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使 賀取文 등의 歸國[春秋智의 入唐請兵, 百濟의 멸망] ( 660년 07월16일(음) )

가을 7월 庚子 초하루 乙卯 高麗의 사신 乙相賀取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 高麗의 沙門 道顯의 『日本世紀』에 “7월에 云云, 春秋智001001 春秋智김춘추를 말한다.닫기가 大將軍 蘇定方의 손을 빌려 百濟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002002 春秋智가 ~ 멸망시켰다『三國史記』 권 5, 新羅本紀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 사신을 보내 군대를 청하자, 唐 高宗은 그 다음해 3월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金仁問을 副大摠管으로 삼아 左驍衛將軍 劉伯英 등 水陸 13만 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신라는 6월 21일에 소정방을 德物島에서 맞이하여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7월 13일 의자왕이 熊津城으로 도주하였다가 18일 항복하였다.닫기”고 했다. 어떤 사람은 “百濟가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 注에 “新羅의 春秋智는 (고구려의) 內臣蓋金003003 蓋金淵蓋蘇文의 다른 이름이다.닫기에게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唐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나라 풍속의 衣冠을 버리고 천자에게 따를 것을 청하여, 이웃나라에 화를 끼치고 그 의도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伊吉連博德의 書에 “경신년(660) 8월 백제를 이미 평정한 후 9월 12일 본국(唐)에서 사신들을 풀어주었다. 19일에 西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10월 16일 東京에 돌아와 비로소 阿利麻 등 5인을 만나볼 수 있었다. 11월 1일에 將軍 蘇定方 등이 사로잡은 百濟王 이하 太子 隆 등 여러 왕자 13명, 大佐平沙宅千福·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004004 사로잡은 ~ 50여 명『三國史記』 권 5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년 9월 3일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臣寮 93인, 백성 1만 2천 인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닫기을 朝堂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19일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하사하였다. 24일에 동경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註 001
春秋智 : 김춘추를 말한다.
註 002
春秋智가 ~ 멸망시켰다 : 『三國史記』 권 5, 新羅本紀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 사신을 보내 군대를 청하자, 唐 高宗은 그 다음해 3월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金仁問을 副大摠管으로 삼아 左驍衛將軍 劉伯英 등 水陸 13만 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신라는 6월 21일에 소정방을 德物島에서 맞이하여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7월 13일 의자왕이 熊津城으로 도주하였다가 18일 항복하였다.
註 003
蓋金 : 淵蓋蘇文의 다른 이름이다.
註 004
사로잡은 ~ 50여 명 : 『三國史記』 권 5에 의하면 太宗 武烈王 6년(659)년 9월 3일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 臣寮 93인, 백성 1만 2천 인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국가명
高句麗
百濟
新羅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