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문
무릇 지극한 도는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周)나라 때 자취를 드러내었고,註 001 부처[能仁]註 002는 가는 듯하고 오는 듯 하지만 일찍이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꿈에 모습을 나타내었다.註 003 〈불교의〉 기원은 서역에서 〈불법의〉 등불이 전해져 동방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에 불일(佛日)의 그림자가 해 뜨는 땅을 덮어 비추었다. 패엽(貝葉)의 경문註 004이 패수(浿水)註 005를 넘어 〈신라를〉 일깨워, 용궁 같은 절들이 우뚝우뚝 솟고 기러기처럼 탑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니, 사위성(舍衛城)註 006의 경계가 여기에 있고 극락의 땅에 가깝다.註 007 중아찬註 008 김지전(金志全)은註 009 신령스러운 산천의 기운으로 태어났으며 성신(星辰)이 내린 덕을 받아 성품은 구름과 노을에 맞고 정은 산수와 벗하였다. 현명한 자질을 갖추어 명(命)을 이어 받았고 지략을 품어서 시정(時政)을 보좌하니 대궐에 나아가 경륜을 쌓아 곧 상사(尙舍)註 010에 제수되어 어명을 받들었다. 계림에 머물며 인수(印綬)註 011를 이끄니 집사시랑註 012을 역임하였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법림(法琳)이 『주서이기(周書異記)』에 의거하여 “석가가 희주(姬周) 소왕(昭王) 24년 갑인년에 태어났다.”고 하였다(『大正新修大藏經』 卷50 485中 “佛以姬周昭王二十四年甲寅歲生”). 그러나 갑인년은 소왕 26년이며 기원전 1027년에 해당한다. 석가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희주 26년설은 북방설로 우리나라에서도 이 연대를 사용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유통1의1 의연(義淵)조에서도 석가의 탄생·출가·성도의 연대에 대해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집사부의 차관이다. 집사부는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개편한 것으로 왕정의 기밀을 맡은 최고 기관이다. 장관은 중시(中侍) 1인이고, 차관은 전대등(典大等) 2인을 두었다. 이후 경덕왕 6년(747)에 중시를 시중, 전대등을 시랑으로 고쳤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따라서 집사시랑이라는 관직명은 김지성의 생존 기간과 맞지 않는다. 이에 집사시랑이 이미 진덕왕 때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거나(末松保和, 1954,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 『新羅史の諸問題』), 또는 이 불상이 747년 이후에 완성되었거나 명문이 후대에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 『歷史學報』63, 143쪽).
나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註 013 세간을 피해 한적한 곳에 거처하니 사호(四皓)註 014의 고상함과 같았고, 영화를 버리고 성품을 기르니 양소(兩疏)가 물러날 때를 안 것과 같았다.註 015 무착(無著)註 016의 진종(眞宗, 불교)을 우러러 사모하여 때때로 『유가론』註 017을 읽고 겸하여 장자[莊周]註 018의 그윽한 도를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편」을註 019 열람하였다. 자애로운 부모 은덕에 보답하는 것은 십호(十號, 부처)의 힘만한 것이 없고, 성스러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함은 삼보(三寶)註 020의 인연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국주대왕註 021과 이찬(伊飡)註 022 개원공(愷元公),註 023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註 024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처 고로리(古路里), 죽은 여동생 고보리(古寶里),註 025 또 처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그 감산장전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이에 석조 아미타상 1구를 만드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인연이 피안에까지 넘어가 사생(四生)註 026과 육도(六道)註 027의 중생 모두가 보리를 증득하게 하소서.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들. 『삼국유사』에는 무열왕과 문희 사이의 아들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아찬(大阿飡)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여 모셔왔다. 효소왕 4년(695)에 상대등에 올랐으며, 성덕왕 5년(706)에 인품이 새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이때까지 김개원이 상대등을 역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문무왕 11년(671)에 중시가 된 예원(禮元)과 개원을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文明大, 1974(上), 102쪽).
개원 7년(719)註 028 기미년 2월 15일에 내마(奈麻) 총(聰)註 029이 교(敎)를 받들어 지었고 사문 석경융(釋京融) 대사 김취원(金驟源)이 ▨▨▨.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이 나이 47세에 고인이 됨에註 030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註 031 후대에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자는 이 선업의 도움이 있으리라. 김지전 중아찬은 삼가 생전에 이 선업을 받들었으며, ▨9[69]세 경신년註 032 4월 22일에 서거하여 ▨하였다.
註) 001
註) 003
註) 005
註) 006
註) 007
註) 008
註) 010
註) 012
집사부의 차관이다. 집사부는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개편한 것으로 왕정의 기밀을 맡은 최고 기관이다. 장관은 중시(中侍) 1인이고, 차관은 전대등(典大等) 2인을 두었다. 이후 경덕왕 6년(747)에 중시를 시중, 전대등을 시랑으로 고쳤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따라서 집사시랑이라는 관직명은 김지성의 생존 기간과 맞지 않는다. 이에 집사시랑이 이미 진덕왕 때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거나(末松保和, 1954,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 『新羅史の諸問題』), 또는 이 불상이 747년 이후에 완성되었거나 명문이 후대에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 『歷史學報』63, 143쪽).
註) 013
註) 014
註) 015
註) 016
註) 023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들. 『삼국유사』에는 무열왕과 문희 사이의 아들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아찬(大阿飡)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여 모셔왔다. 효소왕 4년(695)에 상대등에 올랐으며, 성덕왕 5년(706)에 인품이 새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이때까지 김개원이 상대등을 역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문무왕 11년(671)에 중시가 된 예원(禮元)과 개원을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文明大, 1974(上), 102쪽).
註) 025
註) 030
註) 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