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大唐故金氏夫人墓誌銘)
전(前) 지계양감(知桂陽監) 장사랑(將仕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이구(李璆)의 부인 경조김씨(京兆金氏)의 묘지명과 서문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가 찬술하였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 수(守) 건주장사(建州長史) 동함(董咸)이 지문과 전액(篆額)을 썼다.
크고 높으신 천자께서 나라를 편안하게 하시고 종파를 드러냈으니,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불렀다. 이는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은 조상이다. 그 후에 종파가 멀어지고 갈래가 나뉘어져 번창하고 아름다워 사방 천하에 만연하였으니 또한 매우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日磾)인데 흉노[龍庭]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으로 귀순하여 한무제(漢武帝)에게 출사하였다. 명예와 절조에서 신중하였으니, 승진하여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되었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해졌다. 투정후에 봉해진 이후 7대에 걸쳐 관직에 있었는데, 돈황(燉煌)에서 바라보다가 경조군(京兆郡)으로 이어졌으니 〔이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재주가〕 견줄 것이 없을 정도로 크더라도, 필시 한 세대가 지나야 인(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여기서 징험된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백성들이〕 흩어짐에 이르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어려운 때를 피하여 먼 곳에 이르렀으니, 고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 충성과 신의가 있고 행동에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으면, 비록 오랑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 도(道)가 또한 행해질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 집안이 요동에 있으면서도 창성함을 회복한 까닭이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인데, 황조(皇朝)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이름은 충의(忠義)로 당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檢校)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소부감내중상사(少府監內中尙使)의 벼슬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공량(公亮)으로 당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였다. 조부와 부친은 문장과 무예에서 재주가 뛰어났고, 평자(平子)를 연구하여 관상(觀象)하는 일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공수자(公輸子)를 궁리하여 귀신같은 기예를 갖추었다. 이에 궁궐 문에서 공부(貢賦)의 등급을 분류하였으며, 여러 조정에서 아울러 일하였으니, 봉록과 작위에서 처음과 끝이 모두 좋고 훌륭하였다. 돌아가신 모친은 농서(隴西) 이씨로 대대로 관직[搢紳]을 역임한 두터운 집안이었다.
〔김씨〕 부인은 판관(判官)의 둘째 딸로 유순하고 곧았으니, 타고난 품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솜씨는 부녀자의 도리에 맞았으며, 부지런히 직무에 힘씀은 옛것으로부터 구한 것이었다. 이씨에게 시집을 감에 중외의 친척들이 모두 어진 부인이라 일컬었다. 부인은 대를 이를 자식이 없어서 전부인의 아들 셋을 기르고 훈육하였는데, 자기 자식보다 더 잘 대하였다. 장차 쌓아온 선행과 풍부한 보답을 기대하였으나, 어찌 천명이 그 명줄과 운명을 헤아린다고 말하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였고, 함통(咸通) 5년(864) 5월 29일에 영표(嶺表)에서 죽었으니 향년 33세였다. 단공(端公)은 옛 생애를 추모하여 시신을 그대로 보존한 채로 산과 강을 넘기를 마치 평지와 내를 건너듯이 하였고,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부인의〕 관에 임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땅에 돌아왔다. 대를 이을 아들 경현(敬玄)과 차자(次子) 경모(敬謨), 그 다음 아들인 경원(敬元)은 모두 슬픔이 외모를 상하게 하였으며, 영친(靈櫬)을 멀리 모실 적에 뒤따르며 부르짖음이 한도 끝도 없었다. 경현 등은 겨우 붙어있는 숨에 의지하여 삼가 예문을 갖추었다. 함통 5년(864) 12월 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향(滻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 묘역에 안장하였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昭王)의 스승[昭王傅]을 지냈고, 친형은 수(守) 우청도솔부(右淸道率府)의 병조참군(兵曹參軍)이었는데, 연이어 조정에 출사하여 가문을 받들고 가업을 이었다. 최희고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추도하는 글을 지었고, 인하여 이로써 명문(銘文)을 청하니, 명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에 앞서 죽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을 누리지 못하고 큰 명줄을 오래도록 이어가지 못하였구나. 어찌 그녀가 아름답고 착하다고 하겠는가. 또한 어질고 성스러움에 엮였구나. 이 짧은 세월을 만나 대종(岱宗)에서 노닐며 곡기를 끊었도다. 큰 도가 이미 끝났구나. 만 가지 변화가 하나로 모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