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 등의 任那 재건의 계책 모의
(2년, 541) 여름 4월 安羅註 001의 次旱岐
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
註 002 등과 加羅註 003의 上首位
古殿奚,註 004 卒麻註 005의 旱岐, 散半奚
註 006의 旱岐의 아들, 多羅註 007의 下旱岐
夷他, 斯二岐註 008의 旱岐의 아들, 子他註 009의 旱岐 등이 任那의 日本府의 吉備臣
이름이 빠졌다과 더불어 百濟에 가서 함께 詔勅을 들었다. 百濟의 聖明王
註 010이 任那의 旱岐들에게, “日本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任那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任那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任那의 旱岐 등이, “전에 두세 번 新羅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新羅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任那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해 있어서 卓淳
註 011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卓淳) 등이라 함은 㖨己呑,註 012 加羅를 말한다. 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速古王,註 013 貴首王註 014의 때에, 安羅·加羅·卓淳의 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註 015 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新羅에게 속임을 당하여 천황을 노엽게 하고 任那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下部 中佐平
註 016
麻鹵, 城方
註 017
甲背昧奴 등을 보내어 加羅에 나아가 任那의 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任那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황이 명령을 내려, ‘속히 任那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任那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任那의 경계에서 新羅를 불러, (조를)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新羅가 틈을 엿보아 任那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新羅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任那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新羅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新羅가 高麗에 구원을 청하여 任那와 百濟를 쳤으나註 018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新羅가 어찌 혼자서 任那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任那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加耶의 한 나라로, 그 위치에 대하여 종전까지는 경상북도 경산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문헌기록으로 미루어 영산, 밀양 방면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 「6세기 전반 伽倻南部諸國의 소멸과정고찰」, 『韓國古代史硏究』 1, 1988). 성립시기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5세기 말, 6세기 초에 고령의 大加耶가 推封(밀양에 비정)에까지 세력을 미칠 때 후기가야연맹으로 소속된 듯하다. 그 뒤 大加耶와 新羅의 혼인동맹 이후 大加耶王에 의하여 주변 소국들에 분산 배치된 신라 왕녀 수행인들의 變服문제로 가야연맹의 내부에 분쟁이 생겼다(『日本書紀』 권 17, 繼體天皇 23년조 참조). 신라가 이를 계기로 창원·영산 방면을 공격하자 己呑國의 函跛旱岐가 신라측에 내응함으로써 쉽게 멸망하였다. 후기가야소국 중 가장 먼저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멸망연대는 529년을 전후한 2~3년간으로 추정된다(金泰植, 앞의 글 참조).
「高句麗廣開土王陵碑」『朝鮮金石總覽』上, p.4에 永樂 9년(399) 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것이 보이는데, 이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註) 005
註) 007
註) 009
註) 010
註) 012
加耶의 한 나라로, 그 위치에 대하여 종전까지는 경상북도 경산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문헌기록으로 미루어 영산, 밀양 방면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 「6세기 전반 伽倻南部諸國의 소멸과정고찰」, 『韓國古代史硏究』 1, 1988). 성립시기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5세기 말, 6세기 초에 고령의 大加耶가 推封(밀양에 비정)에까지 세력을 미칠 때 후기가야연맹으로 소속된 듯하다. 그 뒤 大加耶와 新羅의 혼인동맹 이후 大加耶王에 의하여 주변 소국들에 분산 배치된 신라 왕녀 수행인들의 變服문제로 가야연맹의 내부에 분쟁이 생겼다(『日本書紀』 권 17, 繼體天皇 23년조 참조). 신라가 이를 계기로 창원·영산 방면을 공격하자 己呑國의 函跛旱岐가 신라측에 내응함으로써 쉽게 멸망하였다. 후기가야소국 중 가장 먼저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멸망연대는 529년을 전후한 2~3년간으로 추정된다(金泰植, 앞의 글 참조).
註) 015
註) 017
註) 018
「高句麗廣開土王陵碑」『朝鮮金石總覽』上, p.4에 永樂 9년(399) 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것이 보이는데, 이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국가명
- 가야(加耶)
- 백제(百濟)
- 신라(新羅)
- 고구려(高句麗)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