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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金貞卷이 朝貢. 이후 新羅의 來朝에서의 네 가지 조건 제시
(天平寶字 4년, 760) 9월 癸卯 新羅國이 級湌 金貞卷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陸奧按察使 從4位下 藤原惠美朝臣朝猲 등으로 하여금 來朝한 이유를 묻게 하였다. 貞卷이 “職貢을 닦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저희 나라의 왕註 001이 調를 가져다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聖朝의 풍속과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學語 2人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무릇 예물을 가지고 朝聘을 행하는 것은 본래 충성과 신의에 부합하고 예의에 통해야 한다. 그런데 新羅는 이미 말에 신의가 없고 또한 예의를 잃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행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천하게 여기는 바이다. 또한 王子 泰廉이 入朝하던 날에, ‘모든 일에 옛자취를 따라 받들어 행하겠다’고 하였는데,註 002 그 후에 小野田守를 보냈을 때 너희 나라가 예를 잃었으므로 田守가 사신의 일을 행하지 않고 돌아왔다.註 003 王子도 오히려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더욱이 지위가 낮은 사신이야 어찌 의지할 만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貞卷은 “田守가 왔을 때 저는 外官으로 나가 있었고 또한 미천한 사람이므로 자세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라 말하였다. 이에 貞卷에게 “使人이 미천하고 보잘 것 없으므로 손님으로 대접할 수 없다. 마땅히 이 길로 돌아가 너의 본국에 알리고, 단독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과 충실하고 믿을 만한 禮 및 옛날과 같은 調, 그리고 분명한 말, 이 네 가지를 갖추어 來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註) 001
신라 景德王(742~764)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002
『續日本紀』 권 18, 天平勝寶 4년(752) 6월 己丑조에 보인다.바로가기
註) 003
小野田守는 天平勝寶 5년(753) 2월 辛巳에 新羅에 사신으로 갔다가 天平寶字 2년(758) 9월에 귀국하였다. 『三國史記』 권 9, 景德王 12년(753)조에는 이 해 8월 “日本國使가 來朝하였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치 않았더니 곧 돌아갔다”고 하는 기사가 보인다.바로가기
국가명
  • 신라(新羅)
주제분류
  • 정치>외교>사신>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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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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