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燕王 盧綰013013 盧綰 盧綰은 豊人으로 漢 高祖(劉邦)와 同鄕人으로서 漢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異姓諸侯 7人 중 1人으로 燕王에 封해졌다. 그러나 漢 高祖의 異姓諸侯 제거정책이 진행되자, 匈奴로 亡命하였고 匈奴는 그를 東胡盧王으로 封했다. 그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參考文獻≫
『史記』卷93「韓信·盧綰列傳」
『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所引『魏略』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古朝鮮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리지린,「진개와 위만」『력사과학』1962년 5호;『고조선연구』196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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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千餘人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東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空地인 上下鄣014014 秦故空地上下鄣 漢의 東界要塞는 당시의 浿水 西岸에 존재했으며 그 東쪽은 朝鮮領土였다.『三國志』에 인용된『魏略』에 의해 이 당시 秦의 故地를 衛滿이 準王에게 居住허가를 요청한 사실에서 朝鮮領土였음이 확실하다. ‘秦故空地’를 문자 그대로 빈 땅으로 보아 秦과 고조선과의 완충지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秦故空地’에 鄣塞가 설치된 데에서 이는 秦의 遼東外鄣에서 관할하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42) 특히 이 지역에 中國流民과 蠻夷(朝鮮人)가 존재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이 地域을 근거로 衛滿은 구체적 領域(百里)內의 계속적인 人口 증가 등을 기반으로 準王을 축출할 수 있는 征服國家的 性格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한편 ‘上下鄣’이란 표현은 順序的 表現일 수도 있고 遠近的 表現일 수도 있는 바 두개의 要塞가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또 이를 ‘오르내리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白鳥庫吉,「朝鮮古代地名考」 p.29)
≪參考文獻≫
『山海經』卷12「海內北經」·卷18「海內經」
『水經』卷上「大遼水」
李龍範,「大陸關係史 : 古代篇」(上)『白山學報』18, 197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진한대 료동군의 위치」『력사과학』1963년 1호;『고조선연구』1964.
리상호,「고조선 중심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들에 대한 비판」『력사과학』1963년 2호.
박시형,「위만조선에 관하여」『력사과학』1963년 3호.
김석형,「고조선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고조선에 관한 토론론문집』1963.
허승종,「중국『사기(史記)』에 보이는 료동고새(遼東故塞)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기원전 3세기말~2세기초의 한나라 료동군(遼東郡)에 대하여」『력사과학』1967년 4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白鳥庫吉,「朝鮮古代地名考」『朝鮮史硏究』(『白鳥庫吉全集』3卷,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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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았다. 점차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옛 燕·齊의 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015015 王之 中國의 경우 皇帝의 一族이나 功臣이 皇帝로부터 諸侯의 자격으로 王이란 封爵을 받기도 하였다. 이 경우의 王은 영예와 특정권한을 소유하게 되나, 실질적인 독립국가의 최고주권자라고는 할 수 없는 지위이다.
그러나 本文 중의 ‘王之’는 衛滿이 ‘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의 王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中國의 封爵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또『三國志』「東夷傳」 所引『魏略』에는 衛滿이 古朝鮮의 準王으로부터 변경 수비 임무를 받은 후 오래지 않아 정권을 탈취하여 王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王之’는 衛滿朝鮮의 建國과 연관지어 하나의 독자적 정치체가 등장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文獻은 물론 考古學·人類學 등의 이론을 원용한 諸 연구의 경향은 衛滿朝鮮의 成立을 征服國家的 성격으로 파악하고, 準王代의 濊貊朝鮮을 최소한 初期國家(Prinstine State)의 단계로 설정하여 韓國 古代의 國家起源 문제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金錫亨은 古朝鮮의 정권교체에 대하여 별도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衛滿이 古朝鮮의 서쪽지역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조성하는데 상당기간을 소비했기 때문에 古朝鮮에 있어서 政權쟁취는 그가 燕으로부터 망명해 온 바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을 王이라 稱하고 準王을 축출하였다는 것이다. (「古朝鮮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 pp.95∼115) 이같은 견해에 의하면 십수년 이상(기원전 194∼180년) 2개의 朝鮮이 존재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衛滿朝鮮과 이전에 濊貊朝鮮이라고 불리웠던 箕王朝에서 온 王들의 朝鮮이 그것이다. 前者의 朝鮮은 大凌河와 遼河 流域의 영토를 차지하고, 後者의 朝鮮은 朝鮮의 西北部에 존재한 것으로 된다. 한편 尹乃鉉은 古朝鮮과는 별도로 衛滿朝鮮이 灤河의 동부 연안에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衛滿朝鮮의 再認識」 pp. 240∼304)
≪參考文獻≫
『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所引『魏略』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知識産業社.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尹乃鉉,「衛滿朝鮮의 再認識」『韓國古代史新論』1986.
김석형,「고조선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고조선에 관한 토론론문집』1963.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三上次男,「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中國古代史の諸問題』195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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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險016016 王險 衛滿朝鮮의 도읍지인 王險(『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王儉’으로 表記)의 위치에 대하여『史記集解』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徐廣의 말을 인용하고,『史記索隱』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應劭의 注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條 險瀆의 註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이라는 應劭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臣瓚의 해석이 附記되어 있다.
王險城의 위치는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漢四郡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高麗時代 이후 朝鮮後期 實學者들에 이르기까지 王險城의 위치는 現 平壤으로, 또 古朝鮮이나 漢四郡의 위치는 韓半島 北部로 이해되어 왔다.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朝鮮考)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漢字語 표기인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王險城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遼東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現 蓋平 地方으로 그 위치를 比定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王險城은 浿水 以東 秦故空地 以南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漢書』「地理志」의 樂浪郡 朝鮮縣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사기색은』에서 王險城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史記集解』에서 徐廣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遼東의 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古朝鮮의 移動說에 의하면 險瀆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遼東의 險瀆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遼河 以東 千山 以西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史記』의 王險城은 秦故空地 以南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古朝鮮이 遼東의 險瀆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大同江 유역의 平壤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 5 東川王 21年條.
『三國遺事』卷1「紀異」 1 衛滿朝鮮條.
『東國輿地勝覽』平壤條.
『漢書』卷28「地理志」 第8 下 遼東郡 險瀆縣 應劭 注.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上「考異」 王險條.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一 朝鮮考.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業』下卷, 1972)
李丙燾,『檀君神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尹乃鉉,「古朝鮮의 都邑遷移考」『韓國古代史新論』1986.
리상호,『고조선 중심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들에 대한 비판」『력사과학』1963년 2호.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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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을 정하였다.

註 013
盧綰 : 盧綰은 豊人으로 漢 高祖(劉邦)와 同鄕人으로서 漢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異姓諸侯 7人 중 1人으로 燕王에 封해졌다. 그러나 漢 高祖의 異姓諸侯 제거정책이 진행되자, 匈奴로 亡命하였고 匈奴는 그를 東胡盧王으로 封했다. 그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參考文獻≫
『史記』卷93「韓信·盧綰列傳」
『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所引『魏略』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古朝鮮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1986.
리지린,「진개와 위만」『력사과학』1962년 5호;『고조선연구』196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4
秦故空地上下鄣 : 漢의 東界要塞는 당시의 浿水 西岸에 존재했으며 그 東쪽은 朝鮮領土였다.『三國志』에 인용된『魏略』에 의해 이 당시 秦의 故地를 衛滿이 準王에게 居住허가를 요청한 사실에서 朝鮮領土였음이 확실하다. ‘秦故空地’를 문자 그대로 빈 땅으로 보아 秦과 고조선과의 완충지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秦故空地’에 鄣塞가 설치된 데에서 이는 秦의 遼東外鄣에서 관할하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p.42) 특히 이 지역에 中國流民과 蠻夷(朝鮮人)가 존재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이 地域을 근거로 衛滿은 구체적 領域(百里)內의 계속적인 人口 증가 등을 기반으로 準王을 축출할 수 있는 征服國家的 性格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한편 ‘上下鄣’이란 표현은 順序的 表現일 수도 있고 遠近的 表現일 수도 있는 바 두개의 要塞가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또 이를 ‘오르내리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白鳥庫吉,「朝鮮古代地名考」 p.29)
≪參考文獻≫
『山海經』卷12「海內北經」·卷18「海內經」
『水經』卷上「大遼水」
李龍範,「大陸關係史 : 古代篇」(上)『白山學報』18, 1975.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尹乃鉉,「古朝鮮의 위치와 疆域」『韓國古代史新論』1986.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제 2 집, 1988.
리지린,「진한대 료동군의 위치」『력사과학』1963년 1호;『고조선연구』1964.
리상호,「고조선 중심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들에 대한 비판」『력사과학』1963년 2호.
박시형,「위만조선에 관하여」『력사과학』1963년 3호.
김석형,「고조선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고조선에 관한 토론론문집』1963.
허승종,「중국『사기(史記)』에 보이는 료동고새(遼東故塞)에 대하여」『력사과학』1966년 2호;「기원전 3세기말~2세기초의 한나라 료동군(遼東郡)에 대하여」『력사과학』1967년 4호.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白鳥庫吉,「朝鮮古代地名考」『朝鮮史硏究』(『白鳥庫吉全集』3卷, 1970)
註 015
王之 : 中國의 경우 皇帝의 一族이나 功臣이 皇帝로부터 諸侯의 자격으로 王이란 封爵을 받기도 하였다. 이 경우의 王은 영예와 특정권한을 소유하게 되나, 실질적인 독립국가의 최고주권자라고는 할 수 없는 지위이다.
그러나 本文 중의 ‘王之’는 衛滿이 ‘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의 王이 되었다는 것으로서, 中國의 封爵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또『三國志』「東夷傳」 所引『魏略』에는 衛滿이 古朝鮮의 準王으로부터 변경 수비 임무를 받은 후 오래지 않아 정권을 탈취하여 王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王之’는 衛滿朝鮮의 建國과 연관지어 하나의 독자적 정치체가 등장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文獻은 물론 考古學·人類學 등의 이론을 원용한 諸 연구의 경향은 衛滿朝鮮의 成立을 征服國家的 성격으로 파악하고, 準王代의 濊貊朝鮮을 최소한 初期國家(Prinstine State)의 단계로 설정하여 韓國 古代의 國家起源 문제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金錫亨은 古朝鮮의 정권교체에 대하여 별도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衛滿이 古朝鮮의 서쪽지역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조성하는데 상당기간을 소비했기 때문에 古朝鮮에 있어서 政權쟁취는 그가 燕으로부터 망명해 온 바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원전 1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을 王이라 稱하고 準王을 축출하였다는 것이다. (「古朝鮮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 pp.95∼115) 이같은 견해에 의하면 십수년 이상(기원전 194∼180년) 2개의 朝鮮이 존재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衛滿朝鮮과 이전에 濊貊朝鮮이라고 불리웠던 箕王朝에서 온 王들의 朝鮮이 그것이다. 前者의 朝鮮은 大凌河와 遼河 流域의 영토를 차지하고, 後者의 朝鮮은 朝鮮의 西北部에 존재한 것으로 된다. 한편 尹乃鉉은 古朝鮮과는 별도로 衛滿朝鮮이 灤河의 동부 연안에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衛滿朝鮮의 再認識」 pp. 240∼304)
≪參考文獻≫
『三國志』卷30「烏丸鮮卑東夷傳」 韓條 所引『魏略』
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知識産業社.
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1986.
尹乃鉉,「衛滿朝鮮의 再認識」『韓國古代史新論』1986.
김석형,「고조선의 연혁과 그의 중심지들에 대하여」『고조선에 관한 토론론문집』1963.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三上次男,「衛氏朝鮮國の政治·社會的性格」『中國古代史の諸問題』1954.
유. 엠. 부찐,『古朝鮮』1986.
註 016
王險 : 衛滿朝鮮의 도읍지인 王險(『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王儉’으로 表記)의 위치에 대하여『史記集解』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徐廣의 말을 인용하고,『史記索隱』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應劭의 注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條 險瀆의 註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이라는 應劭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臣瓚의 해석이 附記되어 있다.
王險城의 위치는 古朝鮮이나 衛滿朝鮮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漢四郡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高麗時代 이후 朝鮮後期 實學者들에 이르기까지 王險城의 위치는 現 平壤으로, 또 古朝鮮이나 漢四郡의 위치는 韓半島 北部로 이해되어 왔다.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朝鮮考)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漢字語 표기인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王險城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遼東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現 蓋平 地方으로 그 위치를 比定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王險城은 浿水 以東 秦故空地 以南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漢書』「地理志」의 樂浪郡 朝鮮縣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사기색은』에서 王險城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史記集解』에서 徐廣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遼東의 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古朝鮮의 移動說에 의하면 險瀆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遼東의 險瀆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遼河 以東 千山 以西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史記』의 王險城은 秦故空地 以南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古朝鮮이 遼東의 險瀆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大同江 유역의 平壤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高句麗本紀」 5 東川王 21年條.
『三國遺事』卷1「紀異」 1 衛滿朝鮮條.
『東國輿地勝覽』平壤條.
『漢書』卷28「地理志」 第8 下 遼東郡 險瀆縣 應劭 注.
安鼎福,『東史綱目』附卷上「考異」 王險條.
丁若鏞,『與猶堂全書』「疆域考」 其一 朝鮮考.
申采浩,『朝鮮史硏究草』(『丹齋申采浩全業』下卷, 1972)
李丙燾,『檀君神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尹乃鉉,「古朝鮮의 都邑遷移考」『韓國古代史新論』1986.
리상호,『고조선 중심을 평양으로 보는 견해들에 대한 비판」『력사과학』1963년 2호.
리지린,『고조선연구』1964.
리순진·장주협,『고조선문제연구』1973.
최택선·리란우편,『고조선문제연구론문집』1976.
유. 엠. 부찐,『古朝鮮』1986.
주제분류
정치>외교>인적교류>망명
정치>왕실>국왕>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