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濊133133 濊傳 『三國志』濊傳은 총 510字로 되어 있고,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中國과의 交涉·風俗 및 특산물 등을 기술하고 있다.
『三國志』濊傳의 특징은 編者인 陳壽가 서술의 중점을 단지 中國과의 對外的 事件에 두기 보다는 東夷諸族의 地理 및 政治社會構造, 풍속 등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濊의 사회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는 데에 있다. 또한 中國과의 관계기사는 東沃沮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접촉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漢郡縣과의 관계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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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34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 (『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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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남쪽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135135 僭號稱王 『三國志』韓傳 所引『魏略』에 따르면 燕 昭王(在位 B.C. 311~279)代의 장군으로 보이는 秦開의 古朝鮮侵入 훨씬 이전에 朝鮮侯가 王을 稱하였고, 準의 아버지인 否도 朝鮮王으로 불리고 있다. 准(準)이 처음으로 稱王하였다는 이 기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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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말년에] 陳勝136136 陳勝 秦의 陽城人. 字는 涉. B.C. 209년 (秦二世皇帝 元年) 吳廣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秦末 天下大亂의 실마리를 열었다. 陳에서 王을 稱하고 國號를 張楚라 하였으나 6개월만에 秦에게 멸망당하였다. 『史記』에서 司馬遷의 文章을 통해 표현되어 傳하는 ‘王侯將相寧有種乎’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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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起兵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지역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漢 武帝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137137 胡·漢稍別 이 때 胡는 古朝鮮의 주민을 가리킨다. 곧 漢四郡이 설치됨에 따라 토착민과 流移民의 연합정권이었던 衛滿朝鮮 때와는 달리 古朝鮮地域의 토착주민과 漢人 사이에 점차 뚜렷한 차별이 생기고, 소수의 漢人들이 중심이 되어 다수의 토착민을 支配하는 住民構成의 이중성을 나타나게 되었음을 전하는 기록이다. 漢四郡의 支配構造의 단면을 전해준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7,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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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3
濊傳 : 『三國志』濊傳은 총 510字로 되어 있고, 그 내용은 地理的 位置와 中國과의 交涉·風俗 및 특산물 등을 기술하고 있다.
『三國志』濊傳의 특징은 編者인 陳壽가 서술의 중점을 단지 中國과의 對外的 事件에 두기 보다는 東夷諸族의 地理 및 政治社會構造, 풍속 등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濊의 사회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는 데에 있다. 또한 中國과의 관계기사는 東沃沮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접촉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漢郡縣과의 관계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一潮閣.
註 134
濊 :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 (『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註 135
僭號稱王 : 『三國志』韓傳 所引『魏略』에 따르면 燕 昭王(在位 B.C. 311~279)代의 장군으로 보이는 秦開의 古朝鮮侵入 훨씬 이전에 朝鮮侯가 王을 稱하였고, 準의 아버지인 否도 朝鮮王으로 불리고 있다. 准(準)이 처음으로 稱王하였다는 이 기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136
陳勝 : 秦의 陽城人. 字는 涉. B.C. 209년 (秦二世皇帝 元年) 吳廣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秦末 天下大亂의 실마리를 열었다. 陳에서 王을 稱하고 國號를 張楚라 하였으나 6개월만에 秦에게 멸망당하였다. 『史記』에서 司馬遷의 文章을 통해 표현되어 傳하는 ‘王侯將相寧有種乎’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註 137
胡·漢稍別 : 이 때 胡는 古朝鮮의 주민을 가리킨다. 곧 漢四郡이 설치됨에 따라 토착민과 流移民의 연합정권이었던 衛滿朝鮮 때와는 달리 古朝鮮地域의 토착주민과 漢人 사이에 점차 뚜렷한 차별이 생기고, 소수의 漢人들이 중심이 되어 다수의 토착민을 支配하는 住民構成의 이중성을 나타나게 되었음을 전하는 기록이다. 漢四郡의 支配構造의 단면을 전해준다.
≪參考文獻≫
盧泰敦, 「三國의 成立과 發展」『韓國史』2, 1977, 국사편찬위원회.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문화>풍속·놀이>풍속