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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문
무릇 지극한 도는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周)나라 때 자취를 드러내었고,註 001 부처[能仁]註 002는 가는 듯하고 오는 듯 하지만 일찍이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꿈에 모습을 나타내었다.註 003 〈불교의〉 기원은 서역에서 〈불법의〉 등불이 전해져 동방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에 불일(佛日)의 그림자가 해 뜨는 땅을 덮어 비추었다. 패엽(貝葉)의 경문註 004이 패수(浿水)註 005를 넘어 〈신라를〉 일깨워, 용궁 같은 절들이 우뚝우뚝 솟고 기러기처럼 탑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니, 사위성(舍衛城)註 006의 경계가 여기에 있고 극락의 땅에 가깝다.註 007 중아찬註 008 김지전(金志全)은註 009 신령스러운 산천의 기운으로 태어났으며 성신(星辰)이 내린 덕을 받아 성품은 구름과 노을에 맞고 정은 산수와 벗하였다. 현명한 자질을 갖추어 명(命)을 이어 받았고 지략을 품어서 시정(時政)을 보좌하니 대궐에 나아가 경륜을 쌓아 곧 상사(尙舍)註 010에 제수되어 어명을 받들었다. 계림에 머물며 인수(印綬)註 011를 이끄니 집사시랑註 012을 역임하였다.
나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註 013 세간을 피해 한적한 곳에 거처하니 사호(四皓)註 014의 고상함과 같았고, 영화를 버리고 성품을 기르니 양소(兩疏)가 물러날 때를 안 것과 같았다.註 015 무착(無著)註 016의 진종(眞宗, 불교)을 우러러 사모하여 때때로 『유가론』註 017을 읽고 겸하여 장자[莊周]註 018의 그윽한 도를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편」을註 019 열람하였다. 자애로운 부모 은덕에 보답하는 것은 십호(十號, 부처)의 힘만한 것이 없고, 성스러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함은 삼보(三寶)註 020의 인연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국주대왕註 021과 이찬(伊飡)註 022 개원공(愷元公),註 023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註 024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처 고로리(古路里), 죽은 여동생 고보리(古寶里),註 025 또 처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그 감산장전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이에 석조 아미타상 1구를 만드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인연이 피안에까지 넘어가 사생(四生)註 026과 육도(六道)註 027의 중생 모두가 보리를 증득하게 하소서.
개원 7년(719)註 028 기미년 2월 15일에 내마(奈麻) 총(聰)註 029이 교(敎)를 받들어 지었고 사문 석경융(釋京融) 대사 김취원(金驟源)이 ▨▨▨.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이 나이 47세에 고인이 됨에註 030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註 031 후대에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자는 이 선업의 도움이 있으리라. 김지전 중아찬은 삼가 생전에 이 선업을 받들었으며, ▨9[69]세 경신년註 032 4월 22일에 서거하여 ▨하였다.
註) 001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법림(法琳)이 『주서이기(周書異記)』에 의거하여 “석가가 희주(姬周) 소왕(昭王) 24년 갑인년에 태어났다.”고 하였다(『大正新修大藏經』 卷50 485中 “佛以姬周昭王二十四年甲寅歲生”). 그러나 갑인년은 소왕 26년이며 기원전 1027년에 해당한다. 석가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희주 26년설은 북방설로 우리나라에서도 이 연대를 사용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유통1의1 의연(義淵)조에서도 석가의 탄생·출가·성도의 연대에 대해 이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바로가기
註) 002
‘능인(能仁)’은 능히 인(仁)을 행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석가모니를 일컫는다.바로가기
註) 003
후한 명제(明帝: 57~75년 재위)가 영평(永平) 10년(67)에 금인(金人)이 서쪽에서 궁정으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사신을 서역에 보내 불법(佛法)을 구하였다고 한다. 『모자이혹론』, 『사십이장경』, 『위서 석노지』 등에 보이는 기록으로, 중국 불교전래와 관련하여 가장 통용되는 설이다.바로가기
註) 004
옛날 인도에서 불경을 다라수라는 잎에 바늘로 새겨 넣었는데, 이를 패엽경이라 한다.바로가기
註) 005
패수는 일찍이 고조선 때부터 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는 강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청천강, 대동강, 요하 등 다양하게 비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성덕왕 34년(735)에 당나라가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었다”(『삼국사기』 권8 성덕왕 34년조 “義忠迴, 勑賜浿江以南地”)고 하는데, 이는 당나라가 발해를 견제하고자 패강 이남 땅의 신라 영유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때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06
고대 인도 코살라국의 수도. 기타 태자가 소유한 땅을 수달다 장자가 사들인 후 ‘기원정사’를 세웠다. 석가모니 생존이 가장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와 더불어 초기불교의 대표적 가람이다.바로가기
註) 007
‘밀이(密爾)’를 ‘빽빽하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나(『역주 한국고대금석문 Ⅲ』, 301쪽), 밀이(密邇), 즉 ‘가깝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上)-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 『歷史學報』 62, 97쪽; 최영성, 2015, 『한국고대금석문선집』, 문사철, 96쪽).바로가기
註) 008
신라 17관등 중 제 6관등인 아찬을 대상으로 한 특진제도로 중아찬에서 4중아찬까지 존재한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六曰阿湌 或云阿尺干, 或云阿粲. 自重阿湌至四重阿湌”). 아찬뿐 아니라 대나마(제 10관등)과 나마(제 11관등)에도 중위(重位)가 설정되어 있다. 대나마는 9중대나마, 나마는 7중나마까지 있었다. 이러한 중위제는 신분 간 관등의 상한선으로 인한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신라 골품제의 엄격함을 잘 보여준다.바로가기
註) 009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상기」(이하, 「미륵보살상 조상기」)에는 ‘김지성(金志誠)’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로가기
註) 010
신라 때 궁중에서 음식·의복 등을 관장하는 직책이다(文明大, 1974(上), 97쪽). 『삼국유사』에는 “상의봉어(尙衣奉御)”라 하였다(『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바로가기
註) 011
관인(官印) 등을 몸에 찰 수 있도록 매단 끈을 말한다.바로가기
註) 012
집사부의 차관이다. 집사부는 진덕왕 5년(651)에 품주를 개편한 것으로 왕정의 기밀을 맡은 최고 기관이다. 장관은 중시(中侍) 1인이고, 차관은 전대등(典大等) 2인을 두었다. 이후 경덕왕 6년(747)에 중시를 시중, 전대등을 시랑으로 고쳤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따라서 집사시랑이라는 관직명은 김지성의 생존 기간과 맞지 않는다. 이에 집사시랑이 이미 진덕왕 때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거나(末松保和, 1954,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 『新羅史の諸問題』), 또는 이 불상이 747년 이후에 완성되었거나 명문이 후대에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明大, 1974,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 『歷史學報』63, 143쪽).바로가기
註) 013
중국 한나라 사람 설광덕(薛廣德)이 나이가 들어 원제(元帝)에게 사직을 청하니, 원제가 안거(安車) 등을 하사하였다. 설광덕이 고향으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안거를 영광이라 하여 걸어놓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로 하였다.(『한서』 권71 설광덕전) 여기서 유래하여 ‘현거(懸車)’는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바로가기
註) 014
상산사호(商山四皓). 진나라 말기 혼란한 세속을 피해 상산에 은둔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4명의 노인으로, 이들이 모두 수염과 눈썹이 희었기 때문에 사호라고 불렸다.바로가기
註) 015
양소견기(兩疏見機). 양소는 한나라 선제(宣帝) 때 태부를 지낸 소광(疏廣)과 그 조카 소수(疏受)를 가리키며, 이들은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물러날 때를 알고 미련없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서』 권71 소광열전).바로가기
註) 016
범어로 Asaga(아승가, 阿僧伽)라고 하며, 4세기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성의 바라문 출신으로 동생 세친(世親)과 함께 대승불교를 일으켰다.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미륵보살의 말을 엮어 『유가사지론』, 『대승장엄론』 등을 찬술하였고, 『섭대승론』 등을 저술하여 유식사상을 선양하였다.바로가기
註) 017
『유가사지론』 100권. 미륵보살이 설한 것을 무착이 엮은 것으로, 유가파의 기본 논서이다. 바로가기
註) 018
장자의 이름이 ‘주(周)’이다. 바로가기
註) 019
『장자』 내편(內篇) 제1 소요유(逍遙遊).바로가기
註) 020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바로가기
註) 021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702∼737 재위).바로가기
註) 022
신라 17관등 중 제 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二曰 伊尺湌 或云伊湌”).바로가기
註) 023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아들. 『삼국유사』에는 무열왕과 문희 사이의 아들이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아찬(大阿飡)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여 모셔왔다. 효소왕 4년(695)에 상대등에 올랐으며, 성덕왕 5년(706)에 인품이 새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이때까지 김개원이 상대등을 역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문무왕 11년(671)에 중시가 된 예원(禮元)과 개원을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文明大, 1974(上), 102쪽).바로가기
註) 024
신라 17관등 중 제 13관등으로 사지(舍知)라고도 한다(『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十三曰 舎知 或云小舎”).바로가기
註) 025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상기」에는 “동생 양성(良誠) 소사(小舍), 현도사(玄度師), 여동생 고파리(古巴里), 전처 고로리(古老里)”라고 하여 인명 표기가 조금 다르다. 뿐만 아니라 719년 미륵보살상 조상기를 찬술할 당시에 이들 모두 생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註) 026
생물이 태어나는 4가지 형식으로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을 일컫는다.바로가기
註) 027
중생이 업인(業因)에 따라 윤회하는 6가지 길로,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을 말한다.바로가기
註) 028
‘개원(開元)’은 중국 당나라 제9대 현종 때 사용한 연호 중 하나로, 713~741년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개원 7년은 719년이며 신라 성덕왕 18년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029
설총으로 비정한다(葛城末治, 1935, 『朝鮮金石攷』)바로가기
註) 030
‘成之’는 이두식 표현으로 ‘성(成)’은 ‘이루다’ 또는 ‘되다’로 풀이되고, ‘지(之)’는 ‘에’로 풀이된다. 따라서 성지는 ‘됨에’ 또는 ‘되어’로 풀이할 수 있다(양주동, 1943, 『古歌硏究』, 497쪽)바로가기
註) 031
『삼국유사』 권3 탑상4 남월산조에는 “東海攸友邊散也”라고 하였는데, 유우(攸友)는 향찰로 바우, 바위라고 한다(양주동, 위의 책). 한편 흔지(欣支)를 경상북도 영일의 옛이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34 지리1 양주 의창군 임정현조에 “臨訂縣 本斤烏支縣 景德王改名 今迎日縣”에 나오는 근오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文明大, 1974(上), 102〜103쪽).바로가기
註) 032
末松保和는 ‘▨’를 ‘六’으로 추정하여 김지전(김지성)의 나이 “69세”로 해석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 한편 문명대는 ‘在’로 추정하여 ‘성덕왕 19년’으로 해석하였다(文明大, 1974(上), 103〜104쪽). 69세로 보든 성덕왕 19년으로 보든 뒤에 ‘경신년’이라는 간지가 있어 김지전이 사망한 해는 720년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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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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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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