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新羅의 表文과 이에 대한 答書. 新羅使 등에게 朝堂에서 연회를 베품
辛未 新羅 사신이 方物을 바치고 이어, “新羅 國王께서 ‘무릇 新羅는 개국 이래로 聖朝의 역대 천황의 은혜와 교화를 우러러 의지하며 배와 노가 마르지 않게 계속하여 調를 바친 年數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나라 안에 도둑떼의 침입이 있어 入朝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삼가 薩湌 金蘭蓀과 級湌 金巖 註 001 등을 보내어 調를 바치고 겸하여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遣唐判官 海上三狩 등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사신에 딸려 보내고, 또한 常例에 따라 學語生을 보냅니다’고 하셨습니다”하고 아뢰었다. 參議左大弁 正4位下 大伴宿禰伯麻呂가 勅을 선포하여, “대저 新羅國은 대대로 배와 노를 이어서 우리나라에 供奉을 해온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泰廉 등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常貢을 닦지 않고 매번 일마다 무례하였다. 때문에 최근에는 그 사신을 물리쳐 돌려보내고 손님으로 접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朕의 때에 사신을 보내어 朝貢을 하고 겸하여 새해인사를 올리며, 또한 海上三狩 등을 찾아오는 사신편에 딸려 보냈으니 이 수고로움을 朕은 가상히 여긴다. 이제부터 이후로 이와 같이 供奉하면 은혜로 대우함을 더욱 두터이 할 것이며 常禮로 대접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너희 國王에게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날 朝堂에서 唐 및 新羅의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祿을 내렸는데 차이가 있었다.
註) 001
金庾信의 嫡孫인 允中의 庶孫으로 惠恭王代에 활동한 인물이다. 『三國史記』 권 43, 金庾信傳 附 金巖傳에 그의 행적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三國史記』 金巖傳에도 그가 大曆 14년(779, 惠恭王 15년)에 왕명을 받아 日本에 사신으로 갔다고 하여, 『續日本紀』의 기사와 일치를 보이고 있다. 金巖傳에 따르면, 이 때 일본의 국왕(光仁天皇)은 그의 도술이 높음을 알고 억지로 더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 때 그는 마침 日本에 와 있던 唐나라 사신 高鶴林과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므로 서로 즐거워하니, 이를 본 일본인들은 金巖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임을 알고 더욱 두려워하였다고 한다.바로가기
국가명
  • 신라(新羅)
주제분류
  • 정치>외교>사신>유형
  • 정치>외교>문서>내용
디지털역사자료 인용방법
닫기
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오류신고
닫기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이트 하단의 ‘오류신고’ 메뉴를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명
일본육국사 한국관계기사
자료위치
자료상세화면
자료 선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