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상륙과 인천 점령
미군의 상륙과 인천 점령
9월 8일 8시 30분에 도선사들을 태운 선도함이 인천에서 수송대를 맞았다.註 001 선도함의 도움은 최고사령관이 일본에 부과한 요구들 중의 하나였다.註 002 항구로의 수송대 이동은 별다른 사고 없이 진행되었고, 약 13시 30분에 제7사단의 부대들이 병력상륙정과 다른 종류의 상륙정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註 003 날씨는 맑고 따뜻했으며, 부두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17시 30분 제17보병연대와 제32보병연대가 상륙했고 인천 점령을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저항에도 맞닥뜨리지 않았다.註 004 다수의 무장한 일본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눈에 띄게 보였다. 인천 부두 근처 주요한 교차지점은 검은 옷을 입은 경찰이 지키고 있었는데, 몇몇은 말을 탔고 그들 모두는 착검된 총을 지니고 있었다. 경찰의 존재는 조선인의 대규모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았다. 한번은, 상륙 이전에 시위가 시도되었다. 하지 장군의 명령을 정확히 시행한 경찰에 의해 군중들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두 명의 조선인이 사망했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註 005
Radio SCAP to Japanese Imperial GHQ, 300458/I Aug. 45. 실제의 무선 연락이 동경의 제국총사령부에 도착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튼 고즈키 장군은 틀림없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알게 되었다(선발대의 인원들을 통해서든지 혹은 하지 장군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메시지를 통해서든,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가 조종사들을 찾아서 조우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Radio CG 17th Area Army to CG XXIV Corps reply to radio NO. 2, CG XXIV Corps to CG 17TH Area Army, 1 September 1945. 고즈키 장군은 나중에 선도함을 보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날씨 상태로 인하여 전 일정표가 약 24시간 늦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부두에는 상당수의 조선인 통역사들뿐만 아니라 부두 노동자와 다른 일꾼들이 있었고, 모두 일본어와 영어로 인쇄된 완장을 차고 있었다. 또한 여전히 칼을 찬 일본인 장교무리와 일부 군 트럭과 운전수들은 미국인들의 지위에 맡겨졌다.註 006 그동안 크럼프 가빈 장군은 무장한 일본 군대의 지역 대표와 다음 날 서울 총독부 건물에서 남조선에서의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註 007 항복식의 시각은 16시로 정해졌다.註 008 예비회담은 9월 8일 약 16시에 인천의 시청에서 개최되었다.註 009
사람들과 장비의 하선과 하역은 그날 밤과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9월 9일 오후까지 제7사단의 주요 제대(梯隊)가 상륙했고, 인천 지역은 이후 제17연대에게 맡겨졌다. 미군의 이동은 일본인이나 조선인의 저항 없이 진행되었고,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註 010 9월 9일, 그 전날 부두에서 미군을 도왔던 인원들(노동자들, 트럭과 운전수들, 일본인 장교들)이 다시 거기에 있었다. 장교들은 이번에는 그들의 군도를 두고 갔다.註 011 이 날 인천 점령이 완료되었고, 그곳 상황은 완전히 통제되었다.
註) 002
Radio SCAP to Japanese Imperial GHQ, 300458/I Aug. 45. 실제의 무선 연락이 동경의 제국총사령부에 도착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튼 고즈키 장군은 틀림없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알게 되었다(선발대의 인원들을 통해서든지 혹은 하지 장군이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메시지를 통해서든,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가 조종사들을 찾아서 조우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Radio CG 17th Area Army to CG XXIV Corps reply to radio NO. 2, CG XXIV Corps to CG 17TH Area Army, 1 September 1945. 고즈키 장군은 나중에 선도함을 보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날씨 상태로 인하여 전 일정표가 약 24시간 늦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註) 003
註) 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