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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 夫餘註 026
夫餘註 027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註 028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註 029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註 030 [국토의 면적은]방 2천 리가 되며,註 031 戶數는 8만이다.註 032
그 나라 사람들은 土著생활을 하며, 宮室과 창고 및 감옥을 가지고 있다.註 033 山陵과 넓은 들이 많아서 東夷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註 034
토질은 五穀註 035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五果註 036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모두 六畜의 이름으로 官名을 정하여 馬加·牛加·豬加·狗加註 037·大使·大使者·使者註 038가 있다. 부락에는 豪民이 있으며, 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奴僕이 되었다. 註 039 諸加들은 별도로 四出道註 040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家였다.
註) 026
『三國志』夫餘傳은 총 930字이며, 中國正史 중 夫餘에 관한 최초의 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夫餘의 位置와 강역을 비롯하여 官制·衣食·儀禮·風俗·産物 등 夫餘의 生活習俗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玄菟郡·後漢·公孫氏 등 中國의 諸 勢力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撰者인 陳壽가 참고한『魏略』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과는 다른 異本이나, 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魏略』의 夫餘와 高句麗 공통의 習俗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pp.39~64)
이러한 점에서『三國志』夫餘傳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魏略』이 逸失된 현재『三國志』夫餘傳은 裵松之 注에 인용된『魏略』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參考文獻≫
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朝鮮傳을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1970, 서울大出版部.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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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7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中國文獻에는 夫餘로, 國內文獻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① 夫餘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開發->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崔南善, 『兒時朝鮮』p.158),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p.516),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李丙燾, 「夫餘考」p.226)『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으나(리지린, 『고조선연구』),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② 夫餘는 일찍부터 中國文獻에 등장하는데, 前記한『山海經』의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伏生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이라 하고, 『史記』 「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라 하였으며, 『漢書』 「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夫餘는 이미 先秦時代부터 古朝鮮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後漢代에는 王號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 (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p.77)
③ 이와 같은 夫餘는 貊族이 古朝鮮 즉, 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說과(리지린, 앞의 책) 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說이 있다. (李玉,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山海經』第17 「大荒北經」
『史記』卷129, 「貨殖列傳」69.
『漢書』卷28上下 「地理志」
『資治通鑑』卷97.
伏生, 『尙書大典』
崔南善, 『兒時朝鮮』1926(『六堂崔南善全集』2, 1973)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출판사.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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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8
長城은 中國 北方에 外敵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城壁으로 흔히 萬里長城이라 불리운다. 地圖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기복이 있거나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5,000km에 달한다.
長城의 기원은 春秋時代의 齊에서 시작되어 戰國時代에 들어오면 楚·魏·燕·趙·秦 등 中原의 諸國이 모두 국경에 이를 세웠다. B.C. 221年 秦의 始皇帝가 統一한 후 匈奴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를 보수하여 臨洮에서 遼東에 이르는 萬里의 長城을 수축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赤峰 등지의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長城은 현재보다는 北方에 위치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이르러 大同에서 居庸關을 거쳐 山海關 부근에 이르는 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內長城이다. 당시의 長城은 판축과 석축을 겸용한 것으로 주로 北方 유목민족의 기마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것에 주 목적이 있었다. 現代의 長城과 같은 웅대한 규모가 갖추어진 것은 明代에 이르러서이며, 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잃고 중국본토와 몽고를 구별하는 정치적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本傳의 長城은 현재의 萬里長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燕·秦시대에 쌓은 長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1975년 이후 中共에서 발굴된 당시 長城의 東端은 대체로 遼河 本流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3차 玄菟郡治인 撫順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 去玄菟千里’와『後漢書』의 ‘在玄菟北千里’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參考文獻≫
王國良, 『中國長城沿革攷』1931.
佟柱臣, 「赤峰附近新發見之漢前土城址與古長城」『歷史與考古』1946, 瀋陽博物館.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1984, 文物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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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9
『翰苑』所引『魏略』에는 ‘夫餘國在玄菟長城北去玄菟千餘里 南接句驪 東接挹婁即肅愼國者也’라 하였다.『魏略』의 이 佚文 중 ‘即肅愼國者也’를『翰苑』의 註記者인 雍公叡가 첨가한 기사로 보아 반드시『魏略』의 舊文은 아닐 것이라는 說이 있으나, 기사 전체는 『魏略』의 舊文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의 기사도『魏略』의 異本이나 ‘原魏略’에 의거한 기사로 생각된다.(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硏究』)
≪參考文獻≫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學的 硏究』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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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0
弱水의 명칭은『尙書』 「禹貢篇」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弱水는 夫餘의 위치비정과 관련되어 중요한 문제인데, 『通典』에는 ‘營州柳城縣東南有饒樂水 即弱水也’라 하였다.
현재에는 黑龍江이라는 說과(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p.43), 弱의 옛 발음이 nziak 혹은 niak이므로 弱水는 松花江의 지류인 嫩江(Nonni강)을 가리킨다는 說이 있다. (白鳥庫吉,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
그러나『晋書』肅愼傳의 ‘北極弱手’라는 史料에 유의한다면 黑龍江이 보다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참조>
1. 『三國志』夫餘傳 註 6)
夫餘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中國文獻에는 夫餘로, 國內文獻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① 夫餘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開發->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崔南善, 『兒時朝鮮』p.158),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p.516),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李丙燾, 「夫餘考」p.226)『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으나(리지린, 『고조선연구』),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② 夫餘는 일찍부터 中國文獻에 등장하는데, 前記한『山海經』의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伏生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이라 하고, 『史記』 「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라 하였으며, 『漢書』 「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夫餘는 이미 先秦時代부터 古朝鮮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後漢代에는 王號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 (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p.77)
③ 이와 같은 夫餘는 貊族이 古朝鮮 즉, 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說과(리지린, 앞의 책) 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說이 있다. (李玉,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山海經』第17 「大荒北經」
『史記』卷129, 「貨殖列傳」69.
『漢書』卷28上下 「地理志」
『資治通鑑』卷97.
伏生, 『尙書大典』
崔南善, 『兒時朝鮮』1926(『六堂崔南善全集』2, 1973)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사회과학원출판사.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白鳥庫吉, 「濊貊民族の由來を述べて, 夫餘高句麗及び百濟の起源に及ぶ」『白鳥庫吉全集』 3卷, 1970, 岩波書店.
2.『晋書』肅愼傳 註 7)
北極弱水
『後漢書』와 『三國志』를 보면 ‘夫餘 …… 北有弱水’라 하여 夫餘의 북쪽 경계가 弱水에 닿았다고 하고 있으며, 『晋書』肅愼氏傳에서도 肅愼의 북쪽 경계가 弱水에 接한다고 밝히고 있다. 肅愼이 동쪽으로 오츠크 바다에 접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弱水는 오늘날 Amur江이 틀림없다. 그러나 肅愼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夫餘의 북쪽경계가 弱水에 接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松花江을 가리키는 것 같다.
池內宏은 弱水는 阿勒楚喀河의 입구 가까운 지방의 동쪽으로 흐르는 松花江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금의 哈爾賓 부근의 松花江이라고 하였으며,( 「肅愼考」p.17) 和田淸은 弱水는 松花江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p.51)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夫餘條.
『三國志』卷30 「東夷傳」夫餘條.
池內宏, 「肅愼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和田淸,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亞史硏究』1955, 東洋文庫.
≪參考文獻≫
『尙書』 「禹貢篇」
『晋書』卷97 「東夷列傳」肅愼氏條.
『通典』
白鳥庫吉, 「夫餘國の始祖東明王の傳說に就いて」『白鳥庫吉全集』券5,1970.
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1974, 平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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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1
『後漢書』에는 ‘地方二千里’라 하였으며, 대체적인 夫餘의 영역을 말한다. 각종 史書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夫餘의 영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西境: 夫餘는 서쪽으로 B.C. 3세기 말~1세기에는 烏丸과, 그 이후 시기(B.C. 1~5세기)에는 鮮卑와 각각 접하고 있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燕이 ‘北隙烏丸·夫餘’라 하였으니, 烏丸과 부여가 燕나라 北쪽에서 서로 접하고 있었으며, 부여의 서쪽에 烏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後漢書』 「烏丸·鮮卑傳」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烏丸이 匈奴에게 정복당한 후에도 烏丸은 본래 거주지역에 그대로 있었으므로 夫餘와 烏丸과의 지리적 관계는 기원 1세기까지도 그 전시기와 다름이 없었다.
기원 1세기에 夫餘의 서쪽에 鮮卑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기원 1세기 말~2세기 초 後漢이 匈奴를 격파한 후 급속히 장성한 鮮卑族들은 이전 匈奴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夫餘와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夫餘의 西邊은 西遼河 일대였다. 즉, 기원 2세기 중엽 鮮卑의 右肩이었던 檀石槐는 匈奴 故地를 차지하고 그 관할구역을 東部·中部·西部의 3개부로 구분하였는데, 동부지역은 右北平으로부터 遼東에 이르러 夫餘·濊貊과 접하였다.
3세기 전반 軻比能 代의 鮮卑의 東쪽 변경은 遼水界線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三國志』 「烏丸·鮮卑傳」) 기원2~3세기의 遼水는 오늘의 遼河이며, 이 시기의 遼東도 遼河 동쪽지역이다. 그런데 당시 遼河 下流에는 後漢과 魏의 遼東郡·玄菟郡 등이 있었으므로 鮮卑의 동쪽은 遼河 上流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鮮卑와 접하는 夫餘의 西邊도 西遼河 일대라고 할 수 있다.
② 東境: 夫餘의 동쪽은 挹婁와 접하였다고 하는데, 『晋書』 「東夷列傳」에 의하면 挹婁의 후신인 肅愼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하여, 夫餘 中心部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읍루는 夫餘에 예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실지 夫餘의 영역은 읍루의 東邊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③ 北境: ‘北有弱水’라 하여 後漢代의 夫餘의 북쪽 강역은 弱水임이 분명하나, 弱水의 위치에 대하여는 諸說이 분분하다. 그런데『晋書』肅愼傳에 의하면 ‘肅愼北極弱水’라 하여 弱水라는 강은 夫餘 뿐 아니라 挹婁(肅愼)의 북쪽까지도 경유하면서 흐르는 큰 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화강 유역에 있었던 夫餘와 그 동변이 연해주의 해변지대까지 이르렀던 읍루의 북쪽을 경유하여 흐르는 큰 강으로는 黑龍江 외에는 없다. 따라서 夫餘의 北境은 흑룡강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④ 南境: 南쪽은 대체로 高句麗와 접하였다. 晋代에 이르러서는 鮮卑 慕容氏의 진출로 鮮卑와 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여의 지역이 사방 2,000리였다는 것은 부여가 오늘의 夫餘府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연해주 지방, 북쪽으로는 흑룡강 이남, 서쪽으로는 遼河 下流, 남쪽으로는 백두산 줄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後漢書』卷90 「烏桓·鮮卑列傳」
『晋書』卷97 「東夷列傳」肅愼氏條.
『조선전사』2(고대편), 1979, 사회과학원 출판사.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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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2
'戶八萬'이란 기록은 앞에 나타나는 ‘夫餘 …… 南與高句麗’ 란 기록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夫餘 建國當時의 數로 볼 수는 없으며, 高句麗의 興起와 제 2차 玄菟郡의 設置 時期인 B.C. 82年 이후부터 A.D. 2年 사이의 人口로 보여진다.『漢書』 「地理志」에서 玄菟郡이 있는 幽州管內 諸郡의 戶口數를 비교해 보면 一戶當 口數의 총평균은 4.6이 된다. 또『後漢書』 「郡國志」에서 幽州管內 諸郡의 戶口數를 비교해 보면 一戶當 口數의 총평균은 5.38이 되므로 A.D. 2年의 夫餘의 人口數는 36萬 8千~39萬 2千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後漢書』志第23 「郡國」5.
金三守, 「古代夫餘의 社會經濟構成과 土地所有의 存在形態」『淑明女大論文集』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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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3
宮殿·倉庫·牢獄은 국가기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宮殿은 國王의 권위를, 倉庫는 國家의 軍事力·國家財政·國家經濟의 규모를, 牢獄은 國家의 社會秩序에 대한 규제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러한 건축물의 존재는 夫餘의 국가형성이 매우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
이러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A.D. 1세기 초에는 夫餘가 聯盟王國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三世紀の夫餘國-」『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12集,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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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4
夫餘는 이미 古朝鮮 당시에 松花江 유역을 무대로 하여 성장하였다. 그 중심지는 伊通河 유역의 長春·農安 지방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日野開三郞, 「夫餘國考」), 이 지역은 滿洲에서도 가장 넓은 平野지대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本文의 구절을 중요시하여 夫餘 본래의 위치를 農安의 동북방 즉, 松花江 북쪽의 雙城에서부터 그 북쪽에 있는 阿勒楚喀(일명 阿什河) 일대로 比定하는 견해도 있다. (池內宏, 「夫餘考」pp.452~454)
≪參考文獻≫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日野開三郞, 「夫餘國考」『史淵』34, 1946.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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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5
五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종류와 명칭이 다른데, 각종 문헌에 나오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麻·黍·稷·麥·豆(『周禮』天官, 疾醫條의 注)
② 黍·稷·麻·麥·菽(『大戴禮』曾子 天圓條의 注)
③ 稻·稷·麥·豆·麻(『楚辭』大招條의 注)
④ 黍·稷·菽·麥·稻(『孟子』滕文公上의 注 및 『周禮』夏官職方氏條)
⑤ 粳米·大麥·小麥·大豆·黃黍(『素問』藏氣法時論의 注)
⑥ 稻穀·大麥·小麥·菉豆·白芥子(『成就妙法蓮華經』注 瑜伽觀音儀軌)
⑦ 大麥·小麥·稻穀·小豆·胡麻(『建立曼茶羅護摩儀軌』)
李春寧은『李朝農業技術史』에서 中國의 古代農業에서 곡식의 栽培順序는 稷(稗)→黍梁(粟)→麥類→稻作, 農産物로 통해 보는 中國 古代農業史의 時代區分은 西周以前=黍稷文化, 春秋~戰國時代=粟麥文化, 그 以後는 稻米文化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稗黍類의 栽培는 新石器時代 以來로 가장 原始的 耕作法인 火田에서 시작, 三國時代 初葉까지는 粟麥類가 主 作物이었고 古代의 中國·日本·韓國은 거의 共通的으로 稗粟·大豆·小豆·大麥·小麥·稻가 主要 栽培作物이었다고 하였다.
한편, 千寬宇는 이를 통괄하여 5穀은 대체로 ‘麻·黍(粟)·稷(稗)·麥·豆’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p.36)
≪參考文獻≫
李春寧, 『李朝農業技術史』1964, 韓國硏究院.
千寬宇,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 2 部-」『震檀學報』41, 1976.
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1,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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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6
五果는 다섯 종류의 과일을 말하는 것으로, 桃(복숭아)·李(오얏)·杏(살구)·栗(밤)·棗(대추)를 가리킨다. 또한 果物의 性質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누기도 하니, 核果(살구·복숭아 따위)·膚果(배·사과 따위)·穀果(밤 따위)·檜果(잣 따위)·角果(콩 따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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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7
夫餘의 官名 ‘加’를 ‘家’자의 誤譯으로 보거나(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p.156), 男子의 존칭으로 보아 ‘커’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安在鴻, 『朝鮮上古史鑑』p.41), 高句麗語의 皆,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李基文, 「韓國古代諸語系統論」p.175), 滿蒙系統의 汗(Han, Kan)·可汗(Gahan, Kagan)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夫餘傳의 加는 部族長이나 官名에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 部族長을 의미하는 말인 加가 國家形成의 초기과정에서 族的 紐帶感이 강한 單位政治體의 大小族長勢力이 연맹적 결속의 단계를 거쳐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金光洙, 「高句麗 前半期의 加階級」), 점차 중앙의 官名으로 변천되어 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馬加·牛加·豬加·狗加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윷 말판의 도·개·걸·윷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본 견해가 있어 왔는데 (申采浩, 『朝鮮上古史』; 李丙燾, 「夫餘考」p.125), 이와는 달리 馬加의 馬는 ‘마리·’의 表音으로 보아 新羅의 麻立干과 같은 계통의 官名으로, 牛加의 牛는, ‘우·위’의 音譯으로 보아 高句麗의 于臺(優臺)와 같은 官名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田鳳德, 「古代官名 加硏究」p.250)
≪參考文獻≫
『欽定滿洲源流考』卷 1 「部族」1.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下), 1947~1948.
申采浩, 『朝鮮上古史』1948.
田鳳德, 「古代官名 加硏究」『韓國法制史硏究』1968.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基文, 「韓國古代諸語系統論」『한국사』23, 1978.
金光洙, 「高句麗 前半期의 加階級」『建大史學』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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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8
使者는 大加의 밑에서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는 官人으로서 中國化한 官名이다.
樂浪의 彩畵漆篋에도 그 명칭이 보이며, 高句麗에서는 族長的 성격을 지닌 兄과 대응되는 官職으로 발전하였다. 즉, 使者는 원래 氏族내부에서 신분이 열등한 자로 租賦를 統責하는 官史였는데 점차 그 職能이 중요시되어 여러 층의 使者로 分化되어가는 가운데 점차 그 位階가 높아졌으며, 行政的 官僚로서 성장하였다.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pp.128~138)
高句麗의 경우 使者가 후대에 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로 分化·편성되어 감을 알 수 있는데, 夫餘傳의 경우 이미 이러한 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本傳의 大使는 太大使의 誤記나 혹은 太大使者의 격에 해당되는 명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李丙燾, 「夫餘考」p.214)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12)
使者
그 명칭에서 보듯 行政的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인으로서 뒷날 고구려 관계조직상에서 兄과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었다. 초기에는 族長家系보다 하위의 身分 出身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또한 高句麗 官階에서 兄이 族長的인 性格을 지녔던 것이라면 使者는 行政的인 官僚로서 成長한 存在인 듯 하다.
2.『魏書』高句麗傳 註 45)
其官名有謁奢 …… 小兄之號
이 부분은 앞서 편찬된『三國志』및『後漢書』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나 후에 편찬된『周書』·『隋書』·『新唐書』나『翰苑』所引『高麗記』에 실려있는 官名과 비교하면 同類이나 매우 소략하다. 그러나 高句麗에서 兄은『三國史記』에서는 烽上王 2年 이후에 나타나며 中國史書로서는『魏書』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官名으로 그 前身은 優臺(于臺)로서 당초 年長者 또는 家父長的 家族長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 國家的 發展에 따라 兄으로 전환되면서 여러 층으로 分化되어 편성된 官名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使者란『三國史記』에서는 大武神王 15年부터 나타나며 中國史書로서는『三國志』高句麗傳부터 나타나는 官名으로 당초 氏族 내부에서 신분이 열등한 자로 租賦를 統責하는 官吏였다고 이해되는 것이며, 후기에는 그 職能이 중요시되어 점차 여러 층의 使者로 分化되는 가운데 그 上層部는 高位職으로 상승하였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高句麗의 官位는 기본적으로는 이들 兄系官位와 使者系官位를 주축으로 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그 骨子를 요약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史書에 보이는 高句麗의 官位로 내용상 기준이 될 수 있는『周書』高句麗傳과『翰苑』所引『高麗記』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좀더 상세한 후자에 기준하여 대조표를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魏書 周書 高 麗 記



謁奢

太奢
大兄



小兄



① 大對盧
② 太大兄
⑥ 烏拙
⑦ 太大使者

⑧ 大使者
③ 大兄
⑩ 褥奢
⑤ 意侯奢
⑨ 小使者
④ 小兄
⑪ 翳屬


⑫ 仙人
吐摔
太大兄
鬱折
‘太大’使者
皀衣頭大兄
大使者
大兄
‘汲’位使者
上位使者
‘小’使者
小兄
諸兄
過節
不節
先人
大對盧
莫何何羅支
主簿
謁奢
中裏皀衣頭大兄
大奢
纈支
儒奢
契達奢
乙耆
先支
翳屬·伊紹·河紹還


‘先支’·庶人
一 品
‘正’二品
從二品
正三品
從三品
正四品
正五品
從五品
正六品
從六品
正七品
從七品
正八品
從八品
正九品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7 「高句麗本紀」5 烽上王條.
『翰苑』高麗條 所引『高麗記』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帝とその展開」『朝鮮學報』86輯, 1978.
≪參考文獻≫
金哲埈,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1975.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夫餘國王と大使」『柴田實記念日本文化史論叢』1976.
바로가기
註) 039
「汲古閣本」· 「新校本」에는 ‘名下戶’로 되어 있으나, 「安本」· 「殿本」에는 ‘民下戶’로 되어 있어 종래부터 夫餘의 邑落共同體의 구성과 그 계층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어 왔다. 그 견해는 크게 ① 民과 下戶를 별개의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3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金三守) ② 民과 下戶를 동일한 계층으로 이해하여 豪民·民(=下戶)의 2계층으로 분류하는 경우로 대별되는데 후자의 견해가 보다 유력시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洪承基의 ‘民의 下戶’란 견해와 金哲埈의 ‘民之下戶’란 견해가 있어 일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를 통하여 볼 때 夫餘社會가 加·豪民·民(下戶)·奴婢의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가운데 豪民은 村落에 거주하는 유력한 民을 의미하는 말로, 종래부터 夫餘의 收取體制와 관련하여 그 存在形態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그리하여 이를 族長(金哲俊)·渠帥(武田幸男), 많은 私有財産을 가진 民(金三守) 등으로 각각 달리 파악하여 왔으나, 대체로 身分上으로는 民에 속하면서, 諸加가 이들을 매개로 하여 邑落의 民을 지배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下戶에 대하여는 古典的 奴隷(白南雲)·家內奴隷=東方的 奴隷(金三守)·農奴(金柄夏)·良人身分의 農民層(洪承基·武田幸男)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으나, 『三國志』 「東夷傳」의 用例로 보아 이들을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며, 豪民의 支配를 받는 一般 族員이나 邑落員을 가리킨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本傳에서 ‘民下戶皆爲奴僕’이라 하여 마치 下戶를 奴隷인 양 기술한 것은 당시 中國人이 夫餘의 豪民層이 下戶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조>
1.『三國志』高句麗傳 註 22)
下戶
『魏略輯本』에선 이 부분에 상당하는 기사로서 ‘大家不田作 下戶給賦稅如奴’라 하였다.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 『魏略』에선 ‘ …… 如奴客’이라 하였다. 농민층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下戶는 중국에서는 通時代的으로 널리 사용되어졌으나, 下戶의 의미는 각 시대마다 달랐다.
『三國志』와『魏略』에 쓰여진 기사와 近接한 시대인 後漢代에는 下戶는 부강한 豪族인 上家와 대비되는 用語로, 무력하고 빈한하지만 독자적인 家計를 가지며 자유로운 신체를 보유한 小作農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그러나『三國志』 「東夷傳」에서 下戶로 지칭한 이들의 존재양태가 後漢代의 小作農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三國志』나『魏略』에서의 下戶는 당시 中國人이 표면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보이는 東方社會의 구성원 중 가난하고 劣勢한 이들을 자기사회의 용어를 써서 下戶라고 기술하였던 것 뿐이다.
따라서 下戶의 성격은 당시 東方社會의 전체적인 구조하에서 규정되어져야 한다. 이에 따라 그간 下戶의 성격에 대해 古典的 奴隷 또는 총체적 노예로 보는 說 , 農奴로 보는 견해, 봉건국가와 그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가난한 一般民의 汎稱으로 보는 說, 촌락공동체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입장 등 諸說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下戶를 奴隷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三國志』와『魏略』에서의 用例를 보아 下戶는 대체로 공동체적 관계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촌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당시 東方社會의 諸種族과 國家에서의 촌락구성원의 성격은 각 집단이 처한 政治的 상황과 社會的인 발전의 불균형에 따라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三國志』 「東夷傳」에서는 모두 下戶라 기술하였지만, 그 각각의 존재양태는 제각기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下戶란 당시 諸加·豪民·大人 등으로 표현된 이들과 대비되는 열세한 이들을 가리키는 汎稱으로서, 어떤 특정 계급이나 신분을 규정한 용어는 아니다.
≪參考文獻≫
洪承基, 「1~3 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2.『三國志』韓傳 註 20)
下戶
下戶의 性格을 奴隷로 보는 경우와 일반 백성으로 身分을 규정하는 기준에 따라 社會의 性格이 다르게 된다.
『三國志』 「東夷傳」高句麗條에는 ‘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라는 기사가 있으며, 濊條에도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夫餘條에는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이라고 하여 약간 다른 語感을 주고 있다. 『翰苑』所引의 『魏略』에는 ‘下戶給賦如奴’라고 하여 마치 下戶가 奴隷인듯이 착각을 하게 된다.
下戶는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며 결코 奴隷는 아니다. 韓國史에서 奴隷制社會를 주장하는 學者들이 경우에 따라 下戶를 그러한 立論에 적용하려고 하나 그것은 잘못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濊條·夫餘條.
『翰苑』夫餘條 所引『魏略』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1936; 『삼국시기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토론집』1958.
權丙卓, 「韓國古代經濟史序說-三韓社會의 Asia 共同體的 性格-」『大邱大論文集』4, 1964.
金雲龍, 「韓國社會에 있어서 奴隷制의 性格分析에 對한 試考」『서울대文理大學報』20, 1965.
金三守, 「韓國社會經濟史」『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丘秉朔, 「우리나라 下層民身分制의 發生過程-우리나라 下層民(奴婢)身分制의 發生過程-」『國學』17, 1967; 『韓國古代法史』1984.
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尹載秀, 「古代身分法史稿」『法史學硏究』1, 1974.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所謂 ‘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歷史學報』63, 1974.
金哲埈,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韓國古代社會의 性格」『大東文化硏究』13, 1979.
金錫亨, 『朝鮮封建時代農民の階級構成』1960, 學習院東洋文化硏究所譯刊.
정찬영·김세욱, 「조선에 있어서 노예소유자사회의 존재시기문제에 대한 논쟁개요」『력사과학』1961년 3호(『古代朝鮮の基本問題』1974)
森谷克己, 「朝鮮原始社會の東夷諸種族の狀態」『アジア的生産様式』1937.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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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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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柄夏, 「韓國의 奴隷制社會의 問題」『韓國史時代區分論』1970.
洪承基, 「1~3세기의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武田幸男, 「魏志東夷傳にみえる下戶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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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0
王道로부터 四方에 통하는 길로 早期社會의 雙分組織(dual organization)으로부터 발전한 古代國家의 地方支配의 기본이 되는 道路와 그 주변읍락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되는데, 이것이 지방을 정확히 4개 구역으로 구분한 정리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중앙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방위에 따라 四方을 나누고 그 지방에 있는 우세한 부족들이 각기 영도권을 쥐고 중앙부족과 연맹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高句麗의 五部制, 百濟의 五方制의 초기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四出道를 관할하였던 諸加를 中央官階인 馬加·牛加·豬加·狗加로 한정하여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夫餘考」p.217), 여기서의 諸加는 이를 포함한 部族長 전체를 의미하는 汎稱으로 생각되며, 그들이 다스렸던 部族集團은 廣開土王碑의 鴨盧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參考文獻≫
『廣開土王陵碑』 永樂 20年條.
金哲埈, 「韓國古代國家發達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4.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東アジア民族史』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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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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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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