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의 百濟 공격·尉禮함락, 蓋鹵王의 죽음
20년(476)註 001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註 002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註 003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三國史記』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 권 25, 백제본기 蓋鹵王 21년(乙卯)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長壽王)이 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百濟記』의 기사가 『三國史記』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 권 18, 고구려본기 長壽王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 권 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註) 001
『三國史記』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 권 25, 백제본기 蓋鹵王 21년(乙卯)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長壽王)이 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百濟記』의 기사가 『三國史記』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 권 18, 고구려본기 長壽王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 권 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국가명
-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