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王 宮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毌丘儉은]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沃沮의 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級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宮은 北沃沮121121 北沃沮 대개 오늘날의 함경북도 및 北間島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B.C. 28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이 北沃沮는 일반적으로 廣開土大王碑에 나오는 東夫餘가 세워진 곳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異論도 없지 않다. 東夫餘의 위치에 대해서는 세 가지 說이 있다.
① 東夫餘=東濊=江陵說; 漢鎭書(『海東繹史』東夫餘考), 丁若鏞(『疆域考』東夫餘考)등의 실학자가 주장했던 것으로 오늘날에는 부정되고 있다.
② 東夫餘=東濊=咸南 南部 및 江原 北部說; 李丙燾등의 주장으로 이 說에선 東川王이 관구검이 침공 때 달아난 곳인 買溝漊는 廣開土大王碑에서 전하는 東夫餘의 味仇婁와 同一地名이며, 오늘날 咸南 文川으로서 東濊地域이라고 비정하였다.(「臨屯郡考」pp.201~206)『三國志』東沃沮傳에서 東川王이 置溝漊로 피난했다고 했는데, 이 置溝漊는 買溝漊의 착오라고 보았다. (앞의 논문, p.204)
③ 東夫餘=豆滿江 流域說; 申采浩(『朝鮮上古史』)·池內宏(「夫餘考」) 등의 주장으로 이 說에선 東夫餘의 기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A.D. 285년(晋 太康 6년) 夫餘國이 慕容氏에게 수도를 공략당한 후, 그 중심세력이 北沃沮로 이동하였다가 다음 해 晋의 원조를 받아 復國케 되었는데, 이 때 그 집단의 일부가 계속 北沃沮 地域에 머물면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가 곧 東夫餘라고 보는 견해이다.
≪參考文獻≫
韓鎭書, 『海東繹史』續4「地理考」東夫餘考.
丁若鏞, 『疆域考』東夫餘考.
申采浩, 『朝鮮上古史』1927(『丹齋申采浩全集』1972, 乙酉文化社)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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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122122 置溝婁 溝漊는 城을 뜻한다. 두만강 하류 유역의 置溝漊 즉, 北沃沮에 뒷날 고구려가 柵城을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濊貊 故地인 이곳 柵城에 東京 龍原府를 설치하였다. 渤海 東京 龍原府의 위치는 오늘날 간도 지방의 琿春으로 비정되며, 발해의 對日交通路의 中心地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0)
幘溝漊
幘溝漊를 세움은 곧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대한 고구려 중앙정부의 統制力이 확립되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적으로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衣幘을 받고 交易하여 漢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고 있던 諸那集團들의 對外交涉窓口를 이제 中央政府가 一元化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족 내부에 작용하고 있던 漢의 영향력을 배제한 것을 말한다. 그뒤 고구려가 교만해져 다시는 郡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幘溝漊의 구축 시기는 太祖王代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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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도 하는데 南沃沮123123 南沃沮 沃沮의 영역 가운데 北沃沮에 대비하여 함흥을 중심으로 한 本沃沮를 가르키는 명칭이다. 安鼎福은 東·北·南沃沮를 各各 독립적인 존재로 보아 南沃沮를 따로 三水·甲山·渭原·江界 일대로 설정하였으나, (『東史綱目』沃沮考) 인정받지 못하였다. 『三國史記』에는 南沃沮人이 百濟에 來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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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註 121
北沃沮 : 대개 오늘날의 함경북도 및 北間島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B.C. 28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이 北沃沮는 일반적으로 廣開土大王碑에 나오는 東夫餘가 세워진 곳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異論도 없지 않다. 東夫餘의 위치에 대해서는 세 가지 說이 있다.
① 東夫餘=東濊=江陵說; 漢鎭書(『海東繹史』東夫餘考), 丁若鏞(『疆域考』東夫餘考)등의 실학자가 주장했던 것으로 오늘날에는 부정되고 있다.
② 東夫餘=東濊=咸南 南部 및 江原 北部說; 李丙燾등의 주장으로 이 說에선 東川王이 관구검이 침공 때 달아난 곳인 買溝漊는 廣開土大王碑에서 전하는 東夫餘의 味仇婁와 同一地名이며, 오늘날 咸南 文川으로서 東濊地域이라고 비정하였다.(「臨屯郡考」pp.201~206)『三國志』東沃沮傳에서 東川王이 置溝漊로 피난했다고 했는데, 이 置溝漊는 買溝漊의 착오라고 보았다. (앞의 논문, p.204)
③ 東夫餘=豆滿江 流域說; 申采浩(『朝鮮上古史』)·池內宏(「夫餘考」) 등의 주장으로 이 說에선 東夫餘의 기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A.D. 285년(晋 太康 6년) 夫餘國이 慕容氏에게 수도를 공략당한 후, 그 중심세력이 北沃沮로 이동하였다가 다음 해 晋의 원조를 받아 復國케 되었는데, 이 때 그 집단의 일부가 계속 北沃沮 地域에 머물면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이가 곧 東夫餘라고 보는 견해이다.
≪參考文獻≫
韓鎭書, 『海東繹史』續4「地理考」東夫餘考.
丁若鏞, 『疆域考』東夫餘考.
申采浩, 『朝鮮上古史』1927(『丹齋申采浩全集』1972, 乙酉文化社)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池內宏, 「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註 122
置溝婁 : 溝漊는 城을 뜻한다. 두만강 하류 유역의 置溝漊 즉, 北沃沮에 뒷날 고구려가 柵城을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濊貊 故地인 이곳 柵城에 東京 龍原府를 설치하였다. 渤海 東京 龍原府의 위치는 오늘날 간도 지방의 琿春으로 비정되며, 발해의 對日交通路의 中心地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0)
幘溝漊
幘溝漊를 세움은 곧 高句麗族의 諸集團에 대한 고구려 중앙정부의 統制力이 확립되어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적으로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衣幘을 받고 交易하여 漢과 직·간접의 관계를 맺고 있던 諸那集團들의 對外交涉窓口를 이제 中央政府가 一元化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족 내부에 작용하고 있던 漢의 영향력을 배제한 것을 말한다. 그뒤 고구려가 교만해져 다시는 郡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하는 것이다. 幘溝漊의 구축 시기는 太祖王代로 여겨진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1975.
註 123
南沃沮 : 沃沮의 영역 가운데 北沃沮에 대비하여 함흥을 중심으로 한 本沃沮를 가르키는 명칭이다. 安鼎福은 東·北·南沃沮를 各各 독립적인 존재로 보아 南沃沮를 따로 三水·甲山·渭原·江界 일대로 설정하였으나, (『東史綱目』沃沮考) 인정받지 못하였다. 『三國史記』에는 南沃沮人이 百濟에 來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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