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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鉛植

判讀文

(뒷면)
元和 五年註 001 庚寅 六月 三日, 順表□塔, 金堂, 治成註 002文, 記之. 辛亥年註 003, 仁陽寺註 004
鐘, 成. 辛酉年註 005, 六寺 安居註 006, 食註 007 六百六石. 壬戌年註 008, 仁陽寺, 妙()戶 頂礼石註 009, 成.
同寺, 金堂註 010 治. 同年, 羊熱 楡川 二駅註 011, 施 食 百二石. 乙丑年註 012, 仁陽 无上舍, 成.
壬午年註 013, 京註 014 奉德寺註 015, 永興寺註 016, 天巖寺, 寶藏寺, 施 食 二千七百十三石, 壬午
年, 仁陽寺, 三寶註 017 中 入 食 九百五十四石. 同年, 塔盧半 治註 018. 癸未年註 019, 仁陽寺, 金
堂內, 像註 020, 成. 同年, 苑池寺, 金堂內, 像, 成. 癸未年, 仁陽寺, 塔 弔四層註 021, 治. 同年,
仁陽寺, 佛門註 022 四角鐸註 023, 成. 乙酉年註 024, 仁陽寺, 金堂, 成. 開□堂, 盖. 丁亥年註 025, 須彌註 026,
成. 己丑年註 027, 常樂寺, 无尽倉 註 028, 成. 庚寅年註 029, 同寺, 无□倉(), 成. 同年, 大谷寺註 030, 石塔,
成. 己丑年, 仁陽寺, 赤戶階, 成. 寺戶註 031, 石梯, 頂礼二石, 成. □鶴足石, 成. 庚寅
年, 龍頭註 032, 成. 辛亥年, 初, 庚寅年, 至, 間 □合用() 食 一萬五千五百九十五石.
(우측)
夫大(出?)要 多語求之□等□□□門八萬註 033 (이하 결락)
有 木食巖居註 034 草□石□註 035 (이하 결락)
(좌측)
依三寶, 奉報四恩註 036. 復有, 偏身獻佛註 037, 役力供僧, 栖遲廻谷註 038, 宴默深山,
雪中截臂註 039, 碓下通心註 040, 怜鳩割股註 041, 念佛投身註 042. 如此等類, 皆是 菩提註 043.
註) 001
元和는 唐나라 憲宗의 연호로 806년부터 820년까지 사용되었다. 원화 5년은 810년, 신라 憲德王 2년에 해당된다.바로가기
註) 002
이 비문에는 治와 成이 따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의미상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글자의 뜻대로 하면 治는 수리한다는 뜻이 되고, 成은 완성하였다는 뜻이 된다.바로가기
註) 003
惠恭王 7년, 771년에 해당된다.바로가기
註) 004
경상남도 창녕읍 校洞에 있던 절인데 구체적인 창건경위는 명확하지 않다.바로가기
註) 005
신해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해로 宣德王 2년, 781년에 해당된다.바로가기
註) 006
범어로 Varsa라고 하며 승려들이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한 곳에 모여 외출을 금지하고 수행하는 제도이다. 원래 인도에서 여름에 승려들이 돌아 다니다가는 폭풍우를 만나거나 초목과 벌레들을 해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이 여름 안거 이외에 음력 10월 16일부터 다음해 정월 15일까지 행하는 겨울 안거도 있다.바로가기
註) 007
鮎貝房之進은 사찰의 금석문이나 고문서 등에서 ‘食 ○○石’ 등의 기록이 많은 점을 근거로 하여서 식(食)을 곡물의 종류로 파악하고, 이것을 田米 혹은 粟米로 간주하고 있지만 (『雜攷』第6輯), 그러한 자료들은 모두 사원의 재정 조달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곡식의 종류를 나타낸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食이 구체적인 곡식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도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곡식의 종류를 쓰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시의 주곡이면서 가치 있는 교환품으로 사용된 쌀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08
宣德王 3년, 서기 782년이다.바로가기
註) 009
頂禮는 接足禮, 頭面禮라고도 하며 부처의 발에 자신의 이마를 대는 것으로써, 자신의 가장 귀한 것으로 상대방의 가장 천한 곳에 대기 때문에 가장 극진한 경례법이 된다. 頂禮石은 拜禮石을 의미한다.
『圓覺經疏』以己最勝之頂 禮佛最卑之足 敬之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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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0
사찰의 가장 중심되는 건물로서 사찰의 본존불을 모시는 곳이다.바로가기
註) 011
駅은 종래 駟로 판독되었는데 탁본 검토결과 駅자로 보이며 이것은 물론 驛의 약자이다. 실제로 楡川驛은 고려시대의 역으로 나오고 있다. 羊熱驛은 명확하지 않지만 역시 당시에 역으로 기능하던 곳임이 분명하다.
『고려사』 권36 兵志 2 站驛 金州道에 楡川驛이 창녕의 內也驛 근처에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지금의 淸道郡 지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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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12
元聖王 원년, 785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013
哀莊王 3년, 802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014
新羅의 서울인 慶州를 의미한다.바로가기
註) 015
『三國遺事』 聖德王 조에 聖德王이 太宗大王을 위하여 경주에 건립한 절이라고 한다. 景德王 때에 부왕인 성덕왕을 위하여 12만근의 큰 종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惠恭王 때에 완성되었다. 그후 北川이 넘쳐서 봉덕사가 묻히게 되자 靈廟寺로 이 종을 옮겼는데 지금 국보 99호인 聖德大王神鐘이 이것이다.바로가기
註) 016
『三國遺事』 阿道基羅조에 의하면 아도가 신라에 포교하는 것을 도와준 毛祿의 누이 史氏가 三川이 갈라지는 곳에 창건한 절이라고 하며, 후에 법흥왕비 巴刀夫人이 출가하여 이름을 妙法이라고 하며 머물렀던 곳이다.바로가기
註) 017
三寶는 원래 佛寶, 法寶, 僧寶라고 하여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인 경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라, 고려시대에 사원의 자금 운용을 위하여 실시하던 寶의 명칭이 아닌가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18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盧半을 露盤, 곧 상륜부의 가장 아래에 있는 盤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탑의 상륜부를 수리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만, 半자를 뒤로 이어 塔盧를 반절 정도 건립하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탑로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전자의 해석이 보다 타당하지 않나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19
哀莊王 4년, 803년에 해당된다.바로가기
註) 020
金堂에 안치할 본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21
弔는 탑이 허물어졌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鮎貝房之進은 弔자를 弓의 변형으로 보고 弓이 穹과 통한다고 하여 옥개석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바로가기
註) 022
부처에게 들어가는 문으로 원래는 부처의 가르침 곧 釋門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사찰 입구의 문, 곧 寺門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23
鮎貝房之進은 四角은 네모서리, 鐸은 그 모서리에 다는 풍경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바로가기
註) 024
哀莊王 6년, 805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025
哀莊王 8년, 807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026
須彌壇으로 사원의 본전 정면에 안치하는 단이다.바로가기
註) 027
憲德王 1년, 서기 809년이다.바로가기
註) 028
無盡(无尽)藏(무진장)은 중국 南北朝 시대에 시작된 사원의 재단으로, 원래의 뜻은 불교의 福田 사상에 근거한 ‘무궁무진하게 이어질 수 있는 재보’로서 사찰의 재산이나 신도들이 寄進한 재물을 기본 재산으로 하여 高利貸를 통하여 그 이식으로 사원의 운영과 빈민구제 등을 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성행한 사찰의 寶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無盡藏은 또 한편으로는 사원의 재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비에서의 글자 판독은 완전하지 않지만 글자의 자형이 盡의 약자인 尽과 비슷하여, 무진장의 위의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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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9
헌덕왕(憲德王) 2년으로 서기 810년이다.바로가기
註) 030
慶北 月城郡 西面 大谷里 탑동에 있던 절로 지금은 석탑이 남아 있다.바로가기
註) 031
戶는 원래 門의 뜻을 갖는 것이므로 寺戶는 앞의 佛門과 마찬가지로 절의 입구에 있는 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32
龍頭는 龍首라고도 하며 원래 범종의 위에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하여 붙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양사의 종은 이미 신해년에 만들어진 상태이므로 종과 관계없이 용두만 만든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서 鮎貝房之進은 이 용두를 건물의 지붕 구석에 붙여 놓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이나 기와로 이해하였다.바로가기
註) 033
이 부분의 내용은 불교에서 복을 짓는 길이 많은 것을 8만 4천 가지라고 이야기 한 것과 관계되는 것 같다. 이 시기의 금석문에서 이러한 구절이 많이 보이는데 모두 그 중에 불탑을 세우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서 당시의 불탑 신앙과 관련한 사상적 배경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내용이 기록된 「敏哀大王 石塔記」와 「昌林寺 無垢淨塔記」의 일부를 적어 본다.
「敏哀大王石塔記」
若夫聖敎所設 利益多端 雖有八萬四千門 其中聿鎖業障 廣博利物者 無越於 崇建佛圖禮懺行道
「昌林寺無垢淨塔記」
聞, 經之言. 有爲功德, 厥數萬端, 而利物無邊者, 莫若 崇建 塔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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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4
木食은 나무 껍질을 먹는 것을 의미하고, 巖居는 바위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수행을 위하여 많은 고행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宋高僧傳』 智封,
焂辭出蒲津安峯山 禁足十年 木食澗飮
『淮南子』 人間訓,
巖居谷飮 不衣絲麻
『韓非子』 詭使,
如此 則士之飢餓乏絶者 焉得無巖居苦身 以爭名於天下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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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5
이 부분도 앞의 木食巖居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참고로 수행을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草衣가 있다.
『後漢書』 黨錮列傳 序,
或起徒步 而仕執圭 解草衣 以升脚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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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6
불교에서 말하는 네가지 은혜로써 부모, 국왕, 중생, 삼보 등을 가리킨다. 혹은 부모, 스승, 국왕, 시주를 가리키기도 한다.바로가기
註) 037
偏身은 遍身의 잘못이라고 생각되며 遍身은 온 몸을 말한다. 곧 遍身獻佛은 온 몸을 부처에게 바친다는 의미이다.바로가기
註) 038
栖遲는 편안히 지낸다는 뜻이다.바로가기
註) 039
禪宗의 제 2祖가 되는 慧可가 崇山 少林寺로 達磨大師를 찾아 갔다가 만나주지 않자 눈속에서 자신의 왼팔을 잘라 정성을 보였다는 일화가 있다.바로가기
註) 040
禪宗의 6祖인 慧能이 5조 弘忍의 문하에서 수도할 때 8개월 동안 방아를 찧는 일을 맡았다가 깨우침을 얻었다는 고사가 있다.바로가기
註) 041
菩薩이 前生에 尸毗라고 하는 곳의 왕이었을 때, 비둘기가 매에 쫓겨 도망오는 것을 보고 비둘기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는 고사가 『菩薩本生鬘論』 卷一에 나온다.바로가기
註) 042
『三國遺事』 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眞表律師가 불법을 깨치지 못함을 발분하여 자신의 몸을 절벽 아래로 던지자 靑衣童子가 진표의 몸을 받아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바로가기
註) 043
범어로 Bodhi라고 하며 道, 智, 覺이라고 번역한다.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의 지혜 곧 佛果를 가리키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깨우침을 얻기 위하여 닦는 길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리’라고 읽는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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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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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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