蝟聚鴟張”으로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신라군과 계백의 백제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표현하였다.바로가기
註) 016
군문 : 원문의 ‘원문(轅門)’은 군문을 의미하며, 진영의 문이라는 뜻이다.바로가기
註) 017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 원문 “元惡泥首轅門”은 적의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더럽혔다는 뜻으로, 백제의 의자왕이 항복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바로가기
註) 018
읍루(挹婁) : 『삼국지』 등에서 읍루로 불리는 종족은 부여나 옥저의 북쪽에 있었다. 선진(先秦)시대에는 숙신(肅愼)으로, 남복조시대에는 물길(勿吉)로, 수당시대에는 말갈(靺鞨)로 불렸다. 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바로가기
註) 019
이하의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문무왕의 유조(遺詔)와 관련 있다.바로가기
註) 020
천황대제(天皇大帝) : 당 고종(재위 649~683년)이 674년(상원上元 원년)에 황제의 칭호를 천황(天皇)으로 고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천황대제는 자미궁에 속한 별의 이름이기도 하다.바로가기
註) 021
팔정(八政) : 중국 하나라 우왕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이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8가지 정사를 지칭한다.바로가기
註) 022
호량(濠梁)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펑양현[鳳陽縣] 동북쪽의 호수에 있던 다리 이름이며, 일반적으로 못의 제방을 말한다. 여기서는 문무왕 14년(674) 2월에 수축한 월지(안압지)를 가리키는 듯하다.바로가기
註) 023
기린각(麒麟閣) :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가 상스러운 동물인 기린을 얻어 세운 누각이며, 공신 11인의 상을 그려서 건물 안에 걸었다 한다.바로가기
註) 024
운대(芸臺) : 중국 한나라의 비서감(秘書監)이며, ‘운서(芸暑)’, ‘운각(芸閣)’ 등으로 불렸다.바로가기
註) 025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원문은 탄‘질(呑蛭)’로,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한저(寒葅)를 먹을 때 그 속에서 지렁이가 발견하었으나 요리사가 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삼켰다는 고사를 말한다. 이는 왕의 신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고사이다.바로가기
註) 026
단증(丹甑) : 단증: 풍년에 나타나는 성스러운 물건이다.바로가기
註) 027
적오(赤烏) : 제후들이 면복(冕服)에 신는 붉은 신발이다.바로가기
註) 028
황웅(黃熊) :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아버지인 계(啓)의 영혼이 변화한 것이며, 여기에 제사를 지내면 흉한 것이 길한 것으로 전환된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29
25일 : 본 비의 건립 시기로 추정되는 신문왕 2년(682) 7월 25일이다.바로가기
註) 030
한눌유(韓訥儒) : 통일신라시대 금석문에서 한씨(韓氏)가 처음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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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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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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